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고린도후 › 웃는 얼굴과 보물을 담은 질그릇

허태수 목사 | 2020.10.26 22:59:52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고후4:7
설교자
허태수 목사
참고
2019.2.11 성암감리교회 http://sungamch.net

웃는 얼굴과 보물을 담은 질그릇 
고후4:7


여러분이 이 본문을 설교 듣기는 ‘질그릇처럼 약하고 천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은혜가 임했다’는 은유적인 의미로 들었습니다. 교훈은 되지만 본래 말하려고 하는 핵심과는 거리가 좀 있습니다. 우선 보물이 뭐며, 질그릇이 뭔지를 밝혀내고, 이런 은유를 사용하게 된 배경을 읽어야 합니다.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고린도교회는 그리스의 이원론 사고에 빠진 열성 신도들이 ‘영혼은 불멸하고 영원하지만 육체는 일시적이고 덧없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몸으로 무슨 짓을 해도 상관이 없다고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창녀에게 드나들었고, 아버지의 아내와(계모) 살기도 했습니다. 이게 못마땅한 사람들은 아예 모든 걸 멈추어버리는 금욕주의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상황에서 ‘우리 몸은 우리 게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값을 주고 사신 몸이다. 또 그리스철학자들의 말대로 몸이 천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령의 전이며, 그리스도의 지체(고전6:15-20, 고후6:13)라고 말하면서 몸을 높이는 말을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몸이 천 한 게 아니라 높고 고귀하다는)하는 은유가 바로 ’우리 몸은 질그릇이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몸이 질그릇‘이라는 표현은 몸이 약하다거나, 하잘 것 없다거나, 값싸다는 뜻으로 하고자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반대의 의미를 담아서 했던 말이죠.


우리는 아주 간단히 이 본문을 해석하기를, 그렇게 하잘 것 없는 질그릇에 하나님이 담겨 있으니 고귀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만약 이게 그런 뜻이라면 바울이 그리스철학의 이원론을 받아 들였다는 게 됩니다. 아무리 질그릇에 보물이 담겨 있다고 해도, 담겨 있을 동안만 귀하게 취급되지 만약 보물이 담겨 있지 않으면 도로 하찮게 되지 않습니까? 인간의 몸이 그렇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의 이 말, ‘우리 몸이 질그릇이다’는 말은 단어 그대로 ‘질 그릇 같은 몸’이기 때문에 귀하다는 것입니다. 그럼 물으시겠죠? 그릇 안에 아무것도 담지 않아도, 금은보화가 담기지 않아도 그릇 자체로 귀하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걸 알기 위해 질그릇을 알아야 하겠죠. 질그릇은 흙으로 그릇 모양을 빚어 초벌을 굽고 그 위에 유약을 발라 반들반들하게 빛나는 유기그릇이 아닙니다. 질그릇은 유약을 바르지 않은 황토 모양의 그대로입니다. 여기에 물을 담으면 어떻게 됩니까? 금방 그릇의 흙 입자 속으로 좌~악 스며들겠죠? 그러니 쓸모가 없다고요? 그렇죠. 쓸모로 따지면 그렇습니다. 이렇게 그릇을 만들어 팔면(팔수도 없지만)금새 망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은유는 그릇을 만들어 팔아 돈을 버는 관점에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질그릇의 특성’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질그릇의 특성은 ‘담기는 것이 뭐든 금방 입자 사이사이에 침투해서 그릇과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걸 전제로 질그릇 은유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질그릇은 그 안에 담긴 것에 의해 변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바울은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뭐가 담겼다고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빛은 금덩어리처럼 담았다가 꺼낼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물처럼 쏟아 내지도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빛은 질그릇 안에 담을 수도 있고 스며들기는 하지만 그것을 꺼내서 쏟아버릴 수는 없는 겁니다. 그것은 질그릇에 한 번 담기면 그릇을 질적으로 변화시키고, 다시는 그것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흙으로서의 질그릇이 인간존재(믿는 신앙인)와 관련되어 있고, 그 안에 담긴 보물은 이런 존재들의 변화 내지 구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질그릇에 담긴 빛에 대해서 바울은 고후4:6에서, “어둠 속에서 빛이 있어라 하신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을 비춰서, 예수그리스도의 얼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합니다.


