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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곤 목사 | 2011.10.24 22:55:46 | 메뉴 건너뛰기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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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 집기

모처럼 집에 일찍 들어갔습니다. 6시 30분쯤 집에 들어가자 큰딸이 "아빠 왠일이야, 이렇게 일찍!"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일년 내내 집에 늦게 늘어간 것 같습니다. 특별하게 그렇게 매인 것도 아닌데 늘 의무감에 사로잡혀있고 무엇인가 해야만 바르게 사는 것처럼 산 세월 같습니다. 저녁 늦게 집에 들어가 아이들과 제대로 한 번 놀아주지도 못하고 밥 먹고 책보고 잠자기에 바쁜 세월로 보낸 듯합니다. 돌이켜 보니 50대가 되기까지 아이들과 외식 한 번 제대로 못하고 평범한 가정에서 다 가는 여름 휴가 한 번 가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쉬는 날 가족 나들이 한 번 제대로 못하며 지냈던 것 같습니다. 좋은 아버지, 오랫동안 아이들의 마음에 남아 있는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는 아버지가 되어야 하겠다고 생각은 가지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참 아이들에게 부족한 아버지였습니다. 늘 통장에 아무것도 없이 살았던 경제적인 이유가 첫 번 원인이기도 했지만 가족에게 우선순위를 두지 못한 것이 큰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목사가 되면서 우선순위를 하나님을 위하여, 다음에 교인을 위하여, 그 다음 가족에 두기로 마음 먹고살았던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족은 매정할 정도로 늘 우선순위에서 밀렸습니다. 그렇다고 특별히 믿음이 좋은 것도 아니고 알아줄 정도로 많은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당연히 해야할 습관처럼 그렇게 살았습니다. 얼마 전 쉬는 날 일이 있어 교회에 나와 일을 하고 저녁에 집에 들어갔는데 아이들이 케이크를 가지고 왔습니다. 무슨 케이크냐고 물었더니 오늘이 아빠 엄마 결혼 기념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전깃불을 끄고 분위기를 잡았습니다. 주방에서 일하고 있는 엄마를 불렀습니다. 딸들이 케이크에 촛불을 켰습니다. 몇 개냐고 물었습니다. "아빠, 그것도 몰라 18개 !" 아이들이 합창하듯 말했습니다. 결혼한지 몇 년이 된지도 모르게 무심하게 살았습니다. 아내의 생일도 아이들의 생일도, 심지어는 내 생일도 기억하지 못하고 사는 무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빠는 무엇을 기억하고 있어?" 작은 딸이 물었습니다. "응 아빠는 기억하고 있는 것이 별로 없어, 성탄절, 부활절..." "아빠는 결혼 기념일도 기억 못해?" 결혼한 지 벌써 18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 결혼 기념일 기억 한 번 제대로 못했고 아내에게 결혼 기념일 선물 하나 해본 기억이 없으니 참 부족하고 무심한 남편으로 살았습니다.

그래도 아무 불평없이 살아준 아내와 아이들이 고맙기만 합니다. 몇 년 전 중국에서 사업하시는 집사님께서 개업 예배 겸해서 초청을 하였습니다. 아마 그냥 오라고 하시면 가지 않을 것 같으니 집사님 부부가 지혜를 짜서 개업 예배라는 명목으로 오시라고 초청을 한 듯합니다. 50대가 되기까지 단 둘이 여행을 해보지 못했고 해외에 나가 본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늘 남의 신세를 지고 살면서도 펴놓고 남의 신세 지기를 무척 꺼려하는 성격이라 누가 초청해도 가지 않았습니다. 한 번은 아는 장로님께서 비행기 표를 구해 가져 왔지만 신세지기 싫고 당시 교회 형편을 볼 때 목사가 해외에 여행하는 것이 덕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정중하게 거절하였습니다. 그런데 공장 개업 예배라 하여 거절할 수 없어 아내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처음으로 해외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아내는 "처음으로 부부가 집사님 덕분에 해외에 나왔다"고 그 집사님과 대화하며 무척 감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기뻐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며 몹시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멋을 알고 부자인 남자를 만났으면 여행도 다니며 많은 즐거움을 누렸을 텐데 멋도 없고 돈도 없는 남편 만나 많이 고생을 한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백 여만의 생활비로 헌금하고 아이들 가르치고 다섯식구 생활한다는 것이 쉽지만 않았을 텐데 그래도 아내는 다시 태어나도 나와 결혼한다고 하고 아이들은 아빠를 사랑한다고 하니 참 고맙기만 했습니다.

아내의 과외비 시름을 덜어주고 어려운 선교사님을 돕기 위해 아이 둘을 선교사님 집에 보내었는데 오히려 그것이 더 큰짐이 되어 버렸습니다. 필리핀 선교사님이 아이들 데려간다고 하여 그러면 내 생활비 반반 나누어 쓰면 되겠다고 보냈는데 50대가 되어 좀더 좋은 아빠, 가족을 배려하는 남편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먹으니 경제적으로 교인들에게 부담을 주게 되어버렸습니다. 나 역시 예전에 내가 싫어했던, 교인보다 가족을 우선시하는 나이든 목사의 반열에 들어서게 되지 않았나 하여 몹시 마음이 무거워져 버렸습니다. 일찍 들어가 아이들과 함께 모처럼 저녁밥을 먹으며 젓가락 잡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아들이 왼손잡이라 젓가락질을 잘 하지 못했습니다. 아내는 가끔 나의 젓가락 잡는 모습을 보며 젓가락질을 잘 못한다고 했습니다. 밥을 다 먹고 콩집기 시합을 통해 젓가락질을 누가 잘하는가 내기를 하였습니다. 다들 자신이 있어했습니다. 큰딸이 먼저 "아빠, 나하고 내기해 !"라고 말했습니다. 아마 피아노를 치니까 자신의 손가락이 잘 발달되어 아빠정도는 넉넉히 이길 것으로 생각을 한 모양입니다. 결과는 딸의 패배였습니다. 아들과 아내도 나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둘째 딸만 아빠를 이겼습니다. 나는 젓가락질을 잘 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젓가락을 잡는 방법이 달랐을 따름입니다. 청빈한 목사, 좋은 아버지, 따뜻한 남편이 동시에 되기는 콩 잡기보다 쉽지 않습니다. 다 만족시킬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나는 내 방식대로 속임수 없이 젓가락으로 성실히 인생의 콩 집기 경주를 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콩 집기/섬기는 언어/김필곤 목사/2005.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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