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신명기 › 광야길을 걷게하신 이유

김필곤 목사 | 2009.12.13 15:03:58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신8:1-10
설교자
김필곤 목사
참고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2002.10.31

 제가 몇 주 전에 어느 교회에 가서 강의를 하였습니다. 강의를 하면서 세상에서 우리가 가장 존경하고 본받고 싶은 분은 예수님이라고 소개를 하였습니다. 그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를 하였습니다. 우리 성도님에게도 이시간 질문해 보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본받고 싶은 분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라는 사실에 동의하십니까? 그래서 제가 다시 질문을 하였습니다. 자녀를 예수님처럼 살게 하고 싶은 분이 있습니까? 얼마 정도의 사람들이 그렇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어떠합니까? 자녀를 우리가 그렇게도 존경하고 따르는 예수님처럼 살게 하고 싶습니까?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자녀를 예수님처럼 집이 없이 평생 살게 하고 싶습니까?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였는데, 예수님처럼 목수의 직업을 가지게 하고 싶습니까? 예수님처럼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며 끔찍한 고난을 받게 하고 싶습니까?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많은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며 돌아가시게 하고싶습니까? 아무도 그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성도님은 어떠습니까? 예수님 믿는 것 때문에 우리가 아니 우리 자녀들이 이런 고난을 받는다면 교회에 다니라고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빼고 부활과 영광에 동참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사도 바울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바울처럼 살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주를 위해 결혼도 하지 않고 사도 바울처럼 주를 위하여 모든 명예를 포기하고 사도 바울처럼 주를 위해 태장을 맞고 감옥에 들어가기도 하고 갖가지 위협을 당하는 삶을 원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였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 16:24)"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4:27)"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는 원치 않든 원하든 자신의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원하지 않는다고 광야길을 걷지 않고 원한다고 광야길을 걷는 걷는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에 가는 길에는 반드시 광야 학교에서 훈련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때로는 원하지 않던 질병이라는 광야, 때로는 상상하지 못한 사고라는 광야, 때로는 끝없이 번창될 것같은 사업이 어느날 갑자기 부도를 당하는 파산이 광야, 실패라는 광야, 이별이라는 광야, 슬픔이라는 광야,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이라는 광야를 건너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 내가 이런 고난을 당하여야 만 합니까? 내가 무엇을 잘못하여 이런 고통을 겪어야만 합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40년 동안 광야길을 걸어갑니다. 때로는 적들의 공격을 받습니다. 물이 없습니다. 편안히 잘 곳이 없습니다. 먹을 것이 없습니다. 왜 이 길을 40년 동안 걸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이유를 명쾌하게 3가지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가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1. 낮추시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겸손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2). 인간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기 주제를 파악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이 아니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것이 잘되면 사람은 끝없이 교만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교만이야 말로 인간의 최고의 문제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자기 자신에 몰입되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쾌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잘 났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려움을 당하면 그 때 자신의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아 내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없구나!, 인생이란 내 힘으로 살 수 없구나. 나는 지극히 연약한 존재이구나" 이것이 인간입니다. 광야의 과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인간이 인간답게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알고 있는 유명한 의사 선생이 계셨는데 그분에게 꾸준히 전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 때 그분은 차갑게 거절하며 자신은 살만하니 무능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에게나 전도해서 위로를 주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오만함이 실어 전도하기를 포기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수년이 흐른 후 그분에게서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그분은 그 목사님을 만나 고개를 숙이고 도움을 요청하더라는 것입니다. 암에 걸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고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뿐이라며 애원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등 따뜻하고 배부르고 모든 것이 편안할 때는 자기의 실력을 믿고 교만해 하지만 심한 환난이 다가와 때리면 그 교만이 박살나고 '자기' 라는 우상이 산산조각 깨져버리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끓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성이 있습니다. 영적인 존재입니다. 이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동물이 병들었다고 하여 "아 나는 연약한 존재구나" 라고 깨닫고 겸손해 집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고 말합니까? 그러나 인간은 어른이든 아이든 고난을 통하여 자신과 이웃과 하나님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목요일 저희 집 아이들이 윷놀이를 하였습니다. 저보고 같이 하자고 하는데 저는 읽을 책이 있어서 너희끼리 하라하고 방에서 책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한 참 후에 막내가 울면서 통곡을 하며 방에 들어와 저에게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누나들이 자기를 속였다는 것입니다. 그 전날 지내 어머니가 자기 편이 되어 누나들의 돈을 따먹었는가 봅니다. 그러니 자기가 다 딸 줄 알았는가 봅니다. 그런데 자기 어머니가 없으니 딸 리가 없지요. 제가 그랬습니다. 야 너희 누나들이 너에게 돈을 잃겠느냐 어제는 어머니가 있었으니 너에게 잃은 것이지 어머니가 없으면 너에게 어떻게 너희 누나들이 잃겠느냐? 어떤 방법으로든 너의 돈을 따먹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주제 파악을 하라는 말이었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는 나의 존재와 다른 사람의 본질을 알게 되어 있습니다. 고난의 강을 건너고 광야를 길을 통과한 사람은 사도 바울처럼 죄인 중의 괴수로구나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의 죽음을 보면서 인간의 허무를 느끼게 되고 인생이란 별거 아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업의 실패를 통해 나의 욕심대로 모든 것을 채울 줄 알았는데 세상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3절은 어떻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까? 낮추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기 위해(3)"서입니다. 모든 것이 잘 되고 먹을 것이 풍부하고 건강해 지면 어떻게 됩니까? 풍부한 만큼 사람은 교만하게 되어 있습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 잊어 버린(13-14)"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잊지 않고 더욱 낮아져 인간답게 살게 합니다.

