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로마서 › 그리스도의 표상(그리스도의 몸인 교회-1)

김홍전 목사 | 2017.08.09 23:42:08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롬12:3-11
설교자
김홍전 목사
참고

성경: 12:3-11

제목: 그리스도의 표상(그리스도의 몸인 교회-1)

 

1. 교회관의 난맥상

우리의 교회가 서울에 있든지 혹은 미주에 흩어져 있든지 거룩한 교회로서 주님 앞에 묶여진 모든 회원이 늘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참 교회의 자태를 바로 보존하고 늘 중시하며 살아가려면 가진바 구원의 도리가 정당해야 합니다. 또한 구원하신 내용의 여러 가지 은혜와 하나님의 여러 가지 경영을 잘 깨달아서 주님께서 오늘 나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무엇이며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목적과 이유가 무엇인가를 바로 알고 살아나가는 것이 심히 중요합니다. 그냥 맹목 가운데, 알지 못하는 가운데에서 살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세상을 바라볼 때에 세계 어느 나라에 있든 지간에 기독교라는 이름 아래 교회라고 칭하는 많은 종교 단체의 활동이 있고, 또 거기서 많은 사람이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고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다 분명히 알고 느끼듯이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고 사는 많은 사람이 실제로는 기독교인으로 볼 수 없는 경우가 흔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정당한 표준으로 판단해 볼 때 확실히 구원과는 상관이 없으면서, 다만 기독교의 문화나 종교적인 색채와 관계되어 있다고 해서 스스로 기독교인으로 자처하고 기독교인적인 활동을 추구하면서 대외적으로 발표하고 나가려는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빈곤한 정도로밖에 기독교를 알지 못하지만 대외적인 활동에는 오히려 더 열심을 냅니다. 이때에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정당한 교회 관입니다.

 

과연 나는 어떠한 교회 관을 가지고 있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아직도 그릇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교회 관을 가지고, 실은 그 사람들뿐만 아니라 허다히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이지만, 과연 이 사람들의 교회관이라는 것이 반드시 바르겠는가 할 때에 거기에 굉장히 많은 오류가 있다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교회가 무엇인가를 바로 잘 깨닫지 아니하고서 어떤 전통이나 습관에 의해서 교회 관을 형성하고, 이런 것이 교회라고 생각하고 그런데 어울리는 생활 행동을 할 때에는 참으로 그릇된 데로 빠져 들어가기가 심히 쉽다는 것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잘못된 일을 하고도 잘못된 것인 줄 알지 못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끓임 없이 강조하는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요구 하시는 바 참된 도리는 무엇이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의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 무엇이며, 무엇이 참된 구원이고 무엇이 중생이며 무엇이 새사람이고 또 무엇이 그리스도의 속죄이며 영광의 내용인가를정당하게 알아서 비슷하나 절대로 아닌, 소위 사이비라는 것을 분간할 줄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다고 늘 함께 생각해 왔습니다.

 

교회에 대해서도 참된 교회와 거짓된 교회를 분별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교회이고 무엇이 교회가 아닌가를 모르고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맹신이나 아주 거친 속된 의견,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비판을 거치지 않은 제멋대로의 전통이나 특수한 환경에 의해서 형성해 나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이것이 교회라고 하면서 그렇게 모여서 조직하고 활동을 한다면 교회가 되는 것입니까? 교회가 되지 아니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그릇된 신학이 참된 신학이 되지 아니하고, 그릇된 교리가 구원의 도리가 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비슷하고 그럴듯하게 하나의 종교 철학으로서의 교회 관을 말할지라도 그런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회가 아닌 것을 이 세대에 특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죄, 십자가, 부활, 그로 말미암은 새로운 생명, 성화와 같은 구원관이 정당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경경하신 가장 영광스러운 실체인 참 교회는 어떤 것이고 그렇지 아니한 것은 어떠한 것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오늘날 시대와 같이 배교의 세력이 큰 성격으로 역사를 꾸며 나가고 있는 때에는 부지불식간에 그 거센 물결에 끌려 들어가기가 쉽습니다. 더구나 그런 아무런 훈련이 없는 사람들이 교사가 없고 정당하게 가르치는 도리가 없는 세계에 들어가면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미국 같은 나라는 비록 기독교 국가라고 하지만 사실상 바른 것을 어디서 배울지 찾기가 쉽지 않은 현실입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왜곡되게 가지고 있던 생각을 덧붙여서 사람을 모아 종교 단체를 조직하여 교회라고 할 때, 거기에는 교회의 질의 저하만이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아닌 것을 긴 것으로 만들어 놓는 현실을 특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때때로 신문지상에서도 보는 것처럼 괴상한 것이 교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별로 보이지 않던 괴상한 것들이 이제는 떳떳하게 기독교의 이름을 붙이고, 어느 때는 심지어 대한 예수교 장로회라는 이름을 딱 붙이고 나서서 무슨 파 무슨 파 해 가면서 활동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은 환경과 주위의 영향이 크지만 무엇보다 참된 교회관이 빈곤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바르다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주지 못하고 사람들은 제각기 저 좋을 대로 생각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사 시대의 말기에 사람들이 바른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 제각기 저 좋은 대로 했다는 말씀처럼 다만 어떤 종교적인 형식을 꾸리면 교회가 되는 것으로 저 좋은 대로 생각하며 나아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의 교회관은 몇 사람이 모여서 예배라는 형식을 취해 버리면 그것이 교회이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교회를 세운다고 난리법석입니다.

