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 간송 전형필

최한주 목사 | 2017.11.16 14:21:22 | 메뉴 건너뛰기 쓰기

교회에서 산 쪽으로 넘어가 신방학초교 정문을 지나 방학동 성당으로 가다보면 “간송 전형필 생가”라는 작은 팻말이 있다. 무심코 지나쳤지만 자주 대하다 보니 호기심이 있어 가보기도 하고 그가 어떤 인물인지 살펴보았다. 알고 보니 일제에 의해 빼돌려진 문화제를 전 재산을 바쳐 지켜낸 문화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1906년 서울에서 손꼽히는 부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물러 받은 논만 약 800만평이었고, 일 년에 거둬들인 쌀은 당시 기와집 150채를 사고도 남는 어머어마한 부자였다. 그러나 그는 이 엄청난 재산을 문화재를 지키는 데 모두 쏟아부었다.

 그가 지켜낸 문화제 중에는 국보 제 70호 훈민정음 해례본, 국보 제 135호 신윤복의 미인도, 국보 제 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등 이름만 들어도 떠올릴 수 있는 문화제가 수없이 많다. 국보급이 12점, 국보급이 10점, 서울시지정 문화제 4점 등을 포함 아직 공개되지 않은 수많은 국보급과 보물급 문화제가 성북동의 간송 미술관에 보존되어 있다. 전형필 선생이 자신의 삶을 드려 문화제를 보호한 결과다.

 오늘날 가장 예술성이 뛰어난 고려청자로 칭송되는 청자상감운학문매병에 얽힌 일화가 있다. 이 상감청자는 전문 도굴꾼에게 도굴되어 일본인 흥정꾼에게 당시 서울 기와집 한 채 가격인 1,000원에 팔렸다. 전형필 선생이 이 상감청자를 사겠다고 하자 이 흥정꾼은 터무니없는 가격인 2만원을 제시했다. 그러나 간송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2만원을 주고 이 상감청자를 구입했다. 후일에 다른 일본인 수집가가 전형필 선생에게 4만원을 제시하며 이 청자를 사겠다고 했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하였다고 한다.

 유네스코 세계 기록문화유산이기도 한 훈민정음 원본인 훈민정음해례본에 얽힌 일화도 있다. 훈민정음해례본은 연산군 때 대부분 불태워져 매우 귀했다. 원래 소장했던 사람은 이 책을 기와집 한 채 값에 팔려고 했다. 그런데 전형필 선생은 “이런 보물 중의 보물을 한 채 값만 줄 수 없다”면서 기와집 열채 값을 주고 수고비로 한 채 더 얹어주었다고 한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간송은 조선어학회 33인을 간송 미술관의 전신인 보화각으로 불러 훈민정음해례본을 공개했다. 그리고 영인본(원본을 복제한 인쇄물)을 만들 수 있도록 귀중한 원본을 낱장으로 때어 흔쾌히 제공하였다. 6.25 전쟁 때는 이것을 넣은 가방을 가슴에 품고 다녔고, 밤에는 베게 속에 넣고 잤다고 한다.

 어느 날 민족 대표 중의 한 명인 서예가 위창 오세창 선생이 그에게 “왜 서화나 골동품 수집에 나섰느냐?”고 물었다. 그는 “서화와 골동품은 조선의 자존심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의 이와 같은 나라사랑이 일제 치하에서 민족의 혼이 담긴 문화제를 보호할 수 있었다.

 정부도 2012년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을 설립하고 늦게나마 해외로 반출된 우리 문화재에 대한 조사와 연구 그리고 환수에 나서고 있다. 우리의 문화재를 지키고 빼앗긴 것을 도로 찾는 것은 땅의 회복만아 아닌 문화의 자주성을 회복하는 길이다.

최한주 목사 <푸른숲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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