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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화요일/청교도 파이데이아 영성훈련세미나

무엇이든 청교도............... 조회 수 1395 추천 수 0 2005.05.20 08: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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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말씀의 영성"!

"진정한 청교도 영성훈련 세미나"에 여러분을 초청합니다!

목회자 그리고 교회개척과 사역을 준비중인 교역자& 평신도사명자들을 위하여 "파이데이아 영성훈련세미나" 를 갖습니다.

찬양과 말씀(성경)중심의 참된 청교도적인 영성수련 세미나에 오셔서 하늘(영)의소리에 새힘을얻고 하나님의 마음을 부음받아  목회와 사역에 새로운 비전과 능력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강   사

양 영태 교수  광주 광신대학교 .대학원 교수(예장 개혁). 변호사

              서울대학교 법과대학교.대학원

저서 / 말씀에서 본 영성훈련의 실제(상.중.하). 사람의 본분

       파이데아와 바울의 영적체험. 영성의 샘물

  
이 승태 목사 Worship Lender.선교공동체 주바라기 대표    


일시 : 매주 화요일 /오전11시 - 오후4시
장소 : 목동 아파트 2단지 농협뒤편 꿈동산 교회
☞지하철 2호선 당산역 2번출구 0-1번 마을버스 영도초등학교 앞 하차

회비 : 무료/양영태교수 신간/파이데이아와 바울의 영적체험/영성 설교자료. 중식제공

접수&문의 : * 장소관게로 선착순 50명만 접수합니다.
☎ H.P 016-270-2189 . 010-7361-0691(031)502-6699 김영옥 간사  

주최 :          코/이/노/니/아 /영/성/원
후원 : 한국교회 목회자 바로서기 운동본부/선교공동체주바라기/기쁜 농어촌 선교회/광신대학교


목회자가 바로서야 교회가 부흥하며 한국교회가 바로섭니다.!
하나님은 준비된자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아래교안을 꼭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의 세 가지 신앙고백

1. 들어가는 말

2. 죄인 고백

3. 그리스도 고백

4. 사랑 고백

(1) 사랑 고백과 사명

(2) 사랑 고백에 관련된 세 가지 문제

  ① 이 사람들과 이 것들

  ② 아가파오와 필레오

  ③ 사명의 내용

(3) 사명을 주신 후의 말씀

  ① 베드로에 대한 예언

  ② 나를 따르라

  ③ 가라사대 “너는”

5. 끝맺는 말



1. 들어가는 말

사도 베드로의 이름은 원래 “시몬”(마 4:18)이었는데 예수님께서“게바”라고 하셨고, 아람어 게바의 뜻은 “반석”으로서 이것을 헬라어로 번역하면 “베드로”가 됩니다. 따라서 시몬은 베드로의 중생 전의 옛 사람(겉 사람)의 이름이고, 베드로는 중생 후의 새 사람(속 사람)의 이름이며1), 성경에서는 경우에 따라서 사도 베드로에 대한 이름이 “베드로” 외에도 “게바”나 “시몬”이라는 이름이 자주 나옵니다.

사도 베드로는 세례 요한의 제자이었던 그의 형제 안드레(요 1:35~37)의 인도로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가르쳐 줍니다. 즉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하고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요 1:40~42)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예수님께서 아직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이었기 때문에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그 후에 일어납니다. 즉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옛 사람)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마 4:18~20)라는 것입니다.

