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궁극이 | 2020.10.21 09:49:20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눅8:26-39
설교자
김경형목사
참고
궁극교회 주일예배

826-39: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이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이 사람을 붙잡으므로 저가 쇠사슬과 고랑에 매이어 지키웠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마침 거기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하신대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치던 자들이 그 된 것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촌에 고하니 사람들이 그 된 것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아래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귀신 들렸던 자의 어떻게 구원 받은 것을 본 자들이 저희에게 이르매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쌔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저를 보내시며 가라사대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 하시니 저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하신 것을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제자들은 풍랑을 경험하고 갈릴리 맞은편에 도착을 했는데 그곳은 거라사인의 땅이었다. 그러면 갈릴리 호수 가운데서 거센 풍랑을 만나서 배가 떠밀리다 보니 거라사인 땅에 도착된 것인가? 원래는 딴 곳으로 가려고 했는데 떠밀려서 도착한 곳이 거라사인의 땅인가? 그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으신 우리 인간의 구원목적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이냐? 후자다. 제발 성경대로 믿어라. 타락된 인간의 지식에 의해 세상을 산다고 해도 거기서 거기다. 하나님께서 잡아 쳐서 내려앉히면 꼼짝없이 당하는 거다.

 

그러면 주님이 당신의 예정된 구원의 시간에 딱 도착되어 있을까, 풍랑에 의해서 조금 시간이 지연이 됐을까? 그 시간에 정확하게 그곳에 도착을 했다. 그러나 제자들과 많은 인간들이 볼 때는 그렇게 생각을 못한다. 하나님의 주권섭리를 생각을 못한다. 예수 믿는 교인들 가운데도 그런 게 참 많다.

 

오늘 이 하루도 주님께서 동쪽에서 해를 띄워서 하늘공간을 지나서 서쪽으로 지는 맑은 날로 하려고 했는데 마귀가 입김을 불어서(입김에는 원래 서리 같은 게 있으니까) 비가 온 것이냐? 먼저 우리 기독자는 하나님의 주권섭리를 생각해야 한다. 시간 돌아가는 거, 하루가 돌아가는 거 주님의 창조 때 그 법칙 그대로 들어있다. 모든 만물이 그대로 돌아가고 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 자기의 지식이 들어서 술을 마시고 길을 가면서 전봇대에도 부딪히고 시궁창에도 빠지고 그 모양이다. 그러면서도 인간 자기는 완전하고 깨끗하고 정확하고 영리하고 똑똑하고 제 잘난 맛으로 세상을 살고 있다. 하나님의 주권섭리를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예수 믿으면서 말씀의 이치에서 바로 깨달아 자기 속에 하나님께서 정답을 내리시는 것과 같은 지식이 들어있으면 생활 속에서 자기의 지식 면이나 소원 목적 면이나 성격 성질 면에서도 그렇게 결정을 내리며 살게 된다. 그러면 별로 실수가 없다.

 

자기 마음이 이래볼까 저래볼까하며 마음이 흐렸다 밝았다 하며 자기 마음을 자기가 어쩌지 못하는 것은 마귀가 그러는 것이냐, 자기가 그러는 것이냐, 다른 사람이 그러는 것이냐? 자기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자기 마음속에서 정확한 것을 못 잡았기 때문에 흔들리는 거다. 뿌리가 있어서 흔들리면 그 자리에서 흔들리는 거지만 뿌리마저 없이 흔들리면 뽑히면서 야단법석이 난다.

 

집사 직을 받고서도, 이 진리를 수 년을 듣고서도 주일날 자기 마음을 정하지를 못하고 있다면 뿌리가 있는 거냐, 없는 거냐? 세상만사 일이 잘 돼야 교회에 나오는 거냐? 그건 소용없다. 그게 무슨 믿음이냐? 세상만사가 안 될수록 이 원인이 무엇인가?’ 하고 주님 앞에 묻고 잘못된 것 어그러진 것을 고치고 들어가면 정립이 돼 가는 거다. 그런데 세상에 딱 맞춰놓고 예수를 믿으려고 하고, ‘누가 안 도와주나?’ 하는 식이라면 그런 예수를 누가 못 믿겠느냐? 거기에 훈련 연단이라는 게 어디 있느냐? 주님의 말씀의 훈련연단이라는 게 어디 있느냐?

