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도행전 › 인간의 불가능 속에 계시는 하나님

김필곤 목사 | 2009.12.13 15:15:06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행12:1-17
설교자
김필곤 목사
참고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누가 지어낸 이야기인지 실화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무더운 여름이었습니다. 한 청년이 더위에 지쳐 숨을 헐떡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문득 눈앞에 커다란 냉동실이 나타났습니다. '냉동실은 얼마나 시원할까?' 청년은 냉동실로 들어갔습니다. 한 참 시원하다고 생각하고 앉아 있는데 '철컥'하고 냉동실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안에서는 냉동실 문을 열 수가 없었습니다. 청년은 문을 두드리며 발악을 했습니다. 그리고 절망감에 사로잡혀 유서를 썼습니다. "이젠 완전한 절망이다. 죽음의 그림자가 나를 죄어온다. 내 몸은 점점 얼음으로 변하고 있다. 조금 후면 꽁꽁 얼어죽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틀 후 냉동실에서 숨진 청년의 시체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냉동실은 놀랍게도 작동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고 합니다. 실내온도는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섭씨 15도였으며 산소도 충분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은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싸늘히 식어 있었다고 합니다. 절망은 죽음을 몰고 옵니다. "어떤 일을 당할 때 할 수 있는 방법이 아무것도 없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 절망하게 되고 인생을 포기하게 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일을 당할 때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불가능하다."라고 생각되는 한계 상황을 만나면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1. 불가능한 상황을 만나면 불가능한 상황만 보지말고 불가능한 상황을 바꾸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불가능한 상황은 하나님을 보라는 기회이고 신호입니다. 절망의 때 포기의 때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의 때입니다. 그 때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1)본문:
지금 베드로가 처한 상황은 인간적으로 볼 때 살아 날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이미 야고보를 처형하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유대인들이 좋아합니다. 이제 베드로 차례입니다. 빠져날 올 수 없는 상황입니다. 베드로가 이미 두번이나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행4:3; 5:18). 이제 세 번째입니다. 전에 기적적으로 탈출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를 철통같이 경계하도록 하였습니다.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게 하였습니다. 쇠사슬에 매어 놓았습니다(6). 두 군사 틈에 쇠사슬을 메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두명은 2중으로 문밖에서 옥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이중 삼중으로 감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침묵하십니까? 뭐하고 계십니까? 7절에 보십시오. 주의 사자를 보내었습니다. 쇠사슬을 그의 손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감옥 문에 이르니까 감옥문이 저절로 열리게 합니다(10). 거짓말 같은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것을 통하여 베드로가 깨달은 바가 무엇입니까? 1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 불가능한 상황을 경험함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서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베드로의 능력으로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고 나아갈 수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도 불가능입니까?

