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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홀씨> 제134호: 우리속에서 솟아나는 샘물

김재성............... 조회 수 1900 추천 수 0 2005.02.12 10:4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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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호 / 2005 년 1월 7일 발행 발행처: 민들레성서마을    발행 및 편집인: 김재성



요 4:5-26

1.“물 좀 주소”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피로하여 우물가에 앉으셨다. 예수께서 피로했다는 표현은 성서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독특한 것이다. 요한복음 기자가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부인하고 신령한 지식만 추구하는 영지주의적 가르침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피로하고 우리와 같이 목이 말랐으며, 우리에게 물 좀 달라고 말을 걸어오셨다는 것이다. 안병무 선생님은 이 모습을 “구걸하는 초월자”라고 표현하였다. 어떻게 초월자가, 그리스도께서 무언가 필요한 것이 있고 우리에게 무엇을 구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일반인의 상식에 어긋나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는 목마른 분으로 나타나며,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직전에도 “목마르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요 19:28).

이렇게, 초월자이신 분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시는 사건 때문에, 복음이 시작되고 새로운 일이 시작된다. 새해의 시작도 그렇다. 우리에게 말 걸어오시는 주님을 만나지 않고는 새해는 별 의미가 없다. 그저 출퇴근을 하고 열심히 돈을 벌면서 늘 바쁘게 지내다 보면 어느 새 일년 52주가 다 지나갔다고 푸념을 하게 될 것이다. 새해에 어떤 소원들을 갖고 계획들을 갖고 있는가? 그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인가? 그 소원들이 어떻게 생긴 것인가? 주님이 우리에게 말 걸어오지 않았으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한때 한대수의 <물 좀 주소>라는 노래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물 좀 주소”라는 그의 절규가 무언가에 목말라 있던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이 새해 아침에 그 한대수의 그 호소하는 목소리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나에게 물 좀 달라고 말을 거시는 그분, 나 역시 목이 말라 이 우물가에 나왔지만, 나에게 말을 걸어주시고 물 좀 달라고 하는 그분을 만날 때, 우리 생은 변화될 것이다. 목마른 주님을 안타깝게 여기게 되고, 주님께 물 한 잔이라도 드리고 싶은 마음이 우리 속에서 치밀어오를 때, 우리가 주님을 위해 우리 가진 것을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것을 바쳐 주님의 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2. 거절 또는 회피

사마리아 여인도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저 물을 길으러 나온 것일 뿐 별로 재미난 일이 없었다. 하지만 목마른 예수, 물 좀 달라고 하는 예수를 만나면서부터 흥미진진한 일들이 시작된다. 먼저 예수의 요구는 말이 안 되는 것이라는 것이 그 여인의 첫 번째 생각이다. 유대인 남자는 대낮에 거리에서 여인과 말해서는 안 되었고, 그들이 멸시하는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남자든 여자든 불문하고 상종을 해서는 안 되었다. 그런데 예수는 이런 상식과 관습을 깨고, 파격적으로 그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건 것이다.

사마리아와 유다의 갈등은 매우 뿌리 깊은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 통일국가 이스라엘은 솔로몬이 죽은 후 기원전 922년에 남북 왕국으로 분열이 된다. 북쪽 지역은 사마리아 지역 세겜에서 예배를 드렸다. 기원전 722년 앗수르는 북왕국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혼혈정책을 썼다. 이스라엘 상류층을 앗수르로 이주시키고 앗수르인들을 사마리아로 이주시켜 혼합종족을 만들었다. 유대인들은 이런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의 노예보다 더 경멸하였다고 한다. 나중에 남왕국 유다도 바빌론에 의해 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갔다. 하지만 남왕국에서 끌려간 유대인들은 자치 구역에서 자기들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살 수 있었다. 그들은 나중에 포로생활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게 되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을 철저하게 배제했다. 그러자 격분한 사마리아 사람들은 기원전 4세기에 알렉산더 대왕의 허락으로 그리심산에 자신들의 성전을 건축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경전을 모세 오경 다섯권 만으로 사용하여, 유대인들과 완전히 분리가 되었다. 그후 사마리아와 유다 사이에는 서로 공격하고 살육하는 일들이 이어졌고, 더욱 적대감의 골은 깊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가 여인을 만난 곳은 사마리아 지역에 있는 야곱의 우물가 바로 세겜지역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보면, 그 여인이 예수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여인의 거절에는 사마리아인으로서의 서러움과 울분이 배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여인의 그런 태도는 건방지거나 인정 없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똑똑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만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이 여자가 정오에 물 길러 온 것을 두고, 아마도 사람들이 우물에 자주 나오는 아침이나 저녁 시간을 두고 땡볕이 내리쬐었을 정오에 온 것은 뭔가 떳떳하지 못해서 사람들을 피해서 온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었다고 하니 그럴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그런 점 때문에 그 여인은 자기를 안으로 걸어 잠그고 살아 온 것 같다. 예수께서 말을 걸어오시는 것은 그녀에게 중요한 기회일 수도 있는데, 그녀는 이렇게 한편으로 똑똑하고 또 한편으로 자기를 닫아 잠그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거부하고 회피한 것이다.

