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님

한승지............... 조회 수 807 추천 수 0 2003.02.04 01:30:53
.........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님

성경: 요한복음 14장 1-7절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5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서론

누가 나에게‘당신은 왜 교회에 다니십니까? 하고 묻는다면 나는 네,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예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흔히 세상 사람들이 의지가 나약한 사람들이 교회를 찾는다는둥, 현실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또는 죄책감을 없애거나 복을 빌러 교회에 간다는둥 말들을 한다. 이 말들이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겠지만, 정작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런 것들이 아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은 간단하고 쉬운일이 결코 아니다. 왜 이렇게 힘든일을 자청해서 교회에 다니는 것일까? 왜냐면 거기에 길과 진리와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에 더 충실하고 싶고 성실하고 싶고 함부로 살고싶지 않고 진지하게 살고 싶어서 교회에 다닌다.
죄가 주는 고통, 무의미가 주는 고통, 아무런 생각도 없이 무작정 살아가는것에 대한 고통, 거짓된 삶에 대한 고통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교회를 찾는 것이다. 오늘 나에게 주시는 절대자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싶어서 교회에 찾아오는 것이다.
여러분은 오늘도 교회에 잘 찾아오신 것이다. 우리 예수님은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분이시다. 말씀을 통해서 이 세가지를 발견하시기 바란다.

본론

1. 길이신 예수님

본문 말씀은 절박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제 몇시간 후면 예수님은 군병들에게 끌려가게 되신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제 뿔뿔히 흩어지고 말 것이다. 심지어 베드로도 어찌할줄 몰라 당황하고 있었다. 말로는 내가 목숨을 걸고 주를 따르겠다고 장담하고 모든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주를 따르겠다고 소리쳤지만, 이들은 곧 갈길을 모르고 방황하게 될 자들이었다.
어느 한 제자도 현실을 직시하고 다가올 불행을 예견한 자가 없었으며, 심지어 유다는 예수를 팔 생각으로 골몰하고 있었다. 이런 제자들을 두고 가야 하는 예수님의 심정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착찹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단호하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내가 너희들을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갈것이며, 곧 다시 오시리라고 말씀하고 계셨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겠다. 한편으로는 모든 것이 절망이요, 이제 끝장이 났다고 주저 앉아 버릴 수밖에 없는 것 같지만, 실상은 결코 그렇지 않고 이제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며 온 인류의 죄가 사해질 것이며, 진실된 하나님의 나라가 펼쳐질 것이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지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곧 길이다. 사방이 온통 거짓이지만 나를 믿어라, 내가 곧 진리이다. 눈앞에 죽음이 펼쳐질 지라도 놀라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곧 생명 그 자체이다.
십자가의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두고 선언하신 위대한 예수님의 말씀이다. 어떻게 이렇게 담대할 수 있단 말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진짜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셨기 때문에 이런 선언이 가능하셨던 것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모름지기 사람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은 이러이러한 길이라고 소개하였다. 그러나 자기도 제대로 깨닫지 못한길을 제시한 경우도 있었고, 자기 외에는 아무도 걸을 수 없는 길을 소개하기도 했으며, 또 아무도 그 끝이 어떻게 될 것을 밝혀준 사람도 없었다.
오직 예수님만 겸손의 길, 온유한 길, 좁은 길, 섬김의 길, 봉사의 길, 희생의 길을 걸어 가셨다. 거기는 복잡한 이론도, 알아듣기 힘든 철학도 없었다. 오직 ‘사랑’이라는 단어 하나로 모든 것이 설명되었고, 모든 윤리가 결정되었다. 그리고 스스로 가장 쉬운 본을 보이시며 모든 사람이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길을 만들어 주셨다. 그 길은 가장 쉬운 길이었고, 모든 사람이 기뻐하는 길이었고, 모든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길이었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28-마11:30)

<-타종교가 가는 길은 험난하다. 이슬람이 얼마나 고달픈 생활을 하는가?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이 모든 인생의 모범이 된다.>

