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궁극이 | 2020.06.24 19:44:13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눅7:14-16
설교자
김경형목사
참고
궁극교회 주일예배

714-16.

 

14: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요단강물에 들어서니 사해바다 죽음의 바다로 다 몰아가던 물들이 멈추어 서버렸고 이스라엘은 그 가운데로 유유히 약속의 땅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러니까 사망성에 삼켜지지 않았던 것이지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역사라야 만이 사망과 죽음의 대열을 멈출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고통과 슬픔도 다 멈추어지는 겁니다. 환희로 바꾸어진다 그 말이요. 슬프고 고통스러울 때에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을 붙잡아라. 진리의 말씀에 대한 뜻을 곰곰이 생각하라. 세상 것은 아무리 좋아도 잠깐이요. , 잠깐이요. 잠깐 되는 그것을 잠깐 붙들면 잠깐 동안 고통이지만 오래 붙들고 있으면 그 고통이 근심 걱정이 오래 가고 결국은 병들고 죽습니다. 그렇게 살 필요가 없다 그 말이요.

 

청년아, 일어나라.’ 죽은 청년에게 명령을 했습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자는 것도 아니고 숨이 끊어진 죽은 사람보고 일어나라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죽은 사람보고 일어나라하는 사람 있어요? 자는 사람보고 일어나라그러는 법이지. 그냥 잠자는 사람은 아무나 깨울 수 있어요. 맞잖아요? 교인도 깨울 수 있고 이방인도 깨울 수 있고 늙은 사람도 깨울 수 있고 아이들도 깨울 수 있습니다. 그냥 잠자는 사람을. 그러나 숨이 끊어져 죽은 사람은 늙었던 젊었던 아이이든 어른이든 아무도 못 깨웁니다. 못 살린다 그 말이요.

 

지푸라기로 콧구멍을 간지르면 재채기 하면서 죽은 사람이 눈을 뜨고 일어날까요? 귀에다 나팔을 세게 불면 놀라서 일어날까? 죽은 사람을 아무도 못 깨웁니다. 일어나라고 할 그런 소리를 할 자격자는 그 어떤 인간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는 사람을 깨우듯이 너무 쉽게 말씀을 하신다 그 말이요. ‘청년아, 일어나라고 하니까 마치 자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는 것처럼 일어난단 말이요.

 

우리가 볼 때는 죽은 건데 예수님이 깨우니까 만일 그 아이가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면서 , 잘 잤다. 내가 깊이 잠들었었나?’ 그런 말을 한다면 과부 어머니가 뭐라 그럴까요? ‘이놈아, 네가 죽었었단다.’ ‘내가 정말 죽었었어요?’ 주위 사람들도 그래, 네가 정말 죽었었다. 네가 지금 어디에 앉아 있으냐?’ 둘러보니까 관이거든. ‘관이 아니냐?’ 만일에 그런 것을 본다면 얼마나 신기할까? 안 그래요? 그리고 놀랄 것이 아니겠는가?

 