3. 허세를 부림

예수는 따지듯이 묻는 그 여인에게 똑같이 따지거나 나무라지 않고 전혀 다른 방향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것은 유대인이냐 사마리아인이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사, 선물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선물은 위에서부터 오는 것이다. 그것은 땅을 파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은총이다. 하나님은 지금 이 여인과 대화하는 바로 그분을 통해서 영원한 것을 주시려고 하는 것이다. 예수는 그것을 멋지게 한 마디 말로 표현했다. "네가 하나님의 은사를 알고, 또 너에게 물을 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도리어 네가 그에게 청하였을 것이며,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10절) 그 여자는 우물에 생수를 길러 왔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은 그것과는 다른 생수라는 것이다.

그러자 그 여자는, “선생님, 선생님에게는 두레박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떻게 나에게 생수를 구해 주시겠습니까? 선생님이 우리 조상 야곱보다 더 위대한 분이라는 말입니까?”(11-12절) 이렇게 묻는다. 역시 그 여인은 당당하고 똑똑하다. 그렇지만, 야곱을 “우리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데서 어떤 허세를 읽을 수 있다. 야곱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시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조상이다. 물론 사마리아 사람들도 거슬러 올라가면 야곱의 후손이지만, 그들에게는 이방사람들의 피가 섞여 있었으니까, 유대인 같이 직계 후손은 아니다. 조상이나 혈통의 순수성을 따지는 것 때문에 그들 자신이 유대인들로부터 그렇게 멸시를 당했는데, 또 다시 예수 앞에서 여전히 조상을 따지는 것으로 허세를 드러내고 하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그 여자의 본 모습이 아닐지도 모른다. 적 앞에서 깃털을 부풀게 하여 자기를 크게 보이게 하는 새처럼, 그 여자는 그런 말을 둘러대면서 예수 앞에서 자기를 한껏 부풀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본래 자신을 내세울 것이 없고 열등감에 젖어 있는 사람이 조상이나 족보를 내세우는 것이다.

4. 하나님의 선물

그 문제를 간파한 예수는 그 여자의 말을 절대로 따라가지 않는다. 유다와 사마리아의 관계도 무시하고 조상 얘기도 무시한다. 그리고 늘 문제의 본질로 직접 들어간다. 아까도 하나님의 선물, 생수 이야기를 했고, 지금도 다시 생수 이야기를 한다. 그 여자가 마침 생수를 길러 온 것을 보고, 예수는 생수의 은유를 사용하여 그 여자가 이해하기 쉽고 또 그 여자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해주신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13-14절) 하나님의 선물은 바로 이것이다. 그 사람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이요, 이것은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다.

바로 이것이다. 이 여인이 자기 식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절대로 하나님의 선물을 받을 수 없다. 끝까지 자기 생각을 고집하고 상식과 관습을 내세우고 조상을 들먹이고 자기 자존심을 내세우는 한 늘 부끄러움을 가지고 숨어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적대감과 분노를 품고서 굴절된 생을 계속 살 수밖에 없다. 남들이 안 나오는 시간에 열심히 물을 길러 오지만, 허리가 휘어지게 물을 길어 날라도 진정한 행복은 없다. 하나님의 선물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선물은 우물에 가서 바가지로 퍼오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 솟아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은유도 참 은혜롭다. 하나님의 선물이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 솟아나는 것이라고 한다. 여러분은 산속에서 샘물이 솟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얼마나 아름답고 신비한가? 그런 것이 내 속에서 솟고 그것도 영원한 생명수라고 하니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선물인가? 우리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고 우리 속에 그것이 이미 있다는 말이 아닌가?

