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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맷돌 | 2021.09.10 22:38:07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아침편지2850] 2021년 9월 8일 수요일

 

동정심이 좀 더 강했더라면 … .

 

샬롬! 새아침입니다. 오늘도 내내 건강하고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한 심리학자에 의하면, 현재의 기억 70%는 이틀 뒤엔 잊어버리게 된답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즐겁게 배운 30%는 언제까지나 기억한답니다. 한 철학자가 ‘이것이 바로, 좋아서 하는 일을 잘하게 되는 이유’라고 설명했습니다.

 

만약 죽은 사람도 슬픔을 느낄 수 있다면, 죽음이 가장 슬픈 것은 역시 그 당사자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죽은 사람의 슬픔을 중심점(中心點)으로 삼고, 그 사람과의 원근관계를 따라서 슬픔의 파문이 번져갈 것입니다. 던져진 돌이 고인물 위에 일으키는 파문이 그렇듯이, 슬픔의 파문도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약해져서 마침내는 아주 없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장례식(기독교는 천국환송식)이 거행될 경우, 죽음의 당사자가 있고, 그의 유가족이 있습니다. 그리고 장례식에 참석한 조객들이 있으며, 그들을 멀리서 바라보는 구경꾼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결코 고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한 번은 당사자가 되고, 또 몇 번은 유가족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죽음은 그 어떤 사람에게도 남의 일이 아니지만, 그러나 때로는 마치 남의 일처럼 바라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기야 그 숱한 죽음을 모두 나의 일처럼 느껴야 한다면 얼굴에 눈물 마를 날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의 슬픔을 함께 슬퍼하고 남의 기쁨을 내 기쁨처럼 여기는 동정심이 좀 더 강했더라면, 세계역사는 이토록 어두운 방향으로 흘러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욕심은 남보다 좀 더 오래 살고 싶어 하게 되어 있습니다. ‘너무 오래 살면 도리어 욕이 된다.’고 입으로는 말하지만, 속마음은 오래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가족과 친지가 모두 떠난 뒤에 혼자서만 오래오래 살아남는 것은 상상만 해도 아찔합니다. 아내를 죽인 끔찍한 죄를 저지른 ‘판도라’의 주인공에게 신(神)이 내린 형벌은 ‘영원히 죽지 못하는 것’입니다.(출처; 인생의 열매들, 전(前)서울대 교수 김태길)

 

얼마 전, 어느 분과 전화통화를 하는데, ‘친정어머니께서 9월 초에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치 남 이야기하듯이 하기에 ‘의문’을 표했더니, 그분의 대답이 ‘살만큼 살다가 가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믿기 때문에 울지 않는 것이 상례(常禮)이지만, 이제는 어느 장례식장에서든지 ‘눈물이 없고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 될 것 같습니다.(물맷돌)

 

[주께서는 저 무덤에서 이 몸 건져주시고, 저 죽음의 구렁텅이에 아주 빠져 들지 않게 하셨습니다.(시30:3 현대어)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도 없고 슬픔도 없고, 우는 것도 아픔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전에 있던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계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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