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당에 닿은 행복

운영자............... 조회 수 459 추천 수 0 2004.10.27 04: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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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당에 닿은 행복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직면하게 하시고 죽음이 행복이 된다는 은혜를 깨우쳐주셨다. 그동안 나는 별세 신앙과 진리를 말했지만 죽음과 친밀하지는 않았다. 멀리 있는 죽음을 굳이 먼저 앞당겨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셈이다. 그동안 내가 별세를 말할 때 그 별세는 종말적 죽음이 아니요 자기부인으로서의 죽음이었다. 이 세상 것을 향한 육신의 정욕을 쳐서 죽이는 것,안목의 정욕을 부인하는 것,이생의 자랑에 대한 유혹을 부정하는 자기 죽음이었다.

이것은 살아서 자기를 죽이는 별세였다. 이 점에서 나는 부단히 정진했고 어느 정도 성과도 거두었다. 그러나 실제로 죽는다는 것은 실감해보지 못했다. 죽음의 문제를 무의식속에서 마냥 미루어두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별세 4수(四修)는 실제적인 죽음이 아주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매우 가까이 있음을 상기시켜주었다. 죽음이 내 곁에 매우 가까이 있었다. 상황은 죽음에 대한 자세를 분명히 요구하고 있었다. 죽음은 현재 여기서 맞이하는 나의 실존적 문제였다.

나는 결코 염세주의자가 아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감사하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는 삶을 즐거워한다. 비록 가난하게 태어났어도 나를 이 세상에 있게 하신 부모님께 감사했다.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태어나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것에 감사한다. 육신의 몸을 입었기에 속죄의 은총을 입고,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으며,신령한 몸으로 부활할 것을 기대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이러한 은혜의 기회를 주신 것을 생각하면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신앙적으로 타계주의자도 아니다. 이 세상은 질고와 고통뿐이며 영원한 행복은 다가오는 내세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주어진 삶속에서 천국을 누려야 하고 이 세상 삶속에서 최선을 다할 때 그 영광,그 행복이 영원한 소망에 이른다고 여겼다.

그렇다고 죽음을 예찬하는 신비주의자는 더욱 아니다. 일부러 고행을 통해 자신을 괴롭히고 서서히 죽여가며 거기서 특별한 은혜를 체험한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별세의 신앙은 오늘의 삶속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을 주장한다. 그 삶을 하나님께 영광스런 것으로,그리스도와 더불어 행복한 것으로,그리고 다른 이들을 유익하게 하며 세상을 살리는 삶으로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제 내게 더 이상 육신의 삶을 살 수 없는 그때에,죽음이 바로 코앞에 다가온 그때에 그 죽음에 대해서 신앙고백을 강요하고 있었다. 결론은 죽음은 행복하다는 것,죽음과 친구가 되어야겠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죽음을 불행한 것으로 생각한다. 죽음을 하나님의 저주요 심판의 결과만으로 받아들인다. 죽음을 가져오는 것은 사탄의 사자요,죽음을 지배하는 것은 악의 세력이라고 여긴다.

사람들은 죽음은 인생의 끝이요 완전한 종말로 생각하며 두려워한다. 죽음은 되도록 지지 않아야 할 수고로운 짐이요,벗어버려야 할 고난으로 생각한다. 세상 사람들이나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죽음은 자신의 적일 따름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나를 동정했다. 65세의 나이에 죽는 것은 너무 이르다고 아쉬워했다. 고생만 하고 죽어서는 안된다. 더 살아서 좋은 날을 누리라고 격려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살아온 날들이 행복했고 앞으로 더 사는 것에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도리어 죽음의 행복을 꿈꾸었다. 가까이 다가온 죽음과 대면하면서 죽음조차 친구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죽음도 감사하다. 오래 산다고 반드시 좋은 것일 수만은 없다. 편안한 날을 얼마 더 산다한들 더 좋을 것도 없으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를 데려가시는 그 순간이 가장 적당한 때인 것이다. 그러니 죽음도 행복인 것이며 죽음 앞에서 감사를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행복이여 어서 오라

나는 그동안 예수를 믿고 별세신앙으로 행복을 설교했다. 지상 천국의 행복은 외쳤으나 내세 천국은 자신이 없었다. 죽음 너머의 세계이기에 마음에 큰 부담이었다.