 

어린아이를 갓 낳아놓으면 일어나고 싶어서 엎어졌다 뒤집어졌다 한다. 일어나려고 하는 거다. 그건 참 좋은 현상이다. 그런데 날 때부터 열 살 스무 살이 되도록 가만히 있으면 희망이 있느냐? 자기의 신앙 믿음을 지혜롭게 생각을 하려면 어린아이들을 봐라. 목사나 집사나 기본자세도 전혀 안 돼 있으면서 예수 믿는 사람이 정말로 많다.

 

자기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붙잡아야 한다. 진리를 붙잡으면 풍랑 파도가 일어나도 자기 마음은 움직이지를 않는다. 우리교회에서 어릴 때부터 자란 사람은 그런 일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이상한 교회에 다니다가 온 사람 중에는 도대체 어느 목사가 저런 버릇을 그대로 보고 있었느냐하는 게 있다. 그 성격 그 성질 못 고치면 그대로 죽는 거다. ‘네 성격 성질 때문에 네가 고생을 많이 해야 되겠다.’

 

사는 것은 자기가 사는 거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우리 입장에서는 모든 면에서, 지식이나 지혜나 도덕성적으로 사람이 바로 서면 세상살이가 그렇게 힘들지 않다. 무난하다. 신앙 믿음이 올라가면서 세상바람을 그렇게 타지를 않는다.

 

잔잔한 바다보다 풍랑 파도를 타고 나와야 신이 나고 재미가 있는 거다. 자기가 좋은 밥을 먹고, 좋은 입을 가지고 찬송을 부르는 것이 하나님 앞에 자기 마음에 기쁨이 오는 거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으면 기쁨이 솟아오르느냐? 어린아이들이 자라면서 노래 부르고 춤추고 하니까 굉장히 귀엽다. 그 가정에 웃음이 돈다. 그런데 어린아이가 움직일 줄을 모르고 가만히 있고, 먹여도 잘 못 먹고 하면 그 가정에 큰 근심이다. 예수 믿는 것을 모르거든 사람 사는 생태를 보고 좀 배워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을 온전케 하려고 안 가시는 곳이 없다. 하나님의 역사는 안 가시는 곳이 없다. 그러니까 거라사인의 땅의 그 지역 그 지방에도 구원목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있었다. 성경에 내용적으로 보면 그 윤곽이 떠오르느냐? 가다가 보니 어떤 사람을 만난 것이냐, 그 사람을 구원시키려고 가는 것이냐? 후자다.

 

우리가 설날이나 추석날에 친구 집이나 친척 집이나 부모형제 집이나 갈 때 구원 때문에 가느냐? 구원시키려고 가는 것이냐? 그렇다면 부지런히 가라. 그런데 자기 집 식구들은 말을 안 듣는다. 예수님이 말을 해 놨다. 네 고향사람들은 네 말을 안 듣는다. 그런 경우 다른 사람을 데리고 가든지 하라. 괜히 놀고 싶어서 가면서 구원목적으로 간다고 하지 말아라. 자기 집 식구들은 말씀은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인정정실로 자꾸 가지 마라. 가지 말라하며 끌어당긴다. 그 당장에는 미움을 조금 받아도 그런 데서 탈출을 해야 한다.

 

또 그런 사람들과 계속 연결해봐야 덕 되는 것이 없다. 왜 그러냐? 안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일가친척이나 안 믿는 부모형제들과 친하게 해 놓으면 덕이 되는 게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나면 안 봐줄 수가 없지, 시집장가를 가면 안 내려갈 수가 없지. 결국 인정정실이 끈끈해져서 그게 잘 안 떨어진다. 고민이 많다.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서 보니 귀신들린 자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분명한 목적을 두고 그곳에 가신 것이다. 그러면 가실 바에야 풍랑의 고생이 없이 올 수도 있지 않은가? 어떤 목적지에 갈 바에야 풍랑이 안 일어나게 잔잔케 만들어 놓고 갈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게 안 되는 이유는 당신에게 그런 게 필요해서가 아니라, 예수 당신은 잔잔한 바다이던 풍랑을 치는 바다이던 상관이 없다. 그런데 풍랑을 일게 해서 가게 하는 것은 제자들 때문이다. 제자들을 깨닫게 해 주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첫째는 하나님께서 인간 즉, 제자들에게 오심을 알게 하심이 들어있고, 두 번째는 말씀순종에는 풍랑 파도가 일어도 하나님께서 같이 하신다는 것이 들어있고, 세 번째는 예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즉, 너를 위해서 역사를 하신다는 것이 들어있고, 네 번째는 제자들이 훈련 연단을 받아서 깨닫고 훗날에 사도가 될 것이니 사도로 보내려는 역사가 그 안에 함축되어 있다.

