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창작동화 › [창작동화] 울음산의 숟가락

이규희 | 2005.02.17 21:58:29 | 메뉴 건너뛰기 쓰기
내가 재두루미 쭈쭈를 만난 건, 바로 이른 새벽이면 산마다 하얀 새싹
같은 서리들이 삐죽삐죽 돋아나는 초겨울 어느날이었습니다. 그어느 때
와 마찬가지로 나는, 갈대가 바람에 서걱서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
뭇잎에 얼굴을 묻곤 달콤한 낮잠을 자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뭔가 딱딱하고 뵤족한 것이 나를 툭 건드리는 바람에 소스라
치게 놀라 깨엇습니다.
˝누,누구얏!˝
나는 큰 소리로 외치며 주변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재두루미 한
마리가 부채 같은 날개를 사르르 접으며 내 옆에 서 있는 게 보였답니
다.
˝어머,미안해요.제가 그만 한눈을 파는 바람에 당신을 밟았군요.사실은
전 지금 제 친구하고 숨박꼭질을 하고 있었거든요.˝
재두루미는 미안하다는 듯 발을 동동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였습니
다.
˝괜찮아, 조금 놀랐을 뿐인데 뭐.˝
그러자 재두루마리가 머루 같은 눈을 또록또록 굴리며 조금은 토라진
듯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아무리 내가 당신 잠을 깨우긴 했지만, 왜 그렇게 반말을 하세요?난
이렇게 몸집이 크고, 당신은 오히려 이렇게 조그맣고........˝
재두루미는 나를 보고 조그맣고 보잘것 없다는 이야기를 하려다가 차
마 말끝을 맺지 못 하며 그 긴 입을 더 쌜쭉 내밀었습니다. 난 또 그
모습이 우스워서 이번에는 더 큰 소리로 웃었답니다.
˝하하하! 나를 보고 조그맣고, 보잘것 없다는 말을 하려 했지, 그렇지
재두루미야?˝
˝어머머, 그래도 반말을 하네......? 아니,도대체 나이가 몇 살이나 되셨
길래 그러는 거예요? 정말 기분 나쁘다!˝
이번에는 재두루미도 지지 않고 야무지게 따졌습니다.
나는 느물느물 능쳥스럽게 웃으며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 날은 웬일인
지 그 귀여운 재두루미와 이야기를 나누는 게 재미있었으닉까요.
˝글쎄, 내 나이가 도데체 몇 살이지? 백 살? 아니 참, 이백 살? 그렇
지 이백 살까지는 나이를 세어 보았지만, 그 동안 너무 오래 내 나이를
잊고 살아서 나도 잘 모르겠구먼.어쨌든 어림짐작으로 따져도 아마 천
살쯤은 되었을게다.˝
˝네엣? 처,천 살이라구요? 그게 저,정말이세요?´
재두루미는 놀란 나머지 피리같이 생긴 길쭉한 입을 쩌억 벌린 채 다
물지를 못 하였습니다.
˝하하하, 어여쁜 재두루미야. 그러니, 내가 너한테 반말을 좀 한다 해
도 괜찮겠지? 나는 너의 할아버지의 또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되고도
남으니까 말이다.˝
˝그, 그럼요.당연히 그러셔야지요.˝
그제서야 재두루미는 부끄러운 듯 하얀 날갯죽지에 얼굴을 숨기며 대
답하였습니다. 나는 그런 재두루미가 깨물어 주고 싶도록 귀여웠습니
다.물론 해마다 겨울이 되면 이 철원 지역으로 수많은 철새들이 날아오
는 걸 보긴 했지만, 이렇게 귀여운 재두루미와 이야기를 나누는 건 처
음이었으니까요.
˝네 이름은 뭐냐? 너도 저 먼 시베리아에서 온 게냐?˝
˝네, 아무르 강 근처에 살다가 따뜻한 곳을 찿아 이 곳 철원까지온 쭈
쭈라고 해요.여기 휴전선 부근에는 나쁜 사람들이 살지 않아서 아주 안
전하거든요.게다가 넓은 저수지랑 강도 있어서 먹이도 많거든요. 그런
데 저, 할아버지, 한 가지 여쭤 봐도 되나요?˝
˝그럼,되고말고, 뭐든지 물어 보거라.˝
˝할아버지는 숟가락이시지요? 그렇지요? 다른 숟가락보다는 좀 크긴
하지만 분명히 밥 먹을 때 쓰는 숟가락이 틀림없어요. 그런데, 왜 그렇
게 오랫동안 혼자 이 산 속에 누워 계신 거예요? 누군가 소풍을 나갔
다가 모르고 그냥 갔나요?아니면......?˝
쭈쭈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모르겠다는 듯 쭈뼜거리며 물었습니다. 쭈
쭈한테 그런 질문을 받은 난 그만 가슴이 찡하게 아파 왔습니다. 내가
숟가락이었다는 걸 알아 주는 것만도 가슴 벅찬 일인데, 왜 이렇게 혼
자 산 속에 누워 있느냐고 물어 주다니, 정말이지 가슴이 터질 듯이 아
파 왔습니다.