2)우리는 불가능한 상황을 만나면 그 불가능한 상황을 붙들고 절망하지 말고 인간의 불가능을 가능케 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내 건강으로 내 지식으로 안될 때는 바로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을, 하나님의 지혜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라는 신호입니다. 하나님께 무릎 꿇으라는 신호입니다. 인간이 살면서 내 힘으로 다 되는 것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면 될수록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침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 불가능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 주시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가 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베드로를 외면하였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의 사자를 보내십니다. 하나님은 불가능 상황에서 역사하시기를 즐겨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은 어려우면 불가능한 상황만 봅니다. 불가능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지 못합니다.
베드로는 과거에 그런 경험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이후의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먼저 보내시고 홀로 기도하러 산에 올라갔습니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는데 기도를 마친 예수님께서 바다를 걸어 제자들에게 갑니다. 그 때 제자들은 유령소동을 버립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마 14:27)"고 합니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마 14:28)" 예수님께서 오라 할 때 베드로가 내려 물위로 걸어 예수님께 갔습니다. 그러나 바람을 바람을 보고 무서워 하니까 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바라 볼때는 잘 걸어갔습니다.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바람을 보자 마자 물속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2:2)"
우리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일평생 우리를 훈련시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 바라보는 훈련을 시키십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십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하고 합니다. 무엇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죽습니다. 의지하던 롯이 떠납니다. 아들을 낳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아들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상황에서 하나님 바라보고 아들을 얻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 제물로 바치라고합니다. 가능한 이야기 입니까?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받은 일평생 훈련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 믿음의 길, 기적의 길, 더 좋은 길을 열어 주십니다.
월요일날 어느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목사님께서 간증을 하였습니다. 교회를 개척하였는데 너무도 어려웠다고 합니다. 빚이 7억쯤 되었답니다. 그런데 헌금을 하니 6000만원 나왔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능력도 없고 사모님이 공무원이라 사모님이 돈을 이곳 저곳에서 빌려 막으면서 목회를 한 6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해결될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고 매일 매일 피말리는 생활을 하였다고 합니다. 교회를 팔 수도 없고 교인들은 한 60여명 나오는데 헌금 이야기 할 수도 없고 견딜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주를 위해 할 만큼 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역에 대하여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후 11:23-28)"라고 말씀했는데 자신도 헤아려 보니까 주를 위해 꽤 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서 이문제 하나 해결해 주시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새벽마다 나가 기도하는데 "하나님 교회 부도나게 해주십시오. 망신당하면 제가 당합니까? 하나님 망신입니다. 제발 부도나게 해 주십시오. " 그런데 부도가 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한 번은 급하게 6000만원을 갚아야 하는데 길이 없습니다. 목사님을 부도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데 사모님 친구 중에 의사가 있는데 그 의사가 기도하는 중에 6000만원을 빌려주라는 감동을 받았다고 가져 왔더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빚을 갚는다는 것을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하루는 통장 23개를 가지고 새벽에 강대상에 올려 놓았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욕을 하며 맘대로 하시라고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렇겠느냐는 생각도 들리만 그래도 하나님께 욕까지 할 필요가 뭐 있겠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참 원망과 욕을하고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세미한 음성으로 들려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네 집 팔아라. 그리고 나 만 바라봐" 아파트 34평 짜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어야 합니다. 하고 집을 팔아 헌금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포 넘어 시골로 이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금 갚아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큰 아들이 경희대학에 들어갔는데 4년 동안 한 번만 장학금을 받지 않고 전액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녔다고 합니다. 작은 아들이 올해 대학 시험을 보았는데 공부를 잘하는데 375점 밖에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들이 와서 아버지에게 "하나님이 나 돈 하나 안들고 학교 다닐 수 있는 길을 가게 하시려고 하였다고 하고 재수를 하겠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의료 선교사가 꿈인데 중문대학에 들어가면 등록금 안내고 다니도 되니까 그학교에 들어가겠다고 한답니다. 대성학원인가 종로학원인가를 들어가 지금 공부하고 있다고 합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될 때 상황 보시지 마시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찬양에도 있지 않습니까?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평화의 주님 바라보아라 세상에서 시달린 친구들아 위로의 주님 바라보아라.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 플 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주리라. 힘이 없고 네 마음 연약할 때 능력의 주님 바라보아라. 주의 이름 부르는 모든 자는 힘주시고 늘지켜 주시리"
그 고난 가운데 살았던 다윗이 고백하지 않습니까?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 18:1-2)"

2. 불가능한 상황을 만나면 부정적인 결과만 예측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좋은 기회로 알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신뢰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상황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늘 부정적 결과만 예측하고 그것에 사로잡힙니다. 이 병으로 죽지 않을까? 이 빚으로 우리 가정 망하지 않을까? 이러다가 회사 망하는 것이 아닌가? 이러다가 우리 부부, 우리 가정 일어 설 수 없는 파경을 마지 하지 않을까? 등 갖가지 부정적 결과에만 집착하게 됩니다.