 

교회의 요소는 본질적인 것도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실적으로 형식적인 요소가 가미된 것부터 찾아 반성해야 합니다. 교회가 적어도 본질적인 부분에서 필요한 조건들을 간직하지 못하고 있으면 그 교회에는 구원의 사실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필요한 조건들을 간직하여 못한 교회가 구원의 사실이 아니라고 확실히 분간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그런 것이 없다면 참으로 세례를 주어야 할 자와 세례를 주지 아니할 자를 분간하지 못하는 것이고, 또 징계를 할 자와 징계를 하지 아니할 자를 분간하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교회는 바른 교회란 무엇인가를 늘 찾으면서 그러기를 힘쓰고 나타내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자라는 대로 차례차례 교회의 확실한 자태를 형성하겠지만 그것도 하나하나 다 근거 있게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근거 없이 남이 그러니까 나도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이 세대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형식이나 우리의 활동하는 것이나 우리의 방향이나 우리의 노선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증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 배교의 도도한 물결이 막 창수와 같이 휩쓰는 때에 튼튼히 서 있는 반석 위에 세운 교회가 되려면 반드시 쥐고 있어야 할 것들을 쥐고 있어야 합니다.

 

2. 교회의 형식상 조건들

지금까지 형식적인 점을 이야기 할 때 참된 교회가 형식상 교회와 교회 아닌 것을 나눌 때에 신학상 적어도 세 가지 요소를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고, 진실하게 전한다는 것뿐 아니라 설교해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강단을 요하는 것이고, 말씀의 사자를 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단에서는 말씀이 정당하게 가르쳐지고 해명되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에게 주어진 사명 중에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둘러싸고 있어야 할 요소들이 결핍되어 있다면 몇 사람이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 해도 당장에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정당하게 가르쳐지고 해명 되어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모든 가정에서 다 때를 따라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회를 하지만 모든 경우 그 하나하나를 다 교회라고 하지 않습니다. 가정이면 그저 가정일 뿐입니다.

 

형식상 교회와 교회가 아닌 것을 나눌 때의 둘째의 기준은 말씀을 보이는 형식으로 제공하는 성례전이 있습니다. 보이는 형식으로 제공하려니까 받는 사람이 있고 주는 사람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서 교회에 전달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성례전을 집행할 때 반드시 그 일을 위하여 준비하고 훈련된 사람, 하나님이 불러내신 사람이 서서 집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일반 성도 아무라도 일어나서 할 수 있게 만들지를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의 요소라는 것을 형식상으로도 확립해 놓은 것입니다. 성례를 집행할 때 교회적인 행사로, 교회적인 권위로, 또 교회적인 권위를 스스로 체현할 수 있는 권위자가 늘 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례를 집행할 때에는 사석에서 몇 사람이 앉아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교회적인 의미를 가진 집회를 열어서 그것을 행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형식상 교회와 교회가 아닌 것을 나눌 때의 셋째의 기준은 권징을 신실히 행하느냐에 있습니다. 권징을 희미하게 생각하여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순결을 위해서 반드시 시행해야 합니다. 불순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여 가지고 점점 혼탁하게 하는 악한 요소에 대해서는 권위 있게 지적하여 회개할 수 있게 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다시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하나님 앞에 거룩한 교통을 할 수 있는 자로 회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순결을 늘 보존하기 위해서 엄격하게 행정적인 조치, 법적인 조치를 정당하게 행하여야 합니다.

