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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표지400.jpg하동-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햇볕같은이야기시리즈21)

 

저자/최용우  

출판일/2020.12.31

출판사/교보문고 퍼플

분류/종교 기독교(개신교) 

크기/신국판 A5 153X225

페이지/320쪽

가격/14,300원

ISBN 978-89-24-060997

구입링크 https://c11.kr/031yw

 

 

 

 

 

 

 

 

 

 

 

 

 

 

 

 

[책구입]<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320쪽 14300원 https://c11.kr/031y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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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저는 산책을 하다가 공원 의자에 앉아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작은 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걸어갑니다. 유치원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것일까요? 엄마랑 시장에 가는 것일까요? 아빠에게 가는 것일까요? 그거야 알 수 없지만 다정한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행복’을 그림으로 그리라면 저 모습이지 싶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과 동행’이라는 큰 주제를 붙잡고 씨름하고 있었기 때문에 엄마와 딸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저것이 바로 동행이지...” 하고 혼잣말을 했습니다.
저는 ‘하나님과 동행’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저를 속 시원하게 해 줄 책이나 자료를 찾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은 뜬구름 잡는 식의 ‘개념적’글이 많고 자신의 경험이 아니라 ‘이렇게 하면 된다’...카더라... 식의 글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렇다면 내가 한번 ‘하나님과 동행’이라는 것을 경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성경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그날까지 하나님께서 우리와 어떻게 동행하시는지에 대한 ‘동행기록’입니다. 저는 구약성경을 꼼꼼하게 읽으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찾아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하나님과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동행한 깊은 이야기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만듭니다.

 

<추천사>
오랫동안 지켜본 최용우 전도사는 소탈한 성격에 꾸밈없이 진솔 하였고 예수님을 닮은 제자였다. 그의 인간적 매력을 표현하자면 마치 깊은 숲속 옹달샘에서 떠온 물로 상큼한 봄나물에 오래 묵은 재래식 된장을 넣어 끓인 구수함이 배어나오는 것 같다. 그 누구와도 거리감이나 차별함이 없는 친근함과 사랑이 넘치는 인격의 소유자였다.
햇볕같은이야기 시리즈 21번째 책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진리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 마음, 삶을 깨우치게 하여 참 믿음과 바른 신앙으로 인도하는 내용이다.  책을 읽고 최전도사를 다시 보게 되었다. 시대를 바르게 읽고 성경에서 답을 제시하는 그의 깊고 깊은 통찰력은 어디에서 나올까 생각해 보았다.
그는 세상에 때 묻지 않으려 자신과 부단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의 글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한국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엿보였다. 바른 복음만이 한국교회를 세울(회복)할 수 있다는 일념이 보였다. 그의 글에는 서재에 박혀서 방대한 양의 독서를 하고, 기도의 방에서 야곱처럼 씨름하는 모습과, 산행을 비롯 일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모습이 잔뜩 묻어 있었다.
<햇볕같은이야기>를 30년 동안 한눈팔지 않고 이끌어온 저력으로 21번째 펴내는 책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어린 종의 신앙고백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결정체요 주님께서 한국교회를 사랑하시여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라 믿어 확신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추천한다. 

-강원도 정선 생명나무교회 담임목사  황 금 열

 

[책구입]<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320쪽 14300원 https://c11.kr/031yw

 

<꾸민순서>
1장 하나님과 동행
2장 성경읽기
3장 대화와 정결
4장 가문의 영광
5장 지혜와 기도
6장 심판과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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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구입]<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320쪽 14300원 https://c11.kr/031yw


<내용 미리보기>

 

