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령충만
[질문] '성령충만'이란 의미를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성령충만 후 나타나는 현상만
적혀있습니다. 성경에도 '성령충만 하라'는 내용을
많이 보았습니다. 제가 알고 싶은 것은 성령충만
하여서 나타나는 현상을 알고 싶은 것이 아니고
성령충만하게 되는 과정을 알고 싶습니다. 기도하면
된다는 막연한 내용은 사절합니다.
[답] 저는 오랫동안 '성령충만' 하고 싶어서 그 방법을
찾았던 사람입니다.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를 찾아보니
감사하라, 기도하라, 성경을 읽어라, 순종하라 등등
별로 도움이 안 되는 내용뿐이었습니다. 설교를
하신 목사님들은 과연 설교한대로 해서 '성령충만'
해 본 경험이 있는지 궁금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사도행전을 깊이 읽으며 '성령충만'하는
방법을 깨달았습니다. '성령충만'은 내 안에 하나님의
'영'이 가득 찬 상태인데, 숨쉬는 호흡을 통해 얼마든지
하나님의 영을 어렵지 않게 가득 채울 수 있습니다.(창2,
행2, 겔37, 요3장을 꼼꼼하게 읽어보면 그 방법이
나와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은
인격이시기 때문에 내가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가시는 분이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님 마음대로입니다.
내가 아무리 '성령충만'하고 싶다고 해도 성령님이
호응을 안 해주시면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내가
'호흡 방법'으로 영을 내 안에 가득 채워도 성령님이
호응을 안 해주시면, 그냥 심호흡일 뿐 성령충만상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방법이 아니라
먼저 '성령님과의 관계 회복'입니다.
또한 가만히 보니 진짜 성령충만이 아니라, 자기최면
상태에서 황홀경에 빠진 무의식의 세계를 성령충만이라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기도원 같은데서 막
북치고 장구치고 소리를 질러 이성적 판단이 마비된
상태에서 뇌속에 도파민이라는 물질이 과다분비
된 집단최면 상태를 '성령충만'이라고 착각하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성령충만이 아닙니다.
아닌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집회 끝나고 집에
돌아갈 때 차 빼달라고 막 싸우더라구요. 성령충만의
증거는 일상생활 속에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로 조용히 섬기며
겸손하게 사는 모습입니다. ⓒ최용우 more..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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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모든 동물들이 뱀을 앞에 놓고
비판을 했습니다.
"사자는 먹이를 쓰러뜨린 다음 먹고, 늑대는
먹이를 찢어 먹는다. 그런데 뱀아, 너는 어째서 먹이를
송두리째 삼켜버리냔 말이야!"
뱀이 빈정대는 투로 말했습니다.
"나는 잔인하게 남을 물어뜯는 놈들보다는 낫다고
생각해. 나는 적어도 입으로 상대방을 상처나게
하지는 않거든."
[꼬랑지] 말로 받은 상처가 주먹으로 맞는
것보다 더 아플 때가 있다. ⓒ최용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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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우글방 - 꽃차
한잔의 향기와 여유 ○지난일기 |
□ 착한 낙지
삼탕이 먹고 싶다느니, 뭐 맛있는 것 없나?
입맛을 다시는 아내가 요즘 부쩍 여러 가지 일들로
기운 없어 하기에 아내를 위해 밥 한끼 사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누구한테서 들었는지 '착한낙지' 이야기를
합니다. 낙지면 낙지지 착한낙지는 뭐야? 또 지들이
착하면 얼마나 착하다고... 해서 밝은이와 아내와
셋이서 함께 조치원에 있는 '착한낙지'를 찾아갔습니다.
과연 얼마나 착한지 확인해 보려고요.^^
원래 매운맛은 '맛'이 아니라지요. 맛이 아니고 아픈
통증이랍니다. 입과 식도와 위장에 통증을 느끼는
것을 매운맛이라고 합니다. 생각보다 매운맛의 강도는
덜했지만 그래도 입천장 다 까지고 목과 위가 쓰리고,
숨을 쉬면 입에서 매운맛이 훅훅나오네요. 참다못해
화장실로 달려가 일을 보는데 똥꼬까지 아프네요.
흐윽흑!
어쨋든 오랜만에 겁나게 매운맛으로 모공도 열어주고
마음의 화도 다스리니 역시 먹는 것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오늘도 뱃살이
조금 더 늘어나긴 했지만요.홍홍 ⓒ최용우 2011.6.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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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책은
물과 공기 같아서 맑고 깨끗한 책을 골라
읽어야 영혼도 맑아집니다. ○지난일기 |
정원의<낮아짐의
은혜>를 읽다 109 |
□ 멸시와 천대를 통한 낮아짐 |
멸시를 모르고 자란 이들은 비참하다 - 멸시를
모르는 이들, 멸시의 경험이 부족한 이들, 천대를
모르고 좋은 대접만 받고 자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통을 많이 겪은 부모들이 자녀들에게는 가난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배우지 못한 부모들은
자녀들만은 어려움이 없이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뒷받침을 하고 싶어합니다. 부모의 정을 받지 못하고
자란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따뜻한 정을 주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잘못된 행위를 해도 징계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애정은 오히려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합니다. 멸시를 받지 않은 이들은 낮아짐을
모릅니다. 겸손해야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러한 것을 배울 길이 없습니다. 그들은 순종이
어렵고 비판하지 않는 것이 아주 힘듭니다. 항상
자기가 중심이 되고 사랑을 받고 칭찬을 받고 살아왔기
때문에 높은 마음에서 나오는 수많은 악들이 그들의
안에 있습니다. 또한 징계를 통하여 그것을 교정
받지도 못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이들은 악에서 벗어나기가
아주 어려운 것입니다. ⓒ정원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