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의 근원지
어떤 사람이 집 몇 채를 샀는데 집 값이 올라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욕심이 생긴 그는 빌딩을
사면 더 많은 돈을 벌 것이라 생각하고, 집을 다
판 다음 돈을 은행에 잠시 예금해 두었습니다.
전 재산을 예금해 둔 바로 다음날 그 사람은 은행이
'영업정지'를 당했다는 청천병력같은 뉴스를 보고는
그만 너무 놀라 쓰러져버렸습니다. 만약 은행이
파산하면 아무리 많은 돈을 예금했더라도 돌려주는
돈은 5천만원뿐입니다. 날아가버린 그 많은 돈을
돌려달라고 어디다 억울함을 호소할 데도 없습니다.(며칠
전에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많은
소유'가 우리를 지켜주고 행복하게 해 줄 것 같아서
열심히 이것저것 긁어모아 보지만, 나중에는 그
소유 때문에 더 불행해지는 경우를 너무나 많이
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그 어떤 소유도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합니다. 행복의 근원지는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는 심령을
목마르지 않게 적셔주고, 하나님의 말씀의 빵은
우리를 배부르고 등따시게 해 줍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는 '소유'가 넉넉하면 우리는 세상의 다른
것에 눈을 돌리지 않게 됩니다. 옛말에 '배부르고
등 따시면 장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는 것이 넉넉하면 장땡입니다. ⓒ최용우 mo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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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주1480 <보는것을 보는눈이
행복하다/kcm>중에서○지난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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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책 없는 사람(막15:1) |
예수가 체포되던 날 새벽에 예루살렘에 의회가
소집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대책을 의논하였다.
바로 전날, 혼자 대책을 생각하다가 그나마 포기하고
모든 것을 '하늘'에 맡겨버린, 한 '대책 없는 사람'을
처형하기로, 보나마다 근사한 예복으로 위엄(?)을
갖추었을 의원님들이 결정하셨다는 이야기다.
주님! 날마다 머리 둘 곳 없이, 물처럼 바람처럼
정처 없는 흐름으로 사셨던 주님, 그러나 빈틈없는
하늘 섭리에 몸을 내어맡기고 옹근 자유를 누리셨던
주님, 저도 당신처럼 살고 싶습니다. 도무지 대책이
없어 보이지만, 때와 곳에 틀림없이 나타나는 그런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저에게 이런 소원을 품게
한 분이 바로 당신이시니, 당신의 뜻을 부디 저에게서
이루어 주소서. ⓒ이현주 (목사) |
□ 복은 쌍으로 안 오고 화는 홀로 안 온다.
낮과 밤으로 하루가 이루어지듯 복과 화는
끊임없이 우리를 찾아온다. 사람을 가려 누구에게는
복만, 누구에게는 화만 찾아오는 경우는 없다.
그런데 가만 보면 화는 쌍으로 오고, 복은 홀로 오는
것처럼 보인다. 화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찾아오고,
복은 어쩌다 한 번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정말 그런 것일까? 정말로 화는 겹쳐서
오고, 복은 홀로 오는 것일까? 어디 복이나 화가
공장에서 만들어내는 물건이라고 처음부터 쌍으로
혹은 혼자 오도록 만들어졌겠는가. 복과 화를
맞이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그러할 것이다. 복이
찾아왔을 때 찾아온 복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모두가 같은 마음일 터, 그러나 복이 마냥 이어지지는
않는다. 화가 찾아왔을 때는 어서 화가 물러가기를
바라지만, 화는 쉽게 물러가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
생각지 않았던 어려움이 다시 찾아오곤 한다. 아마도
복과 화가 똑같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찾아온다
하여도 사람은 복은 홀로, 화는 쌍으로 찾아온다
생각했을 것이다. 복은 홀로, 화는 쌍으로 온다는
말에는 과학적인 진실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이해하고
위로하려는 마음이 담겨있다. 그러려니 하라고,
그런 게, 그렇게 보이는 게 삶이라고, 이내 사라진
것 같은 복과 너무 오래 머무는 것 같은 화에 대해서
서로가 서로의 한숨과 눈물을 닦아주는 따뜻함이
있다. 그런 마음으로 바라보는 세상과 삶은 한결
푸근하지 않겠는가. ⓒ한희철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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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우글방 - 꽃차
한잔의 향기와 여유 ○지난일기 |
□ '할렐루야' 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나요?
<답>할렐루야(Hallelujah)는 히브리어 음역으로
할렐루(hallelu, 찬양하다)와 여호와(YHWH)의 단축형인
야(YAH)의 합성어로서 그 뜻은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입니다.
이 말은 주로 시편의 처음이나 마지막에 나오며
예배의식에 사용되었습니다.(시106:48) 할렐루야는
'예배'에서 '하나님'을 '찬양' 하는 '절정의 환호성'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께만 써야 합니다. '할렐루야'는
사람이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이지 사람들끼리
하는 인사가 아니기 때문에 '할렐루야'를 사람들끼리
인사하는 말로 써서는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할렐루야를 욕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영화 제목이나,
그밖에 자기들 유리한데 사용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고 비꼬거나 하나님을 욕되게 합니다.
설교 도중에 '아멘'을 유도하기 위해 '할렐루야!'
하는 것도 역시 합당하지 않습니다. 마치 잘 훈련된
개처럼 '할렐루야' 하면 아무 생각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아멘'이 나오는 것은 '할렐루야'를 잘못 사용하는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최용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