세상에 나타난 처음의 빛이 이 세상을 비추는 빛이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비춰주신 빛은 우리 마음을 비추는 빛입니다. 우리 각자의 존재를 밝히는 빛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의 빛임과 동시에(요8:12),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세상의 빛(마5:14)입니다. 바울이 질그릇 속에 담긴 보물이라는 말은, 이제 보물을 담으라는 게 아닙니다. 이미 우리에게 담겨진 보물 즉 그리스도의 빛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환함이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얼굴에 나타나는 환함입니다. 그러니까 ‘너는 질그릇 같은 존재인데 그 안에 그리스도의 환한 빛이 담겼으므로 너는 존재자체 또는 얼굴에 그 빛이 드러나야 한다’는 말이지요. 이걸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너는 존재나 얼굴이 환하냐?’그리 묻는 것이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흙덩이로 빚은 네 속에 다른 게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나는 이 시점에서 신라시대(서기600년 무렵)의 것이라고 여겨지는 깨진 기왓장하나를 여러분에게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신라시대 얼굴무늬 수막새’인데, 그저 ‘웃는 얼굴 기와’라고 합니다. 수막새는 수놈 기와고 암막새는 암놈 기와입니다. 지붕에 기와를 다 얹고 처마 끝에서 그것을 마무리하는 것을 ‘막새’라 하는데 우리가 보는 저 기와는 ‘수막새’입니다. 그런데 웃는 얼굴입니다. 저 기와를 만든 도공이 저 흙덩이에 웃는 얼굴을 새겨두었기 때문에 저 기와는 깨져서도, 2천 년이 되어가도 여전히 웃는 존재로 있습니다. 저기서는 환한 웃음과 흙이 하나입니다. 분리되지 않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로 환란을 당해도 곤경에 빠지지 않고, 난처한 일을 당해도 절망에 빠지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을 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8-9)


이는 마치 저 신라시대 웃는 수막새와 같지 않습니까? 새겨 있기 때문에 어떤 시간의 역사 속에서도,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웃는 얼굴일 뿐이듯이 말입니다.


그러면 저 수막새의 웃는 얼굴이 행복해서 웃는 것일까요? 형편이 좋아서 웃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모든 게 다 이루어져서 웃는 웃음이 아닙니다. 온갖 수난과 고난을 당하지만 것에 굴하지 않는 웃음, 내 안에 있는 그 존재(예수라는 빛)에 의해서 발산되는 그런 웃음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는 웃음이죠. 이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우리는 언제나 그리스도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10절)


그러니 질그릇에 담긴 보물은 무슨 신령한 영적 실체가 아닙니다.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니는 예수님의 죽임 당하심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의 생명이 우리에게서 나타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서(질그릇 같은)나라는 존재를 환하게 밝혀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담고 있는 그릇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 보물을 담고 있는 사람들은 그 자신의 경제적, 신분적, 신체적, 상황적인 형편과 상관없이, 저 신라시대의 수막새처럼 나와 내 안의 그리스도가 일체화 되어 있음으로, 나의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처음 깃든 대로, 새겨진 대로 그저 환하게 빛날 뿐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질그릇과 같습니다. 질그릇은 그 안에 뭐가 담겨졌느냐에 따라 그 존재의 특성이 결정됩니다. 그리고 한 번 특성화가 되면 이랬다저랬다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상황이나 형편에서도 내게 담겨 있는 그것이 내 속에 배어있으므로 나는 그저 내안에 있는 그 존재의 특성을 발현할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존재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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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기와  


이동찬


옛 신라 사람들은
웃는 기와로 집을 짓고
웃는 집에서 살았나 봅니다.

기와 하나가 처마 밑으로 떨어져
얼굴 한 쪽이
금가고 깨졌지만
웃음은 깨지지 않고

나뭇잎 뒤에 숨은
초승달처럼 웃고 있습니다.

나도 누군가에게
한번 웃어주면
천년을 가는
그런 웃음을 남기고 싶어
웃는 기와 흉내를 내봅니다. 


설교/허태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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