 

그래서 나도 부족하지만 우리교인들에게 가르치는 거나 목사님들에게 가르치는 거나 똑같다. 그건 왜 그러냐? 여기에 계시지만 이 안에서 장차 앞으로 커서 종이 몇 명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걸 염두에 두고 이렇게 하는 거다. 걸핏하면 안 나오거나, 게으름을 피거나, 들쑥날쑥하는 사람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니다. 예수를 믿으려면 따라가야지.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오너라했지 너 어디 갈 거냐? 내가 따라갈께그랬느냐? 그래서 말씀 속에는 그만큼 주님의 역사가 많은 만큼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준비시켜 쓰실 것이다. 나는 그런 마음을 갖고 한다.

 

아무리 젊은이들이 목사가 되겠다하며 배운다고 해도 그건 안 된다. 콩가루가 묻혀지듯이 진리에 의해서 진리가 그 사람에게 묻혀져 들어가야 한다. 진리의 사람이 돼서 모든 면에서 들어가야 한다.

 

사람이 살다보면 올라갔다 내려갔다 여러 가지 사건을 겪을 터인데 그냥 목사가 돼서 해외나 다니고 편안히 지내고 축복이나 받고 그건 틀려먹었다. 그런 사람에게는 속으로 네가 고생을 많애 해야 되겠다한다. 그러나 말씀에 수종들면서 순종하면서 따라오는 사람은 오르락내리락해도 얼마든지 그것을 헤치고 나갈 수 있는 정신력 지혜력 도덕성이 다 구비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진리 길을 계속 가게 된다.

 

잘 믿던 못 믿던 어차피 풍랑 파도는 만나기 마련이다. 우리교회 사람들은 예수 믿어 부자 되고 어쩌고하는 것은 때려치워라. 그러려면 딴 교회로 가라. 그건 사람이 안 된다. 하나님 앞에 자기 마음을 비추어서 바로 잡아야 한다. 그래야 자기에게 복이다. 사건이 와서 어려움을 겪는 것도 힘든 일인데 왜 자기가 삐딱한 마음을 가지고 가면서 얻어맞느냐? 마음을 못 고쳐서 왜 얻어맞느냐? 참 어리석다.

 

27: 예수님이 육지에 턱 내리니 예수님은 능력이 많은 분이니까 그 도시의 시장이나 읍장이 꽃다발을 들고 와서 환영인사를 했느냐? 육지에 내리니까 마치 기다리고 있었듯이 미친 사람 하나가 나와 있었다. 옷도 안 입고, 머리는 짐승처럼 길어있고, 수염도 길고, 손톱 발톱은 독수리 발처럼 길고, 피부는 햇볕에 그을렸고. 그런 사람은 그의 집에서 들어오라고 안 할 것이고, 그래서 무덤 사이에서 늘 사는 사람이다.

 

무덤은 어떤 곳이냐? 무덤은 죽은 것만 들어간다. 무덤은 생명 없는 자가 들어가고, 무덤은 목숨이 끊어진 자만 들어가고, 무덤은 활동하기 싫은 자만 들어가고, 무덤은 숨 쉬기 싫은 자만 들어가고, 무덤은 밥 먹기 싫은 자만 들어가고, 무덤은 썩는 일만 하는 곳이고, 완전히 썩어져서 흙으로 사라지는 곳이 무덤이다. 날이 갈수록 썩고 남는 것은 그 무덤 앞에 기념비만 남는다. 비석이 기념비다. 그 기념비도 잠깐이다. 비석 즉, 기념비도 오래 되면 비바람에 깎이고 넘어져서 이리저리 뒹굴다가 깨어지고 묻혀지기 마련이다. 이 지구가 없어지는 날 세상에 속하고 땅에 속하고 임시성에 속하고 물질성에 속하는 것은 다 없어지고 만다.

 

공동묘지에서는 생산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건설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공동묘지는 별의 별 죽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인데 기술자도 죽고, 장사꾼도 죽고, 사무 보는 사람도 죽고, 애고 어른이고 죽고, 차를 운전하는 사람도 죽고, 비행기를 운전하는 사람도 죽는다. 그래서 공동묘지에 밤에 가서 보면 배추를 팔다가 죽은 사람이 일어나서 배추 한 포기가 얼마요하더냐? 또 집을 짓다가 죽은 사람이 망치 가지고 오너라하며 집을 짓는 걸 봤느냐? 가만히 보면 살아있을 때는 생산적이었는데 죽어서 그런 사람들이 다 모였는데 한 명도 일을 하는 사람이 없다.

