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정원  | 출판사 : 영성의 숲
판매가 : 12,000원10,800원 (10.0%, 1,200↓)
이 도서는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영성'이 재판된 도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 성도에게 있어서 주님의 임재하심 속에깊이 잠기는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은 없습니다.주님의 임재는 곧 천국의 영광이며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는 빛입니다.그 임재 속에서 우리의 영혼은 행복해지며 새롭게 깨어나게 됩니다.주님의 임재 경험, 이것이 기독교의 실제이며영성의 실제입니다.여기에서부터 성도는 진정한 기쁨과 자유함을누리게 되는 것입니다.[더보기▶]



20160621_061102.jpg책의 제목이 바뀌어 다시 출간 되었습니다.

정원의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영성/이레서원>을 읽다

재목 바꿔 다시 출간<영성의 실제를 경험하는 길/영성의숲>


최용우의 책 읽기


어떤 학생이 네이버 지식인에 질문을 했습니다.
"학교 가기 싫어요"
답변이 하나 올라왔습니다.
"가지마라"
의외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시간'을 지루해 하더군요. 예배시간을 견디고 난 후 점심메뉴가 무엇일까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예배시간을 설레이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일찍 서둘러 교회당에 와서 준비하고 있다가 예배를 통해서 주님의 은혜와 기쁨을 충만히 받고 누려야 되는데, 이렇게 말합니다.
"예배시간이 재미 없어요. 예배 드리기 싫어요"
"드리지마라"
어떤식으로든 한국교회가 변해야 한다고 말이 많습니다. 이런 저런 대안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악한 문화, 둔감해진 죄 의식, 형식적인 신앙행태를 통해서 심령이 병들고 상한 상태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자유함이 없고 행복함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잠에서 깨어나 하나님을 만나는 길밖에 없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회복되면 다른 모든 문제들은 순식간에 해결되어 버립니다. 그동안 잃어버렸던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영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 책은 제1장에 주님을 만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소개하고 있고,
제2장은 우리가 열심히 믿고 있는 신앙생활 가운데 실제가 아닌 예배, 기도, 찬양, 종교적 행위같은 것들을 진단합니다.
제3장에서는  실제가 아닌 사역을 하고 있는 사역자들의 모습을 밝혔고,
제4장에서는 주님의 실체를 접촉하는 원리와 방법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2004.9.19 최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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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과 실제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영적 성장을 갈망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교회와 선교 단체의 많은 훈련 프로그램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신앙의 진리에 대한 훌륭한 통찰력과 영적인 동력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이수한 사람은 뿌듯한 자부심, 새로운 깨달음, 어떤 자신감 등을 획득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위험은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훈련들이 주님을 경험하게 하며 주님을 알아가는 데에 실제적으로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또한 영적인 실제가 결여된 채 어떤 고정된 관념의 형성이나 경험에 그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우에는 실제적으로는 별로 유익이 없이 과정의 이수에 대한 자부심과 이에 따른 영적 교만만 남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분위기가 충만한 집회에 참석했던 이들은 몹시 고양됩니다. 그들은 자신이 충만한 상태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적 실제는 몇 번 은혜를 받고 멋진 강의를 들었다고 해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책을 몇 권 읽고 그 이론을 이해했다고 해서 참된 영적 실제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영적 실제와 원리가 나의 것이 되려면 현실 속에서 수많은 실패와 갈등과 체험을 통하여 서서히 그 자신의 것으로 조금씩 소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의 헌신과 열정은 순간의 열정으로 지나가 버리는 경향이 매우 많습니다. 그러나 분위기에 휩쓸려 울고 헌신을 고백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실제 삶에서의 불시험을 통과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것은 아직 온전한 헌신으로서 입증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대한 사랑을 고백하지만 막상 구체적인 헌신이 필요한 곳에서, 또한 시험이 올 때에 진정으로 주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와 기성의 신앙에 대하여 쉽게 비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으로 실제에 접하고 실제의 삶을 경험하고 보여줄 수 있을 때에만 그러한 이야기들은 실제가 되는 것입니다.