1)본문
베드로도 얼마든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사역이 이제 끝이 났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 주님께서는 어떻게 해 주십니까? 죽음의 위기 앞에 있는 베드로에게 하나님은 주의 사자를 보내어 옆구리를 쳐 깨웁니다. 베드로의 옆구리를 치며 급히 일어나라고 명령합니다(7). 지금 누워 자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절망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죽을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고 합니다. 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고 합니다. 이 때 베드로의 마음에 무슨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철통같이 경계를 하고 있습니다. 걸리면 죽게됩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무사히 빠져 나올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데도 베드로는 어떻게 합니까? 8절에 보십시오.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9절에 보십시오.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베드로가 확실히 알고 그렇게 순종했습니까? 아닙니다. 자신도 환상인지 현실인지 몰랐습니다(9). 그러나 미미했지만 주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랐습니다. 따르는 과정에서는 확실히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고 하여도 과거 하나님을 믿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따른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른대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되어지면 결과는 생각할 것 없이 따르는 것입니다. 나중에 베드로는 어떻게 깨닫게 됩니까?(11)

2) 우리는 불가능한 상황을 만나면 부정적인 결과만 예측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좋은 기회로 알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신뢰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상황에서 기적은 어떻게 일어납니까?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맞지 않아도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기적은 순종으로 피어나는 꽃입니다. 나아만이 문둥병이 걸렸습니다. 문둥병을 났기 위해 엘리사에게 갔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나와 보지도 않습니다. 적어도 이스라엘 나라 보다 훨씬 강한 나라입니다. 당시 가장 강대국의 국방부 장관입니다. 얼마나 자존심 상하겠습니까? 이번 김대중 대통령 방문때 부시가 김대중 대통령을 this man이라고 했다고 해서 자존심 상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뭐 자존심 상할 것 있겠습니까? 우리는 부시맨이라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종을 시켜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목욕을 하라고 합니다. 그가 그 말씀에 억지로라도 순종을 합니다. 그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왕하 5:14)"
우리도 어떤 절망적인 상황 불가능한 상황이 있다하여도 이 말씀과 같이 순종하는 과정에서 기적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서울대 수석으로 졸업한 최세은 양에 대한 기사를 읽어 보았습니다. 평균학점 4.3점 만점에 4.2를 받았습니다. 4대째 예수믿는 집안인데 늘 가정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언니도 서울대 사회학과를 나왔고 오빠도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 군대를 추격을 받으며 도망갈 때를 보십시오. 죽음의 위기 앞에 있습니다. 그런데 홍해가 앞에 노여 있습니다. 이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한계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 (출 14:16)"
그 때 모세가 그 명령대로 순종합니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출 14:21)"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 성도님들에게도 순종할 때 이런 기적의 능력을 체험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왜 홍해도 없고 추격도 없게 하시지 왜 이런 상황을 허락하였습니까? 성경을 보십시오.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 모든 군대와 그 병거와 마병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리니 내가 바로와 그 병거와 마병으로 인하여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 (출 14:17-18)"
하나님이 때때로 우리 인생길을 이렇게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순종의 훈련을 받으시기 원하십니다. 오직 여호와의 말씀에만 우리의 초점을 맞추고 순종하시길 원합니다. 기적을 준비해 놓고 말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내가 하지 않고 하나님이 하시도록 맡기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느니까? 나의 능력은 부족하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어느날 피카소가 여행 중에 시골의 한 농가에 묵게 되었답니다. 하룻밤을 잘 보낸 그는 다음 날 아침 주인집 딸아이를 보자 사랑스러운 나머지 "얘야, 그림을 하나 그려줄게 네 손수건을 다오"라고 말했답니다. 그러나 이 "세계의 거장"을 몰라본 아이는 엄마에게 달려가 이렇게 소리쳤답니다. "엄마, 웬 미친 사람이 내 비단 손수건에다 물감을 뿌린대" 오늘날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생을 맡기라고 하시는데 이처럼 "어리석은 딸"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잠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시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벧전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3. 불가능한 상황을 만나면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아도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상황은 지금 행동하기 전에 기도하라는 신호롤 받아들이면 됩니다.
1)본문:
베드로가 옥에 갖혔습니다. 그들의 최고 지도자입니다. 지금 그가 죽으면 안됩니다. 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 때 그들은 무엇을 하였습니까? 5, 12절을 보십시오.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기도는 어떤 기도였습니까? 그렇게 믿음 좋은 기도는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나온 것을 여자아이가 말하자 그들은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15절을 보십시오. "네가 미쳤다."라고 합니다. 기도해 놓고도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의 천사라"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베드로가 죽었다 천사가 되어 나타났습니까? 실제 베드로를 보고도 믿지 않습니다. 16절에 보니 놀랐습니다(16).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로데(장미)라는 여자 아이만 믿었습니다.'베드로의 음성인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들어가'(14절) 자기들이 '간절히'(5절) 올린 기도에 응답한 것으로 믿고 적극적으로 설득합니다. "계집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저희가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15절) 그러나 다른 사도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응답해 주었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기게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불완전한 믿음이었으나 그들의 기도를 들으신 것입니다.