1.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어떤 남자 둘이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 달려 속력을 내다가 그만 교통경찰에게 걸렸습니다. 알고 보니 두 사람은 ‘목사님’들이었습니다.
“아실만한 분들이, 천천히 다니십시오. 사고 납니다.”
그러자 뒤에 탔던 목사님이 자기도 모르게 말했습니다.
“경찰관님! 걱정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니까용”
그 말을 들은 경찰관은 즉시 스티커를 꺼내며 말했습니다.
“그럼 스티커를 끊겠습니다. 정원 초과 벌점 10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거의 습관적으로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라는 말을 합니다. 과연 하나님은 그 오토바이에 함께 타고 계셨을까요?
성경에 에녹은 365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 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어떻게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라는 아들을 낳은 이후부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므두셀라’라는 이름의 뜻은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라는 뜻입니다. 므두셀라의 나이를 계산해 보면 노아의 홍수의 때와 일치합니다. 노아가 태어날 때 므두셀라는 369세였고, 므두셀라가 969세에 죽은 그 해에 홍수가 일어나 온 세상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에녹은 므두셀라가 죽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온다는 것을 알고 늘 깨서 준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베드로후서3:10) 늘 세상 끝날을 생각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비결이었습니다.
자, 우리도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 봅시다.
하나님을 오토바이에 태워 모시고 열심히 달려 보자구요.^^ (6260)

 

2.솔직한 고백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로 저는 축복받아 부자가 되지도 못했으며, 몸의 병이 치료함을 받지도 못했으며, 소심한 성격문제도 고침 받지 못했으며, 게으른 습관도 고쳐지지 않았으며, 버럭 하는 성질도 그대로이며, 예수님을 믿고 저는 특별히 더 나아진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로 저는 마음으로 죄를 짓는 일이 확 줄지도 않았고, 거짓말 하는 것도 변하지 않았고, 자랑질이나 교만한 마음도 그대로이고, 남을 판단하는 것도 그대로이며,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저는 특별히 더 나아진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로 저는 안 믿고 살 때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이렇게 저렇게 살아야 한다고 하는 설교나 말을 들으면 솔직히 양심이 많이 찔리고 부끄럽습니다.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로 내가 받은 최고의 축복은 눈에 보이는 육체적인 축복이 아니라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은 변한 것이 없지만 나의 ‘신분’이 하나님을 뵈올 수 없는 사람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나의 부족함과 죄악과 바뀌지 않는 성격과 생활습관들이 전혀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냥 잘 살고 있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보니 나의 연약함이 눈에 보여 그것이 부끄럽고 밉고 안타깝고 쪽팔립니다.ㅠㅠ
그래서 저는 늘 회개하며 근신하며 삽니다. (6261) 

 

3.하나님을 깊이 알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아는 만큼 하나님이 보이고, 아는 만큼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임스 패커라는 학자는 “성경을 연구해 보니 ‘믿음이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표면적으로가 아니라 내면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착한 일을 하면서 선한 사람으로 살아가겠습니다.’ 하는 개과천선의 고백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겠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안 믿는 사람들보다도 더 죄를 많이 짓는다니까.” 하면서 비아냥거리지만, 그것은 진짜 뭘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죄를 안 짓고 착한 사람이 되겠다는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을 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다는 고백은 ‘하나님을 모른다’는 고백과 같습니다. 또한 아무리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도 하나님을 모르면 그거 ‘로또’입니다. 안 맞습니다. 안 맞는 로또 들고 헛된 꿈을 꾸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속였던 사탄(뱀)은 오들도 여전히 우리를 속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선한 사람이 돼. 돈도 많이 벌고 착한 사람이 된다구... 예수 믿으면 선악을 알게 되어서...”
아닙니다. 뱀에게 속지 마세요. 예수 믿으면 ‘선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생명을 얻는 사람’이 되어 눈이 밝아져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6262)
 
4.인격이신 하나님

 

저는 잠자리에 누워 눈을 감고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왜?”
“제게 몇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뭐냐?”
“첫째는 하나님의 손을 한번 잡아보고 싶습니다.”
“지난번에는 얼굴을 한번 보고 싶다더니?”
“제 소원은 그때그때 변해요....”
그렇게 모노드라마를 하면 잠이 듭니다.
하나님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눈높이에 맞추어 인간과 소통하시려고 인간의 몸을 잠시 빌려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인격이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수많은 표현 중에 단지 한가지일 뿐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인격이신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뜻입니다. 나의 감정과 하나님의 감정이 서로 통하는 방법은 ‘인격이신 하나님’과 만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창1:26)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닮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닮은 것입니다.
제가 만난 인격이신 하나님은 너무나도 ‘인간적인’ 분이셨습니다. 거룩한 위엄이 있어 그 앞에 나아가려면 덜덜덜 달달달 떨리는 분이 아니라, 방귀도 뿡뿡 꾸고 딸꾹질도 하시는 그런 인간적인 소탈함이 가득하고 장난끼가 많은 개구쟁이 같은 분이셨습니다. (6264)

