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길을 택하라

운영자............... 조회 수 1070 추천 수 0 2003.10.12 20: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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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길을 택하라



본문: 창세기 2장 16~17절

(마태복음 5장 38~48절)



10월 특별 전도의 달을 맞이하여 첫주일 말씀은 “생명의 길을 택하라”는 제목으로 전하고자 합니다. 한국에서 일 년에 자살하는 사람이 일만 명이 훨씬 넘습니다. 중국에서도 자살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고 합니다. 일 년에 수십만 명이 된다고 합니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타살로 죽은 사람보다 자살로 죽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고 합니다. 선진국일수록 자살자가 더 많습니다.

또 이혼하는 가정이 그렇게 많습니다. 30%가 이혼하는데, 세 가정이면 한 가정씩 이혼하는 셈입니다. 이혼하는 가정 중에도 절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신혼부부라고 합니다. 세 가정이면 한 가정씩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는 길, 생명의 길을 선택하는 법을 배우고 그 길을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솔로몬 왕 때에 두 여자가 한집에 살다가 거의 비슷한 때에 아기를 낳아 키우게 되었습니다. 그중에 한 여자가 잠버릇이 나빠서 잠자다가 자기 갓난아기를 깔아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몰래 자기 죽은 아들과 다른 여자의 산 아들과 바꿔치기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두 여자가 서로 산 아기가 자기 아들이라고 우겨대다가 판결을 낼 수가 없어서 솔로몬 왕에게까지 올라와 판결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에 솔로몬은 가만히 생각을 하다가 말하기를 “두 여자가 서로 산 아기가 자기 아들이라고 하니 별수 없다. 산 아들을 둘로 짝 갈라서 나누어 주는 수밖에 없다” 하고는 큰 칼을 가져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때에 산 아기의 엄마는 가슴이 불붙는 것 같아서 애원하기를 “왕이여, 나는 그 아기를 안 가질 터이니 부디 그 아기를 죽이지 말고 저 여자에게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누가 진짜 산 아기의 엄마이겠습니까? 보나마나 죽이지만 말고 살려 달라는 여자의 아기였습니다. 솔로몬 왕은 “저 아기는 이 여자의 것이니 살려 달라는 엄마에게 돌려 주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여기서 죽은 아기의 엄마는 아기가 죽어도 좋으니 공평하게 짝 갈라 달라고 했지만 산 아기의 엄마는 불공평해도 좋고, 내 권리는 못 찾아도 좋으니 부디 아기를 살려 달라고 했습니다. 죽은 아기의 엄마는 형평성에도 맞고 이론적으로 틀린 데가 없지만 죽음의 길을 택한 악한 사람이고, 산 아기의 엄마는 자기의 권리도 못 찾고 아기도 빼앗기는 바보, 멍충이 같았지만 생명의 길을 택한 사람이요, 그 아들의 참엄마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른 실과는 다 먹어도 좋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The fruit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는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선악과”는 무슨 뜻입니까?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느냐” 하는 것만 따지고 공평과 정의만 내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이야 죽든 살든 상관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생각을 의미합니다. “생명과”(fruit of life)는 생명을 살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피차 사는 길을 택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생명을 살리고 영생을 주러 오셨는데 사탄 마귀는 끊임없이 죽이고 파괴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사탄 마귀는 생명을 도적질하고 건강을 파괴하며 가정을 파괴하고 교회를 파괴하고 국가를 파멸시키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선악과”를 따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의 사상은 이론상으로, 명분상으로만 정당해 보이고 옳아 보이는 것입니다. 옳고 그른 것만 따지고 덤벼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마귀의 사상을 받아들여 자기 권리만 주장하고 누가 옳고 누가 그르냐 하는 것만 따지고 비판하기만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죽이고 가정을 파괴하고 교회를 파괴하고 죽이려고 듭니다.



1. 산상수훈은 생명의 길을 걷는 삶입니다

① 네 오른편 뺨을 치는 자에게 왼편도 돌려 대라(마 5:39)

이 말씀은 누가 뺨을 한 대 때리면 화가 나서 “더 때려, 더 때려” 하면서 덤벼들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또 북한 공산군이 남침해 올 때 “어서 오십시오” 하고 서울도, 부산도 내어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 전쟁을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공의를 실현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크리스찬들, 천국의 백성들은 정의의 차원을 넘어서서, 누가 옳고 누가 그르냐 하는 차원을 넘어서 어떤 것이 내가 살고 남도 살고 내 가정이 사는 길이냐 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산상수훈은 불신자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없는 말씀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말씀하시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진주의 가치를 모르는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 주면, 콧구멍이 막힌다고 캑캑거리거나 이빨로 와작와작 깨물어 없애기나 할 것입니다.오른편 뺨을 치는 자에게 왼편도 돌려 대라는 말씀은 누가 크리스찬에게 해를 가했을 때 복수심을 가지고 싸우려 덤벼들지 말고 자원하여 한번 더 맞아줄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친절하게 대해 주라는 것입니다.

