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 무엇이 감사를방해하는가?

옥한흠 | 2004.06.22 13:35:01 | 메뉴 건너뛰기 쓰기
누가복음12:15-34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는 여러 가지 모양이 있을 수 있지만 그 기본 형태는 물질로 표현하는 것, 즉 헌금이라 봅니다. 더욱이 신약시대에 와서 십일조마저도 하나님의 것이라는 율법적인 성격보다 그의 은혜에 감사하는 의미가 더 짙게 내포됨으로써 감사하는 마음이야말로 헌금을 드릴 때 가장 올바른 자세임을 알 수 있습니다.
헌금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하는 가를 평가할 수 있는 하나의 시금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34절). 그런데 여기에 감사를 방해하는 불순물이 끼여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보여 주십니다.

1. 부자가 가지고 있었던 탐심입니다.
예수님은 따르던 무리들에게 부자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부자가 어리석었던 이유는 탐심 때문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이 부자에게 있어서 두드러진 심리적 특성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라는 점입니다. 17~19절에서 「나」라는 단어가 연거푸 나오는 것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탐심은 자기를 위해서는 언제나 후한 반면에 하나님께 대해서는 항상 인색한 마음입니다.
성경을 보면 부자가 예수 믿기 제일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부유한 사람들이 교회를 많이 찾는다는 것은 대단한 축복이 아닐 수 없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가 그만큼 감당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특별히, 누구보다도 부유층이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을 깨닫고 새 사람 되어 재물을 우상으로 숭배하던 이전의 탐심(골3:5)을 모두 버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선한 일에 아낌없이 투자하고 헌금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이 사회에 만연된 황금만능주의 악취도 제거될 것입니다.

2. 가난한 자들에게 경계되었던 염려입니다.
그 당시 제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사는 하늘의 참새같은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한번도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32절). 오히려 구차한 과부가 전 재산이었던 두 엽전을 가지고 감사한 것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가난한 성도들이 감사하려고 할 때 크게 장애되는 것이 있습니다. 염려라는 것입니다. 염려는 반드시 가난하기 때문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오래된 습관처럼 엉겨붙어 있는 염려가 한 두 가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단호히 말씀하시기를, 염려는 성도가 결코 해서는 안되는 해로운 악이라 하셨습니다. 그 이유를 말씀 가운데서 몇 가지 찾아봅니다.

1) 염려는 예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주님의 강하고도 분명한 어조가 담긴 부분이 있습니다. 29절의 ""구하지 말며…""라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다른말로 기도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의식주의 문제는 살아가는데 있어서 너무나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이어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 염려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시24:1). 그리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나 채워 주시는 분이십니다(빌4:19). 이토록 부요하고 자비로우신 아버지가 계시는 데도 불구하고 염려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불신하는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3) 염려는 우리의 신분을 스스로 비하시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땅의 것을 가지고 염려하는 것은 우리에게 걸맞는 일입니다(24,28,30절).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일을 생각하고 마음을 쓰는 것이 제대로 어울리는 일입니다. 어느 면으로 보나 염려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쓸데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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