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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홀씨> 132호: 메시아의 조상

김재성............... 조회 수 1979 추천 수 0 2005.02.12 10: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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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호 / 2004 년 12월 21일 발행 (부정기)

메시아의 조상/ 룻 4:13-33; 마 1:1-6   김재성/ 민들레성서마을지기



오늘 봉독한 마태복음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시작 부분이다. 여기에는 이례적으로 여자의 이름이 셋이나 나온다. 다말과 라합과 룻인데, 이들은 여자들일 뿐 아니라 매우 험한 인생을 산 사람들이다. 다말은 젊은 나이에 두 번이나 과부가 되고 우여곡절 끝에 시아버지와 사이에 아이를 낳게 된다. 라합은 여리고의 기생이었다. 룻도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이방여인이다. 마태복음은 왜 처음에 이런 여인들의 이름을 올린 것인가? 대림절 넷째 주일에, 이들 가운데 룻의 이야기를 통하여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1. 험악한 세월을 산 사람 룻

룻은 가난한 집에 시집을 와서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다. 베들레헴 출신의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은 그 땅에 기근이 들자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으로 가서 살았다. 무슨 일인지 그는 일찍 죽게 되었고, 나중에 나오미는 모압 여자들을 며느리로 맞이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룻이다. 룻은 먹을 것을 찾아 외국까지 온 이방사람에게, 더욱이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사람에게 시집을 왔으니 고생이 많았다 하겠다. 엎친데덮친 격으로  결혼한 지 10년 만에 그 집의 두 아들이 다 죽게 되어 룻은 청상과부가 되었다. 나오미는 고향에 풍년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먹는 것 때문에 왔다가 다시 먹는 것 때문에 돌아가는 것이다.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때 마을 사람들이 환영을 했는데, 그때 나오미는 이렇게 말한다.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들 마십시오.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몹시도 괴롭게 하셨으니, 이제는 나를 마라라고 부르십시오. 21 나는 가득 찬 채로 이 곳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나를 텅 비어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주께서 나를 치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불행하게 하셨는데, 이제 나를 나오미라고 부를 까닭이 어디에 있겠습니까?"(룻 1:20-21)

‘나오미’는 본래 ‘기쁨’이라는 뜻인데 이제는 ‘마라’(괴로움, 괴로운 여자)라고 불러달라고 한다. 얼마나 삶이 괴로우면 자기 이름마저도 부담스러웠겠는가. 나오미는 고향으로 오기 전에 두 며느리를 떠나보내고 혼자 돌아오려고 하였다. 한 며느리는 그렇게 했지만 룻은 나오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더러, 어머님 곁을 떠나라거나, 어머님을 뒤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는 강요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17 어머님이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 그 곳에 나도 묻히겠습니다."(룻 1:16-17)

이런 말을 한 것을 보면 룻은 참 정이 많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남편이 좋아서 시집을 왔겠지만 살다보니 시어머니에게 정이 든 것이다. 남편이 죽었어도 친어머니한테 돌아가지 않고 시어머니와 함께 살겠다고 하고, 시어머니가 본국으로 돌아간다고 하는데도 낯선 타국땅까지 따라간다고 하는 것이다. 나오미가 얼마나 잘 해주었으면 그럴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남녀 사이의 사랑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이렇게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도 아름다운 사랑이 있는 것이다. 남자들은 다 죽고 여자들만 남았으니 그 집에 슬픔과 통곡만 있을 것 같지만 이렇게 시어머니를 친어머니 이상으로 사랑하고 따르는 룻이 있었기에, 슬픔과 어둠은 걷히고 새날이 밝아올 수 있는 것이다.

2. 밝은 쪽으로 이끌어가는 사람

2장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면서 이야기의 분위기가 바뀐다. 2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오미에게는 남편 쪽으로 친족이 한 사람 있었다. 그는, 엘리멜렉과 집안간으로서, 재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은 보아스이다”(룻 2:1).

