설교시편 › 경제적인 기적을 꿈꾸십시오

이한규 목사 | 2009.12.12 23:09:04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시42:1-8
설교자
이한규 목사
참고
http://john316.or.kr

경제적인 기적을 꿈꾸십시오 (시편 42:1-8)

< 인간의 고귀한 가치 >

 성도들에게는 물질적인 영역을 확대시킬 사명이 있습니다. 물질을 잘못 쓰는 사람에게 물질이 다 가도록 방치하는 것은 성도의 직무유기입니다. 물론 물질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물질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물질로 만족할 수 없다는 사실에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저는 34살에 첫째 딸을 얻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이름을 ‘은혜’라고 지었고, 둘째 딸은 성경에서 가장 예쁜 이름이라고 여긴 ‘한나’라고 지었습니다. 제게는 두 딸이 너무 귀해서 천하를 다 준다고 해도 두 딸과 바꿀 수 없고, 우주를 다 준다고 해도 두 딸의 새끼손가락 하나를 잘라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로도 성이 차지 않고 더 나아가 두 딸은 제게는 저의 생명보다 귀합니다.

 마음은 그래도 실제로 사람은 그렇게 사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사랑합니다. 얼마만큼 사랑합니까? 천하보다 귀하게 여길 만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너희들은 내 생명보다 귀하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로 죽게 되자 우리를 그 품으로 이끌고 말씀합니다. “죄 때문에 네가 죽게 되었구나! 안되겠다! 대신 내가 죽자.”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 달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최소한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새끼손가락을 잘라주신 것이 아니라 생명을 내주신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사람을 천하보다 귀하고 바다보다 넓은 존재로 창조하셨기에 사람의 영혼을 채우고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혼’이란 잔을 너무 크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천하를 다 얻을 수도 없지만 다 얻어도 영혼의 잔을 채울 수 없습니다.

 솔로몬은 전도서 1장 7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솔로몬에게 부귀와 영화와 쾌락은 마치 물이 바다로 흘러들듯이 흘러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영혼이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솔로몬의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영혼의 넓고 깊은 바다를 채울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경험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렵게 살다가 새 집을 장만하면 이사하는 날 너무 좋아서 잠을 못 잡니다. 그러나 이틀째도 잠을 못 잔다면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틀 정도까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삼일 째도 잠을 못 자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런 식으로 일주일째 잠을 못 잔다면 용인 정신병원으로 잘 모셔야 합니다.

 아무리 큰 만족감도 며칠 지속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좋은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영혼의 크기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험은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경험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것도 사흘 이상 잠을 못잘 정도로 만족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영혼의 용량을 천하보다 크고 바다보다 넓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어리석은 일은 소유로 영혼을 채우려고 하는 행동입니다.

< 진정한 만족을 얻는 길 >

 어떻게 거대한 용량을 가진 영혼의 바다를 만족시킬 수 있습니까? 본문을 보면 아주 감동적인 시편 기자의 고백이 있습니다. 본문 7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이 시편 기자는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른다.”는 고백을 통해서 두개의 깊은 바다를 연상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영혼의 깊은 바다’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깊은 바다’입니다.

 ‘하나님의 바다’는 끊임없는 사랑으로 ‘영혼의 바다’를 부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한 영혼이 구원받으면 그토록 기뻐하십니다. 또한 ‘영혼의 바다’도 끊임없이 자기를 만족시킬 수 있는 ‘영적인 바다’를 찾습니다. 그래서 본문 1절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왜 그렇게 하나님을 찾습니까? 영혼은 하나님 이외의 것으로는 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어렵고 힘들면 더욱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본문 5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낙망하여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런 고백을 하면 어느새 영혼의 귀에는 주의 폭포소리와 파도소리가 들리고 영혼을 감싸는 거대한 주님의 사랑의 바다를 느끼게 됩니다. 그처럼 ‘영혼의 바다’는 오직 ‘주님의 바다’를 통해서만 진정한 만족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영혼에 행복을 주는 절대조건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환경과 처지가 어떻든 하나님이 함께 하면 행복한 사람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 사실을 다윗은 체득하고 시편 23편 1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왜 부족함이 없겠습니까? 다윗에게도 부족한 것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아쉬울 것은 없습니다. 그런 행복한 고백이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어느 날, 한 어린아이가 공원에서 엄마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울면서 엄마를 간절히 찾았습니다. 사람들이 불쌍해서 콜라도 사주고 과자도 사주면서 달래보았지만 아이는 계속 울었습니다. 바로 그때 공원 경찰이 아이 엄마를 찾아 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비로소 눈물을 그쳤습니다. 그 순간 그 아이에게는 아쉬울 것이 없었습니다. 콜라나 과자보다 더 소중한 엄마 품에 안겼기 때문이다.

