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김남준  | 출판사 : 포이에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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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준 목사가 쓴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미셀러니!《고백록》의 불후의 가치는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교부이며 서양 사상의 바다로 나가는 수문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위대한 저작, 《고백록》의 의미를 그의 전체 사상의 빛으로 설명하고, 신학과 함께 문학, 역사, 과학, 철학을 넘나드는 저자의 성찰로 풀어낸 아우구스티누스보다 더 아우구스티누스적인 100편의 미셀러니. 《고백록》의 불후의 가치는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교부로 꼽히는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를 찾고, 그 진리 안에서 진정한 쉼을 얻기 위해 치열한 지적 투쟁을 전개했다…[더보기▶]





김남준 목사님의 <영원안에서 나를 찾다>을 읽으면서 각 챕트마다 일부분을 옮겨적었습니다.

가능하면 읽어보는 것으로 만족하시고 죽 긁어다가 다른데로 옮기는 것은 좀 삼가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작권 문제 때문에 글이 여기저기 복사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아시겠지요?

햇볕같은이야기 5372-5471호까지 한편씩 나눈 글입니다. -최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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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간의 쉼과 사랑


인간의 영혼은 오직 하나님의 품에서만 완전한 쉼을 누린다. 갓난아이가 배불리 젖을 먹고 젖 냄새 가득한 엄마 품에서 더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이 만족스런 쉼을 누리듯, 인간도 하나님 안에서 쉬어야 하는 존재다.(시131:2)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2.나와 하나님의 존재


사랑의 관계 안에서 인간은 지성으로써 하나님을 알고, 의지로써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과 함께 살아감으로써 자신의 존재 의미를 발견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은 곧 자신을 찾아가는 것이며,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곧 자신이 사랑을 받는 길이다.


3.변치 않는 하나님과 변하는 세계


영원하시고 무한하시며 완전하신 하나님 안에는 어떠한 구성 요소도 없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단순성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존재는 마치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과 같아서 누구도 직접 그 존재의 ‘속성’을 보아서 알 수 없다. 유한한 피조물인 인간과 무한하신 창조주 하나님 사이에 무한한 격차 역시 이를 불가능하게 하는 요인 중의 하나다.


4.인간의 가치와 존재 규정


우리의 삶은 소중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 순간 한 순간을 핏빛으로 물들이는 심정으로 정성을 다하여 살아야 한다. 불후의 명작을 저술하는 작가가 한 글자 한 글자 심혈을 기울여 쓰듯이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을 찾아감으로 존귀한 자가 되자.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났음이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은 존재들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살아가자.


5.만물의 근원이신 하나님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어린 아이처럼 의지하며 사는 것이 인간의 진정한 복이다. 스스로 높아지려는 마음이 들 때마다 가슴에 두 손을 포개어 얹자. 그리고 인간으로서 나의 분량을 생각하자. 무한한 우주와 끝없는 시간의 흐름 앞에서 나는 단지 사라지는 존재임을 인정하자.


6.자연적 본성과 도덕적 본성


매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거룩한 성찰과 자기 비하의 생활, 주님께 드리는 간절한 기도와 말씀에 대한 깨달음, 성령의 감화와 죄를 죽이는 삶은 우리의 부패한 본성을 죽이는 실천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부패한 본성을 죽이는 것만큼 거듭난 본성인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누리게 하신다.


7.정욕과 필연의 형성


매 순간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정욕의 크기를 측정하자. 그리고 그것을 죽이기 위해 힘쓰자.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향하여 죽자.(고전15:31) 소중한 것을 잃는 안타까운 슬픔으로서가 아니라, 더러운 것을 버리고 거룩해지는 기쁨으로 그리 하자.


8.음란, 자기 사랑의 모상


하나님이 제시하신 명확한 질서가 있음에도, 그 질서 안에서 인간의 본분을 따라 하나님이 지시하신 것들을 열망하고 사랑하는 대신 자의적으로 하나님 밖에서 열망하고 사랑할 대상을 찾을 때, 그것은 인간을 사악한 욕망에 사로잡히게 하고, 이는 결국 악으로 이어진다. 이것을 가리켜 아우구스티누스는 ‘영혼의 외도’라고 불렀다.


9.내재하는 성향으로서의 죄


본질적으로, 죄는 인간의 마음에 내재하는 성향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움직임 뿐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까지 포함한다. 따라서 죄에 대해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작용적 측면에서 죄란 인간으로 하여금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도록 악한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일관된 자기 사랑의 감화력이다.”


10.지성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


인간의 내면에서는 두 가지 사랑이 끊임없이 다툰다. 지성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육체의 감각 기관에 매이지 않는 지성은 더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열망하고, 육체의 감각 기관에 매인 욕망은 일시적 만족을 안겨줄 수 있는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을 열망한다.