나는 수많은 성도들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믿음 좋은 사람들은 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양극이었다. 하나는 죽음을 사탄이 주는 저주로 받아들이면서 죽음을 이기고 믿음의 승리를 부르짖었다. 믿음은 병마와 싸워 이기는 능력이요,기도는 병마를 추방하는 방편으로 신앙고백하면서 부르짖고 살기를 소망했다. 살려는 의지가 자랑스럽고 그 믿음이 부럽기도 했다. 또 하나는 괴로운 세상 더 살아 무엇하느냐. 죽기를 원한다고 고백했다. 이 사람은 괴롭고 죄많은 세상을 떠나는 죽음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믿음도 없고 저런 믿음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죽음을 천국의 주님께 친구로 데리고 가고 싶었다.
나는 오랫동안 하늘과 땅을 구분하며 생각했다. 하늘은 높고 거룩한 곳이요,땅은 낮고 죄 많은 인간이 사는 세계로 여긴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하늘과 땅은 분리할 수 없는 세계로 하늘은 땅이 있어야 하늘이요,땅은 하늘이 있어야 땅이었다. 삶과 죽음도 분리할 수 없는 경지로 나를 이끌어 갔다. 살아있는 자에게 죽음이 있으며 죽을 수 있는 자에게 또한 생명의 보장이 있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은 함께 살고 함께 죽는 친구인 것이다. 삶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죽음도 참으로 행복한 것이다. 별세의 행복은 삶과 죽음의 행복이요,천국에 닿은 행복이다.

이 세상 삶속에서 한 세대는 가고 또 한 세대가 오는 것이 당연하고 또한 아름답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에게는 양들을 위한 희생이 기쁨이셨기 때문에 기꺼이 십자가 죽음의 길로 나아가셨다. 예수님은 마음에 아무 근심 없이 행복한 마음으로 죽음을 넘어 하나님 아버지의 처소로 들어가셨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넘어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큰 기쁨의 길이라 말씀하셨고 그 기쁨을 제자들과 함께 나누어 가질 것을 소망하셨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통해 택하신 백성들이 구원을 받는 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에 십자가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별세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죽음은 행복의 길이다.

성 프란체스코는 그의 죽음을 이렇게 노래했다. “그가 오면 즐겨 맞으리,자매 되는 죽음이여!” 그리스도와 연합된 프란체스코에게 죽음은 자매였고,노래의 주제였다.그의 제자들이 “방안에서 노래 부르며 악기를 뜯고 있으면 저들이 성자라는 생각을 버릴 것입니다”라고 간청할 정도였다. 이에 대해 프란체스코는 “성령의 은혜로 나는 하나님의 품속에 들게 된다. 나는 하나님의 기쁨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고 대답하였다. 프란체스코는 1226년 10월3일 드디어 죽음의 순간을 맞았다. 그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제여,가서 재를 가져 오시오. 그리고 그것을 내 몸에 뿌려주시오.” 한 형제가 접시에 담아온 재를 그의 몸에 뿌리자 재를 온몸에 뒤집어쓴 프란체스코는 조용히 말했다. “조금 있다가 나도 티끌과 재로 되어버리겠지.” 프란체스코는 재를 뒤집어 쓴 채 움막에 누워 계속 기도하다가 죽음을 맞았다.