 

5.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분이시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마도 햄버거 가게 앞에 꼬부라진 지팡이를 들고 하루 종일 서 있는 할아버지 같으실까요? 아니면 하얀 수염을 휘날리는 산신령 같으실까요? 동양적인 정서에서는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증적인 서양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말 육신의 아버지처럼 자상하게 나의 말을 다 들어주고 “괜찮다. 괜찮어.”라고 해 줄 보이는 하나님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신부(神父, Priest)제도가 생겼습니다. 神父 즉 하나님 아버지(의 대리자)입니다. 신부는 천주교, 성공회, 정교회, 오리엔트정교회의 성직자이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사제’입니다.
신부는 고해성사(告解聖事)를 주관하는데, 신자가 죄를 고백하면 ‘그 죄는 용서를 받았다’하고 선언해 줍니다. 제가 천주교인이 아니어서 그쪽 동네를 잘 모르기 때문에 이 정도만 말합니다.
기독교에서는 모든 성도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직접 죄를 아뢰고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만인제사장설’을 믿습니다. 기독교의 성직자를 목사(牧師)라고 하는데 pastor, 또는 minister 또는 rector입니다.
목사는 하나님과 신자 사이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하는 천주교의 ‘신부’가 아닙니다. 목사는 신자들을 돕는 ‘서비스맨’의 역할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자칭 ‘주의 종’이라고 하면서 신자들로부터는 ‘종님’으로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죠.
하나님에 대해서 서양적인 정서로는 신부(神父)의 존재와 같이 매우 구체적이고 실질적입니다. 동양적인 정서로는 아직 하나님에 대한 인상은 매우 ‘신비적인’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만난 하나님은 산신령같은 외모로 구름을 타고 다니시는 분은 아니셨습니다. (6265)

 

6.조용히 부름

 

저의 둘째 딸이 어려서 유치원 다닐 때 항상 차가 오는 정류장까지 손을 잡고 데려다 주곤 했습니다. 그 거리가 꽤 되는데 밝은이는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들을 쫑알쫑알 이야기 합니다. 그러다가 할 말이 없었던지 “아빠” 하고 불렀습니다. “응?” “그냥 불러 봤어요.”
잠시 후에 다시 “아빠” 하고 불렀습니다. “응?” 또 “아빠” “응?”
아하! 이 녀석이 지금 부르기 시합을 하고 싶은 것이로구나! 눈치 챈 저는 다정하게 “왜?” 하고 웃으면서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정류장에 도착할 때까지 “아빠” “응” “아빠” “응” “아빠” “응” 부르고 대답하는 아빠와 딸의 코미디는 계속 되었습니다.
딸이 차에 오르는 순간까지 “아빠” “응” “아빠” “응, 아빠는 네가 부르면 언제나 응이야.” 미처 밝은이가 “아빠”를 부르기 전에 차 문이 닫혔습니다. “이야! 아빠가 이겼다....”
그때 창문이 열리고 작은 머리 하나가 나오더니 “아빠아아아아아아....!!!!” 점점 멀어져 가는 차.... (음, 집요한 녀석...) 저는 “응”하고 혼자 대답을 하며 웃음 띤 얼굴로 집으로 걸어 내려왔습니다.
“주님..........” 하고 조용히 불러 봅니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 “응” 하고 대답을 하십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내 생각인 줄 알았는데 영이 깨어나고 보니 그것은 성령 하나님의 음성으로 ‘분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저의 ‘부르기 시합’은 항상 제가 집니다. 제가 부르면 하나님은 언제나 “응”하고 다정하게 대답하십니다. 지금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주님을 불러 보십시오. 주님께서 “응”하고 대답하시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불러 보세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훈련은 수도원에서 초보 수도사들이 하는 수도의 기초 중에 기초입니다.  (6266)