11.사랑의 질서


인간이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사랑할 때는 자신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화평의 하나님을 만나고, 그 질서를 무시하고 하나님 이외의 것을 사랑할 때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마주할 뿐이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139:7)


12.아름다움과 하나님


아름다움의 원천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투영한 것에 불과하다.


13.도덕과 하나님의 모상


하나님이 정위하신 존재론적 질서에서 이탈하여 자의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다시 정하는 것이 교만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높아지는 것도 교만이지만, 자기를 비하하는 것도 교만이다. 이는 교만이 자신의 판단을 하나님의 판단보다 더 권위있게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14.사랑과 진리


인간에게 아름다움을 주신 것은 우리로 아름다움을 지닌 그 사람을 사랑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사람 아에서 아름다움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사랑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그릇된 사랑에는 안식이 없다.


15.영혼의 외도


영혼은 진리의 빛 아래 있을 때 가장 고르고 맑은 상태를 유지한다. 따라서 영혼의 외도는 인간이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을 떠난 채 추구하고, 하나님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을 하나님 밖에서 찾고자 할 때 일어난다.


16.죄와 자아 분리


사물에 대한 인간의 자기결정성과 독립적 주체성은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 구별하는 가장 뛰어난 특징이자 영광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하고 하나님을 떠나자, 인간을 가장 영광스럽게 하던 특징이 불안과 속박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실존 철학자들이 인간 불안의 기원을 자유에서 찾은 것은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다.


17.견고함과 영적 생명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졌기에 이중의 생명을 필요로 한다. 바로 육체의 생명과 영혼의 생명이다. 영혼의 생명을 가리켜 ‘영적 생명’ 혹은 ‘영원한 생명’이라고 부른다. 이는 그 생명의 근원이 영원하신 하나님에게서 왔고, 불멸할 영혼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18.정서의 미끄러짐


하나님 없는 설움에 잠김으로써 삶의 위안을 얻으려 하는 인간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영혼의 안식은 세속의 즐거움에 출렁거리는 정동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진리가 없는 그곳에 어찌 안식이 있겠는가? 진리가 우리의 마음속에서 모든 사물의 가치와 존재의 질서를 배열하여 정돈시켜주지 않는다면, 어디서 우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수 있겠는가?


19.지혜에 대한 사랑


모든 인간이 한결같이 죄와 욕망에 눈이 먼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방탕한 마음을 욕망대로 움직이도록 방치하셨다면, 이 세상은 무질서와 폭력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본성 안에 신적 질서에 대한 인식을 심으셨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고 선으로부터 멀어졌을 때 양심의 고발과 율법의 정죄를 경험한다.


20.구속자가 없는 철학


기독교 신앙이 철학에 비할 데 없이 탁월한 이유는 그리스도의 구속 때문이다. 철학도 일정부분 인생의 이치를 밝혀주는 까닭에 인간은 철학을 통해 동물적 충동을 따르는 삶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철학에는 구속자가 없으므로 인간을 궁극의 행복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21.지성에 말을 건네심


인간이 감각적 쾌락에 지나치게 자신을 내맡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 이유는 단지 감각적 쾌락이 악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감각적 쾌락은 점점 더 많은 자극을 요구하고, 이러한 자극에 익숙해질수록 인간은 지성을 훈련하는 일에 게으르게 되기 때문이다. 인륜ㄴ이 사실을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22.눈물의 자식은 망하지 않는다


어떤 일은 미처 기도하기 전, 우리가 필요를 느끼기도 전에 하나님이 이루어주신다. 그런데 또 어떤 일은 하나님에게도 선하고 우리 역시 마음으로 간절히 원하는데도 이상하게 좀처럼 이루어주시지 않는다. 심지어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을 눈물로 간구하며 아픈 마음으로 기다리게 하신다. 그래서 믿음이 식을 때에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선하심을 의심하기도 한다.


23.육욕애와 부부애


아우구스티누스는 세 가지 목적으로 성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첫째로 자식을 낳기 위해서다. 둘째로, 부부의 정신을 사랑으로 연합시키기 위해서다. 셋째로, 정욕을 피하기 위해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세 가지 중 첫 번째 목적을 가장 탁월한 것으로 여기고, 세 번째 목적을 가장 열등한 것으로 여겼다.


24.없어질 것을 열애함


인간에게 가장 큰 불행은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그 다음의 불행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고, 마지막은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25.헤어질 수 없는 자아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살 수 없는 것처럼 자아(自我)와 대면하는 것 역시 회피할 수 없다. 인간은 언제나 자아로서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26.기억과 상기, 정동


기쁨이나 고통의 경험은 어떤 사건이나 사물이 현재라는 시공간 안에 있을 때 발생한다. 여기서 ‘현재’는 물리적 시공간이 아니라 그의 인식 속 시공간이다. 즉, 어제 발생한 일일지라도 오늘까지 그의 인식을 장악하고 있다면 그것은 현재 진행 중인 사건이다.