죽음은 결코 불행한 것만이 아니다. 죽음의 최종적 주권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 프란체스코가 죽음을 자매처럼 맞아들인 것처럼 나도 죽음을 친구로 맞아들이기로 마음을 정했다. 병상에 누워 죽음에 대한 묵상이 이에 이르자 마음에 한량없는 평화가 임했다. 수술 시간이 다가와도 평안히 잠들었다. 밤마다 잠에 드는 것을 죽음에 드는 것으로 여기면서 평안히 안식에 들어갔다. 하나님께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거둬가시고 안식의 확신을 주신 까닭에 매일 충분한 숙면을 취했다.
/이중표 목사

별세의 노터치

병의 진행은 죽음에 이르고 있는데 내 마음에는 도리어 자유가 왔다. 지금껏 살아온 세월은 이미 죽어온 세월이고 앞으로 죽는다 하여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원히 살 것이다. 죽는다면 기꺼이 죽으리라. 죽음의 순간이 온다면 이 세상을 기꺼이 떠나리라. 죽으면서도 이 땅을 떠나지 못하고 이 땅의 것을 버리지 못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별세가 헛된 것이요,그 안에서 살아온 생애가 헛된 것이 될 터이다.

목회에 성공하고 그 많은 성공 때문에 죽지도 못하는 경우를 본다. 영원을 증거할 하나님의 사람이 되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지 못해 방황하고 있는 사탄의 후예들이 많다. 제대로 죽지도 못하는 것이다. 세상일을 잊지 못하여 떠나지 못한다면 죽은 사람이 아니다. 나는 죽을지도 모를 수술을 앞두고 이 세상의 일에 대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내 아내는 “당신 죽으면 교회는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했다. 자기가 자원해서 개척한 교회이니 애착이 얼마나 크겠는가. 어느 것 하나 그 사람 없이 된 일이 없었으니 그 마음이 어떠하랴!
나는 이렇게 말했다. “죽은 자는 걱정하지 않는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나는 죽은 자이다. 죽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끝난 것이다.” 어떤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별세를 가르쳐 주신 우리 주님 앞에 내 할 일이 아닌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별세는 미련없이 떠나는 것이요, 뒤돌아보지 않고 죽는 것이다. 그냥 담담히 수술에 임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난다면 이후의 일은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진행하실 것이었다. 육신의 생명이 죽는 순간 사역에 대한 집착도 끝나야지 그렇지 못한다면 죽고도 죽지를 못하는 것이다. 기꺼이 죽음을 맞이할 때만 그 죽음이 생명을 살리는 죽음이 될 것이었다. 나는 자유로운 마음,사는 것에 대한 기대를 포기한 채 수술에 임했고 이제는 죽음에서 일어섰을 뿐이다.

내게는 어린 시절 성장하면서 나를 교훈하거나 간섭하여 나를 지도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노 터치(no touch) 인생으로 길을 걸어왔다. 우리 부모는 가난한 농촌생활에 시달려 아들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초등학교를 다녀도 어떻게 다니는지 묻지도 않았다. 폐결핵으로 각혈을 하고 창백한 얼굴에 병색이 짙어도 어디 아프냐고 묻지 않으셨다. 내가 군에 입대하는지,내가 어떻게 결혼하는지 전혀 노 터치였다. 그것은 아무도 터치하지 않는 인생으로 살게 했고 결국 우리 주님의 고귀한 터치인 별세를 배우는 인생이 되게 했다. 별세는 이 세상을 노 터치하는 최고의 삶의 자세다.

가을이 되면 나뭇잎은 나무에서 떨어짐으로써 그 나무를 살리고 토양을 살린다. 잘 익은 감은 나무에서 떨어짐으로써 나무를 살리고 씨앗도 살린다. 떨어질 때가 되어서도 떨어지지 못하는 나뭇잎과 열매는 살아있는 것이 영광이 아니요 도리어 수치인 것을 새삼스럽게 체감한다. 하나님은 별세 4수(四修)를 통해 완전한 자기 죽음으로 나를 끌고 가신다.

