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 우리가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선하게 살아야 할 이유?

물맷돌 | 2022.08.26 14:05:06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아침편지3132] 2022년 8월 3일 수요일

 

우리가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선하게 살아야 할 이유?

 

샬롬! 지난밤 편히 쉬셨는지요? 요즘 휴가철인데, 혹시 이 편지를 휴가지에서 받아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혹시 그렇다면, 즐겁고 행복한 휴가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아침편지’를 보내드리고 있는 저처럼 집에서 휴가를 보내고 계신다면, 그 나름 지혜로운 선택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무쪼록 무더운 여름을 아무 탈 없이 건강하게 잘 지내셨으면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사형집행을 기다리면서 한 달간 감옥에서 지냈는데, 믿기 어려울 만큼 평안했고, 심지어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죽음을 몇 시간 앞둔 그의 모습을 기록한 글(파이돈)은 고전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글’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신성한 능력인 하나님과 영혼이 존재하며, 이를 믿는 사람은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선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사실을 믿기 때문에, 죽음이 전혀 두렵지 않다’고 하면서 오히려 눈물 흘리는 제자들을 위로했습니다.

 

제자들이 ‘망명하라’고 요청했으나, ‘자신이 재판에 응한 이상, 판결이 아무리 불리하더라도 따라야 한다.’면서 제자들의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불의한 행동은 어떤 이유로라도 행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습니다. 그는, 혼탁한 그리스 사회에 ‘도덕과 양심의 절대성’을 최초로 명확히 했을 뿐 아니라, 죽음 앞에서 진리를 따르는 ‘실존적 삶’을 생생하게 보여주었습니다.

 

플라톤이 방대한 철학을 저술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힘은 스승의 언행일치(言行一致)적 삶을 목격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짜 용기를 직접 보는 것처럼, 결정적인 체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가 보여준 ‘정신의 위대함’이 플라톤과 바울 등을 거치면서 서양문명의 초석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소크라테스가 왜 죽어야 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재판에서 사형이 확정되자, 그 자리에서 일어나 재판관들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이제 떠날 때가 되었군요? 나는 죽기 위해서,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 그러나 우리 중에 어느 쪽이 더 좋은 길을 향하여 가고 있는지는, 하나님 말고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좁쌀같이 왜소한 정신과, 아름드리나무처럼 큰 정신이 있는 법입니다. 그의 죽음은 우리의 큰 정신을 이루는 밑거름이 되었고, 우리는 그 덕분에 오늘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공간’을 얻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출처; 좋은생각, 윤재윤/ 변호사)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야말로 우리에게 ‘위대한 죽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사실 예수께서 가셨던 ‘십자가의 길’은 우리 같은 피라미는 감히 바라볼 수 없는 길입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라면, 그 시늉만이라도 내볼 수 있는 용기가 생길 법도 합니다. 아무튼, 소크라테스는 ‘인간이 왜 착하게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밝혀주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 길이 ‘더 좋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이것이냐, 저것이냐?’ 선택해야 할 일이 있다면, 주님이 보시기에 좋은 길을 선택해야겠습니다.(물맷돌)

 

[그 누가 죽음을 맛보지 않고 불로장생할 수 있으며, 그 누가 제 목숨을 죽음의 세력에서 건질 수 있을까요?(시89:48,현대어) 나는 죽은 자를 일으키고 그들에게 다시 생명을 주는 자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죽는다 하여도 다시 살 것이다.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요11:25-26,현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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