이 베드로는 감수성이 풍부하고 충동적인 성격의 소유자로서 항상 앞장서기를 잘 하였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열정은 누구 못지 아니하여 처음부터 제자들 사이에서 지도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베드로는 사도 야곱과 사도 요한과 함께 예수님의 특별히 사랑 받는 세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나(막 5:37, 눅 8:51)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형되실 때나(마 17:1, 막 9:2, 눅 9:28)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에도(마 26:37, 막 14:33), 위 세 사람은 늘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는 신앙고백을 하자, 예수님께서 “너는 베드로(새 사람)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라고 칭찬하였던 사실을 잘 압니다. 그리고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한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은 예수님의 사역의 전환점이 됩니다2). 세례 요한이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셨던(마 4:12, 17, 막 1:14) 예수님께서는 이 때로부터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셨습니다(마 16:21). 그리고서는 제자들에게 기독교 생활 원리가 되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막 8:34, 눅 9:23)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 베드로의 이러한 “신앙고백”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그 신앙고백 앞에서 그 신앙고백의 뿌리(기초)가 되는 “죄인 고백”이 있었고, 그리고 그 신앙고백의 뒤에는 그 고백의 열매(완성)가 되는 “사랑 고백”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신앙고백을 종합하여 볼 때에라야 우리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의 의미를 제대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죄인 고백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을 사도 누가는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즉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옛 사람)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물에 잠기게 되었더라,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눅 5:1~11)라는 것입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베드로는 자기의 형제 안드레를 통하여 예수님을 메시아로 소개받고 만난 적이 있으나, 그때부터 바로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은 아니었고, 이때부터 자기가 스스로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막 10:28, 눅 18:28)라고 말한 대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면서 제자 훈련을 받습니다. 따라서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하여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라는 “죄인 고백”은, 베드로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중요한 신앙고백이자 새로운 인생의 계기가 되는 중요한 사건이므로, 우리는 그 의미를 잘 알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이와 같은 죄인 고백을 할 당시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여 놀랍게 많은 고기를 잡기는 하였으나, 그러나 베드로가 무슨 죄를 범하다가 발각된 경우도 아니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어떤 죄를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도 베드로가 왜 그와 같은 죄인 고백을 하게 되었는가 깊이 생각하여 보아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가 그와 같은 죄인고백을 한 것은, 자기의 형제 안드레로부터 예수님을 메시아로 소개받았는데 그 당시에는 그 사실을 확실하게 믿지를 못하였으나, 이 때에 그에 대한 확신을 얻은 것이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께서 어부인 베드로보다도 바다와 고기에 대하여 더 잘 안다는 사실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님(히 ; 아도나이, 헬 ; 큐리오스) 곧 하나님으로 부르면서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한 것은, 예수님의 모습에서 신성(神性)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참 사람이시자 참 하나님이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당시 예수님의 모습에서 참 사람(人性)의 모습만 보고 있을 때,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참 하나님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더러운 것이나 먼지가 빛이 밝으면 밝을수록 더 잘 보이듯이, 사람의 죄성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가면 갈 수록 더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의 모습에서 신성을 느끼고 그 거룩하심을 보게 되자 자기의 추한 모습을 생생하게 느끼게 되고, 그리하여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죄인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 후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마 마 26:75, 눅 22:62)면서 회개하였는데, 그 회개는 이 죄인 고백을 기초로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회개(悔改)가 정(情)적인 것으로서 단지 후회(悔)하는 데 그쳐서는 안되고, 반드시 고침(改)까지 나아가야 하는 의지(意志)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도 히브리서 기자가 “믿음의 주(창시자)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완성자)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라고 권면하고 있는 말씀에 따라 예수님의 참 된 모습을 보고, 그리하여 우리의 타락한 옛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사도 베드로와 같이 마음 속 깊이 우러나오는 죄인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그리스도 고백

그러나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무어라고 해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하는 고백에서 그 절정에 이릅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이 예수님의 사역의 전환점이 되어서, 예수님께서는 이때로부터 자기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마 16:21)십니다.

