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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앤조이 | 2004.07.02 08:49:22 | 메뉴 건너뛰기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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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은 예수가 오심으로 무너져…교회는 '예배당'으로 불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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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고려신학대학원 한정건 교수(구약학)가  학교에서 '<선지동산> 2004년.6월호에 기고한 글로 필자의 허락을 얻어 게재합니다.

우리는 개혁주의를 표방한다. 개혁주의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다. 옛 종교개혁시대에 온갖 전통(傳統)에서 벗어나 성경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개혁해 가야할 대표적인 것중 하나가 예배당 건축에 집착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필자는 고신교단 교회에서 주일학교 때부터 자라면서 교회당을 '예배당' 혹은 '교회당'이라고 들었지 한번도 '성전'이라고 들은 적이 없다. 그런데 유학하고 돌아 온 이후(1987년) 우리교단 교회에서 '성전' 혹은 '성전건축'이라는 용어를 예사로 사용하는 것을 듣고 놀랐다.

과연 예배당을 '성전'으로 부를 수 있을까? 만약 성전이라면 제단, 향로, 법궤 등의 기구들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성전이라면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이며, 그러므로 정말 거룩한 곳이다. 만약 예배당이 그런 곳이라면 상가건물에 한 부분을 세내어 사용하는 교회는 용납될 수 없다. 그리고 그 성전에는 함부로 들어가서는 되지 않는 신성한 곳으로 간주해야 한다.

성전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무너졌다. 요한복음 2:19에 예수님이 성전을 청결케 하시면서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 일으키리라"고 하셨다. 이어서 요한은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주석했다(21절). 옛 성전은 그림자이고 모형이다. 이제 참 것이 왔으니 모형은 무너져야 한다. 성전이 폐하여지고 그것을 대치한 것이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옛 성전에 대하여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리라"고 예언하였고(마 24:2), 그 말씀은 주후 70년에 로마 군대에 실현되었다. 오늘날은 더 이상 성전은 없고, 또 있을 수가 없다.

신약의 교회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 초대교회는 주로 개인의 집에서 모였다. 그리고 박해가 가해질 때에 카타콤과 같은 동굴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들은 장소를 거룩하게 구분하여 선택한 흔적이 전혀 없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예배당에 대하여 성전과 같은 개념을 가지고 있다. 성도들이 강대상을 제단 혹은 성전의 기구처럼 신성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강대상이 있는 단위에 함부로 올라갈 수 없는 곳으로 여기는 경향도 있다. 헌신 예배 때에 여성의 경우에는 밑 강대상에서 사회하고, 목사만 윗 강대상에서 설교하는 경우도 있다. 마치 위의 강대상은 더 거룩하고, 밑의 강대상은 덜 거룩한 것처럼 여기는 결과이다.

예배당에 대한 성전의 개념은 예배당 건축에서도 흔히 나타난다. 개척교회의 성도들은 예배당을 지어 셋방에서부터 빨리 벗어나려 한다. 물론 장소의 불편함 등의 환경적인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 세를 낸 장소는 어쩐지 덜 거룩한 것 같아서 더 거룩하게 여겨지는 독자적인 예배당에서 예배보기를 원하는 마음이 은연중에 작용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소위 '성전건축'이라는 소원을 가지고 박차를 가한다. 물론 교회 지도자는 '성전건축'이라는 구호로 건축을 독려한다. '예배당'이라는 말보다 '성전'이라고 해야 더 거룩하게 생각되기 때문이며, 성도들이 자기 집보다 그 '성전건축'에 더 많은 정성을 기울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교회는 특히 강단과 강대상은 더욱 거룩하게 꾸미기를 원한다. 마치 제단과 같은 신성함마저 느끼는 것 같다.

한국교회는 교회의 지상과제가 (성전?) 건축인 것 같다. 자기 예배당이 없는 교회는 그 건축을 하나님에게 해 드리지 못해서 죄송하게 생각한다. 목사나 건축 책임자는 성도들에게 이 '성전건축'이 교회가 해야 할 사명이며,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인 것처럼 독려한다. '성전건축'에는 아름다움 미담들이 많이 소개된다. '그렇게 헌신적으로 바쳤더니 하나님의 큰 축복이 있었다'는 것 등이다. (성전?) 건축을 완성한 후 입당예배 혹은 헌당식을 할 때에는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하고 감격해 한다. 과연 그러할까?