 

참된 교회와 교회가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이 세 가지는 권위를 공동으로 승인하고 그런 권위 하에 있어야만 교회가 교회로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이런 점이 심히 해이해졌습니다. 이런저런 것 구애받지 않고 절제 없이, 제도 없이 모여서 자기가 시작했다고 거기의 무슨 책임자인 양 떠들어대는 일들을 우리는 많이 보았습니다. 심지어 그것을 이권의 미끼로 삼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고서도 교회라는 이름을 가진다면 그것이 참 교회의 이름을 왜곡시키는 일이 아니겠는가를 심각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일이 허다한 시대에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를 교회로 세우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른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실증하고 살아갈 것인가를 모두가 깊이 새겨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바를 증거 하기 위해 함께 서가야 합니다. 사람이 많고 적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원래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바로 깨닫는 사람의 수라는 것이 다수가 아니고 소수입니다. 그러나 소수이면 소수인 만큼 하나님의 말씀과 그 거룩한 뜻을 바로 깨달았다는 본의가 있어야 합니다. 수도 적은데 깨달은 사람들마저 적다면 그것은 참으로 모두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같이 적은 수이면 각 개인이 힘써서 하나님 말씀의 거룩한 뜻을 깨닫도록 더욱 주의해야 하고 마음을 일치시켜서 하나로 굳게 서야 합니다. 같은 각성 아래 같은 선 위에 서서 동일한 방향을 향해서 걷도록 노력하는 것이 정당한 일이지, 마치 대교회와 같이 어떤 사람은 저리로 가고 어떤 사람은 이리로 가고, 어떤 사람은 너무 뒤처지고 어떤 사람은 앞서 가고 하면 좋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교회에서 봉사하고 주님의 은혜 가운데서 방성해 왔으면 이제는 대개 동일한 위치에 서서 거룩한 목표를 향해서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의 본질적인 사실들을 알아야 하고 믿는 사람의 도덕적인 성격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먼저 도덕적인 성격상 큰 결합들을 늘 반성하고 그런 것들을 다 고치고 좀 더 그리스도인다운 정신과 심정을 가지고 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세월이 많이 흐르더라도 언제까지든지 자기의 잘못을 고치지 않아서 때를 따라서 갑자기 이 세상 사람의 심정과 행습들이 나타나는 것이 대단히 부끄러운 것인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3. 교회에 대한 표상적인 가르침

이제 좀 더 본질적인 문제로 들어가서 교회란 무엇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이 가르친바 교회란 무엇인가를 형식적인 면에서가 아니고 그 본질, 지니고 있는 속성들을 가지고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성경은 여러 가지 수사학적 양식을 써서 교회에 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비유를 베풀 때에 표상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표상들을 사용해 가지고 우리에게 교회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말할 때 그리스도 이전에 있던 교회를 가리킬 때 구약의 교회란 말로도 쓰고 구약의 오이코노미아라고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충만한 계시로서 임하시사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교회의 내용이, 물론 과거에 있던 교회와는 다른 전연 새로운 실체는 아닙니다. 신약의 교회는 구약의 교회를 계승하는 것이지만 계시 발전의 역사로 볼 때 그리스도 당신이 계시가 되신 까닭에 신약 교회에서는 좀 더 충만한 계시로 본질적인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과거의 많은 표상 그리고 손으로 잡을 수 있고 접촉할 수 있는 물질적인 사실로써 보이시던 여러 가지 현상을 이제 신약 교회에서는 좀 더 심오하고 좀 더 본질적이며 신령적인 내용으로써 보이십니다. 그러나 그 신령한 내용을 얼른 파악하기가 쉬운 것이 아니므로 다시 어떤 표상을 써서 깨달으라고 설명하십니다.

 

그런 것을 과거의 개혁교회가 신학상 네 가지로 나누어서 가르쳤습니다. 여러 가지 말이 성경에 나오지만 {가장 종합적으로 중요하게 쓰는 표상은 네 가지}입니다.