마귀의 격동을 받은 의심 많은 사람들은 그 청년이 살아난 것은 가만두어도 그 날짜 그 시간에 일어날 것인데 예수님께서 그것을 아시고 깨어날 수 있는 그 시점을 잘 포착을 해서 일어나라고 한 것이 마치 예수님께서 살리신 것처럼 되었다고 말할 거다.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가신 것도 물 밑이 바위가 있는데 물이 나면 바위가 보이고 물이 들면 그 바위가 살짝 덮이거든? 그러니까 그 위로 걸어갔다고 하는 그런 사람들 있거든? 그런 사람들 논리로 본다면 인간보기엔 죽었지만 예수님이 안 깨워도 분명이 살아날 거다. 근데 그 시점을 잘 포착을 해가지고 맞아떨어지게 했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그런 무리들 입장에서 생각을 한다면 마치 예수님이 살린 것처럼 그렇게 돼버렸다 그 말이요. 그럴 만도 하지요? 어떻게 생각하면?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뭐가 어떻게 되어 돌아갈는지 그걸 또 알아야 돼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성도 없어지고 예수님은 포착을 잘하는 하나의 인간이요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요. 그러니까 우리가 믿을 필요가 없는 거지. 이제. 그런데 인간 인류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의 생명을 만드신 주인공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는 그런 분을 믿고 있어요. 그리고 그 교훈을 따르고.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날 죽은 사람뿐만 아니라 사흘 전에 죽은 사람, 사십 일 전에 죽은 사람, 사십 년 전에 죽은 사람, 사백 년 전에 사천 년 전에 죽은 사람 할 것 없이 언제 어디에서 죽었던 해골이 된 것도 살도 뼈다귀도 다 흙으로 녹아진 것도 세상이 끝나는 날 변화 부활 승천으로 한꺼번에 다 일으키실 그 분입니다. 어느 종교가 그런 종교가 있어요? 우리가 하는 말이 허황된 말입니까? 아니라고 하는 것을 성육신 예수께서 맛보기로 다 보여줬잖아요. 그 뭐요? 나흘 전에 죽은 누구를 살렸지? 나사로. 그리고 또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에 그 많은 사람이 부활해서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서 보여줬지요. 맞지요?

 

그럼 그 사람들은 다 예수님 부활할 때 일어난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이 말하자면 어제 죽은 사람들이요? 살아난 사람들이? 며칠 전에 죽은 사람들이요? 그건 모르지만 죽은 날짜에 관계없이 일어났습니까? 날짜 간격에 관계없이. 그래요. 그 사람들이 이때까지 살아있지요? 허허허. 우리에게 계시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한꺼번에 다 일으키신다.

 

그리고 우리가 변화산이라고도 그러고 헐몬산이라고도 그러지요? 세 제자를 데리고 올라가서 시대적으로 몇 백 년 차이가 된 사람들, 이게 뭐요? 모세 엘리야 예수님이 한 자리에서 대화했잖아요. 우리가 그거 그냥 역사로만 볼 게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로 주는 신앙정신 사상은 시대를 초월하는 것. 시대를 초월해요. 그래서 그분들의 신앙사상을 지금 나한테다 끌어당겨 놓을 수도 있고 내 정신 사상을 그 때 그 선지사도들 그 쪽으로 끌어가서 그걸 볼 수도 있단 말이요. 그게 우리 신앙이요. 신앙이라 할 때는 영의 운동이요 영적 차원이요, 영의 것은 시대를 초월하는 거요. 그걸 알아야 돼요.

 

오늘날 기독교 안에 이거 뭐 물질적 개념을 가지고 세상에서 그저 어떻게 살아가나하는 그 면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 그건 기독교가 할 짓이 아니에요. 그건 신앙이 아니라 그 말이요. ‘변화 부활 승천으로 한꺼번에 다 일으킬 것이다그런 정도로 우리가 또 알고 있으면 안 되고 문제는 그런 생명적인 것을 부활의 성질을 가진 것을 우리는 영적 면에서 그 효력을 우리 모두는 지금 보고 가자 말이요. 그런 면에서 이룰구원이란 말이요. 그게. 이룰구원의 신앙은 미래만 보는 게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를 현재에다 끌어다놓고 간다 그 말이요. 어느 신앙 어느 종교가 그런 게 있어요? 없어요.

 

일어나라.’ 누구의 명령이요? 주님의 명령입니다. 어디에서 일어나야 하는 거요? 신앙생명이 죽은 대열에서 일어나야 된다. 그 죽은 대열이 아니냐 그 말이요. 지금. 예수 믿어도 죽은 대열이 있고 산 대열이 있어요. 그 대열이 어떤 대열이냐?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한 선악과를 먹고 저주받고 타락된 세상을 소원 목적하고 사망이 왕 노릇하는 그 대열이더라.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잖아요. 죽은 자를 왕처럼 메고 가니까. 하나하나마다 어떻게 이치를 그렇게 밝혀놓았는지? 첫째는 그것이 이방 불신대열. 두 번째는 세상육적 종교적 대열. 다른 복음이에요. 이건 다른 복음. 아무리 성경가지고 해도 그건 이질적인 비진리적인 인본주의 사고방식, 옛사람 부패성 마귀적인 것. 그 타락된 길이에요. 사망 길 넓은 길이라 그러지. 사망이 왕 노릇하는 그 대열. 그 신앙의 대열.