27.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살아있는 사람의 존재 기반을 뒤흔든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도 삶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사랑한 것이 아니다.


28.아름다움과 ‘없음’


세상의 모든 사물은 완전성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그 결과 이 세상에서 완전성을 온전히 성취하고 영원히 존재하는 피조물은 없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절정에 다다른 후에는 무(無), 곧 ‘없음’을 향한다. 그러므로 사물의 성장 혹은 성숙은 ‘완전성을 발현하고 소멸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29.육체적 감각의 무능


인간의 삶은 아름다움에 대한 정동의 연속이다. 인간의 마음이 고요한 호수라면, 정동은 그 호수에 돌이 떨어졌을 때 일어나는 물결의 파동이다. 육체적 감각이 외부 사물과 접촉할 때, 혹은 상상을 통해 마음 안에서 외부 사물의 심상과 만날 때, 인간의 마음에는 정동이 일어난다. 그리고 거기서 인간은 희노애락을 경험한다.


30.감각과 즐거움


인간의 고귀함은 하나님을 닮은 형상에 있다. 그 형상은 최초의 인류에게 부여하신 하나님의 닮은 영혼의 특성으로, 그 형상을 담지한 효력은 육체에까지 미친다. 그래서 타인의 영혼을 고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또한 그의 육체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을 본다.


31.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이란 사물 안에 있어서 인간의 마음을 끌어 좋아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다. 사물의 아름다움은 인간에게 애호(愛好)이 정동을, 사물의 추함은 오혐(惡嫌)의 정동을 불러일으킨다. 반복되는 애호의 정동은 사랑의 성향을 만들어 아름다워 보이는 것에서 결점을 찾지 못하게 하고, 혐오의 정동은 미움의 성향을 만들어 추해 보이는 것에서 장점을 발견할 수 없게 한다.


32.존재의 층차와 아름다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 그것들 안에 저마다 지정된 선함을 갖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모두 우리에게 동일한 사랑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존재와 가치의 질서를 따라 저마다의 아름다움으로 자기의 자리에 존재한다. 참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그 질서를 아는 것이다.


33.정념과 마음의 움직임


마음은 바다와 같다. 바다는 고요할 때에도 큰 물결로 출렁거릴 가능성이 있으며 험한 파도가 요동칠 때에도 언제든 고요해질 가능성이 있으니, 그 어느 상태를 기준으로 바다의 본 모습을 정의 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마음도 이와 같다. 영혼이 온갖 정념의 창고라고 한다면, 마음은 정념이 뛰노는 곳이다.


34.하나님의 존재 양식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무신론이고 또 하나는 최근 확산되고 있는 반신론이다. 무신론은 신이 없다고 확신하거나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사상이다. 그러나 반신론은 신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상관없이 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싫은 사람들의 사상이다. 즉, 무신론자보다 반신론자가 더 신의 존재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이다.


35.철학보다 귀한 사랑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사43:21) 그분을 사랑하며 그분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우리에게 즐거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분도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기쁘지 않으실 것이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그 일 안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다.


36.가까이 계신 하나님


그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품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이 만물보다 크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만물 속에 사물처럼 계신 것은 아니지만, 어떤 사물도 하나님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지상 만물 중 하나님이 거하시기에 가장 훌륭한 처소는 인간의 마음이다. 인간의 마음 안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음성을 들려주시고 인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신다.


37.배향과 불안


생각과 생활로 하나님을 등지는 것을 가리켜 배향이라고 부른다. 배향은 회심, 곧 하나님에게 돌아오는 전향과 짝을 이루는 단어이다. 하나님을 향하여 배향하는 사람은 불안하다. 마치 태양을 등진 사람이 자기 앞에 드리우는 그림자를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배향하는 사람은 육신대로 살 자유를 얻는 대신 불안을 떨쳐내지 못한다.


38.행복과 하나님을 앎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 안에서 모든 사물과 관계를 맺으며 지복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사랑은 그 대상이 사라져도 영원히 있는 사랑이니, 이 사랑을 누림이 인간 최고의 사랑이다.


39.어미 같은 교회의 사랑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하는 어린 아이처럼 교회를 사랑하자.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듯 교회를 어머니로 여기며 사랑하자. 그 교회 안에서 배우는 진리로 사랑을 이루고, 그 사랑으로 교회와 세상 안에 진리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자.