첫째는 교회를 무엇에 비교해서 가르쳤느고 하니 이라, ‘신체라 하는 말로 가르쳤습니다. 그냥 아무의 몸이라 하지 않고 특별히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신체라는 말로 표시하였습니다.

 

둘째로 교회에 대한 표상은 성전이다, 혹은 하나님의 집이다 하는 표상입니다. 집이나 성전을 보면 그것이 무엇인 줄 알 수 있는 것인데 그런 사실에서 교회란 어떠한 참된 의미를 가졌는가를 추리해 나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셋째로 교회에 대한 표상에 대해 하늘에 예루살렘혹은 새 예루살렘이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보다는 훨씬 직감적으로 예루살렘의 의미를 심오하게 아는 사람들입니다. 시편에 보면 허다히 많이 시온 혹은 예루살렘을 향해서 노래를 불렀던 사실이 나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향해서 항상 자기 마음을 기울였던 것인데 특히 다니엘 같은 사람은 예루살렘 있는 쪽을 향해서 문을 열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예루살렘은 마음의 고향이란 중요한 사실로 그 사람들에게 구상화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루살렘이지만 저 팔레스타인 땅에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하늘의 예루살렘이다, 혹은 새 예루살렘이다 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넷째로 교회에 대한 표상에 대해 진리의 기둥과 그 좌대혹은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했습니다.

 

교회라는 것을 이러한 표상들로 바로 깨달아 가르쳤으면 우리는 결론적인 용어만 몇 마디 써서 교회는 이것이다 하고 말하기보다 왜 하필 그 표상을 쓰셨느냐 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하나 주의해서 배우는 것이 옳습니다.

 

4. 표상적인 표현을 해석할 때 주의할 점

풍유란 것은 어떤 이야기를 쓸 때에 다소 자연성이 떨어지고 무리가 가는 보조 관념을 써서라고 그 실체의 내용을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풍유를 보면 짐승이 사람의 말을 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추상적인 관념, 가령 진리, 사랑, 은혜의 구원, 나태함 등 선덕이든 악덕이든 그런 추상적인 덕성을 하나의 인격체로 만들어 쓰는 것이 풍유 곧 알레고리입니다.

 

그런데 만일 어떤 비유를 비유로 생각하지 않고 풍유로 해석하면, 그 표상이 나타내려고 하는 진리는 파악하지 못하고 표상이 의도하지 않고 그 표상에서 빼내려 하지 않는 허다한 다른 속성들을 빼서 쓰기가 쉽습니다.

 

예를 든다면 씨 뿌리는 비유를 들 수 있겠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는 씨가 무엇인지가 중요합니다. 만일 씨라는 게 뭐냐? 씨는 자체 안에 생명력이 있어서 땅에 심으면 그 생명이 발휘되어 나간다. 그처럼 하나님 말씀은 자체 안에 생명력이 있어서 그것이 사람의 속에 들어가면 반드시 생명의 작동을 한다고 해석하면 그것은 절대로 정당한 해석이 아닙니다. 참된 교회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관이 아닙니다.

 