베드로의 이 그리스도 고백은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에 모두 나와 있는데, 사도 마태는 이를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즉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人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主)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옛 사람)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새 사람)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마 16:13~20)라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신앙고백을 하고서, 예수님으로부터 복이 있다는 말씀을 듣고, 이 반석(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약속과 함께 천국의 열쇠를 주시겠다는 말씀까지 듣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신앙고백은 사실은 베드로보다도 나다나엘이 먼저 한 고백입니다. 나다나엘이 빌립의 안내로 예수님을 만나러 오자 예수님께서는,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이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요 1:48)라고 묻는데,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 1:48)라고 대답합니다. 이 때 나다나엘은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요 1:49)라고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와 같이 나다나엘이 먼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신앙고백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의 신앙고백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크게 칭찬하신 까닭은, 나다나엘의 신앙고백이 선험적인 것인데 비하여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체험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의 그리스도 신앙고백은 앞서 나온 베드로의 죄인 고백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인 고백이 없는 그리스도 고백은 귀신들도 하기 때문에(막 3:11)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또한 그리스도 고백에 이르지 아니한 죄인 고백도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배워서 알거나 또는 하나님께서 알게 하셔서 선험적으로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체험적인 것은 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의 죄인 고백에 대하여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 막 1:16)라고 하시면서 베드로를 제자로 삼아 전도자로 부르셨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에 대하여서는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8)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헬라어 이름)의 이름 앞서 본 바와 같이 “시몬”이었는데 예수님께서 “게바”(아람어)라고 이름을 지어 주셨고, 이 ‘게바’라는 말의 뜻이 ‘반석’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하신 말씀 가운데 ‘반석’은 사도 베드로를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 반석은 베드로 개인이 아니라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하는 열 두 제자의 대표를 의미합니다(쿨만). 또한 사도 바울이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 가운데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1~4)라고 가르쳐 주고 있는 대로 이 반석은 그리스도 자신이거나(루터), 아니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전후 문맥으로 보아 베드로의 이 그리스도 신앙 고백이라고 보아야 합니다.3) 그렇다면 이것은 교회가 사도적 권위 위에 세워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4)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聖子)의 이름(고유명사)이 되어 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서 승천하신 후에도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라는 기독론이 초대교회의 주된 논쟁점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의 내용도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그리스도 고백과 관련하여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사도베드로가 이와 같이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고서 바로 이어서 실족하여 예수님으로부터 심한 꾸중을 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마태는 그 장면을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즉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마 16:21~23)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사도 베드로의 이러한 실수를 거울로 삼아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더 생각하는 어리석은 일을 절대로 범하여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위대한 일을 하거나 큰 일을 성취한 후에 잘못하면 교만하거나 방심하여 넘어지기 쉽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역의 전환점이 되는 그리스도 고백을 한 후, 이와 같이 “사단아 물러가라”라는 꾸중을 듣습니다. 이러한 교훈적인 일이 있은 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독교의 생활 원리가 되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4,25)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4. 사랑 고백

(1) 사랑 고백과 사명

사도 베드로의 신앙고백에서 보듯이 우리에게는 죄인 고백과 함께 그리스도 고백이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고기를 잡고 있는 베드로를 찾아오시고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라고 말씀하시고, 베드로로 하여금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죄인 고백을 하도록 하십니다. 그리고서는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제자가 된 베드로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시고서, 베드로로 하여금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그리스도 고백을 하도록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죽음을 통과하시고서 부활하신 후 다시 베드로를 찾아 가십니다. 그리고서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이나 물으시면서, 베드로로 하여금 마지막 남은 신앙고백인 사랑 고백을 하도록 하십니다.

그 장면을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디베랴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와서 조반을 먹으라”(요 21:12)라고 하시고서 “떡과 생선”을 주십니다(요 21:13). 그리고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옛 사람)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새 사람)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요 21:15~17)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베드로를 찾아 오셔서 이와 같이 베드로로부터 사랑 고백을 받으셨는데, 이것은 우리의 신앙고백이 죄인 고백에서 시작하여 그리스도 고백을 거쳐서 반드시 사랑 고백에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따라서 우리도 마땅히 사도 베드로와 같이 죄인 고백을 한 후 그리스도 고백을 하고 나아가서 사랑 고백까지 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안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 고백이 없으면 우리가 구원을 받지 못하고, 또한 설사 우리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우리는 사명(使命)을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함께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사랑 고백이 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의 감당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고백에서 사랑 고백으로 나아가기 위하여서는 우리에게 한 가지가 더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을 받으신 후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막 8:34, 눅 9:23)라고 말씀하신 대로,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 곧 “자기 비움(kenōsis)”(빌 2:7)과 “자아 죽음”(요 12:24)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4:17)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같이 우리는 먼저 회개하고 “죄인 고백”을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구원자가 필요함을 알고서 “그리스도 고백”을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인 고백”은 우리에게 구속주이신 예수님이 필요한 것을 아는 것에서 더 나아가서, 내가 마땅히 죽어야 하고 또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인 것을 깨달아 아는 것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우리는 비로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자아 죽음”을 통과한 후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사랑 고백”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예수님을 버린 사건을 통하여 “자기 부인”과 “자아 죽음”을 통과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사랑 고백”을 한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사랑 고백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명에 축복이 없다면, 우리는 스스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예수님을 좇고 있는가 살펴 보아야 할 것입니다.