40.범죄와 자아의 찢어짐


칼뱅은 인간이 죄를 지을 때 자신이 마귀 때문에 죄를 짓는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마귀의 존재와 악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설교하던 그가 왜 인간이 짓는 범죄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했을까? 그것은 악이 인간 안에서 역사하는 방식과 인간 밖에서 역사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 밖에 있는 악은 인간을 객체로 삼아 해를 입히지만, 인간 안에서 역사하는 악은 인간이 주체가 되어 악을 선택하고 행사한다.


41.인간과 하나님의 모습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담지 할 때 어떤 존재가 되는지를 분명히 보여주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그리스도의 형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후4:4) 이 형상은 곧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기대하셨던 참 인간의 됨됨이와 살아감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이다. 인간의 타락으로 상실한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회복하게 하셨다.


42.설교와 영혼의 자유


어른이 어린 아이와 이야기 할 때 어른들에게는 이미 자명한 사실이나 어린 아이에게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다. 그러니 3차원의 공간과 4차원의 시간 밖에 경험하지 못하는 인간이 무한 차원에 속하신 하나님이 아시는 바를 어찌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인간에게 정말로 필요한 위대한 지식, 다른 모든 이성적 사유의 토대가 되는 지식은 이성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43.철학과 성경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에 의하면, 성경은 크게 두 가지 지식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는 믿음의 규칙이고, 또 하나는 생활의 교훈이다. 전자는 우리에게 믿도록 요구하고, 후자는 살도록 지시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잘 깨닫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믿어야 할 규칙은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살아야 할 교훈은 기쁜 마음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44.행복한 거지와 불행한 철학자


한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따라 하나님 및 인간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사는 데 있다. 이것은 철학을 통해서가 아니라 경건한 신앙으로 되는 것이다. 치열하게 학문을 탐구하되 거기서 얻은 지식 때문에 교만하지는 말자. 그 지식이 곧 행복 자체가 아니며 반드시 행복으로 인도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45.영원불변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완전하고 영원하며 불변하시는 존재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식하는 인간은 불완전하고 한시적이며 변하는 존재다. 하나님의 존재는 육체의 감각으로 파악할 수 없으니, 이는 인간과의 무한한 질적 차이 때문이다.


46.물질과 정신


정신은 물질이 아니다. 그러나 물질과 떨어질 수 없는 연관이 있다. 인간의 정신을 육체와 엄밀하게 구분하여 이원론을 주장한 데카르트의 사유는 이미 16세기의 갈릴레이 갈릴레오와 15세기의 코페르니쿠스, 그 이전의 르네상스 과학자들이 확립한 기계론적 자연관에 기초를 두고 있다.


47.인간과 자유의지


하나님은 인간을 자유로운 의지를 지닌 피조물로 창조하셨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심지어 동물조차도 무엇을 하고자 하는 의욕을 가지고 있다. 개는 짖고자 하는 의욕이 있기에 짖는 것이고, 소는 풀을 먹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에 풀을 뜯는다. 그러나 우리는 동물들의 이러한 욕구를 의지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의지라는 말은 도덕 능력을 가진 하나님, 천사와 마귀,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단어이다.


48.살아 있음과 의지


인간이 무엇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독특성을 갖는가에 대한 답은 역사적으로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났다. 각각의 견해는 지성이나 감정 또는 의지를 가장 중요한 특성으로 보았다.


49.하기 싫음과 의지


인간의 의지는 ‘하고자 함’과 ‘하지 않고자 함’으로 나뉘어 행사된다. 전자는 어떤 행동을 하고자 하는 욕구이고, 후자는 하지 않고자 하는 욕구다. 인간의 이러한 의지가 도덕적 선과 관련하여 행사될 때에는 ‘하고자 함’과 ‘하지 않고자 함’이 사실상 둘이 아니라 하나다.


50.사물의 무상성과 시간


영원한 사물이라 하는 것들도 절대로 시간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조나단 에드워즈도 이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에 관한 입장을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 그는 시간을 무상성과 긴밀히 연결해서 이해했고, 이 때문에 무상성이 없는 천상의 상태에서도 영원한 사물들이 시간 안에 묶인다고 단언하길 주저했다.


51.무지와 두려움


인간의 가장 큰 비극은 세계와 자신의 존재의 근거조차 모르고 사는 데 있다. 부지런히 살아도 그 삶이 창조주가 의도한 삶이 아니면 좋은 삶이 아니고, 사는 게 아무리 즐거워도 인생의 참된 목적에 기여하는 삶이라는 객관적인 판단을 받지 못하면 잘 사는 것이 아니다. 매일 눈앞에 펼쳐지는 일상에서 수많은 사물이 주는 거짓 표상에 매여 진리보다 행복을 좇는 삶을 산다면, 어찌 진정 복된 삶이라 할 수 있겠는가?