훈련과 열매


 진정한 영적 실제에 접했을 때 그것은 사랑과 포용을 가져다줍니다. 어떤 이가 실제를 접하고 주를 체험할수록 그와는 거리감이 없어지며 연합이 쉬워집니다.
 그들은 어떤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아름다워집니다. 사랑스럽게 됩니다. 그들의 말과 표정은 따뜻하고 풍성해집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며 다른 지체들에게 전에 주지 못했던 어떤 풍성함을 나누어줍니다. 그때 다른 사람들은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변화되었다 무엇인가 달라졌다.’ 그것은 본인의 말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어떤 이가 훈련을 받고 뭔가를 깨닫거나 체험했다고 주장하는 데 바로 그 순간부터 그 체험이나 깨달음 때문에 교회는 분열이 시작됩니다. 그들의 말은 아주 영적인 것 같은데 이상하게 관계는 점점 더 살벌해지고 거리와 벽이 생기게 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영적인 실제에 접한 것이 아닙니다.
 어느 단체에 헌신한 한 자매가 있습니다. 그녀는 당연히 그녀의 전 생애를 주를 위해 드렸으며 주만을 섬기기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가족은 말하기를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녀와 같이 생활한다면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녀는 실제에 접촉했을까요? 주님보다 가족을 더 사랑하는 이는 주님의 제자됨에 적당하지 않으며 세상은 모두 마귀이므로 이러한 비난을 핍박으로 간주해야 할까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러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실제에 접촉하고 있지 않으며 다만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영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러한 모습은 결코 영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그것은 환상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녀가 실제에 접하고 있다면 그녀는 구태여 그것을 설명하거나 자신을 변호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는 자연스럽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모든 관념을 무너뜨립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은 영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만이, 우리만이 영적이라고 보는 것은 실로 무서운 독단이며 무엇인가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훌륭한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몹시 은혜가 충만하고 거의 모든 성도가 주님만을 붙잡기를 열망했습니다. 그러나 예배 후 몇 성도와 교제하면서 그런 즐거움이 다소 반감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녀는 “여기만이 진리와 생명이 있습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것은 정말 좋지 않은 말입니다. 엘리야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호소하기를 “주님 이제 저 하나만이 남았습니다. 온 세상의 믿음이 다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 않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자가 7천명이나 있다” 그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우리만이 영적이며 주님을 제대로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서운 착각입니다 주님께는 항상 그분께 속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훌륭한 많은 교화와 많은 종들을 보유하고 계십니다.” 그녀는 바로 대응했습니다. “어디에 그런 데가 있어요?” 그렇게 따졌습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자기 확신과 영적 우월감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기성 교회를 비판하고 공격합니다. 그들은 모여서 자신들이 들은 설교의 내용을 서로 나누며 이 얼마나 세속적이고 진리가 결여되어 있는가를 흥분하면서 이야기 합니다. 그것은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하고 흠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에는 비판과 공격보다는 사랑과 눈물과 중보의 기도가 필요할 뿐입니다. 다른 교회나 전체 교회를 욕하는 이들은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자기 몸을 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문제가 있을 때 그 교회를 위하여 아파하고 고통을 분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치 교회가 자기와 상관이 없는 양 비난한다면 거기에는 주님의 은총이 임하지 않습니다.


 훈련의 중심


 오늘날 많은 훈련이 있습니다. 교회와 영적인 단체와 선교 단체 등에서 많은 주제를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을 훈련시킵니다. 아버지 학교도 있습니다. 가정 학교도 있습니다. 내적인 치유를 다루는 내용도 있습니다. 전도 폭발과 같은 전도 훈련도 있습니다. 각종 교리 훈련도 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다 좋은 훈련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각론적인 것이며 중심이고 본질적인 것은 아닙니다.
 시체가 있습니다. 시체는 죽어있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세수도 못하고 식사도 하지 못하며 인사도 대화도 할 수 없습니다. 시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식사를 가르치는 것일까요? 인사하는 법이나 대화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시체는 생명을 주어 살리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 외의 모든 것들은 시체에게 근원적인 문제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체에게 멋진 옷을 입히고 화장을 하면 살아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조금 지나면 그가 죽어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영적으로 병들고 약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훈련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주님의 영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의 영혼이 주님의 거룩한 성령께 사로잡히고 붙들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온전케 하고 성장하는 것을 도와주기 위하여 많은 세미나 강좌가 있습니다. 나는 그 모든 것이 좋지만 가장 근본적이고 의미 있는 것은 그 사람의 영혼을 깨우고 일으켜 주님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고 사로잡히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을 아는 것 주님을 체험하는 것 영혼이 깨어나고 그 주님의 영광과 천국의 영광에 실제적으로 사로잡히는 것, 그러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교육이 가장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것입니다.
 모든 훈련은 오직 우리의 영혼이 주님의 영에 가까이 나아가고 사로잡히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종착역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그것이 훈련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께 사로잡히고 주님을 알아가게 되는 이들은 더 이상 아무 것도 구하지 않게 됩니다.