둘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2절 하반적을 보십시오.
2. 믿음과 순종의 훈련을 위해서입니다(2).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즉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지 아니 지키는 지 알아 보기 위해서입니다.
부모들은 왜 학교 가기 싫어 하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냅니까? 그것은 이 아이가 나중에 커서 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힘들지만 교육을 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때로는 우리를 광야라는 학교에 집어넣고 우리가 고통스럽고 힘들어 한다는 것을 다아시면서도 훈련시키십니다. 광야 학교를 통하여 세상적인 생각, 인생관, 습관, 철학, 문화를 깨끗이 청소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여 믿음과 순종의 훈련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도록 하는 훈련입니다.
순종보다 더 완벽한 신앙은 없습니다. 순종은 신앙의 절정입니다. 어는 목사님이 자신의 이야기를 써 놓은 글 중에 이런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중국에서 선교사님들을 만났다고 합니다. 한사람씩 간증을 했습니다. 장로님으로 계시다가 선교사 지원을 해서 중국에서 선교하시는 분인데 70세 넘으신 분이었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수많은 일을 했기 때문에 어떤 간증이 나올까 기대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제가 올해 나이가 70이 넘었습니다. 선교사로 주님의 일 하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 나이가 되도록 저의 못난 성격을 고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화를 잘냅니다. 라며 우시드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내 성격 하나 조정할 수 없고 이 나이가 되어서도 화를 잘내고 소리를 지르는 제가 무슨 선교사입니까?라며 울더라는 것입니다. 광야학교를 지나며 하나님은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순종은 신앙의 꽃입니다.
아브라함은 순종의 훈련을 25년 동안이나 광야의 방랑자로 받았습니다. 야곱은 30여 년을 광야에서,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시나이 광야에서 40년을 다윗은 17여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며 혹독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특히 바울은 3년 반 동안이나 아라비아 사막에서 외로운 광야 훈련을 받았습니다. 먹을 것이 없습니다. 입을 것이 없습니다. 홍해가 앞에 있습니다. 아말렉이 있습니다. 거할 집이 없습니다. 밤은 춥습니다. 낮은 더웁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저 전폭적으로 하나님 믿고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보십시오. 군사력이 있습니까? 탁월한 전략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크신 팔로 통과케 하신 것입니다(출 15:16). 그들의 진로를 가로막는 여러 나라를 거뜬히 통과케 하셨습니다(신 29:16). 바다를 육지처럼 통과하게 하셨고(느 9:11), 강을 도보로 통과하게 하셨으며(시 66:6), 그 어떤 악천후 속에서도 사막을 대로처럼 통과케 하여주셨습니다(시 136:14,16). 비행기나 화물선이 식량을 공급해준 것이 아닙니다. 본문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먹여주셨습니다. 신명기 2장 7절을 보면, 하늘에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부족함이 없이 먹여주셨고(출 16:8), 땅에서는 바위를 터뜨려 물을 마시우셨습니다(사 48:21). 본문 4절을 보면, 광야 40년 동안 항상 새 옷과 새 신발까지도 공급해주셨습니다. 모자라지도 않았고, 떨어지지도 않았습니다. 항상 새 밥 먹고 새 옷 입었어요 요한계시록 12장 6절에서는『하나님께서 양육해주셨다』고 해석해줍니다. 본문 18절을 보십시다.『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에게 재물 얻을 힘을 주셨음이라』
사람이 당하는 고난이 겉모습을 보면 비슷하지만 그 원인을 살펴 보면 종류가 있습니다. 어떤 고난은 수치스러운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고난은 영광스러운 고난이 있습니다. 전혀 부끄럽지 않은 고난입니다. 똑같이 다리를 절어도 도둑질 하다 다리를 절으면 그것 부끄러워 그 이유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육이오때 전쟁에 나가 상의 군인이 되었다면 그 무용담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은 대강 4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가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입니다.
