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 아무도 보지 않을 때

한태완 목사 | 2011.05.23 07:35:51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옛날 어느 수도원에 훌륭한 원장이 있었다. 그는 많은 제자들 중에 특히 한 아이를 지극히 사랑했다. 그 아이는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못생겼고, 무엇을 가르쳐도 늘 쉽게 잊어버리는 아이였는데도 원장은 특별히 그 아이를 사랑했다. 그러니 다른 제자들의 불만은 대단했다. 그 불만이 쌓이고 쌓여 폭발할 지경에 이르렀다. 마침내 모든 제자들이 마당에 모여 스승인 원장에게 따졌다. 그러자 그는 조용히 말했다. "내가 문제를 내마, 그것을 풀어가지고 오면 내가 왜 이 아이를 특별히 사랑하는지 알게 될 게다."
원장은 제자들에게 작은 새 한 마리씩을 주고는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해질 때까지 그 새를 죽여 오라고 했다. 절대로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죽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질녘이 되자 제자들이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하여 수도원 마당에는 죽은 새가 쌓여갔다. 그런데 원장이 특별히 사랑하는 아이가 돌아오지 않았다. 한참 뒤 헐레벌떡 뛰어오는 아이의 손에는 작은 새가 산채로 있었다. 이를 본 제자들은 "저 바보는 원장님이 무얼시켰는지도 모르나봐!" 하며 비웃었다. 원장은 왜 새를 죽이지 못했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그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원장님께서는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새를 죽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아무리 조용하고 으슥한 곳을 찾아보아도 하나님은 보고 계셨어요. 그래서 새를 죽일 수 없었어요."
우리는 천이백만 인구가 사는 서울에서 군중의 시대를 실감한다. 군중의 힘은 그 성격이 매우 야만적이고 파괴적이다. 서로 낮선 사람들 틈 속에서 아무도 나를 주시하지 않는다는 안도감에서 무책임하고 무절제해진다. 이것이 오늘의 세속적 흐름이다. 이 거대한 세계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부름을 받아 구원의 감격을 함께 나누는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에클레시아인 교회는 결코 이 세상의 군중과 같이 맹목적 집단일 수가 없다. 그러나 교회가 점차 대형화되어가면서 그 안의 성도들이 또 하나의 군중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기에 시편기자는 본문에서 잠들기 전 침상에서 스스로 잠잠하여 자기의 성찰로 되돌아간다. 4절 말씀에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 지어다"하였다.
첫째로 아무도 보지 않을 지라도 범죄하지 말아야 한다.
여호수아 7장에 보면 아간이 여리고 성의 전리품을 숨긴 사건이 있다. 그 후 아이성과의 전투에서 패전하였다. 그 이유를 밝히니 아간의 범죄 때문임을 알고 그와 그의 가족을 죽였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마10:26) 아무도 보지 않기 때문에 범죄한다면 하나님이 보신다는 사실을 부정하니 사실상의 무신론자인 것이다. 우리는 지금 군중의 틈 속에서 누가 나를 보겠느냐 하며 교회 밖을 나가면 방심하여 범죄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고 당신 자신이 본다는 사실을 숨길 수는 없는 것이다.
둘째로 아무도 보지 않을 때도 경건한 생활은 실천되어져야만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구제를 하는 경건 생활이 훈련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경건과 선행이 되어버렸다.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말씀도 핵심을 여기에 있다. 제사장과 레위인도 보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강도 만남 사람을 도와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지나가 버렸다.
사마리아 사람의 위대한 점은 아무도 보지 않지만 하나님 앞에서 책임감을 느끼고 차근차근 실천하였다는 것이다. 밤 깊은 시간에 혼자서도 기도할 수 있는 경건의 사람이 필요하고, 아무도 보지 않는 때에도 선행을 기쁨으로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식으로 시위하는 마음으로 교회 봉사하는 사람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 같으면 봉사하지 않는다. 당신은 이 군중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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