영적 체험과 실제


 영적인 훈련과 함께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에 중요한 자극이 되는 것이 영적인 체험들입니다. 주님의 임재에 대한 강렬한 체험은 그의 영적 여정에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한동안 그 사람은 긍정적인 변화들을 가지게 됩니다.
 한 그리스도인의 믿음 생활은 그의 일생에 걸친 몇 개의 체험에 의해서 몇 개의 기간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가 어떤 강렬한 영적 체험을 했을 때 그의 믿음 상태는 가파른 곡선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점차 흐름에 따라 흥분은 사라지고 그의 영적 상태는 점차로 하강 곡선을 그리게 됩니다. 그렇게 점차로 영적인 열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는 또 다른 영적 체험을 하고 다시 영적 회복을 이루어 가게 됩니다.
 이러한 영적 성장의 주기에 대하여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파도에도 밀물과 썰물이 있듯이 영적인 열정의 온도는 어느 정도 주기가 있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일치된 체험과 강렬한 기쁨이나 권능의 체험과 같은 것은 신앙의 성장에 있어서 많은 기여를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는 이러한 체험을 통해서 악습을 끊기도 하며 복된 결단을 하기도 하며 부분적으로 죄에 대하여 승리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순간에 성장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체험 속에 실제는 점점 사라짐
 단지 문제가 되는 것은 체험과 열정의 연속성과 일관성입니다. 그 체험의 감동과 맛은 점점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국은 팔팔 끓을 때 맛이 있습니다. 식은 후에 국의 성분은 변하지 않았을지 모르나 맛은 전과 같지 않습니다.
 유명 연예인이나 사회저명인사가 있습니다. 그가 어떤 영적 체험을 하고 그리스도인으로 변화 받습니다. 그는 전혀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그는 지명도가 높은 사람이었으므로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간증을 하게 됩니다.
 그는 간증을 하면서 자신의 체험 부분에 이르러 감동을 이기지 못하고 흐느껴 울기도 하고 주님의 놀라우신 사랑에 탄성을 발하기도 했습니다. 점차로 그에 대한 소문은 퍼져갔고 그의 간증 횟수는 늘어났습니다. 이제 그는 똑같은 간증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두 번 세 번 네 번 간증의 횟수가 많아지면서 그는 점차로 자신의 상황과 체험을 좀 더 세련된 표현으로 묘사하게 되었습니다.
점차로 그는 간증의 어떤 부분에서 사람들이 감동을 받으며 어떤 부분에서 사람들이 폭소하며 어떤 식으로 끝을 장식하는 것이 좀 더 극적인 효과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때쯤 되어서는 조금씩 사실에 뭔가를 덧붙이기도 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갈수록 그는 영적 실제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가 처음에 간증을 시작할 때 그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차츰 이것이 줄어들고 약간 감동이 오는듯한 정도이더니 나중에는 아주 무덤덤하고 냉랭한 상태에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점차로 자신의 감정을 공연하듯이 꾸며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흔히 있는 일입니다. 체험이 잘못된 것일가요? 아닙니다. 체험은 좋은 것입니다. 그 체험 속에 영적 생명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사실은 남아 있지만 감동은 여전히 남아있지 않습니다. 훈련을 받을 때 어떤 체험을 할 때 사람들은 뭔가 진리를 깨닫고 전율하며 감동합니다. 세월이 지나 과정을 이수했지만 사실과 진리는 남아 있으나 실제의 그 충만함은 없습니다. 그것은 바람처럼 공기 중에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체험 속에 주님만 남아야


