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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부일 | 2018.12.16 22:21:07 | 메뉴 건너뛰기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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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식 샬롬과 복음적 샬롬》



고은교회 황부일목사

살롬의 뜻은 평화, 평안, 평강입니다. 아주 선하고 좋은 의미입니다. 성경에 많이 나오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의 의미는 전혀 각자 기대적으로 다르게 쓰여지고 있습니다.


<유대식 샬롬>

샬롬은 유대인들의 단어입니다. 그들의 조상 히브리인 때부터 써 오던 일반적인 인사요 그들의 기대와 소망이 담겨있는 중요한 용어입니다. 본래 "평화, 평안"의 의미를 가진 샬롬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언약의 은총입니다.
레위 26:6에 보면 "내가 그 땅에 평화를 줄 것인 즉 너희가 누으나 너희를 두렵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사나운 짐승을 그 땅에서 제할 것이요 칼이 너희 땅에 두루 행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했고,
또한 민수기 6:24-26을 보면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제사장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렇게 축복 선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신명기 12:10을 보면,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 거하게 될 때에 또는 여호와께서 너희로 너희 사방의 모든 대적을 이기게 하시고 너희에게 안식을 주사 너희로 평안히 거하게 하실 때에"라고 말씀하심에서 분명 한 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내시고 그들의 조상과 언약하신대로 언약의 땅을 주시고 거기서 하나님은 평안, 평강, 평화를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의 평화는 쉽지 않았고 평안보다 전쟁과 기근이 더 많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때론 그런 하나님을 원망도 했지만 그들의 역사는 강대국의 침략에 의해 평안은 커녕 오히려 공포와 고통과 불안으로 빠져드는 역사가 더 많았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평화, 평안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때 실현되는 하나님나라의 상태였음을 저들은 몰랐고 이스라엘은 저들 인간적 형편적 평화만 기대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고대했습니다. 메시야는 평화의 왕으로 오신다는 선지자들의 예언을 유대인들은 알고 학수고대했던 것입니다.

그런 기대를 잔뜩하고 에수께로 모인 무리들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고 말씀하셨고, 누가복음에서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눅 12:51)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평강의 왕으로 오셨지만 유대인들이 바라는 인간적이고 형편적인 평화를 주러오신 것이 아님을 밝히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도 유대식 평화를 구하는 인본주의자들이 많습니다. 대체적으로 세상이 추구하는 인간적 평안이나 세상적 평화를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만 예수께서는 그런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거짓선지자들이 유대식 샬롬을 말한다>

예레미야 6:14를 보면,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삼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하나 평강이 없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에스겔 선지자도 증거하는 것을 보면,
"이렇게 칠 것은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 (겔 13:10)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평강이 이 세상엔 없는데 거짓된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없는 평강을 빌어주고 남발한 것을 말씀합니다.

이세상에는 진정한 평안과 평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형벌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생들로 인해 땅도 저주하사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어 형편적 환경마저 어려움에 쳐해진 상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창3:17~18)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증거하기를 " 죄 아래 있는 자들은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라고 했습니다. (롬 3:14-18)

그러니까 인류의 역사를 보다시피 인류는 어느 때든 평화를 함께 구하고 협정을 맺기도 했지만 냉전과 전쟁으로 이어져왔습니다.
가정마다 행복과 화평을 기대하고 서로 노력했지만 역시 가정마다 다 갈등이 있고 다툼이 있고 불안한 요소가 있고 파경에 이르는 경우도 많은 것입니다.
부부끼리 수없이 싸우지.말자고 다짐하고는 또 싸우는.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도 예나 지금이나 삯꾼이나 거짓된 자나 잘못된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세상 지도자들과 같은 평화나 평안이나 행복을 비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절기 때 마다 교황이 빌어주는 세상 사회 평화를 공감적으로 같이 빌고 선포해줍니다. 오늘날 이 땅에 교회들은 점점 자유주의 신학이나 진보주의 자들처럼 사회구원을 말하며 세상 평안을 말하는 쪽으로 많이 몰리고 기울어져 갑니다.



<복음적 샬롬>

복음적 샬롬은 복음이 언약한 구원ㅣ.성취인 하나님나라.평화 평강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많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요 14:27)
그러니까 세상에 사람들이 구하고 조성하려는 그런 평화나 평안하고 예수께서 주신 평화하고는 본질이 다른 겁니다.
세상 평화는 늘 불안과 갈등속에 화평하자고 하나 잠시고 평화를 서로 약속해도 위태하고 결국은 말뿐이고 기대뿐인 것이 사람들간의 이상적평화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평화는 하나님나라의 평화로서 죄로 영원히 원수된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평해지고 또한 그렇게 하나님과 평화를 얻은 자끼리 한 몸된 관계로서 한 연합을 이루는 화평입니다.
우리가 메시야의 예언이 평강의 왕으로 평화의 주로 오심은 바로 그가 하나님과 관계를 화평케 하려하심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정한 평강이나 평안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증거하기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땀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은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들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한 성령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증거했습니다.(엡 2:14-18)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안에서 영원히 하나님나라로 실현되는 평화요 평강이요 평안이요 화평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8 20절을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목케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로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안에서 교회된 자들에게 실현된 복음적인 샬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세상에서 형편적 이상을 교회가 화평이나 행복으로 말해서는 안됩니다.
성령이 역사하며 증거하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의의 나라로서의 "샬롬"을 교회는 진리로 전하고 세워가야합니다.
복음이 없거나 다른복음을 말하는 데는 복음의 능력으로 실현되는
구원의 나라로서의 샬롬은 없는 겁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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