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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홍 | 2022.05.10 21:29:08 | 메뉴 건너뛰기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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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news.or.kr/news/articleView.html?idxno=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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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노믹스08] 실낙원 = 아담의 땀

 

김민홍 주간<기독교>2021.03.15

 

“죄짓고 평생 땀 흘려 땅 일구어야

정착과 잉여시대로 빈부격차 심화”

 

세상엔 공짜가 없다. 꼭 대가를 치루어야 된다. 물건을 사거나 서비스를 받게 되면 반드시 돈을 지불해야 한다. 먹고 자고 입는 일엔 돈은 꼭 들어간다. 돈 없이는 경제생활을 할 수 없다. 돈은 일을 해야만 손에 넣을 수 있다. 땀을 흘리지 않고서 얻을 수 없다. 빵 한 조각에도 땀과 눈물이 녹아 있다. 소득논리이다. 에덴동산은 그렇지 않았다. 손만 내밀면 먹거리를 해결했다. 땀을 요구하지 않았다. 지상낙원이라 그렇다.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공급자는 하나님이고 수요자는 아담과 이브 달랑 둘이다. 공급과 수요는 늘 균형을 이루었다. 오히려 공급이 넘쳐났다.

 

에덴동산 울타리 바깥은 영 딴판이다. 먹거리와 각종 생활용품은 아담의 땀을 요구했다. 실낙원이 바로 그런 곳이다. 에덴 바깥 땅은 땀을 먹어야 살지고 풍요로워진다.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깨진 곳이다. 오히려 인류는 공급부족에 시달렸다. 기근이나 수해 등 천재지변이 닥치면 굶어야 할 판이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을 만나기가 두려웠다. 말씀을 어긴 불순종의 죄를 지은 탓 이다. 둘은 무화 과 옷을 걸치고 에덴동산 나무사이에 몸을 숨겼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과 스스로 거리를 두었다. 하나님과 관계가 서먹서먹해졌다. 얼굴을 마주하기가 부끄러웠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지으면 우리는 이렇게 기피족이 된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의 ‘불순종의 죄’를 그대로 넘길 수 없었다. 불순종의 죄를 다스려야만 했다. 추궁에 나섰다. 아담은 지은 죄를 솔직하게 고백은 했다. 그 과정에서 책임을 이브한테 넘겼다. 아담의 비겁함이다.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지만 할 수 도 없었다. 이브 또한 그랬다. 뱀의 꼬임에 넘어갔다 고 둘러댔다. 둘 다 하나님한테 죄 지은 후 책임을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쓴 모양새다. 뱀의 유혹은 거짓이 아닌 사실이다. 그러나 뱀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잘못은 이브에게 있다. 이 잘못은 인정하고 책임을 져야 했다. 그러나 둘은 반성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책임을 엄중히 물었다. 죄의 대가이다. 뱀은 사탄의 매개인이자 하수인이다. 뱀은 저주를 받아 평생을 기어 다니며 흙을 먹도록 했다. 그리고 아담과 이브에게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령을 내렸다. 에덴바깥에서 살도록 했다. 실낙원의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특히 아담에게 내린 형벌은 무거웠다. 하나님은 먼저 땅에 저주를 내렸다. 땅은 아담 때문에 저주를 받았다. 땅은 옥토가 아니라 가시덤블과 엉겅퀴가 무성한 돌밭이 됐다. 아담은 그런 황무지를 일구어서 채소 등 먹거리를 직접 생산해서 먹어야 했다. 노동은 기쁨이 아니라 고통이다. 이브에게도 그랬다. 출산의 고통을 안겨 주었다. 평생 남편의 다스림을 받도록 했다. 이브의 이기심은 인간의 타락과 비극 으로 막을 내렸다.