 우리는 체험과 주님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체험을 추구하는 것과 주님을 추구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것은 미묘하지만 분명히 다릅니다. 깨달음과 진리를 추구하는 것과 주님 자신을 추구하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전자는 독단에 빠질 위험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체험은 양식이 아니지만 주님은 양식이 되십니다. 과거에 아주 비싸고 좋은 음식을 아무리 잘 먹었어도 그 추억으로 계속 배부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매일의 양식으로는 충분히 살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체험이 아니고 과거의 훈련이 아닙니다. 바로 오늘의 훈련이며 오늘의 경험입니다. 날마다 생동적인 주님과의 관계를 가져야 하며 오늘의 주님을 붙들고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꺼져 가는 등불처럼 희미한 옛 체험의 추억을 의지하며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역사에 위대한 영성인들이 등장할 때마다 교회는 분열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따라가지 않고 그들을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역사에 위대한 진리들이 밝혀졌을 때도 사람들은 분열되었습니다.
 그들은 진리이신 주를 따르지 않고 진리 자체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체험은 아름답지만 그 직후에 무시되어야 하니다. 체험은 잊어버리고 오직 주님만이 남아야 합니다.
 기도원에서 처음 만나는 낯선 그리스도인 중에 만나자마다 대뜸 자신의 체험에 대해서 열심히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신앙과 영성을 과시하기 원합니다. 그것은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열정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상대의 기를 죽이기 위한 자기 과시용 체험 간증입니다.
 체험은 우리의 목표가 되고 우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이 3층천에 올라갔었던 14년 전의 영적 체험을 거의 얘기하지 않은 것도, 모세가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40일 동안 경험하고 그의 얼굴에 광채가 드러나자 수건으로 이를 가린 것도 그들은 영적 체험이 우상시될 위험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체험하십시오. 그리고 체험은 버리고 주님만 간직하십시오. 오직 주님만 영원한 실제이시며 우리의 참 목표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소원 성취

기도에 대한 일반적으로 널리 퍼져있는 관념은 '기도=소원성취'라는 등식입니다.
일반적으로 불신자는 거의 이런 개념으로 기도를 생각하는 경향이 많고 초신자나 성숙되지 못한 신자에게서도 이러한 경향은 흔히 발견됩니다.
그들은 성도의 삶이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야 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한다는 관념이 별로 없는 듯 보입니다.
그들은 먼저 자기들의 계획과 비전을 세우는 것을 좋아합니다. 특히 위대한 것을 매우 좋아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인도를 받는 것 보다는 주님을 인도하는 것을 좋아하는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주님은 소원 성취의 도구가 됩니다. 그리고 기도는 주님을 해결사로 만드는 과정이 됩니다. 그런데 주님이 말을 잘 듣지 않으면 작정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래도 주님이 호락호락하지 않으면 이번에는 금식을 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주님을 구슬리기도 하고 협박도 하고 하소연하면서 그들은 소원 성취를 위한 힘들고 피곤한 여행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기도의 주 목적이 될수는 없는 것입니다. 기도는 본질적으로 그분을 만나고 교제하며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동기가 아름답지 못한 만남은 그 열매 역시 누추할 수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와 응답을 마치 커피 자판기에 동전을 집어넣고 커피를 빼먹는 것같이 생각합니다. 동전을 넣으면 커피가 나오듯이 기도를 하면 응답이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동전을 넣었는데도 커피가 나오지 않으면 "이 기계가 망가졌나?" 하면서 발로 커피 자판기를 걷어차는 것처럼, 기도의 응답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기도란 이와 같은 기계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당신은 주님 자신을 사랑하십니까? 아니면 주님이 주시는 선물에 더 많은 관심이 있습니까? 이것은 기도의 본질에 관한 질문입니다. (62-63면)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일을 합니다.


목회를 하고, 선교를 하고, 전도를 하고, 찬양을 하고, 봉사를 하고, 헌금을 합니다.
그런데 왜 합니까? 그것이 우리의 취미 입니까? 아니면 밥벌이 입니까? 아니면 다른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왜 주님의 일을 합니까?
주님께서 그것을 하도록 명령 하셨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사역이라는 것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역이 먼저가 아니고 순종이 먼저 입니다.
아무리 성공적으로 사역을 해서 많은 업적을 이루고 거대한 교회 조직을 만들고 전도왕이 되고 성전을 몇개씩이나 건축했다 해도 그것이 주님께서 명령한 일에 대한 순종이라면 칭찬을 받겠지만, 나의 노력과 공로와 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일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종아, 너는 네 분수를 모르는 구나. 바깥 어두운데로 나가거라" 하고 말씀 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할 때에는 자신의 입장을 초월하여야 합니다. 자신의 상태를 잊어버려야 합니다. 오직 주인의 필요와 기분에 매우 민감하여야 합니다.
그분을 모시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 그분 자신을 섬기는 것이 모든 사역의 기초입니다. Ⓒ정원 목사

햇볕같은이야기 제2186-2188호에 소개

들꽃편지 569-570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