먼저는 자신의 죄, 자신의 잘못, 자신의 부주의 때문에 징계로 당하는 고난입니다.
아간의 범죄하여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거짓말 하다가 부부가 동시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요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고난은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그의 후손들이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입에도 꺼내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는 아니지만 타인의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도 있습니다. 술 취한 운전자의 차가 와서 받는 것이나 환경오염으로 질병에 걸리는 것 등은 타인의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입니다.
둘째는 자연적인 고난입니다. 늙으면 자연적으로 기력이 쇠하고 질병이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 가지 불편한 것들이 다가옵니다. 자연적인 것입니다. 이것 부끄러워할 것이 아닙니다.
셋째로 훈련으로 다가오는 고난입니다. 요셉이나 욥과 같은 경우입니다. 하나님이 더 귀한 인물로 쓰시기 위하여 훈련을 시키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부끄러워할 고난이 아닙니다.
넷째로 사명 때문에 스스로 당하는 고난입니다. 스데반이나 예레미야, 에스겔, 모세, 다니엘과 같은 경우입니다. 얼마든지 편하게 살려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고난의 길 순교의 길을 자처한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더더욱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고난 이든 그 훈련의 과정을 통하여 인생을 참으로 행복하고 성공적으로 사는 길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행복하게 사는 비법이 무엇입니까? 성공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1절을 보십시오. 한 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어떻게 된다는 말입니까? 4을 보십시오. 7-10을 읽어 보십시오. 이렇게 되는 비법이 무엇입니까? 6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참으로 행복하고 성공하고 잘되는 길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해 보십시오. 가정이 행복해 집니다. 말씀의 원리를 적용해 보십시오. 사업이 번창합니다. 행동하기 전에 말하기 전에 말씀에 철저히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인간관계가 회복됩니다. 마음에 기쁨에 넘치게 됩니다.
그 무수한 고난의 강을 건넜던 다윗은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 119:67)"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 119:71)"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과 순종하는 것은 별개의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다고 다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담 이후 사람은 참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를 선천적으로 싫어합니다. 성경의 요나를 보십시오. 니느웨로 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가길 싫습니다. 결국 폭풍을 만나고 바닷물에 빠지고 죽음의 고통을 맛본 후에야 어쩔 수 없이 순종을 합니다. 순종의 훈련에서 우리는 합격해야 합니다. 억지 부릴 필요없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말씀에 순종하면 광야길은 순조롭게 건너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소 무거운 짐을 주신 것 같으나, 그 짐을 감당할 수 있는 어깨도 주셨던 것입니다. 시련을 허락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통과케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이유는 무엇입니까? 16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낮추시고 훈련하여 마침내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3.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16).
광야 길을 걷게 하시는 이유는 결국 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광야길을 통과하게 하는 것은 그들을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괴로움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복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부모들이 이빨 빼는 고통을 감수하고 아이들의 이빨을 빼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름다운 이를 가지고 행복하게 살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의사가 병든 사람들을 그 쓰라린 고통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수술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잠시 고통이 있더라도 질병에서 고침받아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기 때문에 수술하는 것입니다. 사실 광야 자체가 축복의 장소입니다.