나는 그 손길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그 손을 꼭 붙들려 한다.이제 완전한 별세의 은혜를 받기를 원한다. 이민은 했으나 마음을 고국에 두고온 사람은 이국에서 향수병에 시달린다. 아직 이민하지 못한 사람이다. 나의 별세신앙도 죽음을 직면하고 돌아보니 온전히 이민하지 못한 임시 거류민이요,천국의 불법 체류자였음을 느낀다. 몸도 마음도 온전한 천국의 이민자,온전한 별세신앙의 사람이 되기를 서원한다. 나는 이제 주님이 불러 세운 주의 종의 소명의 단계를 지나 천국에서 파송된 자로 남은 생애를 살고 싶다.

그러나 그것도 주님께 맡기고 살아가리라. 나는 죽음의 터널을 통과하여 생명이 연장되면 연장되는 대로,이 세상을 떠나면 떠나는 대로 내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직접 일하실 것이다. 내가 마음을 비워 온전히 버리고 떠난 만큼 나를 통한 하나님의 일은 새롭게 될 것을 기대하고 싶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영원에 이르러 하늘과 땅에서 살아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그리스도 안의 생명이 되기를 소원한다.

오 신비한 별세여!

별세신앙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은혜에 대한 신앙이다. 일반적인 구원의 신앙은 절대적으로 예정된 것을 때가 되어 받는 은혜다. 구원은 예수님을 믿는 자는 누구나 받을 수 있는 은혜다. 별세4수 가운데 도달한 세번째 진리는 죽음의 살림이라는 역설이다.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으로 죽는다.

그러나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에게는 생물학적 죽음이 도리어 생명으로 사망을 삼킨 사건이 된다. 담관암이라는 생사를 예측할 수 없이 위험한 수술 앞에서 나는 별세신앙의 진리를 더욱 깊이 묵상할 수밖에 없었다. 결론은 죽음이 꼭 죽음인 것은 아니며 도리어 생명일 수 있고 살림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고 있다면 죽음이란 부활생명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절차요 관문일 따름이다.

그동안 별세를 외쳐오기는 했지만 내 속에는 죽지 않고 이 땅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으려는 소원이 많음을 나는 깨달았다. 개인적인 욕심과 욕망은 많이 죽이고 있었지만 아직까지도 대의명분을 앞세워 죽이지 못하고 있던 것들이 많음을 발견했다. 주님을 위하고 교회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사역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고상한 목표를 내걸고 이생의 자랑스런 탐욕이 너무 많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것은 육신의 정욕이나 안목의 정욕과는 다른 것이다. 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은 일반적인 것이요 윤리적인 것이다. 그러나 신령한 것과 성스럽게 살려고 하는 종들 속에 감추어진 악은 하나님의 것을 사유화하려는 탐욕이다. 이것은 아무도 모른다. 성자는 성스러운 사기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안에 죽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눈앞으로 닥쳐온 죽음을 실감하면서 별세 시험을 네번째 수련하면서는 대의에 속한 공적인 욕망조차도 죽어 없어지는 것을 느꼈다. 살아서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 사는 생명의 사역이 최대의 과제로 나를 사로잡았다.

살려고 치르는 시험은 세상에서 영광을 얻는다.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긴 자가 영광을 누린다. 그러나 별세의 시험,죽음으로 치르는 시험에서는 하나님이 영광을 얻는다. 죽음은 사탄의 최종적 시험인 까닭이다. 사탄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한 생애를 잘살 것을 기대하실 뿐만 아니라 한 생애를 잘 마감하기를 원하신다. 별세의 시험은 하늘과 땅을 하나로 통일하는 시험이요 삶을 죽음을 통해 영생으로 이어가는 시험이다.

생명은 생명이요 죽음은 죽음인 것이 아니다. 위대한 영성가 헨리 나우엔은 ‘여기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란 저술에서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삶과 죽음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하늘만 거룩한 곳이요 땅은 죄된 곳인 것만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으셨다. 완전히 죽은 자에게만 다시 사는 생명이 있다. 그리고 수많은 열매를 맺는 씨앗이 된다. 이것이 부활이다.
/이중표<한신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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