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은 그냥 읽으시면 됩니다
우리는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그냥
읽어야 합니다. 그냥
한번은 신학대학 교수가 학생들에게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설명하기 전에 문제를 냈습니다.
"여기에 몸무게를 재는 체중계가 있습니다. 이
체중계로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이 건물의 높이를
어떻게 잴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시오."
한 총명한 학생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습니다. "옥상에
올라가서 체중계를 줄에 매달아 내린 다음 그 줄의
길이를 재보면 됩니다." 다른 학생들도 기발한
생각이라며 박수를 쳤습니다.
교수님이 말했습니다. "무지몽매하면 잔꾀만
느는 법! 우리는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그냥
읽어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 그냥. 체중계로 건물의
높이를 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무게를 다는 도구로
어떻게 길이를 잴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 한 것은
'불가능' 하고 그냥 읽는 것이 잘 읽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얼마나 웃기게 읽느냐 하면, 예를
들어 '비둘기'라는 단어가 나오면,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즉각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입니다.' 하고 설교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이 아니었습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날려보낸
비둘기가 감람나무 잎을 물어온 것은 '평화'와 아무런
연관성이 없습니다. '비둘기같은 성령님'이라고
했을 때 그것이 '평화로운 성령님'을 뜻한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비둘기가 '평화의 아이콘'이 된 것은 훨씬 그 후의
일입니다. 1949년 1월 세계 2차대전이 끝난 후, 당시
공산당은 피카소에게 평화운동을 상징하는 포스터와
평화회의(Peace Conference)의 로고를 부탁했는데, 피카소는
그랑오귀스탱가의 화실에서 기르던 흰색 비둘기,
몽마르트르 광장의 비둘기, 고솔의 비둘기, 라코루냐의
비둘기, 어린 시절 말라가의 광장에서 보았던 나뭇가지
위의 비둘기들을 떠올리고 그 비둘기를 평화의 상징으로
그렸습니다. 그래서 1949년에는 유럽 모든 도시의
담벽에 평화의 상징으로 그의 비둘기가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는군요. 하지만 알고 보면 비둘기처럼 잔인한
동물이 없고, 공원과 건물을 더럽히는 가장 지저분한
동물이지요.
우리는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그냥 읽어야
합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날것으로 읽고, 날것으로
믿고, 날것으로 먹어야 합니다. 성경을 해석하려고
하는 순간 성경의 본 뜻은 손상을 입습니다.
ⓒ최용우 mo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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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주1550 <생각대로 성경읽기/자리>중에서○지난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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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갈 길을 찾으라 (계9:20-21) |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이다지도 인간이
무지하고 완고하여 무엇이 백이고 무엇이 흑인지를
분간 못한단 말인가?
그렇다! 미안하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실이 그렇다.
전쟁으로 날이 밝고 날이 저무는, 저토록 길고 어두운
역사의 터널을 통과했으면서도, 여전히 나라마다
'국방예산'이 최우선이요 비밀 무기고는 최신 살상
무기들로 그득 차 있다.
거듭되는 재앙들이 모두 자신이 저지른 과오의 열매인데
그 과오를 고치지 않고 되풀이한다. 인간이 저지르는
과오를, 비유하자면, 열매를 살린답시고 뿌리를
자르는 행위다. 제가 만든 것을 지키고자(소유하고자)
저를 만들어준 분을 무시하고 거절한 것이 인간의
과오라는 얘기다. 나무 가지 위에 올라앉아서 그
가지에 톱질을 하고 있다. ⓒ이현주 (목사) |
□ 터주에 놓고 조왕에 놓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
‘터주’와 ‘조왕’이란 말이 낯설다. 터주란
집터를 지키는 지신을 이르는 말이었고, 조왕(?王)은
부엌을 지키는 신을 이르는 말이었다. 옛 사람들은
이들을 잘 모셔야 집안이 평안하다고 생각했다.
터주와 조왕을 잘 모시는 방법 중의 하나가 떡을
해서 바치는 일이었다. 그런데 없는 살림에 떡을
해서 터주에도 바치고 조왕에도 바치고 나면 남는
떡이 별로 없다.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을 여기저기
나누어주면 남는 것이 없음을 나타내는 말이 ‘터주에
놓고 조왕에 놓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였다.
가만 보면 신앙인들이 주변의 어려운 일에 관심을
갖거나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 비신앙인들보다도
더 인색할 때가 있다. 가지고 있는 신앙대로라면
더 열심히 도와야 할 것 같은데 왜 그럴까?
어쩌면 평소에 시간이나 물질을 더 드리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모르겠다. 예배에 참석하는
시간과 그 때 드리는 헌금이 남보다 더 많이 하고
있다는 생각의 근거가 되어 정말로 누군가를 돕고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을 외면하게 만든다면, 과연
그 신앙이 온전한 것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진지하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 ⓒ한희철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