홍해를 가르는 기적 물이 없을 때 쓴물을 단물로 바꾼 기적 200만에 가까운 사람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먹고 사는 기적, 아말렉 군대와 싸움에서 기도로 승리하게 한 기적,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기적 광야가 아니면 어떻게 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었겠습니까? 광야라는 곳에 하나님은 보물 숨겨 놓고 맛보도록 했습니다. 광야는 우리에게 고통스럽고 이해하기 어려울 지라도 축복의 장소인 것입니다. 광야 40년이 없는 모세, 25년의 고뇌의 세월이 없는 아브라함, 감옥 생활이 없는 요셉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없었다면 그들은 진정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받기에는 부족했을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깨달은 베드로 사도는 고난 받는 것을 복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벧전 3:14)"
지난 주 연매출 1억달러(약 1,250억원) 벤처 '라이트 하우스' 경영인 김태연 씨에 관한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그녀는 여성 최초의 미국 공인 태권도 8단의 GrandMaster, 미국 150개 도시에서 방송되는 토크쇼 '태연김 쇼'의 진행자 등등 화려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공한 기업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이렇게 된 첫 출발점이 미국에 이민을 간데서 부터입니다. 그녀는 24살이던 지난 68년 술만 먹으면 가족들에게 폭행을 일삼던 아버지에 반발, 남동생이 아버지를 폭행한 뒤 음독 자살한 사건으로 더 이상 얼굴을 들고 고향에서 살 수 없게 되어 도망치다시피 온 가족이 미국행 보따리를 쌌다고 합니다. 3D 직종을 전전하던 김씨는 85년 캘리포니아로 이주, 실리콘 밸리에서 작은 사무실 하나와 컴퓨터 한대로 사업을 시작 95년에는 <월스트리트 저널>이 선정한 '미국 100대 우량기업'에 선정되는 등 지난해에는 반도체 장비 분야에서 업계 1위에 올랐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그 가정의 불행이 없었다면 그녀가 오늘날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세계적 기독기업 서비스 마스터의 창업자인 메리온 웨이드는 44년 실명으로 세계 40개국에서 74억달러(8조원)의 매출을 올린 종합 용역 서비스회사로 세계를 석권하게 된 것입니다. 실명이 없었다면 그는 그런 사람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광야로 보내지만 그 광야에서 이길 힘을 주십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문제는 우리가 그 능력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입니다.
고난이 복된 것을 아는 사람들의 인생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바울은 자신의 고난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후 11:23-27) 그런데 그 고난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지니고 있습니까? 지긋지긋하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로마서 5:2-4절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 5:2-4)"
심지어는 그 고난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 1:24)"
그리고 자신 뿐만아니라 아들처럼 사랑하는 디모데에게(딤후1:2) 고난을 받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딤후1:8). 고난도 받으면 나로 족하지 아들에게까지 고난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고난을 받아고 너희들만큼은 편안히 살아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달랐습니다. 바울 뿐만 아니라 진정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신앙인들의 삶은 달랐습니다.
오늘날 만든 사람들은 고난을 싫어합니다. 어려운 일은 3D 업종이라고 해서 피합니다. 좀더 쉬운 일을 택하고 좀편 편한 길을 걷고 싶어합니다. 그러면서 많은 영광과 혜택은 받고 싶어합니다. 세상적인 물결에 따라 신앙인들도 이제 십자가를 지기 싫어합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피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의 십자가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피하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토마스 아켐피스는 그의 명저 [그리스도를 본받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서 도망칠 수는 없다. 십자가를 피한다면 이미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아니다. 그대가 밖으로 도망쳐도 거기 십자가가 있고, 안으로 숨어도 거기 십자가를 볼 것이다. 위로 올라가도 십자가가 기다리고, 밑으로 파고 들어도 십자가가 있을 것이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고자 하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의 십자가의 고통을 좇을 것이니라"

베드로를 보십시오.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벧전 4:16)"
다니엘을 보십시오. 만약 자신이 기도하면 죽음을 당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합니다. 포로로 잡혀와서 어떻게 이루워 놓은 자리입니까?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다 빼앗길 수 있습니다. 재산이 문제가 아니라 목숨을 내어 놓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어떻게 합니까?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단 6:10)
다니엘의 세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보십시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단 3:18)"
고난의 끝은 복입니다. 고난의 과정을 부끄러워 하지 마십시오. 영광스럽게 자랑스럽게 생각하십시오. 고난은 손해가 아니가 거룩한 투자입니다. 막10:29-30절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고난은 q 백배의 축복이요, 영생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고난은 씨앗이요 축복은 수확인 것입니다. 조그만 씨뿌림으로 백배이상의 수확을 할 수 있다는 기대속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처럼 성도는 고난을 씨뿌려 백배의 축복을 수확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고하려 하심이나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가후양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느 다내 능력이 약한 데서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하심으로 나의 여러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7-10).
하나님께서 우리를 광야 길을 걷게 한 이유가 있습니다.
1. 낮추시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겸손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2).
2. 믿음과 순종의 훈련을 위해서입니다(2).
3.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16).
16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광야길을 걷게하신 이유/신명기 8:1-10/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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