‘보아스’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빠름, 쾌속’이라는 뜻인데, ‘쾌활한’, ‘활력이 넘치는’과 비슷한 뜻이다. 실제로 그가 등장하면서부터 이야기는 절망에서 희망으로 변해가며 전체적으로 쾌활하고 활력이 넘치는 분위기로 변해간다.

연속극 같은 것을 보면 흔히 가난한 여주인공이 등장하고 그의 불행한 처지가 강조되지만 그에게 백마 탄 왕자님 같은 멋진 남자가 나타나면서 희망이 생기고 재미가 있게 된다. 흔히 그것은 <신데렐라> 모델이라 할 수 있는데, 흔히 그런 주제는 통속적이고 대개 여주인공은 미모가 빼어나고 남자는 돈이 많다는 설정이어서 상상력이 빈곤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 보면 룻 이야기는 아주 오래 된 <신데렐라> 이야기 같기도 하다. 그러나 신데렐라 이야기와 다르다. 룻이 아름다운 여인이었을 수도 있지만, 성서는 그의 외모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룻이 어떤 사람인지는 보아스의 말에서 알 수 있다.

10 보아스가 룻에게 말하였다. "이봐요, 룻, 그대는 주께 복받을 여인이오. 가난하든 부유하든 젊은 남자를 따라감직한데, 그렇게 하지 않으니, 지금 그대가 보여 준 갸륵한 마음씨는, 이제까지 보여 준 것보다 더욱더 값진 것이오. 11 이제부터는 걱정하지 마시오, 룻. 그대가 바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겠소. 그대가 정숙한 여인이라는 것은 온 마을 사람들이 다 알고 있소. (룻 3:10-11)

보아스는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 온 그 갸륵한 마음씨에 감동을 받았고 그뿐 아니라 온 마을 사람들이 그렇다. 11절에서 “정숙한 여인”은 “현숙한 여인”(개역)으로도 번역되는데 본래 히브리어의 뜻은 “유능한 여인”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히브리어로 ‘에셋 하일’인데, 2장 1절에서 보아스를 ‘유력한 남자’(개역) 또는 ‘재력있는 남자’(표준새번역)라고 할 때 쓴 히브리어도 ‘이쉬 깁보르 하일’이다. ‘하일’이라는 형용사는 ‘유능한’이라는 뜻인데 보아스에게는 ‘유력한’이라고 하고 룻에게는 ‘현숙한’으로 번역한 것이다. 우리말 ‘현숙하다’는 ‘어질고 깨끗하다’는 뜻이니, 유능하다는 말과는 거리가 멀다. ‘유능한 여인’을 ‘현숙한 여인’으로 바꾼 것은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가부장주의 때문이다. 잠언 31:10-31에도 이른바 ‘현숙한 여인’에 대해서 길게 나오는데, 그 내용을 보면 그는 현숙한 여인이라기보다는 유능한 여인이다. 그는 양털과 삼을 가공해서 돈을 벌고, 상인의 배와 같이 먼 곳에서 먹을 것을 구해오기도 하고, 일꾼들을 잘 관리하고, 부동산 매입도 신중하게 하고, 사업도 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입만 열면 지혜가 저절로 나오고, 혀만 움직이면 상냥한 교훈이 쏟아져 나온다고 한다. 이런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현숙한 여인상과는 다르다. 그는 유능한 여인이고 가정과 사람들을 환하게 만드는 빛나는 여인이다. 잠언의 이야기가 오늘날 여성들에게는 너무 짐을 지워주는 얘기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시대적 차이에서 오는 것이고, 그 핵심은 그 여인은 아주 적극적이고 유능하여 세상을 밝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룻이 보아스를 만나게 되는 장면들을 보면 룻은 그저 순종적인 순한 여성상은 아니다.