 

실낙원에 들어선 아담은 나홀로 인생이다. 마치 로빈슨 크루소나 다름없다. 실낙원은 로빈슨 크루소가 도착한 외딴 섬이나 같다. 무인도 생활은 나홀로 경제생활이다. 혼자서 생산해서 소비한다. 실낙원의 아담도 그랬다. 나홀로 경제생활이다. 혼자서 땅을 갈고 씨를 뿌려 먹거리를 생산해야 됐다. 아담은 농사꾼이 됐다. 농경시대 적응하고 살아야 했다. 인류의 농경생활은 물가에서 시작했다. 물은 생존이다. 물은 황무지를 황금밭으로 바꾼다. 물은 씨에다 생명을 불어넣는다. 농업은 물길을 따라 발전 했다.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 중심의 비옥한 땅에서 농사를 시작했다. 이곳을 메소포타미아 문명 지대라 부른다. 기원전 1만 년쯤이다. 농부들은 물줄기의 흐름과 강물의 높낮이 등 수량도 살폈다. 물은 늘 풍년을 도왔다.

 

농경생활은 생활의 혁명을 가져왔다. 떠돌이 생활을 마감했다. 가족이 한곳에 머무는 붙박이 삶을 시작했다. 농사도 짓고 가축을 기른 것이다. 농사꾼들은 날씨와 계절의 변화에 민감했다. 또 땅의 모양이나 토질에 대해서도 지식을 쌓고 흙을 다루는 초 보적인 기술도 익혔다. 순리의 가치를 중시했다. 가족중심의 공동체문화도 형성됐다. 농경생활 이전 생산은 단순했다. 산과 들에서 열매나 따고 물고기를 잡았다. 생산이 아니라 채집생활이다. 다만 에덴동산처럼 낙원이 아니었다. 먹거리를 채집하려면 먼 곳으로 나가야 했다. 그나마도 때를 맞추어 거두거나 양 또한 풍족하지가 않았다. 또 자연에 순응해야 했다. 도구나 장비, 기술개발도 등한시했다. 인류는 이 채집생활이 길어졌다. 수백 만 년 이상 지속했다.

 

농업은 신석기시대를 열었다. 농업생산은 토지 와 노동 이외에도 자본이 투입돼야 한다. 여기서 자본은 현금만이 아니다. 자본재도 포함된다. 자본재는 기계 공구 공장설비 등을 말한다. 농업에서 쟁기 등 각종 농기구가 자본재에 해당된다. 신석기시대 엔 아직 쇠를 녹여내는 기술이 없던 시절이다. 원자재는 땅바닥에 널린 돌멩이 뿐이다. 농사꾼에겐 쟁기 등 도구가 절실하다. 필요는 반드시 발명을 낳는다. 돌맹이를 활용했다. 뾰족하게 갈아 호미나 쟁기로 사용했다. 세월은 농기구와 생활도구의 발전을 가속화했다. 농업기술마저 날로 발전했다.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신기술과 편리한 농기구를 활용한 농사는 매년 수확량이 늘어났다. 생산성 향상 덕분이다. 식량은 매년 먹고도 남았다. 잉여생산시대가 열린 것이다.

 

농경시대는 발전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그 이전 채집시대와 비교가 안됐다. 또 매년 잉여생산물도 계속 쌓였다. 창고를 짓고 큰 그릇도 만들었다. 남는 곡물을 오래 보존하기 위한 지혜이다. 농업은 혁명적으로 발전했다. 덩달아 인류는 문화와 문명사회로 나아갔다. 반면에 농업은 부작용도 가져왔다. 바로 잉여의 가치 때문이다. 잉여는 인간의 마음속 깊이 숨었던 욕망에다 날개를 달아 주었다. 더 많이 가지려 했다. 거기다가 정착생활은 사유재산에 눈을 뜨게 했다. 이제 인간은 ‘내것’에 포로가 됐다. 집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결과는 ‘부익부 빈익빈’ 사회를 만들어 냈다. 인간세계에 계급과 권력이 독버섯처럼 자라는 사회가 찾아왔다. 돈이 한쪽으로 쏠리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 잉여는 갈등과 범죄 그리고 전쟁 등 불행한 시대를 불러왔다. 이것이 잉여의 본질이다. 실낙원은 잉여가 신(하나님)이 됐다. 불순종과 욕망만 이글거리는 땅으로 타락했다. J

 

 김민홍  cnews197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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