 바로 그 아이의 모습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습니다.”라는 다윗의 고백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했습니다. 모든 필요가 충족되어서가 아니라 필요를 채워주는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필요하다고 여기면 필요를 채워줍니다. 그러나 필요 없다고 여기면 그 필요를 채워주지 않고 더욱 소중한 것을 주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원대한 섭리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행복이란 많이 가진 자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부자들이 그 진리를 너무나 잘 압니다. 부자들이 체험적으로 그 사실을 아는 것은 부자이기에 깨닫는 특권입니다. 그처럼 돈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부자들의 절실한 충고를 잘 받아들이십시오. 행복의 파랑새는 부자에게 찾아오지 않습니다. 소유는 행복을 위한 최저의 가능성을 제공할 뿐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이 깊이 만날 때 주어집니다.

 사람은 ‘주님의 깊은 바다’에 잠기기 전까지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본문의 시편 기록자는 낙심이 될 때 주님을 향해 달려가서 본문 8절 말씀처럼 그는 “생명의 하나님께 찬송하며 기도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왠지 삶에 침체와 낙심이 있고 마음이 공허하면 하나님께 찬송하며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어느새 내 영혼 속에 흐르는 ‘주님의 바다’를 느끼고, 그 ‘주님의 바다’를 통해 ‘영혼의 바다’로 밀려오는 주의 폭포소리와 파도소리를 듣고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낙심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 인물이 되는 꿈과 비전 >

 이제 현재의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더욱 큰 은혜와 축복의 바다로 나가십시오. 하나님이 예비하신 바다와 같은 은혜와 축복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실제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품에서 만족하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더욱 복된 사명의 자리로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더 많이 축복 받고, 더 많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찬란한 꿈과 비전을 가지십시오.

 사람에게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일까요? 어렸을 때 저는 시체를 무서워했습니다. 이웃집에서 누가 죽었다고 하면 덩달아서 겁이 났습니다. 그때 제일 궁금했던 것은 “사람이 어떻게 장의사를 할까? 죽은 사람이 무섭지도 않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시체가 별로 무섭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한 어렸을 때는 귀신을 무서워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무서움이 사라지더니 목사가 되니까 더욱 귀신이 무섭지 않았습니다. 흡혈귀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요새 가장 흔히 접하는 흡혈귀가 있습니다. 바로 모기입니다. 가끔 어떤 모기를 손바닥으로 딱 잡으면 피가 흥건하게 나옵니다. 저의 피를 엄청나게 빨아먹은 것입니다. 그런데 요새는 귀신도 두 손바닥으로 딱 치면 “꽥!” 죽는 모기처럼 여겨집니다. 그런 귀신을 왜 무서워합니까?

 어느 날, 한 아이가 악몽을 꾸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귀신이 무섭다고 수시로 아빠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그 아빠가 목사님이었습니다. 아빠가 말했습니다. “얘야! 뭐가 무섭니?” 아이가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아빠! 아빠는 귀신이 무섭지 않아요? 아빠는 목사님이니까 오히려 귀신이 무서워하겠네요? 그런데 저는 무서워요.” 그때 아빠가 말했습니다. “얘야! 귀신은 하나도 무섭지 않아! 진짜 무서운 건 사람이야!”

 나이가 들고 세상을 경험하면서 귀신은 점점 무섭지 않게 되고 오히려 사람이 무서운 것을 더 느낍니다. 때로는 사람의 말이 무섭고 사람의 자존심이 무섭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게으름과 무책임도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 무서움도 신앙이 깊어지면 다 사라집니다. 또한 지속적인 생활고도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자존심을 버리고 땀을 흘리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세상이 무서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진짜 무서운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꿈과 비전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동물은 꿈과 비전이 없기 때문에 발전도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꿈과 비전이 있기 때문에 찬란한 문명을 일으킨 것입니다. 결국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꿈과 비전’이고, 성도를 가장 성도답게 만드는 것은 ‘거룩한 꿈과 비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찬란하고 거룩한 꿈과 비전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우리 앞에는 놀라운 축복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가능성을 실체로 만들려면 꿈과 비전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주님의 바다’에는 ‘영혼의 바다’를 실제적으로 채울 수 있는 무수한 축복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그 축복들을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 축복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 사람을 낚는 어부의 꿈 >