 

우리 기독자는 그런 대열에서 일어나야 된다. 죽은 대열에서 일어나야 된다. 그 죽은 노선에서. 죽은 길로 그렇게 가지 말고 일어나야 된다. 어떻게 일어나야 되느냐? 예수 그리스도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교훈입니다. 이 하늘의 교훈에서 최고의 높은 교훈에서 영의 귀가 열리고 영의 눈이 열리는 날에는 신앙생명이 살아서 일어나게 된다. 사망적으로 있었던 것이 신앙 생명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우리교회서는 일어나야 돼요. 예수님을 오늘날까지 자기가 어떻게 믿어왔던 한 이치라도 깨닫는 거는 일어나는 거요. 많은 이치를 깨달으면 많이 일어나는 거고, 많이 일어나면 그만큼 써먹을 것이 많지요. 이제 그만큼 능력자지. 그러니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가 아니면 이 말씀이 아니면 일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사람이 못 일어나요. 절대로 못 일어나요.

 

일어나야 말을 하게 돼요. 말을 하게 된다고 하는 것은 의사소통이 되는구나. 진리로 생명의 말씀으로 의사소통이 되는구나. 예수님을 수십 년 믿어도 진리의 의사소통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죽어있다 그 말이요. 죽은 자다. 이게 죽었거나 아직까지 벙어리이거나. 죽은 자는 말을 못하듯이 신앙생명이 죽은 자는 신앙사상 면에서의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겁니다. 그걸 아셔야 돼요. 자기가 다른 사람과 비교할 것 없고 하나님과 자기와 하나님 앞에 서서 자기를 심사를 해야 한다.

 

우리가 그런 거 있습니까? 인간끼리 대화는 잘 되는데 성경을 보면 왜 하나님과 대화는 안 되지요? 그런 거 없나요? 성경을 읽어나가면 성경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우리 주님의 의사와 이렇게 통해야 되겠는데 그 면에는 깜깜이고 자기처럼 닮은 인간과는 어떻게 그리 죽이 잘 맞아 돌아가는지? 그런 거 없나요? 그래도 자기의 차원을 모르겠느냐 그 말이요. 믿는 사람이 믿는 사람끼리 대화가 잘 돼야 되겠는데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하고 대화가 잘 되고 믿는 사람끼리 대화하면 왜 이렇게 대립과 마찰과 충돌이 많은지? 둘 다 죽었거나 한 쪽이 죽었거나. 대립 마찰 충돌을 일으키고 있으면, 둘 다 그러고 있으면 차원이 둘 다 똑같아. 그러니까 둘 다 죽은 거라. 살아있으면 그러지를 않아요. 우리교회서는 자기의 신앙사상이 이게 죽은 건지 산 건지 이게 감지를 잘 해야 돼요. 죽은 건지 산 건지 아나? ‘숨 쉬고 밥 먹고 있으니 살았거니그냥 그러고 있는 거지.

 

모든 삶이 사망적인 대열에서 마치 관 속에 있는 송장처럼 떠받들고 가니까 묘지까지 갈 때까지는 재미가 있겠지요. 송장도 아마 재미가 있을 거요. 관 속에서 자기를 받들고 가면 관 안에서 뒹굴뒹굴 하면서 재미없을까? 그런 느낌 안 들어요? 공동묘지에다 내버려질 줄 모르고. 누군가가 자기를 바람 태우고 높여주거들랑 내가 관 속에서 이런 게 아닌가하고 좀 생각을 해봐요. 다 올려주면 좋다고 그러지? 사람이 바로 돼 있으면 올려주던 내려까던 자기가 깨달은 사람은 그대로 있잖아요. 내린다고 내려갑니까? 올린다고 올라갑니까?