˝그래, 쭈쭈야, 네 말이 맞다. 난 분명히 숟가락이었지. 그런데, 왜 여
기에 있느냐면 말이다......˝
나는 쭈쭈에게 천천히 나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아니, 어쪄면
이제는 잊혀져 가는 나의 주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모릅니다. 나의 사랑하는 주인이었던, 궁예에 관한 이야기
를 말입니다.
˝옛날, 아주 먼 옛날, 이 철원 땅에다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나라를
세우려던 사람이 있었단다. 그분이 바로 신라의 왕자였으며, 훗날 빼앗
긴 나라를 다시 세우려 애쓰셨던 나의 주인, 궁예라는 분이었지. 하지만
그분은 끝내 자기의 꿈을 이루지 못 했단다. 왕건이라는 사람이 그분의
뒤를 쫓고 있었거든. 그분은 결국 이 산으로 쫓겨 들어오고 말았었지.
난 지금도 기억하고 있단다. 그 날, 그분을 따라 이 산으로 들어온 부
하들이 통곡하던 그 울음소리를, 그 울음소리는 그 뒤에도 오랫동안 이
산에서 그치지를 않았단다. 그 때부터 사람들은 이 산을 울음산으로 부
르기 시작한 게다.˝
나는 목이 메어 더 이상 말끝을 이을 수가 없었습니다. 울음산으로 쫓
겨 들어왔던 나의 주인이 또다시, 허겁지겁 다른 곳으로 피해 가면서
나를 그대로 이 곳에 그대로 남겨 두고 갔고, 그 후로 나는 나의 주인
을 만날 수가 없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으니까요.
˝아저씨, 그래서 그분은 어디로 가셨나요?˝
내가 먼 산을 바라보며 슬퍼하고 있자, 쭈쭈가 조심스럽게 물었습니
다.
˝모르지,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단다. 그분은 결코 이 곳을 떠나지 않았
다는 것을 말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어요,할아버지?˝
˝그분은 이 곳을 세상에서 제일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려고 하셨던
분이니, 이 곳이 그분의 뜻대로 사람들이 서로 어우러져 사이좋게 사는
세상이 될 때까지는, 아마 이 산 자락 어딘가에 머물러 계실 게다.˝
나는 쭈쭈가 고개를 가우뚱하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
지만,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그렇게 믿고
싶었습니다.
그 무렵, 그분이 쫓기듯 울음산을 떠나시자마자 왕건의 부하들에게 붙
잡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바람결에 들었지만, 난 그렇게 믿지 않았
습니다.
언제가 철조망 쳐진 이 곳에 그분의 뜻대로 세상에서 제일 살기 좋은
세상이 만들어지는날, 그 때에서야 그분은 이 울음산을 떠나리라는 것
을 믿고 있으니까요.
˝그럼 할아버지도 그 때까지 여기 계실 건가요? 혹시 지금이라도 달
근 곳으로 가시고 싶다면, 제가 그리로 모셔다 드릴 게요.˝
쭈쭈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하지만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습니다.
˝쭈쭈야, 네 말은 고맙지만 난 여기에 그냥 있을테다. 하지만 너한테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좀 들어 주련?˝
˝뭔데요, 할아버지?˝
˝내 생각에 말이다, 나와 같이 그분을 모시던 놋쇠 그릇들이나 사발
들, 아니면 또 다른 숟가락들이 이 울음산 근처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단다. 그때 모두들 급히 도망을 가느라고 우리들을
챙길 겨를이 없었거든. 그러니, 혹시라도 네가 시간이 있다면, 내 옛 친
구들을 좀 찾아봐 주지 않겠니? 그렇게만 된다면 난 절대로 외롭지 않
을 게다. 이 산에 나 혼자만 남는게 아니니까 말이다.˝
˝알았어요, 할아버지! 제 친구들한테도 모두 이야기를 해서 도와 달라
고 할 게요.˝
˝고맙다, 쭈쭈야!˝
˝할아버지, 안녕!˝
쭈쭈는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훨훨 날아갔습니다.

그 날 이후 쭈쭈는 매일매일 산 속으로 찾아와서는, 이곳 저곳을 날아
다니며 내 친구들을 찯아다닌 애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
들을 찾기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 분명했습니다. 그 동안 세월이 너무
많이 흘렀으니까요.
