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궁극이 | 2022.04.26 16:28:16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요1:1-3
설교자
김경형목사
참고
궁극교회 주일예배

1장 1절-3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사람이 말을 하면 이 말은 공중으로 사라져 버린다. 영원히 가지 않는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사람이 그 말을 따라 일을 하게 된다. 인간도 임시적인 존재요 인간의 말도 임시적으로 끝나버리고 만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분이요, 이 분의 말씀도 당신과 함께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영원히 간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에서 유를 만들기도 하고, 이 말씀이 우리에게 와서 닿을 때는 우리를 하나님 당신처럼 만들어 놓는 살아 있는 말씀이다. 사람이 이 말씀을 영접을 하건 하지 않건 살아 있는 것을 만들어 낸다. 이 말씀은 당신의 인격이요 성품이요 당신에게 나오는 것이라서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효력성을 지니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 오시기 전에 하나님으로 계신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도성인신으로 이 땅에 오시기 전에는 그리스도로 계셨고, 이 그리스도가 성육신으로 오신 분이 예수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은 하나님 당신을 위한 ‘말씀’이냐, 우리의 구원을 깔고 하는 ‘말씀’이냐? 후자다. 태초부터 인간 나의 구원을 목적에 두고 계신 말씀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라고 한 이 말씀 속에 요:1:1에서부터 끝 장까지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게 다 들어 있고, 이걸 펼치면 예수님의 언행심사가 다 나온다.

 

창:에도 ‘태초’가 나오는데, 창:의 태초는 시간의 시작, 물질창조의 시작을 말한다. 요:의 ‘태초’는 시간과 물질의 시작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이 이전인 하나님의 의지세계, 즉 하나님의 마음중심에서 시작된 정신활동의 시작을 말한다. 즉 행동을 하기 전에, 뭐가 나타나기 전에 인간의 표현으로 ‘척’ 하고 마음을 먹는 것을 말한다. 이걸 인간의 말로는 정확하게 표현하기가 어렵다. 사람의 말로 표현을 한다면 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에 무엇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는 거다. 그러면 마음을 먹는다는 게 뭘 말하는 거냐? 결심과 각오를 했다는 표현이다.

 

‘너는 내 마음 속에 있다’ 라고 할 때 어떻게 상대의 존재 자체가 내 마음 속에 들어오느냐?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은 뭘 표현하는 거냐? 자기가 상대를 사랑한다는 마음을 표현하는 거다. 도시에서 공부를 하는 아들이 농촌에서 일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마음 속에 담고 열심히 공부를 한다고 할 때 어떻게 부모를 자기 마음에 담느냐? 실질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부모를 사랑하고 염려하는 자식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는 거다.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무슨 뜻을 전하고 사라지는 사람의 말소리가 아니라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계신 바로 그 분, 미래에 무엇을 잔뜩 이루실 생명적 영생적으로 알파와 오메가이시고, 영원부터 영원까지 인격적 실상적 근원자이신 이 분을 말한다. 원문에서는 이 말씀이 ‘로고스’인데, 이건 인격성을 말한다. 그러니까 생명적 인격적 실상적 존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 아버지를 보았거늘’ 이라고 한 거다.

 

‘말씀이 계시니라’고 하는 게 꼭 말씀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되어 있지만 사람은 눈으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도 있고, 마음으로 느끼는 것도 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무슨 색깔이며,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느끼는 것도 있다. 이런 인간 자기요, 인격자 자기다.

 

세상에 무인격적 무생명적 무감각적 무활동적 존재가 있느냐? 있다. 세상에 이런 존재가 있기는 한데 인간의 입장에서 이런 것을 생각해 보면 무슨 재미로 존재할까? 바위가 무슨 재미로 존재할까? 세상에 왜 이런 존재를 만들어 놓으신 걸까?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왜 만물을 보게 하는 걸까? 보고 듣고 오각과 오감적으로 구원도리를 깨닫고, 창조자를 깨달으라는 거다. 그런데 이 면에 굉장히 둔감한 사람이 있다. 다시 말하면 멋없이 사는 사람이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은 금방 알아차리면서도 생각이 깊지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오감의 오감성이 민감한 것도 아니고, 그냥 먹고 잠자고 멋없이 사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인격적으로 멋있게 다듬어져야 한다.