 

자기가 어느 대열에서 섰느냐? 신앙생명이 죽으면 환경에 포박되고 환경이 와서 자기를 묶어버려요. 신앙생명이 죽으면 환경이 와서 포박해 버린다. 자기를 위해주는 것 같으나 자기는 하는 것마다 사망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일어나라. 그래야 네가 산다.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도 주일은 분명히 지켜야지요. ‘다른 날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하고하는 그런 면으로. 딴 데서 보면 또 말세가 옴을 볼수록 날마다 모이기를 힘쓰라그런 말씀도 있고. 이런 말씀을 이렇게 겹쳐서 보면 말씀 전하는 시간은 빠지면 안 되겠구나하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 되고.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억지로? 신앙은 억지로 되는 거 아니요. 자기 수준만큼 깨달음이 돼 들어가는 거. 어떤 사람은 주일도 못 지키는 사람도 있고. 그 사람의 차원은 그거밖에 안 되는 거다. 그러나 이 말씀으로 돼지지 않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심사하고 몸부림칠 일이지 어느 인간이 이래라 저래라그건 안 돼요. 그건 억지가 되고 강압이 되고. 권고 권면은 할 수 있으나 억지 강압은 안 돼요. 억지 강압하면 부작용이 일어나 버려요. 억지 강압은 마귀의 수법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하나님은 그 사람의 차원에 따라서 환경과 조건을 이렇게 차근차근 하시니 하나님의 기르심이 그런가하고 그렇게 생각을 해야지 믿음이 있네. 없네하면 그건 안 된다. 그럼 너는 언제부터 그랬냐? 그런데 어린아이가 몇 살 때부터 똥오줌 가려요? 3살 때부터? 그럼 잘 못 가리는 애들은 5, 6살 돼도 잘 못 가려. 군대에 가보니까 어른인데도 못 가려가지고, 허허허. 그런 건 좀 나쁘게 말하면 병적이겠고. 참 그래요. 그런 것도 가만 보면 이만하면 일어설 때가 됐고 똥오줌 가릴 줄도 알 때인데 그걸 가누지 못하면 요건 병들었구나. 감각적인 면에 병이 들었구나. 근데 소금 받으러 가려고 그래? 안 가려고 그러지. 나이가 들어있으니까.

15: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죽은 자가 일어나 앉고 말을 한다는 것은 살아났다는 증거지요? 살아난 자가 말도 않고 눈도 깜짝하지도 않고 가만있다면 사람이 놀라지요. 안 그래요? 눈뜨고 자는 사람 보면 사람 놀라요. 꼭 눈감고 자요. 그거 알아야 돼. 눈뜨고 자지마. 그런데 가만있다가 갑자기 떠들었다가 또 가만있다 그러면 살아난 보람이 있을까요? 생각을 해봐요. 엄마가 뭐라 그래요? ‘너 도로 죽어라. 안 되겠다. 도로 죽어라.’ 살아난 보람이 없잖아? 엄마가 말 안 듣는 자식한테 너 이놈, 나가서 죽어라그랬는데 진짜 죽었다. 죽어놓으면 천상 엄마가 슬플 테지요. 그럼 엄마가 울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살아났다 그랬을 때 엄마가 도로 죽어라할 수도 없고.

 

말을 한다는 것은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이지요. ‘내가 왜 여기 있지요? 저 사람들은 왜 울지요? 누가 나를 살렸지요?’ 자기를 메고 온 상여를 보고 얼마나 놀랐을까? 상여 맨 뒤에는 또 자기를 파묻으려고 삽과 괭이를 메고 맨 뒤에 오는 사람이 있고. 얼마나 그걸 보고 놀랄까? 안 그래요?

 

청년을 살려서 과부에게 주었을 때 청년이라면 몇 살이요? 20살부터 50살까지? 허허. 아마 20세부터 한 30세 그 중간에서 왔다 갔다 하지 않겠나? OO, 너 몇 살이야? 그럼 너는 노인이요, 애기요? 청년이요? 청년이니 이 소리 들리냐? , 청년들 많지요. 많아요. 청년을 살려서 과부에게 주었을 때에 그것을 어머니 편에서 일반적인 위로로 그게 받아지겠냐 그 말이요. 일반적인 위로로 받아지겠냐? 한 번 생각을 해봐요.