참된 교회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는 말씀 자체에 생명력이 있어서 그게 어디에 들어가든지 반드시 그 속에서 역사해서 무슨 작용을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복음의 말씀이 누구한테든 들어가기만 하면 반드시 다 예수 믿는다고 해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님이 말씀과 함께 역사할 때 비로소 하나님 말씀으로서 권위를 나타냅니다. 어디 씨가 그런가? 씨가 무슨 특별한 외부의 작용이 있어야만 씨로서 생명력을 발휘하는가라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많은 표상적인 표현을 해석할 때 엉뚱한 말을 갖다 붙이지는 않았지만, 그 표상 안에서 뽑아낼 수 있다고 해서 자꾸 갖다가 붙이고 또 붙이고 하면 그것이 풍유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는 무엇을 표현하려고 했는가를 바로 파악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표현의 한계는 어디며 그 이상을 갖다 붙이면 안 된다는 것을 늘 주의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표현을 성경에서 읽거나 들을 때에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를 말하려다가 구구하게 장황한 설명을 하였습니다. 여러분들도 성경을 읽으시면서 그런 말씀이 나올 때에 엉뚱하게 무엇을 갖다 붙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옛날에 그렇게 엉뚱하게 둘러맞추는 이들의 강해를 여러 번 들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전연 그 본문에서 말하려고 하지 않은 딴 것을 자꾸 이야기하다가 저 바깥으로 흘러가 버리고 심지어 그것을 가지고 이상한 활동을 하는 일도 발생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에 우리 마음대로 이렇거니 하고 추상하고 짐작하면 안 됩니다. 성경의 보증, 성경이 그것을 보증해 주는 사실이 없다면 독단을 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성경에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그 몸이라는 말을 쓰기 전후에 항상 몸이라고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지시해 나갔습니다. 아 과연 그렇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말을 써서 지시해 나갔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것들을 특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한 표상에 들어 있는 어떤 현저한 속성이라도 어느 때는 성경의 보증이 없는 경우가 생기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을 갖고 제멋대로 해석을 많이 합니다. 아마 요새같이 냉장고가 모두 있는 세대 같으면 그런 해석을 덜 했을지도 모릅니다. 냉장고가 많이 없던 시대에 생선을 사든지 하면 여름날 썩지 쉬우니까 얼른 소금을 쳐서 젓을 담습니다. 소금을 쳐 놓으면 간은 들어도 썩지는 않거든요. 말하자면 거기서 소금의 역할은 방부제인데 얼음을 넣어서 썩지 않게 만드는 것과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소금이 들어가서 간이 배어서 맛이 변해 버리니까요. 지금 이 경우 소금의 더 우선적인 중요한 작용은 맛입니다. 그런데도 맛 이야기는 어디로 가고 방부제 역할을 하는 이야기를 자꾸 합니다. 적어도 맛과 꼭 같은 비중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방부제 노릇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라 했으니 세상에 들어가서 세상이 썩는데 대해서 소금 노릇을 하는 방부제가 되어야 합니다. 방부제가 되려면 소금이 스스로 녹아야하니까 우리도 자기희생을 해서 방부제가 됩시다하고 합니다. 아마 여러분도 이런 설교를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 강해가 정당합니까? 만일 그렇게 성경을 해석하면 아무것이라도 다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하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빛이라 할 때 가령 촛불을 켜 놓으면 초가 자꾸 닳아 가면서 빚는 내는 것이 아니냐? 그처럼 자기희생이 계속되어야만 빛이 더 밝아지는 것이다라고 엉뚱한데다가 자기희생을 요구하는 일이 많습니다. 이런 것들을 주의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5. 한 몸과 많은 지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에 그 앞뒤에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을 왜 썼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 로마서 12:4절을 보더라도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해서 몸과 지체의 애기를 맨 먼저 시작했습니다.

 

이 말에 주의하십시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 4절 한 마디에 당장에 몸이라는 말을 무엇으로 먼저 해석을 해야 하고 생각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두 가지가 여기에 나타납니다. 한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으니까 지체와 몸의 관계에서 몸이라는 말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는 것처럼 교회도 지체가 있으나 한 몸이다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그러고 나서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은 아니니}했는데 이것이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한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다. 그 많은 부분들이 모두 동일한 역사를 몇 배로 하고 있다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한 몸에 많은 부분 곧 지체가 있지만 지체는 다 같은 일들을 하는 게 아니다, 다 각 A, B, C, D, E의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점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합니다.

 

