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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부잏 | 2018.12.06 20:50:25 | 메뉴 건너뛰기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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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교계에 유행되어 온 중보기도에 대해

고은교회 황부일목사

언제 부터인가 교계에 중보기도라는 것이 생겨졌고 요즘엔 유행처럼 번져 있습니다. 교계 단체나 교회 모임에서 중보 기도회를 주기적으로 갖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 이름을 서로 나눠받아 함께 기도하기도 하고 자기가 아는 사람, 가족이나 그 외 사람을 서로 바꾸어 기도해 주기도 합니다.

<중보기도의 실태>

기독교 신문광고를 보면,“초교파 긴급 중보기도단”이라는 광고가 종종 나오는데 보면 “위급한 상황을 당하였습니까? 저희들에게 연락 주십시오 즉시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긴급 중보 기도단은 언제 어디서 기도요청이 오든지 즉시 기도하여 사탄을 몰아내고 문제를 해결 받는 전천후 기도단 으로서 교파를 초월하여 전국에 산재한 기도 회원들이 매일 24시간 기도하고 있는 국내 최초의 전문 긴급 중보현장 기도단입니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들은 접수된 기도요청에 대해 개인의 신상과 교회를 드러나지 않게 기도문을 제작하여 전국에 산재한 기도 헌신 회원들에게 우편으로 발송하여 하나님이 응답을 주실 때 까지 계속 기도를 드린다고 했습니다. 또한 위급한 상황의 기도는 대기 중인 특별한 목회자(?)에 의해 즉각 기도를 실행한다고 했습니다.


근간에 나오는 광고를 보면 많은 사람이 응답받고 해결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중보기도가 이제는 유행처럼 퍼져 개교회 기도회로 되었고 공공연하게 중보기도가 효과 있고 효력 있는 특별한 기도처럼 교회들에서 사용되고 있음을 봅니다. 이제는 기도하면 으레 중보기도란 말이 나오고 그것이 당연한 기도용어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어느 세계적인 교회 협회에서는 세계적으로 각 나라별로 중보기도 운동에 동참하기를 요청할 정도입니다.

<줄보기도의 문제>

여기서 우리는 중보기도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중보기도에 “중보”란 말을 사용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중보"란 말은 둘 사이에서 일를 주선하는자로 하나님과 사람과의 사이를 화목케한 역할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합니다.


디모데전서2:5절에 보면, “하나님은 한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원수된 관계를 십자가로 소멸하사 화평케 하시고 또한 본질적으로 하나가 될 수 없는 인간끼리의 막힌담도 허시고 화목케 하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신다(엡2:13-18참조)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고 말씀하셨는데 바로 그 역할이 중보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구원의 중보를 위해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롬8:34,히7:25) 그러니까 하나님과 사이에 중보자는 오직 그리스도 한분이시오 그를 믿는 자는 누구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갈 수 있고 직접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라도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이비가 될 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중보 기도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중보 기도단에 전화를 걸어 중보기도가 무엇이냐고 물으니까 남을 위한 기도라 했습니다. 교인들이 남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또한 여럿이 함께하는 기도가 있다면 그것은 합심 합력의 기도입니다.

물론 합력의 기도는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도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꼐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8:19) 사도바울도 무시로 성령 안에서 여러 성도와 복음의 사역자를 위해 간구하라고 증거했습니다. (엡 6:18-19)


그러니까 교회구원을 위해 합심하여 합력하는 기도는 마땅한 바요 교회를 이루어가는 합당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중보기도는 합력하는 기도가 아니라 오히려 특정인을 통한 하나님과의 소통이요 문제해결 길이다는 주장으로 볼 때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나 하니님꼐 나갈 수 있는 자녀된 권세를 축소시키는 일이요 교회 본질의 은혜의 교통을 막고 특정자만 교통의 능력이나 기도의 자격을 가진 것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카톨릭의 신부가 자신을 통한 고해성사만을 고집하는 것과 별다름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과 직접 통할 수 없고 하니님께 직접 나갈 수 없는 자들을 위하여 중보기도 한 경우가 있었는데 모세의 기도였습니다. 모세는 당시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청을 대신 아뢰는 중간 역할의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나 아론 같은 대제사장을 통해 당시 이스라엘과 교통하신 것입니다.
또한 백성들의 요청이나 사정을 받아 하나님께 모세가 직접 아뢰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런 모세나 제사장들이 구약에서는 중보자였습니다. 그들의 중간역할은 허락된 것으로서 오실 메시야의 표상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사람과 하나님과의 원수된 관계와 죄로 막힘 담을 십자가로 헐으시고 그를 믿는 은혜를 힘입어 누구나 다 하나님께 나갈 수 있게 하셨고 그리스도 이름으로 직접 하나님께 빌며 간구 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때문에 대신 기도니 중간 역할의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쓰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을 위한 기도는 도고나 합심기도일 뿐입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 이름만 가지고 또는 그 사람의 지금 형편과 사정만 알고 기도 한다는 것은 매우 곤란한 것입니다.
어디가나 우리 주변에 보면 교인들이 많은데 대부분 그들의 신앙을 보면 예수님을 모든 문제 해결사, 만사형통, 소원성취자로 또는 인류 행복의 실현자로 세상 사회의 복지나 박애주자나 평화자로 보고 믿는 자들임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무리들이 대다수가 각자 혹은 무리별로 그런 기대를 가지고 열심히 찾고 따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무리들에게 썩을 양식을 위해 구하지 말고 영생할 양식을 위해 구하라 나는 그것을 주려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요 6:26-27) 또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줄 아느냐 아니다 검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10:34) 이것은 자기기대나 세상 평화나 사회복지나 인류의 행복을 기대하며 구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방종교처럼 자기 기대나 공동체의 기대 실현을 위해 중언부언하며 주문 외우는 자들의 기도를 교회가 합심해서 기도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그런 기도는 외면하셨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를 구하며 언약대로 성취되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구하도록 가르쳐야 할 지도자들이 기도를 주문처럼 가르치고 특정인의 중간기도 능력이 따로 역사되는 것처럼 중보 운동을 벌이고 무지한 교인들은 간절함으로 따라가니 답답할 뿐입니다.

교회에서는 이교들처럼 무조건 원하는 대로 된다는 주문식의 기도를 가르치지 말고 말씀의 언약대로 성취되는 신앙을 가르치면서 특히 예수님의 가르치신 기도대로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라는 말씀대로
주의 뜻을 제대로 깨닫고 그 뜻대로의 모습이.거룩히 이루어지는 교회구원을 위해.기도하게.해야 할 것입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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