 

그리고 자기를 살려주신 예수님을 보았을 때에 얼마나 그 감화 감격이 있을까? 안 그래요? 그리고 무엇을 깨달았을까? 청년의 입장에서 그 말이요. 첫째, 인간창조 목적대로 살아야지? 두 번째, 아니다. 간증하고 돌아다니면서 돈 벌어야지? 두 번째 거 맞지요? 살아났으면 돈을 벌어야지. 그러니까 간증하면 돈 잘 오잖아요. ‘간증 좀 해 주십시오그래가지고 차비 쓰고 갔는데 차비도 안 주고 뭐 간증한 수고비도 안 주고 그럴까요? 그렇게 해서 돌아다니면 돈 벌지요. 그래서 병들어가지고 얻어맞고 막 그냥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고 아슬아슬한 장면이 많으면 이제 간증거리가 좋잖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막 많이 돌아다니지요.

 

간증하면 돈 벌어요. 맞지요? 안 맞아요? 간증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요. 도둑질해서 먹고 사는 사람도 있지요? 간증해서 먹고 사는 사람도 있지요? 남 때리고 먹고 사는 사람도 있지요? 얻어맞고 먹고 사는 사람도 있지요? 많아요. 먹고 사는 게 많아요. 말 팔아먹고 사는 것도 있고.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모든 사람이 두려워한다는 것은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절대권을 행사할 수 있는 분을 보았다는 만났다는 말입니다. 그 분을 통하여 하나님을 높이신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을 발견한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과 직접 관계되는 일입니다. 죽은 자를 살려주시고 병든 자를 고쳐주시면 하나님께서 너와 나와 관계성을 가져보자.’ 살려주고 고쳐주는 것은 왜? 너와 나와 관계성을 가져보자. 멋있잖아요? 그런 뜻이 들어있다. 높은 사람이 심부름을 시킬 때에 너와 나와 관계성을 가져보자는 방편이 들어있기도 하단 말이요.

 

따라서 나음을 얻고 살리심을 받고 그것을 보았던 또는 들었던 알고 있는 자는 그 분과의 관계성을 지을 때마다 유익을 가져오지 손해는 없더라. 그 때 그 당시 보았던 사람들이고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그것을 소문으로 알고 있고, 소문을 통해서 여기에는 사건이 기록돼 있으니 그 사건을 생각하면서 그 분과의 인격적 관계를 지을 적마다 유익이 있지 손해는 없더라. 예수 믿으면서 손해 봤어요? 뭔가 잘못됐다. 그거는. , 돈 내고 학교 다니면서 손해 봤어요? 만일에 그렇다면 본인이 공부를 안 했거나, 아니면 학교에서 돈만 받아먹고 선생이 안 가르쳤거나. 그런 경우 손해가 되겠지요. 그런데 돈을 냈는데 강사는 가르치고 있는데 자기가 안 배웠다 그 말이지. 왜 안 배우냐? 자기 스스로가 손해를 만들었어. 근데 공부하는 사람들은 유익이잖아요. 맞잖아요?

 

예수 믿어서 손해 본 분 있어요? 예수란 놈이 사기 처먹고 달아났어요? 허기야 그래서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목사님들 중에서도 노회장 총회장에게 사기당하는 사람도 더러 있어. 그럼 손해 본 그 분들이 거기 있으려고 그래요? 대전의 O목사님은 아마 많은 돈 몇 억이나 떼인 모양이지? 노회장에게 떼였다던가? ‘돈 내놓으라그러니까 하나님에게 받쳤는데 뭘.’ 이게 기가 막히잖아요. 하나님에게 헌금을 했는데 왜 자기 보고 돈 내라고 그러느냐 그 말이요.