결국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있고, 그 다음에 서로가 지체라는 것이며, 그 지체란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을 설명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지체는 각각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성문교회 성도님들 중에 예언하는 은사가 있는 사람은 예언하는 일을 해야 하고, 섬기는 은사가 있는 사람은 섬기는 일로써 한 몸의 지체로서 자기 직분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가르치는 자라면 그 사람은 가르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권위 하는 자이면 권고하고 위로하는 일을 할 것이고, 구제하는 자는 성실하게 또 그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또 교회의 치리자로 임명을 받아서 교회 일을 돌아볼 때는 그냥 게을러 가지고 자기가 시간이 있고 여유가 있으면 조금씩 하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체들 각각이 자기가 받은 은사의 부분을 정당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할 것이고, 긍휼을 베푸는 자 즉 특별히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마지못해 부대껴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모습이 결과에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사랑의 일인데, 이런 사랑을 행할 때 거짓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외면만 부드러운 체하고 속으로는 항상 이심을 품는 짓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중적인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은 악한 일이니 너희들은 항상 성품상으로도 악을 미워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체로서 자기 직분을 하려면 이런 도덕적인 위치, 그의 차원과 성품이 바로 서야 하는 것입니다. 성품은 어떻든지 덮어놓고 지체의 일만 하면 되느냐 하면 교회 일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각각 지체로서 자기 본분을 다한다는 것은 일을 많이 해서 쌓아놓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성격을 구성하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몸이라는 말부터 썼습니다. 지체이면 먼저 도덕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데 그런 것이 없이 덮어놓고 일을 종합하면 무엇이 되는 것같이 생각하는 게 큰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사랑이란 말을 턱 내놓았습니다. 단번에 종합적인 도덕으로서의 사랑을 하되 거짓 없이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속성, 품성은 선인데 악을 미워하고 그 선에 속하라 하였습니다. 또 형제를 사랑하되 사랑을 할 때에는 개인 개인 그 인격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지체의 일만 하면 저절로 사랑이 다 되는 줄로 알지 말고, 네가 한 교회 안에서 서로 형제라고 부르는 사람에 대하여 내가 구체적으로 진정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가, 그러지 아니하고 그냥 껍데기만 도장하고 살아가는가를 마음 가운데 반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다운 도덕적인 품성이 정상적으로 자라가야 교회의 질도 바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종교 단체의 하나로 모여서 떠들기만 하고, 무슨 종교적인 일을 한다고 왔다 갔다 해 보아도 교회로서의 성격을 제대로 나타내거나 발전시키는 게 아닙니다. 덩치만 큰 사람, 몸뚱이가 굉장히 큰 사람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렇게 아주 큰 거인이면 그가 위대한 사람입니까? 그럴 턱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이는 먹어서 한 스무 살 먹은 만큼 키는 엄부렁하지만 속은 열 살 먹은 아이 정도라면 그를 가리켜 충분한 사람, 넉넉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형식을 꾸미고 종교 단체로서 필요한 모든 면모를 꾸며 놓았으나 그 속에 본질이 아주 빈곤하면 교회로서 무슨 의미를 가지겠는가? 그런데 에서 어떻게 교회의 샘플을 보겠느냐 그것입니다. 그것은 몸뚱이만 큰 사람에게서 정상한 사람의 샘플을 못 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교회를 조직하면 그것을 모두 교회의 샘풀인 것같이 생각합니다. 그런 발상법이 정당한가? 그러고서도 교회가 바로 지도되겠는가? 이런 것이 너무 횡행하는 까닭에 오늘날 세상의 타락은 더 심합니다. 이것을 주의하자는 것입니다.

 

그런즉 오늘 우리들은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아주 좀 더 구체적인 말로 자꾸 들어가야 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막연하게 범범하게 하지만 말고 서로 만나면 우애를 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서로 우애하고 또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며, 그러려면 마음 가운데 존경이 있어야지 남을 깔보고 미워하고 자기 자랑을 하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을 형성하는 요소들입니다.

 

교회를 형성하는 지체로서의 능력을 나타낼 때에 그 저변에 있어야 할 개인 개인의 도덕적인 성격을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이 주님을 섬길 때 부지런히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일에만 몰두해 가지고 소홀히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어서 주를 섬겨야 합니다. 이것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 할 때에, 첫째 이 몸에서 우리가 배운 것은 한 몸에 여러 지체가 있고, 그 지체는 각각 다 다른 일을 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한 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 말을 쓰셨을 때 필연적으로 당연한 공리로서 알아들어야 할 것은, 그 한 몸이 동일한 명령 계통 안에서 같은 힘을 공급받아서 일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명령하는 본위가 없이 제멋대로 움직여 나간다면 어떻게 지체들이 조화 있는 임무를 이루겠느냐 하는 애기입니다. 지체란 말을 썼을 때에는 거기에 충분한 하모니를 상정하고 하는 말입니다. 손을 손대로 제 할 일을 하려하고 발은 발대로 제 길을 가겠다고 제각기 고집한다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동일한 목적의식과 동일한 생명 안에서 늘 조화롭게 움직여야 합니다.

 

6. 거룩한 교회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도덕적인 성격, 신령한 품성들을 지니고 있어야 함.

 

7. 참된 것을 구별하여 참 교회의 자태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함.

댓글 쓰기

목록 삭제
Copyright © 최용우 010-7162-3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