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꺼리목회독서교육 › [서평] '예수는 없다'는 있다

김상일 | 2004.07.14 12:11:08 | 메뉴 건너뛰기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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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김상일
◎ 주제:서평

'예수는 없다'는 있다  

  복음서를 통해 볼 때,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그가 사람들과 가장 많이 씨름한 것은 그의 말하는 '말귀'를 사람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는 문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어철학에서는 '말'을 대사언어라고 한다면 '말귀'는 메타언어라고 한다. 말로는 '살린다'고 하는데 말귀로는 '죽인다'가 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말과 말귀는 서로 상위적 혹은 역설적 관계를 만든다. 그래서 예로부터 현명한 사람들은 사람의 말보다는 말귀를 이해하는 데 최선을 기울이려 한다. 불교에서는 말귀를 '화두'(話頭)라고 한다. 말의 머리란 뜻이 아닌가? 그래서 선방에서는 선사의 '아니다'를 '이다'로 그 말귀를 알아들을 때까지 가르친다. 그리고 제자가 말귀를 알아들을 줄만 알면 선생이 제자를 떠나든지 아니면 제자를 선생이 자기 곁에서 쫓아 버린다. 선불교의 심한 화두 가운데 하나는 "너가 길을 가다가 붓다를 만나면 그를 죽여 버려라"가 있다. 화두치고는 좀 심한 것 같지만 불교에서는 이 화두를 약방의 감초같이 서슴없이 활용한다. 그리고 불교는 이런 화두를 거리낌없이 허용하고 있다. 생각키로는 불교가 그 긴 역사를 이어올 수 있고, 미래의 대안 종교로까지 대두될 수 있는 비밀은 다름 아닌 이런 화두에 있었다고 본다.
  그런데 만약에 위의 화두 속에 붓다 대신에 '예수'라는 말을 집어 놓고 어느 목사가 신도들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하자. 그런 목사가 있을 리도 없고 목사의 그 말의 '말귀'를 알아들을 사람도 없을 것이다. 화두의 핵심은 '역설'이며 '없다'라고 말하나 말귀를 듣고 보면 '있다'라는 데 화두의 묘미가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의 우매함은 이런 역설을 이해하지 못함에 있으며 이 역설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기독교의 수명은 인류 역사상에서 단명으로 끝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예수 자신이 화두의 명수였으며 그런 까닭으로 기독교가 세계 고등 종교로 우뚝 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위 오늘날 예수 잘 믿는 자들이라 자처하는 소위 '예수쟁이들'을 보라.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란 푯말을 들고, 거리와 사람 많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서 있는 그 예수쟁이들을 보라. 『교회 안 나가는 77가지 이유』라는 책을 쓴 어느 저자는 바로 이런 푯말을 들고 서 있는 사람들로 인해 교회에 안 나가게 된다고 썼다. 이 십자가 군병같이, 그리고 마치 자기가 중세기 십자군 전쟁을 벌이고 나 있는 듯 착각하고 있는 이런 예수쟁이들이 알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자기가 들고 있는 푯말의 말귀가 예수를 모독하고 있다는 사실, 즉 '예수 믿으시오'가 도리어 '예수 믿지 마시오'와 같은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는 역설적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아직 많은 목사, 신부들이 교회 안에서 이런 사람들을 영웅시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를 슬프게 만드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그리고 이들 때문에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되고, 잘 나가던 사람들도 "I resign church" 하게 만드는 이유가 아닐까?  
  예수는 '사람이 거듭나야 천국에 갈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의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 군상들은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와야 하느냐고 반문을 했다. 그러면 예수는 일일이 자기 말을 풀어 설명을 한다. 예수는 결국 자기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인간들의 손에 잡혀 죽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예수의 일생은 실로 말과의 전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수는 군중들을 향해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라고 거의 일방적으로 선포한다. 그리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시대'라고 한탄을 하기도 한다.
  오강남 교수의 『예수는 없다』(현암사)를 읽은 독자들이 보여 주는 태도는 두 가지일 것이다. 오 교수의 말을 듣는 사람들과 말귀를 듣는 사람들의 두 부류로 나뉘어질 것이다. 전자의 사람들은 책제목에서부터 불경스럽다 할 것이다. 그리고 후자의 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도리어 '예수는 있다'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것은 독자의 판단에 맡길 문제이다. 교권주의자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가장 싫어했다. 그들은 예수의 말귀를 알아듣고도 고의로 예수의 말을 곡해시켜 군중들을 선동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시킨다. 아마 이런 바리새인들 같은 예수쟁이들은 지금도 서울 거리에 예수가 나타나더라도 같은 짓을 할 것이다.