52.불변하고 영원한 빛


지성의 어둠은 곧 무지의 결과다. 무지는 지식과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지식이 결핍된 상태다. 마치 어둠이 빛 아닌 다른 무엇이 아니라 빛의 결핍인 것처럼 무지도 그러하다.


53.진리, 사랑과 영원


인간은 진리가 자신의 존재 밖에 있는 것으로 인식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니 이는 하나님 자신이 진리이시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영원하지 않다면 진리일 수 없다. 오늘은 참이라 할지라도 내일은 참이 아닐 수 있다면, 그것은 진리일 수 없기 때문이다.


54.악의 비 실제성


악 이란 이전에 원래 있던 완전한 상태보다 못하게 된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실체를 가지고 있다. 각각의 사물에는 하나님이 지정하신 고유한 ‘있음’이 있다. 따라서 절대적인 의미에서 모든 사물은 더 많은 분량의 ‘있음’을 지니지 못하고 자신에게 지정된 분량만큼의 ‘있음’만을 지니고 있어도 여전히 선하다.


55.만물의 일치와 아름다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만물의 존재 목적에 이중의 의도를 가지고 계신다. 하나는 개별적 사물로서 완전한 상태에 있을 뿐 아니라, 그들 안에 잠재적으로 혹은 가능성으로 주신 선과 아름다움을 증진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보편적인 질서 안에서 다른 사물과 어울리는 일치와 조화로서 선과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증진하는 것이다.


56.진리를 싫어함


진리의 실재는 객관적인 것이지만, 진리의 효과는 인간이 주관적으로 받아들여야만 나타난다. 인간이 인식한 진리는 객관적 실재와 주관적 인식에 걸쳐있다. 진리는 객관적인 것이나 인간이 인식하지 않고는 파악할 수 없다는 점에서 자연 사물과는 다른 존재 양식을 갖는다. 그리고 진리와 진리 인식을 두고 일어나는 지성의 혼란은 모두 여기에서 시작된다.


57.영혼의 무게


물체의 무게는 곧 그 물체를 아래로 잡아당기는 힘이다. 아래로 끌려 내려가지 않으려면, 거기에 항거할 반대 방향의 힘이 필요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여러 저작에서 ‘영혼의 무게’를 이야기 한다. 이는 곧 육욕으로 말미암아 죄로 이끌리는 본성의 힘을 가리킨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버릇’이라고도 했다. 이것은 일종의 필연성이다.


58. 진리와 선험적 인식


늘 불행하게 살던 사람이 어떤 행복한 상태에 도달했다고 치자. 누가 옆에서 지금 그 상태가 행복한 상태라고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는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낀다. 무지한 인간이 진리를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것을 진리로 이해하도록 누군가 그에게 미리 학습시키지 않았어도, 그는 즉시 고백한다. “아, 이것이 진리구나!” 이는 진리는 분별하는 인식이 인간 안에 이미 심겨져 있음을 의미한다.


59.진리와 그리스도


사람들이 철학을 하는 이유는 신자가 신학을 하는 이유와 같다. 바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다. 그 행복이 참 행복인가 그렇지 않은가는 잠시 제쳐두더라도, 사람들이 철학을 하는 목적이 행복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철학은 오로지 인간 이성으로 이 목적을 추구하고, 신학은 성경과 계시에 대한 믿음으로 이 목적을 추구한다.


60.사랑 없는 철학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죄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페카툼’으로서 율법과 양심에 의해 판단을 받는 객관적인 죄이고, 또 하나는 ‘포에나’로서 지를 지은 인간 안에 있는 성향, 혹은 죄의 결과가 마음에 끼친 영향이다.


61.진리를 즐기는 것의 한계


진리를 즐거워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를 탐구하는 것은 단지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리가 아닌 것으로부터의 억압과 매임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다. 이는 영혼의 자유 없이는 그 어떤 행복도 참다운 행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62.참된 철학과 눈물


철학에는 참된 철학과 오염된 철학이 있다. 참된 철학은 하나님과 세계, 인간의 존재와 의미에 관한 지식을 정확히 전달하는 철학이다. 이 세상의 모든 철학은 하나의 참된 철학을 위해 주어진 계시와 그 계시에 관한 지식을 둘러싼 무지와 오해, 왜곡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의 어떤 철학도 원래 주어진 참된 철학의 흔적을 부분적으로나마 지니지 않은 것이 없다.


63.영원한 생명에 눈뜸


인간의 영혼은 그 독특한 특성 때문에 다른 어떤 물질적 생명보다도 더욱 밀접하게 하나님의 생명에 의존하고 있다. 죄인이 변화 받아 신자가 된다는 것은 곧 예전에 누리지 못하던, 삼위일체 안에 있는 영적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의미이다.