 

7.하나님의 음성

 

스피커 중에 가장 비싼 스피커는 저음을 내는 우퍼 스피커입니다. 우퍼라는 것은 소리를 진동시키는 둥근 판인데, 공연장 같은데서 엄청 덩치가 큰 스피커 안에 둥근 판이 둠 둠 둠 하면서 떨리는 것을 볼 수 있죠. 우퍼가 크면 클수록 스피커 가격은 급상승 합니다.
저음은 소리의 파장이 길고 천천히 움직여서 멀리 갑니다. 가끔 동네 시장마당에서 각설이패 공연을 하면 그 소리가 멀리 떨어진 우리 집에서 둠 둠 둠 둠 하는 저음 스피커 소리만 잘 들립니다.
50-100명씩 모여서 각자 악기를 연주하는 관현악단에서 성능 좋은 중저음 우퍼 스피커가 악기 소리들을 바구니에 담듯 담아주지 않으면 수많은 악기소리들은 제각각 난장판이 될 것입니다. 가수들이 왜 노래를 잘 하는 줄 아십니까? 비싼 스피커가 받쳐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가수는 자기 스피커를 자기 차에 싣고 다닙니다.
중창단에서 가장 중요한 파트는 ‘남성베이스’입니다. 소리가 높은 소프라노가 주목을 받아서 주인공인 것처럼 생각되지만 남성 베이스가 약 50% 정도로 아래에서 든든하게 받쳐주지 않으면 전체적인 균형이 안 맞습니다. 균형 안 맞는 화음이 얼마나 듣기 싫은지 다 아시죠? 남성베이스 배 나왔다고 구박하지 마시고 그 배가 바로 소중한 소리통(울림통)이라 생각하고 잘 대접하셔야 합니다.
자꾸 하나님의 목소리는 어떠하냐고 묻는 분이 있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하나님의 음성의 특징은 중저음 우퍼 스피커와 비슷한 것 같아서 길게 한번 써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그 소리의 파장이 아주 길고 낮습니다. 흡사 바람소리 같기도 한데, 그래서 아주 신경을 써서 귀를 쫑긋 기울이지 않으면 안 들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세미한 음성’이라고 합니다.  (6267)

 

8.하나님의 존재 인식

 

육(肉)의 사람과 영(靈)의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는지 못 하는지에 있습니다. 육체(肉體)는 오감을 통해 어떤 사실을 인식하는데,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오감을 통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도무지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면 영의 기능이 아주 약하거나 하도 사용하지 않아 퇴화하여 거의 쓸모가 없어진 상태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으로만 감지할 수 있는 파장(전파, 에너지)입니다. 그래서 영이 민감한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를 아주 선명하고 분명하고 확실하고 또렷하게 오엘이디 올레드 티브이처럼 수신하는 것입니다.
영은 어떤 기운 같은 것이기에 아주 민감하고 예민하면서 작은 자극에도 금방 소멸합니다. 마치 굴뚝에서 올라온 연기가 작은 바람만 불어도 사방으로 흩어져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육체(肉體)의 오감에 충실한 동물적인 삶을 지속적으로 살다보면 우리의 영은 자동적으로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겉 부분에 보호막을 칩니다. 그리고 그 보호막은 처음에는 끈적끈적한 콧물 같지만 나중에는 콘크리이트 처럼 단단해져버립니다.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세요. 아무리 양심을 때리는 설교를 들어도 맨숭맨숭 아무 반응이 없다면 지금 영혼을 보호하는 막이 두꺼워져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생활 연수와 상관없습니다. 심지어 목사나 장로 중에서도 영혼의 감동이 아닌, 몸에 밴 습관으로 신앙 행위만 그럴 듯하게 하는 분들 참 많이 봅니다.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려면 그 두꺼워진 영의 보호막을 깨뜨려야 합니다. 그리고 영을 강하게 훈련시켜야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6268)

 

9.하나님을 친구처럼 만나는 사람

 