 

그러니까 받을 돈은 항상 문서화 해놔요. 그냥 주고 싶으면 문서화 하지 말고. 받는 입장에서는 주는 사람이 문서화 합시다그러면 당신이 나를 못 믿냐? 같은 교인인데.’ 빌려가는 사람이 그러면 이거 심각하구나. 큰일 날 소리지요. 아닌 말로 빌려가는 사람이 문서화 합시다그러더라도 빌려주는 쪽에서 그런 걸 가지고 당신이 뭐 날 속여먹을 사람인가?’ ‘내가 당신을 속여먹을 사람인가?’ 그만큼 인격적으로 믿어주면 그거 생각을 해봐요. 인간의 세계에서 인격적으로 이렇게 신용으로 돼야 될 텐데 그걸 역이용 해가지고. 이거는 안 된다. 하나님 앞에 형벌 받는 거지. 선한 사람을 악하게 대하는구나. 예수 믿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이름을 이용해서 죄를 짓는구나.

 

혹시 우리교회에서 예수 믿어가지고 손해 봤다 그러면 가셔야 합니다. 가셔야 돼요. 예수 믿으면서 유익을, 무슨 말씀인가 하니 한 이치라도 깨달아가지고 생활 속에서 죄에 넘어지지 않고 남에게 속지 않고 이렇게 돼야 할 텐데 우리교회 나올수록 남에게 속고 얻어맞고 차비는 차비대로 나가고. 그 어디 쓰겠냐? 이거 문제가 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예수 믿게 한 것은 당신을 따라오게 한 것은 당신의 종으로 다 부려먹고 월급 줄만한 때가 되면 다 내보내려고 하는 거지? 예수님의 심보가?

 

우리가 세상을 보면 모두 다 각자가 자기가 유익을 볼 곳을 찾는 것이지. 안 그래요? 유익을 볼 곳을 찾는 것이지 손해를 볼 곳은 찾지 않더라. 맞잖아요? 장사를 하던 뭘 하던 어디 들어가서 월급을 타던 뭘 하든 자기의 유익을 볼 곳을 찾더라. 쉽게 말하면 자기가 먹고 마시고 살 곳을 찾더라 그 말이요. 그런데 생각이 짧아서 코앞의 것 임시적인 유익만 생각을 하지 영원히 자기가 존영스러워질 것은 생각을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니까 참 똑똑하지요? 너희는 땅의 것을 아랫 것을 찾으라? 아니면 위에 것을 찾아라? 성경에 있어요? , 없어. ‘너희는 다 땅의 것을 찾아라. 아랫 것을 찾아라그 말씀은 있어요?

 

하늘에 속한 것을 찾았느냐? 세상의 것도 따라오도록 사람이 영글어져가야지 예수 믿을수록 사람의 변모성은 보이지 않고 세상 속으로만 더 파고 들어간다면 마치 무엇과 같은가 하니 구더기가 똥 속으로 자꾸 파고 들어가는 거와 같구나. 그 시골 화장실 밑이 다 보이지요? 그러면 이 구더기가 자꾸 밑으로 파고 들어가려고 그러지요? 안 그래요? 안 봤어요? 구더기 자기 똥구멍은 위로 하늘로 보게 하고 주둥아리는 자꾸 똥 속으로 똥 속으로 서로 막 파고 들어가려고 그러고. 사람하고 같구나. 이게. 그러니 답답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거다. 그게. 결국은 고통으로 고통으로 심판일 수밖에 없겠구나.

 

예수라는 분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이 보이는 것인데 이것을 알지 못하고 알아도 싫어하고 무관심하고. 이런 사람은 분명히 자기가 기댈 곳이 있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이 아니고 돈이든 집이든 기술이든 직장이든 기댈 곳이 있다 그 말이요. 맞지요? 틀린 말이 아니지요? 여기서 불타지고 진동하고 변질 안 될 것이 있느냐? 그러면 죽을 때 갖고 갈 수 있느냐? 그런 것을 하나님처럼 기대고 있다가 자기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 같으냐? 그런 것은 다 변질되고 요동 받는 것들이다.