 이제 경제적인 분야에서도 기적을 추구하십시오. 돈은 잘 쓰면 정말 좋은 것입니다. 믿음과 축복의 서장을 장식했던 창세기의 족장들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은 다 부자였습니다. 사람은 돈에 관심이 많지만 하나님도 다른 차원으로 돈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돈에 대한 언급이 많습니다. 성경에는 돈과 관련된 말씀이 약 2350구절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과 기도를 합한 말씀보다 2배나 많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38개 비유 중에서 16개가 돈과 관련된 비유입니다. 주님은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하셨습니다(눅 12:34). 그 말씀의 기본 뜻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물질적인 헌신도 하라는 말씀이지만 그 말씀이 암시하는 또 하나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보물 유무는 마음 유무와 관련된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물질적인 사명을 외면하는 마음이 경제적인 기적을 막는 제일 장애물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상당히 많은 기적은 경제적인 기적입니다. 출애굽도 경제적인 기적을 동반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사람들에게 은금 패물을 달라고 하자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하는 대로 다 내주었습니다(출 12:35-36). 그 장면은 구원의 축복에는 경제적인 축복의 가능성도 포함되어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러므로 경제적인 기적추구를 무조건 욕심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호수아 22장 8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많은 재산과 심히 많은 가축과 은, 금, 동, 철과 심히 많은 의복을 가지고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서 너희의 대적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의 형제와 나눌찌니라 하매.” 하나님은 애굽의 노예였던 백성을 가나안 땅에서 부유하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축복을 지금도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경제적인 축복의 가능성은 현저하게 높아집니다.

 누가복음 5장을 보면 어느 날, 주님이 베드로의 배에 타시고 말씀을 마친 후,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대로 순종하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취미로 낚시한 것이 아니라 생업이 고기잡이였습니다. 결국 그때의 기적은 생업에 주어진 경제적인 기적을 상징합니다. 그런 기적이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런 기적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예수님을 인생의 배에 모셔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습니다. 베드로의 그물처럼 현재 자신이 가진 것이 기적의 원천입니다. 현재 내게 있는 것만 가지고도 말씀과 기도를 앞세우며 나가면 하나님은 번득이는 지혜와 창조성도 주시고, 문제를 극복하는 믿음과 능력도 주실 것입니다.

 특별히 주님은 깊은 데로 가라고 했습니다. 지금 말로 하면 큰 꿈과 비전을 가지고 더 넓은 대양으로 나가라는 말씀입니다. 경제적인 기적의 원천은 대개 안전한 해변보다는 침몰하면 죽을지도 모르는 무섭고 깊은 바다에 있습니다. 그러나 침몰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배에 주님을 모시면 됩니다. 이제는 더 넓은 세계로 나가고 신앙생활도 깊이 하십시오. 해변에서 도전과 모험과 헌신도 없이 신앙생활을 하면 결코 경제적인 기적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경제적인 기적을 준비하려면 한 가지가 꼭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경제적인 기적은 이제까지 살던 방식대로 살라고 주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기적 후에 주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네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하나님이 경제적인 기적을 주시는 목적은 뚜렷합니다. 그것은 더 많은 영혼을 구하고 도우라는 뜻입니다. 그런 가치관과 목적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경제적인 기적은 돈을 쌓아놓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기적의 제일 목적은 영혼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경제적인 축복으로 많은 영혼을 구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마음이 있는 곳에 보물도 있게 됩니다. 그처럼 영혼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큰 꿈과 비전을 가지고 나가면 반드시 경제적인 기적을 체험할 것입니다.

< 경제적인 기적을 꿈꾸십시오 >

 이제 축복을 많이 받기를 꿈꾸십시오. 여러분 중에 경제 분야의 거물도 많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 인물이 한 명만 나와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할 수 있지만 한 명보다는 여러 명이 나오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왜냐하면 한 명만 너무 돋보이면 외롭고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점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한 장로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크고 거룩한 비전을 가졌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이 엄청나게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 축복에 너무 감사해서 자비를 들여 교회를 건축했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교회를 건축했는데 한분이 너무 혼자만 축복을 받다 보니까 그 장로에게 모든 힘이 쏠렸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그런 교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그 교회에도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바로 담임목사가 자주 바뀌는 현상이었습니다.