2. 진리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그 자체가 진리이시다. 진리는 믿음과 직결된다. 세상은 믿음 위에 존재한다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믿음은 필수적이다. 이 믿음이라는 것이 그러므로 성격상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변하는 것을 믿을 수는 없고 변하는 것을 믿는 바보도 없다. 예수님은 결코 변함이 없는 유일무이하신 진리이시다.
사람은 철학적 존재이다. 인생이란 순간 순간 끊임없이 떠오르는 물음표 앞에 직면하는 존재이다. 이 수없이 많은 물음표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답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 해답이 거짓이 아닌 진리라고 어떻게 검증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진리를 찾는 길이 너무 험난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기를 포기하기도 하고 아직 진리의 여부를 검증하기도 전에 더 이상 묻기를 포기하고 그냥 다른 사람들이 걷는 길을 그냥 따라가 버리려고 하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진리를 미처 발견하기도 전에 거대한 거짓 앞에 직면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진리가 너무 어리고 세상물정을 모른채 연한 순과 같이 홀로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정부는 여러 가지 연령제한을 통해서 거짓되고 악한 것들로부터 청소년들을 보호하려고 한다. 그리고 청소년들은 나이를 먹는 것을 이제는 죄악을 저질러도 되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그것이 결코 아니다. 단지 이 사회는 사람이 나이가 들었다면 이제 죄악이나 거짓과 더불어 싸울 수 있는 능력이 있을 것으로 믿고싶을 뿐이다. 거대한 거짓된 세상 앞에 자신을 초라하게 느꼈다면 다윗의 용기를 배울 필요가 있다. 거짓된 세상은 골리앗과 같다. 용기있는 조약돌에 무너지는 세상일 뿐이다. 지금도 이 세상은 진실된 사람, 용기있는 사람, 정직한 사람, 죄악에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을 애타게 찾고 있다. 이 세상은 참된 믿음의 사람을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다. 며칠 전에도 어떤 분과 대화중에 아는 분이 사업을 새로이 일으켰는데, 직원들이 영업 도중에 빼돌리는 물건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모두 예수를 믿게 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을것이라고 답해 주었다.
우리는 거짓된 사람을 만나면 절망하고 두려움에 싸이고 위협을 느낀다. 그러나 진실된 사람을 만나면 한숨부터 돌려지고 평안해지고 마음이 열리고 아름다움과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한다.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왠지 모르지만 진리에 민감하였다. 불교가 말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음양오행설이 말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유교가 말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이슬람교가 말하는 진리가 무엇이며, 힌두교가 말하는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성경이 나에게 주는 충격과 비전을 따라오지는 못했다. 불교는 깨닫는 과정이 너무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손에 남겨진 진리는 보잘것이 없었고 나를 만족시키지도 못했을뿐더러 심지어는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윤리는 그나마 나은데 철학에는 깊고 깊은 비관과 염세적 냄새와 결국에는 모든 것을 허무로 되돌리는 역설을 가지고 있었다. 힌두교는 불교보다 더 지독했다. 오히려 불교가 힌두교에 비해서 대단히 혁신적이었다. 힌두교는 고통이 철저히 숭배되었는데 심지어는 고통의 목적도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어서 더 큰 고통을 자청하는 꼴이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거짓된 진리는 이미 사람을 지옥에 가기도 전에 지옥에서 살게 하는 힘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슬람교는 구약과 기독교와 기타 근동의 종교를 혼합시키고 거기에 정치적 권력을 가미한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사상 자체는 조악하기 그지 없는데, 권력지향적인 구조로 인해서 타종교와는 달리 전쟁을 통해서 전파되었다. 그래서 요즘도 이슬람국가의 우두머리들은 대부분 종교 지도자들이다. 이들은 폭력을 거룩하게 숭배하였다. 이슬람교는 폭력과 권력과 배타성만 제거한다면 쉽게 무너져버릴 것이다. 왜냐면 타 종교에 비해서 사상이 나약하기 때문이다.
가장 그럴듯하게 한국사회에 만연되어있는 사상이 음양오행설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운명론이고 이원론이기 때문에 인생의 발목을 잡는 특징이 있고,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못하면서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고 윽박지르는 경향이 짙어서 쓴웃음만 나오는 사상일 뿐이다. 한마디로 그런말은 나도 아무렇게나 지어내도 가능한 말이다.
그래도 성경을 제외하고 가장 나를 만족시킨 사상이 있다면 그것은 유교사상이다. 특히 율곡 이이의 사상과 정약용 같은 실학자들의 사상이 나를 매료시켰는데, 대단히 현실적이고 건전한 사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두가지 면에서 난점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유교의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교화시키는데는 한계가 드러나고 결국에는 구약성경처럼 율법화를 막을 수 없다는 점이요, 가장 우수한 사상이 충효의 사상인데, 사실은 그 충효사상의 폐해도 막강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혹자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나름대로는 오직 성경말씀만이 유일한 진리로 남게 되었는데, 이런 결론은 비단 나만의 결론은 아닐 것이다. 물론 그동안 기독교가 흠이나 부끄러움없이 역사속에 존재했다는 뜻은 아니다. 또 성경 속에 있는 자구 하나 하나가 아무런 오류도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런 오류들을 무시하자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 그러나 모든 사소한 오류들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진리는 빛나고 있다. 다른 어떤 사상들이 범접할 수 없는 거룩성이 성경에는 있다.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독특성이 성경에는 있다. 나는 성경 속에서 절대 권력자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의 생각을 정확하게 교정하시고 지도하시는 성령님을 만났다.
예수님은 종이조각에 글자 몇 개를 적어서 던져주고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하게 사라져 버린 율곡 이이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오셨다. 예수님은 나의 인생속에 나타나셨다. 나를 만지시고 내 영혼을 깨우셨다. 예수님이 나의 영혼을 깨우시기 전에는 나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었다. 예수님이 나에게 소개시켜준 진리는 옛 성현들이 먼지쌓인 책장 속에 기록해 놓은 것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들이었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헬기의 운전 기술이 뇌리속에 눈깜짝할 사이에 학습되는 것처럼 성령체험은 아무런 의심없이 신구약의 모든 기적들이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믿어지게 하였다. 그리고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사고들이 조각그림 맞추듯이 짜 맞추어져서 하나의 거대한 그림을 형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참으로 성경은 위대한 교과서였다. 성령께서 친히 나의 교사가 되어 주셨다.
게다가 성령은 나를 진리로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나의 마음과 심성과 인격 깊은 곳까지 어루만지셨으며, 거짓을 추방하고 죄악을 씻어 내셨고 악하고 더러운 것들을 소멸시키셨으며 상처입은 심령을 고치셨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셨고, 근심이 변하여 소망이 되게하셨고, 원망이 변하여 사랑이 되게하셨다.
율곡 이이는 나더러 저길로 한번 가보라고 했다. 그러나 성령님은 친히 나를 끌어 내셨고 나를 붙들고 인도하셨다. 실로 주님과 같이 내 영혼을 만지는 분은 없었다. 나는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에야 그것이 사랑인 것을 깨달았다. 진리이신 예수님은 사랑의 주님이셨다.