 

세상에는 인격적 생명적 감각적 활동적 존재도 있다. 이게 바로 인간 나다. 크고 작은 사건을 만들 줄도 알고, 느낄 줄도 알고, 자기 생각 속에 있는 것을 창출해 내기도 한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이 맨 사람을 치고받고 죽이는 게임을 즐겨하던데, 어려서부터 이런 걸 보고 자란 아이가 커서 무엇이 될까? 사람은 자기 속에 들어 있는 것을 몸으로 표현해내게 되는데, 어려서부터 폭력적인 것을 접하고 살면 인격이나 도덕성이 뭐가 될까? 오늘날 피부와 골각과 조직체와 오장육부는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닌 사람이 참 많다.

 

세상에는 ‘내가 제일이다’ 하는 걸로 자기의 존재가치를 삼는 자가 많다. 인간이 인간창조의 목적에서 벗어나 세상의 이익만 쫓아 산다면 무슨 맛으로 살까? 인간의 존재가치는 성경으로 통해 나오는 거다. 성경을 통해 사람의 존재가치를 아는 자가 존귀 영광스러워지는 존재요, 많은 사람의 머리가 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태초에 그리스도가 그냥 바위처럼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창조의 시작과 섭리, 그리고 세상을 마감 짓는 창조자라는 뜻이다. 이 말씀 뒤로 이 사실이 죽 나온다. 특별히 강조를 해서 ‘말씀’이 태초에 계셨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어떤 활동 이전에 생명적으로 영원한 실상적 존재라는 것을 말한다.

 

이 분이 인간 나를 만드셨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원형이시요, 이 분으로 지음 받은 나는 모형이다. 여기서 인간이 사는 이유가 분명해진다. 무슨 목적으로 살아야 하는지가 분명해진다. 안 믿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해도 돈 많이 벌어서 부자로 사는 게 목적이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왜 예수를 믿고, 왜 성경을 배우고 깨닫는 거냐? 그 이유가 뭐냐?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을 만드심은 당신께서 누리시는 천국을 우리와 함께 누리기 위해서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께서 누리시는 그 나라를 하나님처럼 다스리고 누릴 수 있는 영능의 실력을 키우는 목적으로 살아야 한다. 예수 믿는 게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목적이라면 만능의 능력자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을 부자로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에 소원을 두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우리가 이 분의 말씀을 따라 살면 하나님의 성품을 덧입게 되지만 세상을 소원 목적하며 살면 평생 예수를 믿어도 헛 믿는 거다. 예수를 믿고 성경을 배우고 깨닫는다면 자기의 존귀 영광이 실상적으로 되는 그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는 게 분명히 나와야 한다. 이를 위해 세상에 살면서 말씀을 한 이치 두 이치 깨달아 가면서 말씀을 따라 살면 참 인격의 실상자로 만들어진다. 이렇게 되면 가치판단 평가성도 분명해지고, 영의 눈이 밝아지고, 영의 귀가 열리고, 자기 속이 그리스도성으로 인격화 되고, 인격화 된 것이 자기의 지혜지식이 되고, 이러면 자타의 이룰구원의 삶이 된다. 이렇게 예수를 믿으면 궁극적 결과에 가서 반드시 이에 따른 보상이 주어진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 곧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분리가 될 수 없다고 한다. 이것을 비유를 한다면 현실에서 자기의 생각과 마음을 두부를 쪼개듯이 몸과 분리해 낼 수 있느냐? 자기 마음이 살아 있는 자기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데 이 마음을 자기 몸에서 떼어 놓고 ‘이건 내가 아니다’ 라고 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빼놓고 ‘이건 내가 아니다’ 라고 할 수 있느냐? 그러니까 말씀과 하나님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고, 이 분이 하나님이시고, 예수님과 하나님을 둘로 나눌 수 없는 거다. 즉 동격이요, 동질이요, 본질적으로 하나요, 동일한 의사요, 한 의사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라고 하고서 왜 이 앞에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라고 하는 거냐?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아버지께서 일을 하시니 나도 일을 한다’ 라고 하셨듯이 태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로고스, 즉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거다. 다시 말하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라고 한 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의 언행심사를 통해 하나님의 뜻, 곧 우리의 구원을 나타내시고,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나타내셨으니 우리는 이걸 깨달아야 한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증거가 뭐냐? 쉽게 말해서 자식이 아버지를 사랑한다면 그 증거가 뭐냐? 부모의 말씀에 순종이 증거다. 사랑치 않으면 순종이 안 나온다. 같은 이치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한다. 이걸 깨닫게 하느라고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라고 하는 거다. 그래서 이 말씀을 파헤치면 엄청난 구원도리가 쏟아진다.