  실로 오강남 교수의 이번 책은 한국 교회가 새 천년을 맞이하여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과연 불교같이 글로 씌여진 경전마저 불쏘시개로 태워 버리고 불상마저, 그리고 불당마저 불태워 버리고 잿더미 위에서 기독교를 다시 시작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이정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래도 오 교수의 책을 읽고 입다물고 잠잠해 할 줄이라도 안다면 간음한 여인을 끌고 예수 앞에 왔을 때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는 말을 듣고 쥐었던 돌을 슬그머니 놓고 자리를 떠난 바리새인 정도는 될 것이다. 이는 일말의 종교적 양심이 남아 있었고 예수 말의 말귀를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세계 초대형 교회의 목사 아들이 수백 억의 돈을 탈세하고 목사가 자기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는 기독교 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소위 '목사', 그리고 거기에 모여들고 있는 잘 믿는다는 인간들이 있다. 그리고 율곡비리의 주범들이 국민의 세금을 횡령한 돈으로 교회를 세우고, 그 주변에서 기식하고 있는 예수쟁이들이 있기 때문에 오 교수의 화두는 나오게 되었고 오늘날 우리에게 그런 화두를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
  책의 부제목인 '예수 뒤집어 읽기'란, 바로 예수의 말귀를 알아들으라는 뜻이 아닐까? 오늘날 교회와 성직자들이 예수를 그리고 기독교를 너무 곡해시켜 놓았으니 뒤집어 놓아야 바로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마치 군사독재 시절에 언론이 만사를 왜곡시킬 때에 우리가 신문 뒤집어 읽기를 했듯이 말이다. 내용 속의 '창도 이야기의 딜레마 교훈', '단군 신화와 기독교', '성경이 사람을 죽이는 몇 가지 이유', '성불하신 예수님' 등은 우리가 지금 종교적으로 고민하는 문제들을 속시원하게 풀어주는 시대의 화두가 되고 있다. III장의 '잘못된 신관은 무신론만 못 하다'는 철저하게 읽어야 할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단군신화와 기독교'의 경우, 신화의 이해 부족을 일깨워 주는 글이다. 기독교의 민족 전통 뿌리를 말살하고 오만 불손 방자함을 넘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만한 단군 목을 자르는 일을 자행한 반민족적인 교회에 대해 속시원하게 비판하고 있는 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 '베들레햄과 백두산 기슭'은 아직 문자주의와 실증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 학계 일반에 대해 던지는 역사 이해의 충고라 할 수 있다. 김정일이 백두산에서 태어났건 소련에서 태어낳건, 그리고 예수가 베들레햄에서 태어낳건 그렇지 않건 그것이 무슨 중요한 의미를 지닌단 말인가? 과연 노아의 방주가 아라랏 산정에 그 유물이 남아 있어야 노아의 홍수가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런 문자주의를 고집하며 도리어 지식인들로 하여금 교회를 혐오하고 예수 믿기를 주저하게 만드는 일이야말로 진정 예수의 적이라는 역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를 둘러싼 현실에 대해 괴로워하며 저자는 우리에게 화두를 던지고 있다.
  그러면 저자가 우리에게 주려고 하는 대안적 기독교는 무엇인가? 그것은 책 목차에 등장하는 두 사람의 이름 다석 유영모와 함석헌일 것이다. 최근 기도교계 안에서 재조명되고는 있지만 그 동안 백안시되어 왔던 한국 토종 사상가들에 대한 재조명, 그것이 이 책이 제시하려는 대안적 사상이 아닌가 한다. 이들은 기독교 안에, 그리고 밖에 서 있었던 실로 변경에 살았던 사람(marginal man)이었다. 이들은 서양 선교사들이 전해 준 기독교 신학을 거부하고 동양의 유불선 사상을 고루 섭렵하여 우리 식대로 기독교를 이해했던 인물들이다. 오 교수는 폴 틸리히가 조직신학을 세계 종교사적 시각에서 다시 쓰고 싶다고 했던 유언과도 같은 말에 귀를 기울인다. 우리에게는 틸리히의 소원을 아쉬워할 필요 없이 바로 틸리히가 그러했던 바와 같은 작업을 해 놓은 사상가들이 이미 있었다. 그들이 함석헌, 유영모, 김교신 같은 인물들이었다. 오 교수의 우리 안의 위대함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이를 자각하지 못하고 서양의 그것만 쳐다보고 예수를 믿어 온 우물 안 개구리 같은 한국 예수쟁이들에게 일기예보와도 같은 말을 전해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도의 개혁을 주창해 온 네루 수상은 인도의 종교가 변하지 않는 한 정치적 개혁은 어렵다고 했다. 지능지수, 그리고 도덕지수보다 중요한 것이 종교지수이다. 과연 오늘날 한국 기독교가 스스로 지니고 있는 종교지수 정도를 가지고 미래의 희망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타종교에 대한 배타주의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독하는 열광, 그리고 그 도를 넘은 광신주의자들에게 지금 돌팔매를 맞을 각오를 하고 돌격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귀 있는 자는 이 책에 손을 들어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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