그러는 동안 하얀 눈이 펑펑 쏟아지는 한겨울이 되자, 쭈쭈는 부리로
눈 속을 헤치며 울음산을 뒤지고 다녔지만, 나의 친구들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할아버지, 죄송해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실래요?˝
˝아니다, 얘야. 이제 그만 찾거라. 이 때까지도 혼자 살아왔는데 친구
가 없으면 어떻다고, 괜히 너에게 헛고생만 시키고 말았구나. 이른 봄
시베리아로 날나가려면 너도 다른 친구들처럼 맛있는 먹이도 많이 먹
고 몸을 튼튼하게 해야잖느냐? 그러니, 이제 그만두거라.˝
˝괜찮아요!˝
쭈쭈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곤 또다시 저 쪽 산등성이로 후르르
날아올랐습니다. 그렇게 매일매일 시간이 흘러가고, 어느 틈에
한겨울이 지나자, 재두루미떼들은 시베리아로 돌아가기 위하여 날마다
뗴를 지어 나는 연습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쭈쭈는 여전히 자기 혼자서 울음산 여기저기를 날아다니며 내
친구들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쭈쭈는 곤두박질치듯 숨가쁘게 내게로 날
아오며 외쳤습니다.
˝하, 할아버지, 할아버지! 찾았어요! 할아버지의 친구를 찾았다니까요!
분명히 그분의 밥그릇이었다고 했어요! 그분의 이름을 똑똑히 말해 주
시던걸요!˝
˝뭐, 뭐라고!˝
쭈쭈의 애기를 듣던 난 그만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걸 느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가물가물해졌습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깜짝 놀란 쭈쭈는 근처 저수지에서 입안 가득 찬물을 담아 와서는 내
몸에 살살 뿌려 주었습니다.
그 때서야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습니다.
˝쭈쭈야, 그 그게 정말이냐?˝
˝그럼요, 할아버지! 처음에 저는 흙이 잔뜩 엉겨 있어서 그냥 지나칠
뻔 했지 뭐예요?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할아버지한테서 본 이런 파란
녹이 묻어 있더라구요! 그래서 조심조심 여쭈어 보았더니, 글쎄, 그분이
쓰시던 밥그릇이래쟎아요!˝
˝세상에, 믿을 수가 없구나! 쭈쭈야, 어서 나를 그 곳으로 좀 데려다
주련? 어서 빨리 내 친구를 보고 싶다!˝
˝그럴 게요. 제가 할아버지를 모셔다 드릴 게요.˝
쭈쭈는 길쭉한 부리를 젓가락처럼 벌려서는 나를 조심스럽게 물고서
하늘 높이높이 날아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그만 가슴이 터질 듯
이 벅차 올랐습니다. 너무나도 오랫만에 내 자리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간다는 설레임과 옛 친구를 만난다는 기쁨 때문이었습니다.
˝할아버지, 저기예요!˝
쭈쭈가 나를 내려놓은 곳에서 처음 나는, 나의 옛 친구를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친구도 나처럼 녹슬고 삭아서 옛 모습을 전혀 지니고
있지 않았으니까요.
나를 보고 먼저 말을 건건 그 친구였습니다.
˝여보게, 정말 오랫만일세. 난 울음산에 나만 남은 줄 알았는데, 이렇
게 골짜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네가 살아 있었다니......˝
˝여보게, 이게 얼마 만인가......?˝
나는 눈물을 흘리며 옛 친구를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물어 보지 않았
지만, 밥그릇이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이렇게
남아 있는 까닭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밥그릇도 나처럼 언젠가 철원
땅에 둘러쳐진 철조망들이 다 없어지고, 이곳에 그분이 만들려던 아름
다운 세상이 오는걸 보고 싶은 꿈 때문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밥그릇
과 나는 오래오래 눈물을 흘리며 바라보기만 하였습니다.
˝쭈쭈야, 고맙다! 내 부탁을 들어 주느라고 너 혼자 시베리아로 못 간
건 아니겠지?˝
˝아니에요, 할아버지. 이제 떠나도 늦지 않아요! 얼마든지 따라갈 수가
있는걸요! 할아버지, 내년 겨울에 다시 올 게요! 그 때까지 두 분 모두
모두 건강하셔야 해요! 그럼 할아버지, 안녕!˝
나는 날개를 쫘악 펴고 먼 하늘로 날아오르는 쭈쭈를 보며, 정말이지
오랫만에 행복감을 느꼈습니다. 이제는 밥그릇 친구도 있으니, 앞으로도 십 년, 이십 년 그 날이 올 때까지 끄덕없이 살 수 있는 힘이 불끈 솟아났으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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