 그처럼 담임목사가 자주 바뀌자 그 장로가 거의 그 교회의 주인처럼 되었습니다. 그리고 후임목사는 더욱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담임목사가 자주 사임하니까 마치 그 장로가 담임목사를 쫓아내는 장로로 소문났습니다. 담임목사를 쫓아내려고 혈안이 된 장로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혼자 축복을 받고 힘이 자신에게 쏠리다 보니까 목사가 사임하기만 하면 마치 그 장로가 쫓아내는 것처럼 누명을 쓰는 것입니다.

 한 사람만 축복 받아도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할 수 있고 선교센터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롭습니다. 괜한 오해도 생길 수 있습니다. 본인도 어쩌다 실수로 마음이 높아지는 행동이 나올 수 있습니다. 또한 그렇게 세월이 지나면 옛날에 겸손하게 교회의 궂은일을 하며 봉사했던 마음도 희미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혼자 독보적으로 축복 받기보다는 함께 축복 받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공동체의 축복을 통해 더욱 큰일을 감당하려고 하십시오.

 이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교회와 새벽 기도회 성도, 그리고 온라인 새벽기도 회원 중에서 경제적인 거룩한 거물들이 한분이 아닌 여러분 일어나 더욱 많이 선교하게 하소서!” 그래야 서로를 존중하며 처음에 가졌던 겸손한 섬김의 영성을 계속 서로 격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그런 분이 3명 이상은 있어야 외롭지도 않고 자기 자리를 잘 지켜가며 더욱 하나님의 일을 잘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왜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20세기의 최대 복음증거자가 되었습니까? 그분이 설교를 잘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분에게 초창기에 그분을 뒤에서 확실하게 밀어준 3명의 평신도 동역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20세기 중반에 미국 텍사스에서 석유사업으로 억만장자가 된 죤 뉴턴, 루이 웨더포드, 사무엘 프레스톤입니다. 그들 중에 한 명만 헌신했어도 얼마든지 큰일을 할 수 있었지만 3명이 함께 헌신하자 계속 서로를 격려하며 빌리 그래함 목사님을 중심으로 더욱 하나님의 일을 잘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앞으로 한국에 개척될 기독교 선교연맹 교회의 모태 교회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30년쯤 후에는 자연증가만 해도 300개 교회 정도는 되겠지만 하나님의 은혜 주시면 3000개 교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저는 성경 66권 전권 파일을 만드는 천년영향력의 비전을 가지고 지금 30% 정도 완성했습니다. 국제적인 인물배출에 큰 역할을 감당할 네트영어도 있습니다. 그런 비전들을 잘 이루려면 여러분 중에 최소한 3명 이상은 경제적인 기적을 체험하는 사람들이 나와야 합니다.

 이제 존 뉴턴과 그 친구들이 가졌던 비전을 가져보십시오. 텍사스의 거부 3명이 물질로 헌신하자 텍사스 지역에 엄청난 부흥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있었기에 빌리 그래함이란 거물도 생기게 되었고, 텍사스는 미국에서 가장 기독교가 왕성한 주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런 경제적인 기적을 꿈꾸십시오.

 우리 교회는 미국 기독교 선교연맹(C&MA) 소속으로 한국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입니다. 미국 기독교 선교연맹은 복음주의적인 밸런스를 갖춘 선교 중심적인 교단이고, 전 세계에서 4번째로 큰 교단입니다. 현재 필리핀,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중국 남방의 몽족, 홍콩, 캐나다 등에서는 한국의 장로교와 같은 메인 교단입니다. 그런데 한국에는 선교사를 파송하지 않아서 한국 성도들은 잘 모릅니다. 그런 상황에서 개척자의 길을 가고 있기에 경제적인 기적을 체험한 텍사스의 3인방과 같은 분들이 더욱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이제 그런 분들이 더욱 많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해주십시오. 아니면 여러분 자신이 그런 경제적인 기적을 꿈꾸십시오. 쾌락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많은 영혼을 구원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은 소유만으로는 천하를 얻어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하나님의 뜻과 사명으로 채워져야 진정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꿈과 비전을 가지고 최선을 다함으로 더 많은 은혜와 축복을 받고 더 많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귀하고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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