"밭에 나가 볼까 합니다. 혹시 나에게 잘 대하여 주는 사람을 만나면, 그를 따라다니면서 떨어진 이삭을 주울까 합니다."(2:2)

이렇게 말하는 자체가 수줍은 과부의 모습은 아니다. 자기에게 잘 대해 주는 사람을 적극적으로 찾는 모습이다. 성경은 그렇게 해서 그가 우연히 가게 된 곳이 보아스의 밭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우연이 아니라 일부러 그곳에 간 것일 수도 있다. 룻은 그냥 이삭줍기를 한 것이 아니라, 일꾼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여, 보아스와의 만남을 유도하고 있다.

“일꾼들을 감독하는 젊은이가 대답하였다. ‘저 젊은 여인은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사람입니다. 일꾼들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곡식단 사이에서 떨어진 이삭을 줍도록 허락해 달라고 하더니, 아침부터 와서 지금까지 저렇게 서 있습니다. 아까, 여기 밭집에서 잠깐 쉬었을 뿐입니다’”(룻 2:7).

이삭줍기는 성경에서 가난한 사람과 외국인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돌보기 위해서 법으로 제정된 것이다(레 19:9; 23:22; 신 24:19-20). 그러니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삭줍기는 수확이 끝난 빈들판이나 곡식단을 치운 곳에서 하는 것이지 곡식단 사이에서 할 수는 없다. 그런 요구는 일꾼들이 허락할 수 없는 특혜인데,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하니까 일꾼들은 들어줄 수도 없고 룻은 하루 종일 서서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결정권자인 보아스가 그녀 앞에 나오도록 유도한 셈이다. 보아스는 일꾼들에게 일어난 일을 듣고 나서는 룻에게 아주 호의를 보인다.

그는 룻에게, 다른 밭에 가서 고생하지 말고 그냥 여기서만 일하고, 자기 밭에서 일하는 여자들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이삭을 주우라고 한다. 아마도 이런 일을 빌미로 남자들이 여자에게 추근대는 일도 있었는지, 젊은 남자 일꾼들에게는 룻을 건드리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겠다고 한다. 목이 마르면 주저하지 말고 물단지에 마시라고 한다. 게다가 새참 때가 되니까 룻을 불러다가 같이 음식을 먹고 음식 먹는 방법까지 일러준다. 그리고 또 볶은 곡식을 내주었다. 또 일꾼들에게 일부러 곡식단에서 이삭을 뽑아 흘려서 룻이 줍게 하라고 일러두었다.

룻 이야기의 절정은, 룻이 낟가리 곁에서 누워 자는 보아스와 함께 누운 일이다. 나오미는, 마치 리브가가 야곱에게 축복을 가로챌 작전을 지시해주듯이, 룻에게 보아스를 사로잡을 계획을 짜주고 그대로 실행하게 한다. 룻은 시어머니의 지시대로 목욕하고 향수를 바르고 고운 옷으로 단장하고서 타작마당으로 내려가서 잠자고 있는 보아스의 발치께에 누웠다. 잠자다가 인기척을 느낀 보아스가 누구냐고 묻자, 룻은 이렇게 대답한다.

"어른의 종 룻입니다. 어른의 품에 이 종을 안아 주십시오. 어른이야말로 집안 어른으로서, 저를 맡아야 할 분이십니다." (룻 3:9)

이보다 더 로맨틱한 장면도 없을 것이다. 룻의 프러포즈는 주저함이 없다. 보아스가 애초에 룻에게 호감을 가진 것도 사실이지만 또 이렇게 로맨틱한 프러포즈를 받고서 더욱 좋아진 것 같다. 그는 그 자리에서 룻과 결혼하기로 결정한다. 다만 결혼하기 위해서 해결해야 할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그는 즉시 그것도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그 다음날 문제를 해결하고 사람들 앞에서 결혼을 공표하게 된다.