64.심플리키아누스의 회고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알게 되는 것은 우리의 혈육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다.(마16:17) 하나님은 스스로 지혜 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숨기시고, 어린아이 같은 겸손으로 나아오는 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류에는 단호하되, 진리를 향해서는 항상 유순한 마음과 온유한 지성을 지녀야 한다.


65.마음의 필연성


자연이성으로 참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언제나 거치는 돌이었다.(롬9:33) 기독교가 가르치는 지혜는 이성의 추론을 초월한다. 더욱이 그 지혜가 행복한 인생을 살게 하는 방법으로서의 지혜일 때, 자연이성으로는 결코 그 지혜를 추론해낼 수 없다.


66.두 마음의 모순


아우구스티누스는 회심 전야의 긴 시간을 둘로 나뉜 마음으로 살았다. 그것은 곧 진리에 대한 그리움과 육체의 향락에 대한 욕구였으니, 찢어진 영혼으로 사는 그 비참함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67.마음의 나뉨


마음은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성향 때문에 스스로 나뉜다. 엄밀히 말하면, 원래 하나이지 못한 마음이 어떤 사물을 지각하자 그 마음의 성향을 드러내는 것이다. 마치 잔잔해 보이는 바다 안에 커다란 와류가 있지만, 거기에 어떤 물체를 넣어보기 전까지는 소용돌이를 느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68.의지의 모순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가장 진질하게, 그리고 가장 길게 언급하는 세 가지 주제는 시간과 영원, 선과 악, 자유와 의지다. 그 중에서도 인간의 자유와 의지에 대한 탐구는 집요하리만치 끈덕지다. 이 세상에 현존하는 수많은 악은 바로 인간 의지의 악함과 마음의 병든 상태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혼이 고쳐지지 않고는 세상의 악과 고통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69.다른 의지의 싸움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을 복합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주권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을 참으로 인간답게 살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모든 힘의 원천이 하나님께만 있음을 알게 하여 그분을 의지하고 사랑하게 하는 주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사는 사람들은 그분을 의지하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 이것은 학문적 지식이 아니라 신앙의 은혜에서 비롯된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자. 이것이 선한 의지 속에서 아름다운 삶을 사는 비결이다.


70.영혼과 육체의 욕구


인간의 욕망은 의지에 속하는 기능이다. 만약 인간에게 욕망이 없다면, 그의 의지가 무엇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지성의 인식이 의지의 행사로 이어지려면, 선택할 어떤 행동에 대한 욕구가 마음 안에서 우세해져야 한다.


71.죽음과 삶의 두려움


회심한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으로 ‘회심 전야’라고 불리는 시절이 있다. 청교도들은 이것을 중생 이전에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했다. 청교도 신학은 ‘구원을 위한 준비’라는 말로 본성과 은혜 사이의 갈등, 믿음을 위한 노력과 실제로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 사이의 관계를 설명한다.


72.회심을 경험함


회심은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총의 산물임을 입증하는 사건이다. 신자는 회심을 통해 이후의 삶 속에서 자신을 꺾고 하나님에게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순종의 성향을 부여받는다. 그러므로 교회의 품 안에 있는 신자들이 진정한 회심에 이르게 하고, 이미 회심한 신자들이 회심의 은혜를 잘 보존하며 살게 하는 것이 교회가 할 일이다.


73.행복과 안식


참 행복은 안식과 충돌하지 않는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의 품에서 안식을 얻을 때만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거짓 행복은 항상 참된 안식과 충돌한다. 인간이 불행해지는 이유는 대개 행복해지려는 욕망 때문이다. 복의 원천이신 하나님 없이 행복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삶에 안식이 있을 리 없다.


74.화살과 숯불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인식이 인간의 양심을 정확히 찌르는 것을 ‘날카로운 화살’로 묘사했고, 불구가 된 인간의 의지를 사랑으로 감화시켜 고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태우는 숯불’로 설명했다. 복음은 양심의 화살촉을 날카롭게 하고, 성령은 은혜의 숯불을 타오르게 한다. 영혼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때 가장 아름다우니 전심으로 주님을 바라보며 살자.


75.인류의 교만에 항거함


하나님이 인간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것은 인간이 참으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본래 지니고 있던 전일성(integritas)을 상실한 채 하나님이 의도하신 모습에서 멀어져 ‘결함 있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오늘날 자연 세계와 인간을 대하는 비인간적인 태도를 우리 사회에서 자주 보게 되는데, 이것은 결함 있는 존재인 인간 안에 있는 ‘참으로 인간 아닌 것들’의 지시를 받으며 산 결과다.


76.인간은 그 빛이 아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온전히 의존해야 할 필요성은 인간이 진리가 아니라는 점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불변하고 영원한 진리를 찾아 나섰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자신의 이성 안에 진리가 있고 정신의 힘으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오류였으나, 그는 그것이 잘못인 줄 알지 못했다.