 

2절: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가’가 누구냐? 예수 그리스도다.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살아계시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말씀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인간 되어 이 땅에 오실 때 인간의 말로 하나님의 마음 속에 있는 인간구원에 관한 것을 다 가지고 오셨다고 봐도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알맹이를 예수님이 다 가지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지금 하나님에게는 껍데기만 있느냐? 그게 아니다. 하나님의 것은 다함이 없다. 그래서 우리가 본질의 말씀의 이치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주님을 바로 깨달으면 바위 속에서 샘물이 계속 흘러나오듯이 주님에게서 우리의 구원도리와 이치가 무한히 나오게 된다.

 

3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영적 신령적 존재, 물질계 안의 유형적 무형적 존재, 공중과 바다와 육지의 각 종류의 성질과, 숫자적으로 상호 관계적, 생태계적, 시간적 환경적 계절적으로, 수명적 물질 이치적으로 다 그로 말미암아 지어졌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주님에 비해 생각하는 게 너무나도 못 미치고, 너무나도 단순하고, 그래서 물질이치를 어기고 미련한 짓을 하다가 생명에 해를 받기도 한다.

 

창:에 보면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시고 그것을 볼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했다. 그러면 무엇을 염두에 두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한 거냐?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을 보고 구원도리를 깨달을 게 무한이니 이 면을 놓고 볼 때 지으신 모든 것이 인간의 표현으로 인간구원에 필요한 것이 하나도 빠짐이 없이 다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신 거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하신 것은 세상만물을 우리의 이룰구원에 이용 사용 활용물로 만족하게 지으셨다는 의미다. 그런데 안 믿는 사람들은 이 구원을 모르니 물질을 재워놓고 쌓아놓고 감춰놓고 사는 거다. 이건 욕심이다. 이 욕심이 자기를 죽이는 날이 온다. 사람은 육신이 건강해도 정신이 병이 들었으면 이 사람은 병이 든 거다. 정신 사상 소원 목적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되어 있는 게 제일 건강하고 튼튼하고 고상하고 잘난 사람이다.

 

세상만물은 믿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깨달음에 있어서 부족한 것이 전혀 없다. 그래서 믿는 우리는 성경을 안경으로 쓰고 만물을 이용 사용 활용하면서 구원도리와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 만물을 보고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치를 깨닫지 못하면 이 사람은 미련해진다. 믿는 우리는 사람을 볼 때 성경을 기준해서 봐야지 안 믿는 사람의 기준으로 보면 안 된다. 인간의 삶의 가치를 물질에 두면 타락성이요, 믿는 사람이 이런 정신을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는 하나님을 팔아먹게 된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몸을 흙으로 만드셨다. 몸 안에 풀도 넣고, 인삼도 넣고, 돌도 넣어서 지은 게 아니라 순전히 흙으로 만드셨다. 사람을 인삼도 넣고 돌도 넣고 해서 짓지 않고 오로지 흙으로만 지었는데 이게 뭘 말해주는 거냐? 인간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살 자라는 거다.

 

하나님께서 세상만물을 우리의 이룰구원에 이용 사용 활용물로 지으셨으니 성경을 통해 깨달아서 만물을 자타의 구원에 잘 활용을 하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성품을 온전하게 닮을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자타가 기쁨이다. 저 사람이 나에게 기쁨을 주고, 내가 저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하면 얼마나 좋으냐? 그런데 세상은 서로가 슬픔을 준다. 이건 구원이 아니다.

 

안 믿는 사람들과 모든 이방종교는 물론이고 교회 안에서도 거짓된 신앙자들과 이단자들은 자기를 지은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없는 자로 살고 있다. 세상을 소원 목적하고 산다면 이 사람은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없이 사는 것이니 이는 결과적으로 무목적적으로 사는 거다. 사람이 창조의 목적대로 살면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의 이룰구원을 위해 이렇게도 저렇게도 역사를 하신다. 성경은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실상적인 역사의 손길을 가르쳐 준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댓글 쓰기

목록 삭제
Copyright © 최용우 010-7162-3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