2) 우리는 불가능한 상황을 만나면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아도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우리도 얼마나 연약합니까? 기도하면서도 확신하지 않습니다. 금방 기도해 놓고 싸웁니다. 저희 아이들도 가정 예배를 드릴 때 보면 기도를 시킵니다. 우리 아들 보니까 늘 당골 매뉴가 누나들과 싸우지 않게 해 주시고입니다. 그런데 예배 끝나자 마자 싸웁니다. 아이들만 그렇습니까? 어른들도 기도해 놓고 그것이 이루어 질 것이라고 믿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느 분은 새벽마다 기도하는데 맨 앞에 나와서 사모님 단점을 고쳐달라고 큰 소리로 기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아이는 자전거를 사달라고 기도하는데 아버지만 들어오면 큰 소리로 기도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야 기도는 하나님께 하는 것이야"라고 하니까 아이가 "아니예요. 아버지가 들어야 해요"라고 기도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연약한 기도라도 우리는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십니다.
복음 성가에 그런 찬양이 있지 않습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 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실망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방황하십니까? 주님 앞에 무릎끓고 간구해 보세요. 마음을 정결하게 뜻을 다하여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 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기도는 우리의 안식 빚으로 인도하니 앞길 깜깜할 때 기도 잊지 마시오"
비록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마 7:7-8)"

아무리 불가능한 상황이라도 아직 기도할 수 있는 입은 있지 않습니까? 기도를 통하여 능력을 체험 받으시기 바랍니다.
귀신들려 고생하는 불쌍한 아이를 고쳐 주지 못한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는 왜 고치지 못하였느냐고 질문할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 9:29)"
우리의 절망적인 상황은 단순하게 인간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영적 전쟁터에서의 문제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승리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하여 절망적인 상황을 물리쳐야 합니다. 기도를 통하여 불가능을 가능케 하여야 합니다.
베드로는 권력의 감옥에 갇혔지만 오늘날 우리는 환경이라는 감옥에 갇혀, 물질의 감옥에 갇혀, 건강이라는 감옥에 갇혀, 학벌이라는 감옥, 미움의 감옥, 질투의 감옥, 명예의 감옥, 인기의 감옥에 갇혀 나는 불가능하다고 절망할 수 있습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때가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은혜의 때입니다.
상황을 보며 절망하지 말고 주님 바라보고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부정적인 결과만 예측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좋은 기회로 알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신뢰하고 따르시기 바랍니다.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포기하지 마시고 언젠가 매듭이 풀린 것을 믿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기입니다(렘32:17,27; 눅1:37; 18:27).
우리가 명확히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상황이 의외로 좋은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끝나 버리기 전에는, 무슨 일이든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은 지금이 끝이 아닙니다. 불가능해보이는 것들이 실제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나타나는 발판이 되기도 합니다. 만약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일이 해결된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인이십니다.

인간의 불가능 속에 계시는 하나님 /행12:1-17/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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