나는 룻 이야기를 읽으면서 주요섭의 원작 신상옥 감독의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가 생각이 났다. 거기 나오는 어머니(최은희 분)는 남편을 잃고 엄한 시어머니를 모시고 어린 딸과 함께 살고 있다. 남편의 친구인 화가 아저씨(김진규 분)가 그 집에 하숙을 오게 되면서부터 둘 사이에 그리워하는 애틋한 감정이 생기지만 결국 유교적인 관습의 틀을 깨지 못하고 헤어지게 된다. 영화는 여 주인공의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한 수작이지만, 어쨌든 그 영화를 보고나서 아쉬움은 어머니가 왜 그렇게 속으로는 좋아하면서도 적극적인 사랑의 표현을 하지 못하고 안으로만 삭이다가 끝내 포기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감독의 의도는 아마도 양반집 규수의 의식의 한계를 그리려고 한 것 같다. 그 두 사람과 대조적으로 그 집 하녀(도금봉 분)와 그 집을 드나드는 장사꾼(김희갑 분) 사이에 정분이 나는 것을 그리고 있다. 그들은 양반이 아닌 평범한 사람답게, 외로운 사람들끼리 만나서 사랑하고, 찬합을 준비하여 소풍도 가고, 남들이 뭐라 하건 말건 둘이 행복하게 산다. 분명 그 어머니는 우수에 잠긴 채 늘 자책만 하는 괴로운 상이지만 그 하녀는 씩씩하고도 행복한 모습이다.

우리는 최근까지도 이런 어머니 상을 현모양처 상으로 그려왔는데, 성경은 이미 3천여 년 전에 그렇게 적극적이고 용기 있는 여인상을 그리고 있다.

보아스가 룻을 유능한 여인이라고 칭찬한 것도 룻에게서 그런 용기와 밝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어머니를 따라와서 이방 땅에 살면서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사는 그 모습이 그가 보기에도 갸륵하고 복 받을 만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이제부터는 걱정하지 마시오, 룻. 그대가 바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겠소” 하고 말하는 것이다. 누구나 밝은 사람에게는 이끌리는 법이다. 그에게는 자기 것을 주고 싶고 주어도 아깝지 않은 것이다.

사실은 보아스도 ‘이쉬 깁보르 하일’ 즉 ‘유능한 사람’이다. 표준새번역은 ‘재력 있는 사람’이라고 의역하였는데 너무 좁은 의미로 한정한 것 같다. 그가 그저 돈 많은 사람이고, 룻이 그저 얼굴 예쁘고 현숙한 여인이어서, 둘이 사랑하게 되었다고 하면 그것은 통속적인 <신데렐라> 이야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보아스는 유능한 사람이고 그 또한 밝은 사람이다.

룻기를 보면 그가 얼마나 세심하고 자상하고 적극적인 사람인가 알 수 있다. 룻에게 호감을 가지면서 일꾼들을 시켜서 일부러 이삭을 떨어뜨리게 하여 룻이 이삭을 많이 줍게 만들기도 하고, 룻을 만났을 때는 “당신이 하나님의 복을 받을 것이다”“주님의 날개 아래 들어왔으니 모든 일이 잘 될 거다”하고 축복해 준다. 룻에게 새참에 초대할 뿐 아니라 밥 먹는 방법까지 가르쳐 준다. 집에 갈 때는 시어머니께 빈손으로 가지 말라면서 곡식을 되어 주었다. 룻과 결혼하기 위해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도 아주 적극적으로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그날이 가기 전에 해치워버린다. 그의 이름대로 그는 빠른 사람이고 쾌활한 사람이고 유능한 사람이다.

그래서, ‘에셋 하일’이 ‘이쉬 깁보르 하일’을 만난 것이고, 유능한 여자가 유능한 남자를 만난 것이고, 밝은 여자가 밝은 남자를 만난 것이다.