 

누구든지 예수 믿고 영적이든 육적이든 하나님으로부터 살리심을 받았으면 살리고 고쳐주신 그 분과 인격적 관계성을 바로 가져야 바른 신앙이고 옳은 일입니다. 육적 생활적으로 살리심을 받았느냐?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일반은혜도 받으면 고맙잖아요. 영적 신앙 생명적으로 다시 살아났다면 이거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자기 속에 감사와 뜨거운 마음이 식어지면 안 되는 것이다.

 

누구에게 영광을 돌려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사람은 귀한 그 무엇을 받았으면 고맙습니다하게 되듯이 받았으면 돌리게 되더라. ‘고맙습니다하는 것도 돌리는 거요. 그 분께 돌리는 거요. 말하자면 이웃어른에게 또는 아버지에게 어머니에게 뭘 받을 때에 받는 입장에서 고맙습니다그래야지. 안 그래요? ‘, 이까지 것 필요 없는데 뭘 줍니까이러면 주는 사람 입장에서 어떻게 돼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고 하는 것은 신의 능력이 우리 인간에게 역사되는 것을 발견했다. 거기서 나오는 표현입니다. 알겠어요? 발견이 안 되면 보지 못했으면 영광을 돌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그랬어. 선지자는 예언자요, 선지자는 선견자요, 선지자는 성경해석자요. 알겠어요? 복합적인 역할이 들어있습니다. ‘기다리던 구세주 메시아가 나타나셨다고 하지 않고 왜 선지자라고 표현을 했을까 그 말이요. 여기 또 문제는. 예수님은 죽은 청년을 살렸지요? 맞지요? 오늘날 하나님의 선지자는 해석적으로 그 본문의 뜻을 밝히는 거요. 알겠어요? 이게 선지자요. 이게.

 

너의 신앙생명이 죽으면 너를 버릴 사람이 몰려오게 돼있다. 맞잖아요? 그거? 사람이 죽으면 버릴 사람이 몰려오게 돼있어요. 이치가. 몰려와서 너를 위한답시고 씻겨주고 닦아주고 옷을 입혀줄 거다. 시체 놓고 그러잖아요. 맞잖아요? 무슨 말이냐? 세상소원을 품고 산다면 너를 위한다고 하는 자들이 너를 떠받들어 줄 거다. 이해가요? 지금 무슨 말인지?

 

오늘날 자기에게 들어있는 정신, 신앙이라고 하는 정신 마음이 어디 가서 붙어있는지? 세상이 너를 떠받들면 너는 실려 가는 거다. 이제. 세상이 너를 떠받들면 너는 재미있다고 하겠으나 너의 신앙생명은 죽은 거다. 이제. 너를 떠받들고 많은 사람이 따른다고 해도 네가 가는 곳은 죽은 자들만 도착하는 공동묘지다. 이제. 이해가요? 너를 위한다던 그들이 결국 너를 버릴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미리 보인다면 너는 선견자가 된다. 보여졌어요?

 

그리고 너는 어느 대열의 행진을 정신 사상적으로 따르고 있느냐? 예수님의 대 행진으로 따르느냐, 독자 죽은 과부의 대 행진을 따르느냐? 어느 행진을 따르느냐에 따라 살든지 죽든지 하게 된다. 이제. 이것은 결과를 알기 때문에 예언이 되는 거다 그 말이요. 이게 자기에게.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큰 선지자는 영적 면의 하나님이 하시는 일, 신령한 일 곧, 구원에 관한 일을 가르쳐주는 자가 곧 선지자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귀신들린 무당 점쟁이 선지자들이 많이 있어요. ‘꾸었네. 보았네. 들었네하는 그런 귀신들린 선지자들이 많아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주님의 예언은 절대 정확합니다. 큰 선지자는 이 대열 이 노선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되는 예언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의 이 교훈이 아니면 전부는 사망적 공동묘지로 가는 죽은 신앙믿음으로 돼버립니다. 그걸 아셔야 돼요. , 오늘 이게 상여 뒤를 따르는 무리들, 예수님 무리 뒤를 따르는 제자와 무리들. 따르는 그 신앙정신 사상, 그리고 그 결과를 깨달았지요? 알 수 있겠지요?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댓글 쓰기

목록 삭제
Copyright © 최용우 010-7162-3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