박 대통령 시절에 포항앞바다에서 유전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온 국민이 기대에 부푼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헤프닝으로 지나가고 말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말 동해에서 기술자들이 엄청난 천연가스가 매장된 것을 찾았고 거기에 파이프를 박아서 끌어올리는 데 성공을 하였다. 이미 울산 지역에서 그 가스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석유 한 방울 안 나는 나라라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는데 이젠 우리도 적으나마 산유국이라고 한다. 이런 것은 우리 고정 관념을 깨는 것이다. 우리 속에 보배가 있는데 우리는 모르고 지내는 것이다. 그 엄청난 천연 가스를 그 누군가 적극적 사고를 가진 사람이 구멍을 뚫고 뽑아올리기 전까지는 다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땅속에 엄청난 지하수가 있어도 거기에 파이프를 박지 않으면 우리는 물 한 방울 마실 수 없다. 파이프를 박았어도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있어야 길어 올릴 수 있다.

오늘 예배의 부름에서 함께 읽은 말씀이 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에 이른 것과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이것은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이다”(요 7:37-39).

여러분 속에 지하수처럼 잠재되어 있고 유전처럼 침묵하고 있는 그 은사들, 그 하나님의 선물들을 끌어내야 한다. 솟아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건강할 수 있고 일할 수 있고 선교할 수 있다. 우리가 억지로 노력해서 일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것은 허리 휘도록 힘들여서 물을 긷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건 내가 쓰고 나면 남에게 줄 것이 별로 없다. 하지만 속에서 솟아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기쁘게 나누어줄 수 있는 것이다. 교회는 이런 은사를 나누는 은사 공동체이다.

5. 샘의 근원을 막고 있는 것들을 제거하라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기만 하던 그 여인은 마침내 예수의 말씀을 들으면서 본질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여인은 마치 제정신이 든 사람처럼, 예수께 다시 목마르지 않고 다시 물 길으러 오지 않아도 되도록 생수를 달라고 한다. 그러자 예수는 그 여인에게 뜻밖에도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너라”고 하신다(16절). 그러자 그 여자는 “나에게는 남편이 없습니다” 하고 딱 잡아뗀다. 이것이 흔히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어느 정도는 가면을 쓰고, 허세를 부리면서, 늘 본질은 비켜가면서, 지엽적인 것 가지고 빙빙 도는 이야기만 하는 것이 서로에게 예의 바른 것이고, 무리가 없는 것이다. 혹시 누가 본질적인 것을 건드리기라도 하면 일단 껍질 속으로 움츠러들거나, 어느 선에서 차단하는 것이 현명하다.

그러나 예수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 여자에게 말한다. “남편이 없다고 한 말이 옳다. 당신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도 당신 남편이 아니니, 제대로 말하였다.”(18절) 이로써 예수는 그 여자가 마지막까지 감추고 있으려고 한 것, 그것을 끄집어내라고 한다. 마지막까지 절대로 깨뜨리지 않으려고 한 것, 그것을 깨뜨리라고 한다. 자기는 깨뜨리지 않으면서 남의 얘기만 하고 듣기만 하고 먹을 생수만 달라고 하는 그 여자에게 “자기 속에서 생수가 솟아나게 하려면 먼저 자신을 깨뜨리고 그 속에서 나오라”고 하는 것이다. 아무리 지하수가 많고 파이프를 박아놓았으면 무엇하나. 그 파이프가 잡다한 쓰레기들로 막혀 있으면 지하수는 솟아날 수 없다. 막힌 것을 뚫어야 한다. 그것은 자기가 절대로 포기하지 못하는 아집, 절대로 밝힐 수 없는 부끄러운 것 등등일 수 있다. 그 여인에게는 남편을 다섯이나 바꿔가면서 지금도 정식 남편이 아닌 남자와 동거를 하는 삶이다.

예수는 어쩌면 그 여자가 부끄러워하거나 아파할 수도 있는 문제에까지 파고 들어가서 곪은 것을 터뜨려 버린다. 늘 그 상처 때문에 아파하면서도 그 환부를 감추기에만 급급했던 그 여자는 이제는 더 이상 감출 필요가 없게 되었다. 바로 이 순간 그 여자는 새롭게 태어나며, 예수와도 새롭게 만난다.