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벧전1:22)

이슬람교도들은 진리를 만나자 무력이라도 사용해서 이 진리를 전파하려고 했다. 그래서 폭탄 테러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주시면서 세상을 사랑는 법을 배우게 하셨다. 이웃을 사랑하게 하셨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폭탄이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사랑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나는 사랑이 곧 진리이며, 참 진리는 사랑임을 믿는다. 다시 말하면, 그것이 참된 진리인가 아닌가는 사랑인가 아닌가로 검증된다고 믿는다. 이것이 곧 예수님의 가르침이며, 예수님이 바로 진리이심을 증거한다고 믿는다.

3. 생명이신 예수님

구약의 전도서에 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다는 솔로몬의 절규가 나온다. 그는 세상의 모든 이치와 만물의 원리를 깨달은 위대한 사상가이다. 그는 모든 윤리를 실험해서 가장 최고한 윤리를 설파한 자였다. 솔로몬은 실로 석가나 공자가 깨달은 윤리보다 훨씬 능가하는 윤리사상가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실로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그는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사람으로서는 결코 따를 수 없는 깊은 지혜의 소유자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만큼 탁월한 사상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보다 훨씬 더 불행한 사람이었다. 왜냐면 그는 생명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만나보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것을 깨달았지만, 그 깨달음이 그를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그가 모든 만물이 허무하다고 외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풀의 꽃과 같이 사그라지는 인생이 천하만물을 깨달은들 그것이 무슨 유익이 있으랴? 자신이 곧 죽고 없어지게 되는데 만물의 이치를 깨달았다고 기뻐할 수 있겠는가?
미련한 것보다 깨닫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큰 기쁨인가? 그러나 깨달은자도 미련한자와 함께 죽을 수밖에 없으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한탄한다. 솔로몬은 영생의 문제로 가장 크게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했다는 점을 기억하자. 그에게 모든 부귀와 영화와 깨달음이 있었지만 영생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절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영생의 문제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해 주셨다. 예수님은 생명 그자체이시며, 생명의 수여자이시다.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 곧 예수님이셨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서 그토록 담대할 수 있었으며, 갈팡질팡하는 제자들 앞에서 평안하실 수 있으셨던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이유는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6)

생명의 중심에도 사랑이 있음을 명심하자. 부부가 서로 사랑할 때 한 생명이 탄생한다. 죽어가는 죄인을 사랑할 때 그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영생을 얻게 되지 않는가?
진실로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이시다.
/선린교회 목사

성경의 인물
성경에 나오는 왕에서 노예, 예언자, 거짓 선지자에 이르기까지 약 400명의 인물들을 정렬하고, 관계 성구, 배경해설,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되새기도록 구성한 인물 백과사전. 믿음의 선배들이 어떻게 위대한 삶을 살고, 투쟁하고, 실패하고 성취하며 살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부록: 성경에 나오는 전 인물<약2500명> 수록)
한 태 완 목사 著, 좋은 땅 (주문전화:386-8660), 정가 40,000원
저자 홈페이지: http://allcome.ce.ro, http://je333.ce.ro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9350 랍비의 교훈 한승진 2003-02-03 481
19349 똑똑한 사람 한승지 2003-02-03 601
19348 등불 한승지 2003-02-04 952
19347 드레스 한승지 2003-02-04 507
19346 드레스 한승지 2003-02-04 566
19345 다윈의 인간 진화 한승지 2003-02-04 439
»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님 한승지 2003-02-04 807
19343 메리 게첼 한승지 2003-02-04 566
19342 폴 투르니에 한승지 2003-02-04 1314
19341 제정구(전국회의원) 한승지 2003-02-04 550
19340 위대한 고통 한승지 2003-02-04 1132
19339 무식이 높은 신앙의 증거는 아닙니다 한승지 2003-02-04 745
19338 무식이 높은 신앙의 증거는 아닙니다 한승지 2003-02-04 782
19337 농아대학의 데모 한승지 2003-02-04 661
19336 국에 빠진 파리 한승지 2003-02-04 8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