물론 구약에는 다윗이 백성을 향하여 성전건축을 위해 정성을 다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 성전이었다. 그것은 거룩한 곳이고 하나님이 거할 처소였다. 신약에 성전이 무너지고 난 이후 어디 성전을 건축하라는 구절이 없다. 그리고 성전을 건축한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용납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교회당을 건축하라고 독려하는 성경구절 역시 어디에도 없다. 신약의 성경구절에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해야 할 것들이 무수히 많이 나타나지만, 건물을 짓는 것과 그와 관련된 이야기는 없다. 교회가 해야 할 지상과제는 예배당 건축이 아니라 전도하고, 가르치고, 구제하는 일 등이다.

중세교회가 종교개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하였고 문제가 많았다. 그 부패의 요인 중 하나가 성당을 건축하는 것이다. 베드로 성당 등을 짓기 위해 면죄부를 판매하는 일까지 등장했다. 그것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불씨가 되었다. 지금 많은 목사님과 성도들이 로마의 그 화려한 성당들을 관광한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기독교인들은 잘 지은 것에 대하여 감탄하지, 그것이 로마교회를 망하게 하였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오히려 그것을 부러워하고 그와 같은 건축을 하기를 소망할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과연 중세의 로마교회처럼 되려고 하는가?

한국의 소위 '성전건축'에는 또 다른 큰 문제를 안고 있다. 더 큰 예배당을 짓는 문제 이다. 기존의 예배당도 크고 든든하고 얼마든지 사용할 만한데, 그보다 더 크고 더 고급스럽게 짓기 위해 기존의 예배당을 버린다. 대형교회들이 더 대형화되기 위해, 더 많은 사람을 모으기 위해 더 크고 더 좋은 성전(?)을 짓는다. 물론 그들은 절대로 아니라고 펄쩍 뛸 것이다. 그들은 더 큰 교회가 되어 더 많은 선교를 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큰 교회는 더 크기를 원하고 그 세력을 확장해 가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 아닌가. 상대적으로 작은 교회는 더 작아지고, 개척교회는 발붙일 공간이 생기지 않는다. 빈익빈 부익부는 심화된다.

한국사회에서 대형교회의 목사는 자연히 그 위상이 높아진다. 어떤 모임에 초빙을 받을 때에 그에게 높은 자리가 제공된다. 노회에서나 총회에서도 그의 목소리는 커지게 된다. 그는 자기 교회 규모만큼의 예우를 받지 못하면 서운해 할 것이다. 어떤 초대형 교회의 목사가 행차할 때에는 성도들이 도열하고 수행원들이 따르는 경우도 있다. 그 교회에서 그는 왕적인 존재이다. 영광과 권세를 마음껏 누린다. 더 큰 예배당을 짓기 원하는 목사들이 과연 그런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물론 예배당 건축이 불필요하다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우리는 최선의 예배를 하나님에게 드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시끄러운 곳보다 조용한 곳이 위치적으로 좋으며, 또 어느 정도 시설이 갖추어져야 더 좋은 예배를 드릴 수 있다. 그래서 예배당 건축을 하는 일은 바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불편한 곳에서 예배드리는 성도들이 좀 더 좋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또 좋은 교육을 하기위해 건물을 지으려고 하는 정성은 좋은 미담거리도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이 명령하신 다른 일들보다 우선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성전이 아닌 것을 성전의 개념으로 말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예배당 건축의 전부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정당하고 또 떳떳하다면 건축을 하고 있거나 이미 한 교회가 필자의 글을 보고 위축당할 필요는 없다. 적어도 꼭 필요한 건축이었다면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건축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현상을 볼 때에 위험하기 그지없으며, 이미 그 도가 넘어선 감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현재 예배당 건축을 계획하고 있는 교회는 꼼꼼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성전건축'이란 용어가 성경적으로 맞지 않다면 그런 말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하나님이 현재 우리에게 하라고 명령을 내리신다면 그 우선순위가 과연 무엇인지를 성경을 펴놓고 꼼꼼히 살펴보고 결정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살펴서 당장 교회가 처해있는 형편이 건축이 절실할 때이고 그것을 미룰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명되면 그때는 진행해야 할 것이다.

우리 고신 교단은 개혁주의 교회답게 성경으로 돌아가는 운동을 이 부분부터 과감히 시행하자.

한정건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구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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