“선생님, 내가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19절)

이것이 새롭게 태어난 그 여자의 감격에 찬 첫 마디이다. 그 말에서 새로운 세계에 눈뜬 사람의 감격과 떨리는 음성을 느낄 수 있다. 그 여자는 어느새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 있다. 그렇게 예수를 무시하던 사람이 갑자기 최고의 찬사를 예수에게 돌리고 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달려가서 동네 사람들에게 “내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히신 분이 계십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 하고 전하기까지 한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는 늘 부끄러워하고 감추려고만 했던 그가 이젠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예수를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마음뿐이다.

무엇이 사람을 이렇게 바꾸어 놓을 수 있는가. 교육도, 혁명도, 그 무엇도 사람을 이렇게 바꾸어 놓지는 못한다. 뭐라고 이름을 붙여야 할지 모르지만, 예수께서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서 이것이 가능했다. 사람을 겉모습만으로 판단하지 않고, 늘 새로운 가능성에서 새롭게 대하며, 마지막 남은 허세의 껍질마저도 깨뜨려버리고, 감동과 떨림이 있는 본래의 자아와 부딪치고 만나는 방식이다. 그리하여 그 사람 속에서 생명의 샘물이 터져 솟아오르게 만드는 방식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것이 있을 수 있다. 우리를 생수의 근원에서 차단되도록 막는 것들, 그것은 우리 각자에 따라 다 다르다. 그것은 개인의 콤플렉스, 죄의식, 열등감일 수도 있고, 풀리지 않는 인간관계일 수도 있고, 돈 문제나 직장 문제, 진학문제일 수도 있고, 남녀관계나 부모 자식 간의 애증의 감정일 수도 있다. 이런 게 없는 사람, 이런 게 없는 사회는 없다. 다만 그것을 지닌 채 사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빼내고 생수에 근원에 잇대어 사는 사람이 있다. 우리가 손톱 밑에 가시만 들어가도 빼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데, 이상하게 이런 정서적인 가시들은 더 위험한 것인데도 방치를 하고서 꾹꾹 참으면서 살아간다. 그러니까 자꾸만 인간이 굴절되고 나아가 생이 굴절되는 것이다. 내게 말 걸어오시는 예수, 그분을 영접하고 사는 사람은 그분이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막힌 곳을 뚫고 생수의 근원에 잇대어 자기 속에서 솟아나는 생수를 마시는 사람이다. 새해에는 여러분들이 이런 생명의 생수를 충분히 마시고 나누어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생수의 근원에 잇대지 못하도록 여러분을 막고 있는 그것을 용기 있게 깨뜨리고 끄집어내기를 바란다.

이런 시원한 샘물은 우리 신자들 개개인 속에서만 솟아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인 교회에서도 솟아난다. 작은 샘물들이 모이면 생명 강을 이루게 된다. 교회는 이런 생명강이 흐르고 넘치는 곳이다.

지난주에 말했듯이, 우리 교회는 신앙으로 살아온 교우의 믿음의 터 위에 세워졌고, 여러분들이 온갖 정성을 다 바쳐서 건물을 세웠다. 20년간 교회 건물이 없이 주일 예배만 드리고는 흩어져야 했던 교우들이 이제 마음을 두고 와서 기도하고 일하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믿음의 반석을 주셨는데,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 곳이 이 이상의 장소가 어디 있겠는가. 이곳이야말로 우리에게 말 걸어오시는 주님을 만나고, 목마르다고 하시는 주님께 물 한 잔이라도 드릴 수 있는 곳이다.

우리가 이 믿음의 터전에서 예배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 속에서 생수가 터져 나오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우리 속에서 막힌 곳을 뚫고, 시원한 생수, 영원한 샘물의 근원에 잇대어 살기를 바란다. 날마다 약수터에 가는 대신에 여러분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쳐 자신도 복을 받고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생명 운동을 일으키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이 낙산교회가 많은 사람들이 와서 생명의 샘물을 마시는 영원한 생명강이 되도록, 이 한해 기도하고 노력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낙산교회 05.1.2 주일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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