77.교회의 아름다움


진리에 대한 사랑은 우리를 교회로 이끈다. 하나님이 진리를 교회에 위탁하셨기 때문이다. 교회의 아름다움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이를 본받은 성도들의 영혼의 아름다움의 총화다.


78.시간과 영원에의 빛에 태어남


인간은 영혼의 눈이 감긴 채 태어난다. 그리고 한 번도 그 눈을 떠보지 못한 채 인생을 살다가 영혼의 감긴 눈 위에 육체의 눈을 감고 죽는 사람이 많다. “산다는 것이 시련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라고 말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이 인간의 피할 수 없는 고통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장막에 들어오는 바람은 모두 호흡하게 되었습니다”라는 고백은 신자의 비할데 없는 행복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79.예지와 ‘있음’


이 세계와 인간에 관한 모든 지식은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와 인간 존재의 근거이시다. 인생을 슬기롭게 살아가게 하는 판단력은 지혜에서 나온다. 이 세계의 자연 만물을 사용하는 지혜는 인간이 누구이며 어떠한 목적으로 창조되었는지를 아는 지식에서 나온다. 인류에 대한 구원의 계획은 정확히 창조의 목적을 계승하며, 세계를 향한 창조의 계획은 인간의 구속 계획 안에서 구체화되고, 그 계획의 실행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80.사랑과 상처


인간의 사랑은 우주적인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영원하며 우리가 하는 모든 개별적 사랑의 최고의 목적인 하나님 사랑이 그 모든 사물을 사랑하는 동기가 될 때, 사랑의 대상이 사라져도 그 사랑의 대상이 가리켰던 궁극적 사랑의 대상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더욱 사랑하게 될 것이니, 이때 비로소 우리는 아무리 사랑해도 그 사랑 안에서 아무것도 잃지 않을 수 있다.


81.영혼의 소유


진리에 대한 추구가 목마름이라면 진리의 발견은 환희다. 그러나 그 환희는 더 깊은 갈망을 부른다. 어둠속에 머물던 때를 생각하면 최초의 발견은 찬란한 빛이지만, 그 빛은 우리 안에 있는 더 큰 어두움을 보게 하여 그 모든 어두움까지 몰아낼 더 환한 빛을 갈망하게 한다.


82.지성과 사랑


지식과 사랑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영혼의 탁월한 두 기능과 관련이 있다. 지성과 의지가 바로 그것이다. 지식에는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과 후천적으로 습득한 것이 있는데, 모두 지성의 작용과 관련된 것이다. 사랑 역시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과 후천적으로 습득한 것이 있는데, 모두 의지의 작용과 관련된 것이다.


83.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


하나님의 본질은 인간이 파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연을 통해서는 물론 심지어 성경을 통해서도 계시된 바가 거의 없다.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성경의 언급은 단 두절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3:1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14)


84.진리와 인식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과, 들리는 것은 들리지 않는 것과, 만져지는 것은 만져지지 않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진리는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으며 만져지지도 않지만, 진리의 ‘있음’은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방식으로 인간에게 드러난다.


85.자아란 무엇인가?


자아란 무엇인가? 자아는 영혼과 정신, 특히 기억에 정체성을 두지만 육체에 속한 감각기능과도 관계된다. 육체의 감각 기능은 단순히 외부 사물에 대한 정보만을 실어나르는 도구가 아니라 마음과 정신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86.행복과 기억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행복한 상태에 대한 기억이 없이는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인간이 행복한 상태에 대한 기억이 없다면 그렇게 되기를 갈망할 수 없고, 또 그 상태에 도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행복임을 알 수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87.오래 되었으나 새로운 아름다움


아우구스티누스는 회심하여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을, 곧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것으로 보았다. 서른 두 살에 회심했는데, 이를 두고 그는 너무 늦게야 하나님을 사랑했노라고 말한다. 이는 물리적인 시간의 늦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복이 너무 크기에 그분 없이 살아온 날들에 대한 후회에서 나온 탄식이다.


88.은혜와 선


인간이 참으로 선을 행하며 사는 길은 하나님을 꾸밈없이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행하는 바 모든 것이 하나님을 향한 섬김이 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에게서 느낀 사랑은 지성적이고 인격적인 사랑이었으나 그것은 자신을 온전히 불태워드리고 싶을 정도로 뜨거운 사랑이었다. 산 같은 사상, 물 같은 마음, 불같은 사랑으로 살자!