1.친구는 아무리 친해도 친구입니다. 신나게 놀다가도 저녁이 되면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넘지 말아야 될 선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친구처럼 만나는 사람은 하나님을 나를 도와주는 존재로 생각하고 열심히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 삶의 은밀한 곳까지 간섭하는 것은 싫어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이시라도 넘지 말아야 될 선이 있다는 것이죠.
2.하나님을 응급실에서 의사처럼 만나는 사람
의사는 가능하면 안 만나고 건강하게 사는 것이 좋죠. 평소에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다가 급한 일이 생기면 “하이고 하나님! 나 좀 살려 주이소~” 하면서 응급실에 실려가 급하게 의사를 만나는 것처럼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3.하나님을 어린아이처럼 만나는 사람
어린아이는 부모의 보호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어린아이 같은 신앙은 늘 하나님 곁에 붙어 있어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지만 하나님의 손길이 많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4.하나님을 아내처럼 만나는 사람
아내와 남편은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두 사람만의 비밀을 가지고 있는 사이입니다. 그 비밀이 깨지면 같이 살 수 없죠. 남편과 아내가 어떤 잘못과 실수를 해도 서로 용서하고 같이 살 수 있지만, 이 비밀이 깨지면 이혼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비밀입니다. 하나님을 ‘신랑’처럼 ‘아내’처럼 만나는 사람은 이 비밀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누구처럼 만나고 있습니까? 그 비밀이 궁금하지 않으세요?
아이고, 저는 진짜 궁금합니다. (6269)

 

10.시끄러움과 조용함

 

역사상 하나님과 가장 깊은 만남을 가졌던 사람들은 사막 교부(敎父)들입니다. 교부들은 2세기에서 8세기에 걸쳐 기독교의 이론을 확립하고 또한 이단과의 열띤 논쟁을 벌여 사도전승을 바탕으로 한 기독교 신학의 주춧돌을 놓은 이들입니다.
교부들이 ‘삼위일체 하나님’ 이론을 처음 논(論)하였고, 수많은 성경 사본들을 모아 그중에 27권을 ‘신약 정경’으로 확정한 사람들도 교부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교부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깊은 사막이나 동굴 속에서 오랫동안 침묵으로 기도정진 하였습니다. 그것이 나중에 ‘수도원’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강도 높은 기도를 하였고 하나님을 대면하여 만났던 신비(神秘)로운 사람들입니다.
수도원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침묵’입니다. 그렇습니다. 침묵 가운데 하나님을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침묵의 하나님이시며 고요하고 그윽한 분이십니다. 교부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오늘날처럼 시끄럽고 복잡한 세상에서는 하나님이 점점 더 우리와 멀어져 간다고 보면 됩니다.
교회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일단 ‘시끄럽다’는 것입니다. 기도원이나 경배와 찬양 집회나 일단 가장먼저 전자기타와 드럼이 기본적으로 빠지지 않습니다. 전자기타와 드럼은 사람을 ‘흥분’시키는 악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는 ‘흥분’이 아닌 ‘감동’가운데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두꺼운 껍질에 쌓여있을 때는 교회의 열정적인 찬양이나 시끄러운 집회가 필요합니다. 강하게 부숴야 영혼이 깨집니다.
그 다음 영혼이 부드러워지면 조용하고 고요함 가운데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영혼을 깨부수기만 하고 또 부수고 부습니다. ‘부서져야 하리~ 부서져야 하리~’ 하고 부서지는데만 집중하고 맙니다.
뜨거운 집회로 우리의 영혼의 껍질이 부서졌으면 그 영혼의 속살이 조용한 바람으로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과 속삭여야 합니다. 그렇게 영혼이 활성화가 된 상태라면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면 됩니다. 집회 때마다 영혼을 때려 부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영혼에 상처가 나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만 가득한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아직 영혼이 깨지지 않아 영혼이 마치 호도처럼 그 안에 갇혀 전혀 영적이지 않은 사람들과, 두 번째는 좀 기도하고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은 예민한 영혼을 관리할 줄 몰라서 여기에 치이고 저기에 다쳐서 상처받아 신음하는 영혼들만 있는 것 같습니다. (6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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