 

이걸 잘 생각을 하라. 신앙 면에서 죽어 있느냐? 너는 아무 것도 못한다. 너는 생산이 없다. 우리가 영의 눈으로 보면 교인은 엄청나게 많은데 성령님은 안 계시고 귀신들이 날뛰는 것이 있다. 교인이라면 성전이니 성전이라면 말씀의 이치로 너와 내가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으로 맞춰 가면 영적 성전이 되는 것인데 그 일이 없으니 그 곳은 죽었다, 그 교회의 하나님은 죽었다. 너의 하나님은 죽었다.

 

그런데 귀신들린 자가 왜 무덤과 무덤 사이에서 사느냐? 무덤은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곳인데 살아있는 사람이 왜 죽은 송장 사이에서 사느냐? 더럽고 악한 군대귀신이 들려서이다. 그런 곳에 사는 사람의 정신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 곳을 좋아하고, 그런 집회를 좋아하고. 이 사람은 귀신이 들렸구나. 당장 안다. 성경의 예언 방언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귀신이 들린 악령이 들린 예언 방언은 엉터리다.

 

더럽고 악한 귀신이 들린 이 사람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아침점호를 한다고 무덤을 향해서 명령을 한다. 높은 무덤에 서서 열중 쉬어, 차렷. 고향을 향해 묵념하고 있다. 낮에는 막대기를 총처럼 만들어서 귀신들과 훈련한다고 떠들고 있고. 자기 눈에 그렇게 보이는 거다. 지나가는 사람만 보이면 붙잡아서 또 그렇게 시키고.

 

사람이 악하고 더러운 귀신이 들려놓으면 수치감도 부끄러움도 모른다. 이것이 옷을 벗은 것이다. 자기의 수치감도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이건 옷을 벗은 사람이다. 자기의 언행심사가 많은 사람이 있을 때, 혼자 있을 때, 가정에 있을 때, 회사에 갔을 때에 따라 규모 있는 행동이 들어가야 사람이 반듯하고 보기가 좋다. 예배시간 전에 물부터 먹고 볼일을 다 보고 예배에 참석해야 한다. 예배시간에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은혜를 못 받으면 자기만 못 받지 왜 다른 사람에게까지 신경을 쓰게 만드느냐? 그런 면에서 조는 것도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된다. 금방 옮는다.

 

귀신들린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셨다. 벗고 있는 사람에게 찾아오셨다.

 

28: 귀신들린 자가 말하는 투로 봐서 예수님을 알고 있다. 그러면 이 귀신들린 자가 그 전에 예수님과 통성명을 했느냐? 어떻게 보면 제자들보다도 예수님을 더 잘 안다. 제자들은 늘 예수님을 따라다녔음에도 풍랑 파도를 겪은 후에 제자들이 한 말이 있다. ‘저가 뉘기에 바람과 파도도 순종하는고했다. 그러니까 제자들보다 귀신들린 자가 예수님을 더 잘 안다.

 

거기 보면 귀신들린 자가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라고 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제자들은 저가 뉘기에 바람과 파도가 순종하는고그랬다. 그런데 예수님을 그만큼 더 잘 안다면 예수님과 인격적인 연관관계성이 잘 지어져 있어야 할 텐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라고 한 다음에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한다. 여기 계신 분들은 예수와 자기와 상관이 있느냐? 어떤 관계냐? 나는 주인이고 예수는 자기 종이냐? 자기 소원 다 들어달라고 하니까 예수를 자기 종으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냐? 신앙의 기본정신을 바로 가져야 한다.

 

나와 무슨 상관있나이까.’ 이 말을 본심으로 그랬다면 이는 예수님을 아는 지식만 있고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되는 것이고, 그런데 지금 귀신이 들려서 귀신이 그 사람의 입을 통해서 하는 말이니 예수님께서는 귀신과 인격적 애정적 생명적 수수관계를 지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귀신이 예수님을 잘 알아도 예수님이 귀신과 악수를 하면서 인격적으로 관계할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 사람과는 관계가 있다. 귀신과는 관계가 없고 사람과는 관계가 있는 것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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