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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러한 | 2004.08.01 17:08:31 | 메뉴 건너뛰기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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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세 바다


어릴 때 서해 가까운 곳에 살다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우리 집은 서울로 이사를 갔었다.

20년 뒤에 안동에서 첫 사역을 시작할 때
영덕에 가서야 비로써 나는 동해바다를 바라보았다.
그 느낌은 천지창조 때 ‘좋았더라’ 고 했던 그 분처럼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감격 그 자체였다.

나는 원래부터 바다를 좋아했지만
강릉에 이사 와서는 언제나 바다를 끼고 살다보니
이제 바다 없는 삶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지난주에는 우리 집 ‘가족의 날’ 모임을
서해대교 바로 앞에 살고 있는 누님 집에서 가졌었다.

저녁 모임 때까지 시간이 남아 우리식구는 가까운 제부도를
들려서 갔었는데 아이들은 동해와 또 다른 서해(西海)의
꿈틀거림에 무척이나 신기해했다.

아니 그들보다 내 자신이 더 서해를 좋아하는 것을
보면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가는 모양이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 쌓여 있어서
모든 바다의 장단점을 다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축복된 일인가.

사람들은 흔히 인생을 바다로 비유한다.
일기예보도 없이 홀로
거친 바다를 항해해야하는 돛단배 같은 인생들에게
바다는 많은 것을 교훈하고 있다.





먼저 동해(東海)는 인생의 청년기 같은 바다다.

작은 섬 하나 없이 탁 트인 해안선과
깨끗하고 보석같이 빛나는 모래알
그리고 파란 쪽빛 바다를 보고서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저 한 순간에 모든 시름을 다 잊을 뿐이다.

어디 그뿐이랴.
수심이 깊고 계절에 따라 난류와 한류가 흘러 고기도 많고
신선이 된 것처럼 바다에 떠있는 묘미는 누가 알겠는가.


이러한 특성 때문에 동해는
젊은이들이 가장 열광하며 많이 찾아오는 곳이다.

그런데 이런 동해의 외적인 모습들은
젊은이들의 특성과도 상당히 유사한 점이 많다.

어떤 장애물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
눈이 시리도록 파란 그들의 꿈,
바다 위에 누워있듯이 어떤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굴의 벤처정신 등등

또 날마다 해가 뜨듯이 어떤 좌절 속에서도 다시
벌떡 일어설 줄 아는 그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해도 아픈 곳이 있다.
너무도 많은 사람이 오기 때문에
사람냄새는 사라지고 쓰레기 냄새만 진동한다.

모래는 너무나 질서 있게 누워있어서
한참 보고 있노라면 황량한 느낌마저 들 정도다.


젊을 땐 ‘똑똑하다’는 말이 제일 듣기 좋은 소리였는데
나이가 들면서 ‘동해 고기보다 서해고기가 맛있다’
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 된다.

동해처럼 깨끗한 사람은
동해처럼 잘난 사람은
호감은 갈지 몰라도 사람냄새가 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모습들이 더 촌스럽고
인위적인 아름다움으로 느껴지기 것은 알 수 없는 인생을
자기 식으로 쉽게 판단하는 교만 때문이다.





이제 인생의 장년기인 남해(南海)로 떠나 보자.

남해는 동해와 서해를 합쳐놓은 듯
서로의 장점만 갖고 있는 것처럼 힘과 중후한 맛이 있다.

남해의 멋은 역시 조용하고 잔잔하다는 것이다.
덕분에 양식과 조선업하기엔 적지이다.

기후도 온대성이라 제주도처럼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한 식물들도 많다.

그래서 도시의 편리함과
바다의 시원함과 함께 섬의 아름다운 풍경까지
한꺼번에 보고 즐길 수 있는 곳이 남해다.


일반적으로 중년의 4, 50대가 되면
동해처럼 격동적인 일들도 대부분 지나가고
이제 경제적이고 정신적인 여유가 있는
진정한 인생의 멋과 향이 나는
가장 좋은 시절이다.





그러나 이렇게 화려한 남해 뒤에도
적조(赤潮)라는 어두움 때문에 가정이 위기를 맞고 있다.

동해는 수심이 깊고 바닷물의 교류가 빨라서,
서해는 조식간만의 차가 너무 커서 적조가 생기지 않는데
남해에서는 수심도 얕고 섬도 많아 해류의 영향을 적게 받아서
또 공단지역에서 나오는 수질오염 때문에
적조가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중년의 과제다.
시련이 없는 것 자체가 시험이라는 말이 있다.
너무 잔잔하다보니 문제가 된 것이다.

이번 가족의 날에 모여 이야기하면서
안 사실은 형수님과 누님 몸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녀들은 남해처럼 너무 잔잔해서 아픈 것이 아니라
동해 같은 격랑의 세월을 보낸 후
중년이라는 남해에 가보니 몸이 아픈 것이었다.

아마도 다른 집 식구들도
중년에 들어서면 겉으로는 잔잔한 것 같지만
속으론 적조같은 아픔이 있을 것이다.





이제 드디어 황혼기인 서해(西海)에 왔다.

물이 점점 차고 있음에도
아직도 어수선하게 떠 있는 배들,
포구 사이로 잡은 조개를 갖고 분주히 오가는 아낙들의 모습은
어떤 화가도 그릴 수 없는 서해만의 아름다움이다.

물이 들어오면 수많은 생물들은
성장하여 사람들에게 여유와 혜택을 준다.
물이 들어오면 사람들은 물 밖으로
나가야 하듯이 그 때를 알고 맞추어 사는 것이 지혜다.

서해는 이렇게 단순한 놀이의 바다가 아니라
자연의 질서와 공존의 법칙을 가르쳐 주고 있는 곳이다


서해의 매력은 역시 지는 해의 장관이다.
하루 종일 빛을 밝히고 이제 시간이 되어 바다 속으로
사라지는 서해야말로 황혼기 인생을 가장
잘 대변해 주고 있는 모습이다.





서해는 알면 알수록 아름답지만 겉만 봐서는
서해도 꼬집을 것들이 많은 곳이다.

물은 탁하고 구경할 만한 진귀한 것도 별로 없고
해안선도 복잡하고 풍경들도 지저분하다.

인생 노년도 서해처럼 매력이 없다.
‘해가 서쪽에서 뜬다’라는 말처럼 서해는 동해에 비해
부정적인 의미가 강한 곳이다.

그러나 서해는 곳곳에 사람 사는 냄새가 나며
보잘것없는 돌 하나에도
더덕더덕 붙여있는 수많은 생명들은 통해
삶의 지혜와 여유를 배울 수 있는 곳이다.

노년의 멋은 결코 외적인 멋이 아니다.
이렇게 꾸밈없는 그 모습 자체가 모두에게 쉼을 주고
인생의 지혜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주여,

저에게
동해 같은 생동감도 좋지만
인간적인 정(情)이 메마르지 않게 하소서

또한
남해 같은 여유와 멋도 좋지만
인생의 적조들을
지혜롭게 이기게 하소서

그래서
서해 같은 황혼의 때에
모습은 초라할지라도

참된
에너지를 주는 사람이 되며
낙조(落潮)의 아름다움이
있게 하소서
...

2004년 8월 1일 월요일에 강릉에서 피러한이 드립니다.


^경포호수^


Phil Coulter - Morning Has Brok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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