여러 해 전에 중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심한 가뭄이 들어서 농부들이 서로 자기 논에 물을 대려고 싸움을 하는 때인데, 한 신자가 밤을 새우며 자기 논에 물을 대어 놓고 새벽에야 집에 들어가 잠깐 눈을 붙이고 아침에 나와 보니까 괘씸하게도 아랫논 임자가 논뚝을 터서 자기 논으로 물을 다 빼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정도는 “내가 하나님 믿는 사람이니까 참아야지” 하고 그날 밤 다시 밤을 새워가면서 물을 대어 놓고 들어갔다가 다음날 다시 나와 보았더니 아랫논 임자가 다시 물을 훔쳐 갔습니다. 당장 쫓아가서 삽으로 찍어 죽이고 싶었지만 참고 목사님을 찾아가 억울한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목사님이 설명을 듣고 나서 “당신은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느냐를 묻기보다 당신도 살고 그 사람도 사는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 거기에 따라서 행동하십시오. 기왕 물을 두 번이나 빼앗긴 것, 한 번 더 빼앗긴 셈치고 이번에는 아랫논에다 물을 대 주고 그리고 나서 당신 논에 물을 대 보십시오.” 하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 성도는 목사님이 시키는 대로 “예수님은 날 위하여 십자가도 지셨는데…….” 하고 아랫논에 물을 가득히 채워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랫논 주인이 그 사실을 발견하고 울면서 달려와서 “나는 당신이 찾아와 죽이려고 덤벼들줄 알았는데, 내 논에 물까지 대어 주십니까? 예수님 믿어서 그렇게 착한 사람이 된다면 저도 이제부터 예수님 믿겠습니다.” 하고 좋은 크리스찬이 되었다고 합니다.

옳고 그른 차원을 넘어서 사랑을 베풀었더니 그 사람도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5장 38~39절에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눈은 눈으로 복수한다면 이 세상에 얼마나 장님이 많아지겠습니까?



② 속옷을 원하면 겉옷도 주라

마태복음 5장 40절에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크리스찬들이 생활하는 가운데 옷 한두 벌 같은 사소한 일 때문에 싸우고 다투고 송사하는 일은 지혜롭지 못한 일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영광도 가리우는 일이고 전도의 길도 막는 일입니다.

가장 평탄하게 살면서 복을 많이 받아 누린 이삭의 생애를 보면 억울한 고통을 많이 당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을 시기하여 우물을 묻어버리면 다투지 않고 다른 데 우물을 파고, 또 빼앗기면 또 다른 데 우물을 팠는데 팔 때마다 물이 잘 나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삭이 다투지 않고 양보할 때마다 점점 더 큰 복을 주셨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100만 원 빚지면 언젠가는 1,000만 원을 주시고, 억대로 빚지면 수십억 원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도 욕심 많은 조카에게 좋은 땅을 다 빼앗겼습니다. 롯이 떠난 후에 허탈감에 빠져 있을 때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엄청난 땅을 보여 주시며 이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롯의 재산은 다 불타버리고 롯의 처는 소금 기둥이 되어버렸습니다. 딸과 사위도 불벼락에 덮여 타죽고 말았습니다.



③ 5리를 가게 하거든 10리를 동행하라

마태복음 5장 41절에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6.25 동란 때 인민군들이 후퇴하면서 한 집사를 붙잡아 무거운 군수품을 짊어지우고 뜨거운 불볕 더위에 20리를 가자고 하더랍니다. 그 집사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목적지까지 갔습니다. 인민군이 짐을 내려 놓으라고 했지만 그 집사는 웃으면서 “아닙니다. 아직 더 갈 수 있습니다” 하고 계속 걸었더니 한 10리를 더 가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짐을 내려 놓으라고 하면서 “사실은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당신을 총살시키려고 했는데 당신의 친절에 감동되어 살려 주니, 어서 가보십시오” 해서 무사히 살아왔다고 합니다. 그 집사는 의무와 책임 이상으로 친절을 베푼 것 때문에 자기 생명도 구원할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무슨 일에든지 의무와 책임만 이행하려 들지 말고 그 이상으로 선을 베풀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결코 “네가 옳으냐, 내가 옳으냐”, “네 탓이냐, 내 탓이냐”만 따지는 생활은 나도 죽고, 남도 죽고, 가정도 죽고, 교회도 죽게 되는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먹게 하는 것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이것 때문에 많은 가정이 죽고 교회가 파괴됩니다.