룻이 나오미를 따라올 때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라고 말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비밀을 알려준다. 룻이 하나님을 알고 믿은 것이 아니다. 그저 시어머니가 너무 좋아서 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을 믿겠다는 것이다. 나오미가 며느리 룻을 보아스에게 시집보내기 위해서 작전을 짜고 구체적인 지시까지 하는 것을 보면 매우 적극적이고 유능한 여인임을 알 수 있다. 마치 야곱에게 형 대신 축복을 받도록 지시를 내리는 리브가와 같다. 나오미에게 그런 적극성, 밝음이 있었기에 어쩌면 룻은 남편도 시아버지도 없는데 시어머니 한 분을 따라 그 낯선 타국 땅까지 올 수 있었다. 그 덕분에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이다. 그 덕분에 그도 유능한 여인이라는 소리를 듣고 또 유능한 사람 보아스를 만나서 복받은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중 고등학교 시절에, 내가 학교나 동네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대개 권위적이고 그랬는데, 교회에서 만난 어느 목사님은 미남은 아니지만 얼굴이 밝았다. 왠지 나를 멋있는 데로 이끌어줄 것 같았다. 그분이 좋아서 그분 하는 대로 기도하고 따라가다 보니 예수 믿게 되었고 은혜 받고 목사가 되었다. 사람은 밝은 데로 이끌린다. 나를 밝게 해주고 환하게 해주고 기를 살려주는 사람이 좋아서 따라갔는데 그가 예수 믿는 사람이어서 예수 믿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3. 주님의 날개 아래

보아스가 룻을 처음 만났을 때 한 말은 이렇다.

“댁이 한 일은 주께서 갚아 주실 것이오. 이제, 댁이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날개 밑으로 보호를 받으러 왔으니, 그분께서 댁에게 넉넉히 갚아 주실 것이오.” (룻 2:12)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행동은 흔히 ‘날개로 덮는다’는 은유로 표현이 되곤 한다.

“그 때에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가다가 너를 보니, 너는 한창 사랑스러운 때였다. 그래서 내가 네 몸 위에 나의 겉옷 자락을 펴서 네 벗은 몸을 가리고, 너에게 맹세하고, 너와 언약을 맺어서, 너는 나의 사람이 되었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16:8)

그런데 룻이 타작마당의 보아스 발치께에 누웠을 때 보아스에게 한 말은 이렇다.

“어른의 종 룻입니다. 어른의 품에 이 종을 안아 주십시오”(표준새번역 룻 3:9)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개역)

“당신의 옷자락으로 나를 덮으소서”(룻 3:9)의 “옷자락”이나 “하나님의 날개 밑으로 보호를 받으러 왔으니”(룻 2:12)의 “날개”는 히브리어로 같은 단어(knp)이다. 이야기가 진전됨에 따라, 결국, 하나님께서 룻에게 복을 베푸시는 것은 보아스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것은 소중한 사실을 알려준다. 룻이 보아스의 옷에 덮여서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께서 룻을 날개로 감싸주시는 행동의 일부라는 것이다. 룻이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지만, 룻은 보아스의 옷자락을 통해서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이다. 보아스의 밝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환하심을 느끼는 것이다. 보아스도 마찬가지다. 보아스는 룻의 유능함, 밝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환하심을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서로 이끌어주는 방법이다. 나오미가 룻을 이끌었고 룻이 보아스를 이끌었고 보아스가 룻을 이끄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 이끌리는 가운데 점점 더 밝은 데로 나가게 되고 결국은 우리를 날개 아래 보호하시려고 하는 하나님께로 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며 이렇게 탄식하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원하지 않았다. (마 23:37)

예수님은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사람들을 품으려고 하셨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거부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의 날개 아래에 있다.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라는 찬송가 478장 가사처럼, 우리는 주 날개 밑에 있을 때 진정한 평안과 안식을 취할 수 있다.