89.힘으로서의 은혜


인간 안에 역사하는 은혜는 ‘선을 행하도록 마음에 작용하는 사랑의 힘’이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마음은 필연적으로 악을 향하는 성향을 갖게 되었다. 이 성향을 거슬러 율법과 양심에 부합하는 삶으로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일이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그런 행동을 하는 목적이 하나님의 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는 ‘선’이신 하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그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90.욕망과 은혜


정화된 영혼으로 진리를 알게 하는 조명을 받아서 하나님과 사랑의 일치를 이루는 삶에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육신의 욕망이다. 육체를 지닌 인간에게는 욕망이 없을 수 없다.


91.그리스도를 열애함


인간의 영혼이 정화되어 조명을 통해 지성이 진리를 알고, 그 깨달음 아래서 하나님과 궁극적으로 사랑의 합치를 이루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그러나 그 일을 방해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육신에 속한 정욕이다. 여기서 정욕이란 넓은 의미에서 자기를 주인 삼아 살고자 하는 욕망을 말한다.


92.찰라와 기억


아아, 끝없이 흘러가서는 다시 오지 않는 시간의 연속이여! 그 안에서 유한하기 그지없는 인간이여! 밖으로는 무한한 세계 안에서 외롭고, 안으로는 스스로도 그 끝을 인식할 수 없는 내면의 심연 속에서 외롭다. 그리고 그 외로움은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도록 창조된 존재임을 찰라와 기억 속에서도 확인하게 한다.


93.시간과 영혼의 찢김


시간은 참으로 신비하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꼭 필요할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에도 꼭 필요한 것이 시간이다. 그러나 시간은 또한 공간과 함께 인간으로 하여금 그 일에 충실하지 못하도록 영혼을 찢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이 불완전한 감각으로 말미암아 찢어지지 않도록 진리의 끈으로 우리의 영혼을 붙들어 매야 한다.


94.질료와 형상


인간은 꼭 알아야 할 것들에 대해 무지할 권리가 없다. 가장 쓸모없어 보이는 지식이 사실은 쓸모 있어 보이는 지식보다 중요하다. “사람들은 모두 쓸모 있는 것의 쓸모는 알아도 쓸모없는 것의 쓸모는 모른다.”(장자)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기 위해 필요한 지식의 습득이라면, 무엇에든지 게으르지 말자.


95.천상 세계와 지상 세계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셨으니 천상 세계와 지상 세계가 그것이다. 지상 세계가 물질적 사물로 이루어진 세계라면, 천상 세계는 영적 사물로 이루어진 세계다. 두 세계는 서로 다르지만 창조된 목적은 동일하니,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기 위함이다.


96.질료와 무상성


유한한 것에서 나온 모든 것은 유한하며, 유한한 것이 무한하게 되는 경우는 무한한 존재로부터 그렇게 되도록 덕을 입었을 때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며 교만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상한 육체와 시간의 변전에 굴복하지 않을 영혼을 아울러 가졌기에 인간은 행복과 불행의 심연 사이를 지난다. 진리의 줄을 굳게 붙들고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시선을 영원으로 향하게 하여야 한다.


97.천상 사물의 불변성


지상에는 지상 사물이 있고, 천상에는 천상 사물이 있다. 지상 사물은 천상 사물들과는 달리 시간에 의해 변전하고 그 본래의 상태인 질료로 회귀하려고 한다. ‘무’에서 창조된 사물이기에 항상 무로 돌아가려는 경향성을 보이는 것이다. 사물이 무로 돌아가려는 경향성은 시간과 관련이 있으니, 완전성을 상실하거나 형상을 부여받은 질료가 고유한 형태를 상실하는 것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98.영원에 참여하는 방식


인간은 시간 속에 매여 살기에 결코 스스로 영원을 경험할 수 없다. 영원은 오직 사랑을 통해 경험된다. 인간은 영원 자체이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영원한 것들이 무엇인지 경험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영원한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영원을 향하여 의미 있는 삶인지를 사랑을 통해서 배운다. 왜냐하면 사랑 그 자체가 영원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장 큰 본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숨이 멎는 그 순간까지 이것을 기억하자.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만큼만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는 만큼만 알 수 있으니, 그분을 아는 일에 게으르지 말고 사랑하는 일에 순점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99.만물의 회귀


창조된 모든 만물에 대해 말하자면, 개별적 사물에 대한 관념뿐 아니라 그 사물들이 다른 사물들과 이루는 상호 관계에 대한 관념까지 이미 하나님의 지성 안에 있었다. 중세 신학자 안셀무스에 의하면, 그 관념이 하나님의 존재보다 우선한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하나님은 이 전에 없었던 관념을 새로 가지실 수 없으니 하나님과 함께 영원하다고 말할 수 있다. 


100.은총과 절대의존


고백록은 지극히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한 찬송으로 시작하여, 지극히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향한 기도로 끝을 맺는다.ⓒ김남준 (열린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