2. 가정이 사는 길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한국에서도 어느새 세 가정의 한 가정씩 이혼을 합니다. 이혼하는 가정의 절반이 신혼 가정이라고 하니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가정이 파괴되고 죽는 원인도 남편이나 아내가 서로 자기 주장만 내세우고 자기 권리만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네가 옳으냐, 내가 옳으냐”만 따지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 것같이 그런 가정은 파괴되고 죽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에 치약 하나 때문에 다투다가 결국 이혼한 가정이 있습니다. 남편은 꼼꼼해서 치약을 꼬리부터 똘똘 말아가면서 사용하는데 부인은 주의가 깊지 못하고 대범해서 치약을 쓰는데도 중동 허리부터 꾹 짜서 쓰고 픽 집어던지는 여자였습니다. 이것이 남편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늘 잔소리를 했습니다. 그러면 부인은 “뭐 치약 하나 가지고 쫀쫀하게 잔소리를 하느냐”고 하면서 늘 다투다가 결국 이혼하고 말았습니다. 치약 하나가 무엇이길래 가정이 파괴되고 죽는 자리까지 가게 합니까? 이것도 부부가 선악과를 먹는 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 양보하고 이해하면서 가정이 잘사는 길을 모색해야 되는 것입니다. 옳고 그른 것만 따지는 생활은 죽음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친구 목사 한 사람은 가정을 두고 몇 년 동안 미국에 유학을 갔습니다. 그동안 그 부인은 바람이 나서 칠계를 범했습니다. 그러다가 남편이 돌아올 때쯤 외국으로 이민을 가려고 했습니다. 남편이 돌아와서 그 사실을 알고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몇 달 동안 잠도 제대로 못잤습니다. 그러다가 “나도 죄인인데 십자가 공로로 구원받았으니 용서해 주자” 하고 과거는 잊어버리고 새로운 기분으로 살았습니다. 그 결과 교회도 세계적인 교회가 되고 자식들도 다 교수, 박사, 목사가 되었습니다.

만약에 옳고 그른 것만 따지고 율법에 따라 행동했더라면 가정은 파괴되고 자식들은 불량배가 되었을지 모릅니다. 마태복음 19장에 “음행한 연고 외에 이혼하지 말라”는 말씀은 칠계를 범하면 무조건 이혼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모세가 너희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뜻은 부부는 둘이 아니요, 하나라고 말씀하시고 죽는 일 외에는 이혼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이 아니요, 한몸”이라고 하셨는데 한몸이 어떻게 둘로 쪼개질 수 있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서로 자기만 옳다고 하고 자기 주장과 권리만 내세우기 때문에 이혼하고 가정이 파괴됩니다. 피차 살고,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사는 길을 찾아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3. 무엇보다 영생을 얻어야 합니다

육신의 생명은 잘살든 못살든 100년 미만에끝나고 맙니다. 대통령이 되고, 재벌이 되고, 노벨상을 탄다고 해도 금방 죽음의 날이 오고 맙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영생을 얻었다가 죽을 때 천국으로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려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일장춘몽 같고 전광석화 같은 짧은 세상에만 관심을 가지고 영원한 내세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살아갑니다. 우리가 봄에 콩이나 옥수수를 심으면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 수십 배, 수백 배로 다 열매를 맺는 것처럼 사람도 죽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여 천국에서 영원히 살든지 지옥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 운명을 가진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것은 바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만 믿고 영접하면 다 죄사함 받고 영생을 얻었다가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가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63빌딩에 가서 엘리베이터에 올라 버튼만 누르면 20층, 30층 공짜로 올려다 주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느냐 안 하느냐가 여러분의 영원한 운명을 좌우합니다. 요한복음 1장 12~13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면 죽은 후에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곧 생명의 과실입니다. 다같이 따라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죄인을 받아 주시옵소서. 이제부터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합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김홍도 목사



성경의 인물

성경에 나오는 왕에서 노예, 예언자, 거짓 선지자에 이르기까지 약 400명의 인물들을 정렬하고, 관계 성구, 배경해설,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되새기도록 구성한 인물 백과사전. 믿음의 선배들이 어떻게 위대한 삶을 살고, 투쟁하고, 실패하고 성취하며 살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부록: 성경에 나오는 전 인물<약2500명> 수록)

한 태 완 목사 著, 좋은 땅 (주문전화:386-8660), 정가 40,000원

좋은땅 인터넷 http://www.g-wor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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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홈페이지: http://allcome.ce.ro, http://je333.c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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