우리는 저마다 예수를 믿게 된 사연이 있다. 제가 어느 목사님의 밝음에 이끌려 믿게 되었듯이, 여러분도 그 누군가의 밝음에 이끌려서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밝음을 예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해야 한다. 그래서 이 시간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여러분도 또 다른 사람에게 밝은 사람이 되어 주어야 한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게 포근한 옷자락이 되어 주어야 한다. 날개가 되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이끌어 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밝은 사람, 기분 좋은 사람에게 이끌린다. 여러분 모두 예수로 인해 밝은 사람 기분 좋은 사람이 되기 바란다. 예수를 만난 사람답게 예수께 이끌린 사람답게 유능하고 밝은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예수께 인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룻 이야기는 그저 로맨틱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매우 파격적인 사회 개혁의 메시지를 담고 있기도 하다. 신명기 법전(신 23:3-4)은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했다. 이스라엘은 전통적으로 국제결혼을 금지했다. 또 자기들만 선민이라는 국수주의도 있었다. 이방 여인 룻, 유능한 여인 룻, 밝은 여인 룻은 이 엄청난 관습, 그 누구도 감히 도전하지 못하는 낡은 틀을 과감하게 깼다. 룻은 모압 여자이지만 나오미의 며느리가 되고 보아스의 아내가 되었고, 이스라엘이 칭송하는 다윗왕의 조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메시아의 조상이 되었다.

이처럼 유능하고 밝은 여인 룻은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승리하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룻의 승리는 그 자신만의 승리가 아니라 나오미의 승리이기도 했다. 룻이 보아스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자 이웃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15 시어머니를 사랑하는 며느리, 아들 일곱보다도 더 나은 며느리가 아기를 낳아 주었으니, 그 아기가 그대에게 생기를 되찾아 줄 것이며, 늘그막에 그대를 돌보아 줄 것입니다." 16 나오미가 그 아기를 받아 자기 품에 안고 어머니 노릇을 하였다. 17 이웃 여인들이 그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 주면서 "나오미가 아들을 보았다!" 하고 환호하였다. 그들은 그 아기의 이름을 오벳이라고 하였다. 그가 바로 이새의 아버지요, 다윗의 할아버지이다.(룻 4:15-17)

1장에서 나오미는 자기 이름 대신에 ‘마라’(괴로움)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하지만 룻 덕분에, 나오미는 ‘기쁨’이라는 뜻의 그 이름을 버리고 ‘마라’라는 이름을 쓰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이웃 사람들은 나오미를 축하하였으며, 룻을 “아들 일곱보다도 더 나은 며느리”라고 칭찬하고, “나오미가 아들을 보았다!” 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이것은 룻의 기쁨이 나오미의 기쁨이요 룻의 승리가 나오미의 승리임을 보여준다.

대림절, 성탄절의 의미는 무엇인가?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온 나오미가 마침내 “아들을 보는” 감격을 맛보는 것같이, 그리하여 ‘마라’의 여인이 되지 않고 마침내 기쁨의 여인 나오미가 되는 것같이, 절망 속에 있던 룻이 보아스를 만난 것과 같이, 죄와 어둠 속에서 번민하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다. 늘 내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마음에서 어두움을 몰아내지 못하고 염려하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 어둠을 한꺼번에 몰아내는 것이다. 그래서 밝은 얼굴 기분 좋은 얼굴, 사람들을 예수께로 이끄는 얼굴로 사는 것이다. 가장 불행한 여자 나오미가, 이방여자 룻이 메시아의 조상이 되었듯이, 우리도 예수로 인해 유능한 사람 밝은 사람으로 살아서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리 회개해도 마음이 어둡다. 아무리 은혜 받아도 돌아서면 독설이 가득하다. 우리 스스로 노력해서는 의로워질 수 없고 행복해질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에 오실 때 우리가 진정으로 밝아질 수 있고 선해질 수 있고 행복해질 수 있다.

룻이 보아스를 만나지 않으면 행복이 없고, 병아리가 암탉의 날개를 벗어나면 행복할 수 없듯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고는 밝음도 행복도 승리도 없다.

이 대림절 기간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계절에,
온전히 자기를 비우고 회개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 속의 죄악과 어두움을 온전히 몰아내기를 바란다.
밝은 얼굴로 사람들을 이끌고 밝은 얼굴로 자녀를 길러서 나오미 같고 룻 같은 믿음의 조상이 되기를 바란다.
이 대림절 기간에 우리를 환하고 밝게 해주실 분, 저 대림절 촛불처럼 우리 속에서 환하게 빛나실 분, 예수, 예수, 좋은 예수,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영접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결단의 기도:

주님,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듯이
우리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소망 가운데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세상 족보에는
여자의 이름을 올리지도 못한다지만
주님의 족보에는
다말과 라합과 룻의 이름이
자랑스럽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방 여인이고, 가난하고,
남편을 잃은 여인들이었지만
주님의 날개 아래 들어와
어둠을 몰아내고 어려움을 이겼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의 조상이 되고
메시아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주님,
룻이 용기 있게 살아서 밝은 생을 쟁취한 것처럼
나오미가 ‘마라’의 여인이 되지 않고
기쁨의 여인이 된 것처럼
우리도 주님 날개 아래서
어둠을 몰아내게 하소서.
밝은 생을 쟁취하게 하소서.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낙산교회 주일예배 설교04.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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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14 노력하는 천재 김장환 목사 2010-10-31 1969
25913 내 일처럼 사랑하십시오 김장환 목사 2010-07-25 1969
25912 생명의 신비 강안삼 장로 2009-12-16 1969
25911 다미엥의 기도와 십자가 file 이주연 2008-12-06 1969
25910 한국에서 온 사무엘 오현미 2007-09-27 1969
25909 매혹당한 자 브레넌 2005-12-29 1969
25908 알랙산더 대왕과 초상화 모퉁이돌 2004-05-04 1969
25907 어떤 젊은이의 사명선언 이주연 목사 2013-04-22 1968
25906 인공위성 위치 확인능력을 가진 바닷가제 김계환 2012-12-30 1968
25905 어머니의 뽀뽀가 나를 화가로 김장환 목사 2011-07-17 1968
25904 개쪽제비 개쪽제비 2011-03-10 1968
25903 모퉁이 돌 새롭게하소서 2010-11-19 1968
25902 아름다운 세상 김장환 목사 2010-10-12 1968
25901 암도 이겨낸 불굴의 정신력 김장환 목사 2010-09-13 1968
25900 나았다고 선포하기 김열방 목사 2010-04-29 1968
25899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라 강안삼 2009-05-15 1968
25898 가이사가 주님이시다 이동원 목사 2009-03-02 1968
25897 말을 관리하면 인생이 행복해집니다. 김필곤 2008-02-06 1968
25896 강림절 file 신경하 2007-12-18 1968
25895 림 청 이야기 해럴드 2006-12-07 1968
25894 [본받아]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함에 대하여 토마스 2005-04-08 1968
25893 감동을 주는 말 file 설동욱 목사(서울 예정교회) 2013-12-24 1967
25892 위협하는 듀엣노래 김계환 2012-04-26 1967
25891 사자의 청혼 한태완 목사 2011-12-03 1967
25890 3E 역할 김장환 목사 2011-05-27 1967
25889 열대야 피서 주광 목사 2011-03-16 1967
25888 가면 더 좋고 주광 목사 2011-02-03 1967
25887 영화 E.T. 구경 김장환 목사 2010-05-28 1967
25886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있을까요? 김장환 목사 2009-12-23 1967
25885 감정을 억제할 때 강안삼 장로 2009-12-03 1967
25884 제롬의 동상과 해골 김학규 2009-11-19 1967
25883 가을 없는 가을 비 속에서 이주연 2009-10-23 1967
25882 새로운 피조물 권성수 목사 2009-09-10 1967
25881 위로의 품 권성수 목사 2009-08-07 1967
25880 좋은 만남 복된 만남 고도원 2009-05-06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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