(2) 사랑 고백에 관련된 세 가지 문제

① 이 사람들과 이 것들

베드로의 이 사랑 고백과 관련하여 우리가 더 알아야 할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질문 내용과 사도 베드로의 사랑 고백의 내용과 베드로에게 주신 사명의 내용입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첫 질문은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투톤(toutōn)”이고 영어로는 “these”이기 때문에, 이 말은 “이 사람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것들”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질문은 “네가 이것들(이 세상 모든 것)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질문을, 예수님께서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마 16:31)라고 말하자,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라고 하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지금도 그와 같이 즉 다 주를 버릴지라도 자기는 버리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이 사람들” 즉 “다른 제자들” 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부인한 사실 때문에 의기 소침하여 절망 가운데 있는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특별히 다른 제자들보다 더 큰 사랑을 물어보실 이유가 있지 아니합니다. 그렇다면 “이것들”은 예수님께서 그 당시에 주신 “떡과 생선”(요 21:13)과 같은 것(축복)들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이 질문을 우리가 예수님께서 주신 “축복들”보다 “예수님 자신”을 더 사랑하느냐 라는 것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일(사명)을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 자신을 즐거워하고 사랑하기 보다는 예수님이 주신 사역과 축복을 더 즐거워하고 사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자신보다 예수님께서 주신 축복을 더 사랑한다는 것은, 사실은 예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한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스스로도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주신 축복 때문이 아닌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는 사역에 예수님의 (세상적인) 축복이 없는 경우에 우리는 실망하거나 좌절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면 우리의 삶과 사역에 하나님의 축복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임재(koinōnia))를 누리면서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와 같이 하고저 힘 쓸 때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② 아가파오와  필레오

둘째로 예수님께서 물으신 사랑이라는 말과 베드로가 대답한 사랑이라는 말이 모두 같은 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말에는 사랑이라는 말이 구별이 없기 때문에 똑같은 말로 번역이 되어 있으나, 헬라어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질문에는 조건이 없이 섬기는 신적인 사랑을 말하는 “아가파오”(agapaō)가 사용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친구간의 우정을 나타내는 “필레오”(phileō)라는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아무런 의미의 차이가 없이 단순히 동어반복(같은 말의 계속적인 사용)을 피하기 위하여 같은 의미로 사용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는 당시에 헬라어가 아니라 아람어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헬라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아가파오와 필레오가 다르게 사용되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두 말의 의미가 다르다고 본다면 앞서 사도 요한이 가르쳐 주고 있는 사도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첫 번째 아가페 사랑으로 물으시는데 베드로는 필레오 사랑으로 대답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로도 아가페 사랑으로 물으시는데 사도 베드로는 동일하게 필레오 사랑으로 대답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예수님께서 아가페 사랑으로 물으셨는데,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였던 사도 베드로는 아가페 사랑으로는 자신이 없어서 두 번 다 필레오 사랑으로 대답한 것이 됩니다. 따라서 이것은 베드로가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의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한 것이지만 속으로 보면 부정적인 대답을 한 것이 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로 물어 보시면서 베드로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필레오 사랑으로 물어보아 주십니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베드로도 필레오로 대답하기 때문에, 이렇게 본다면 베드로는 세 번째 가서야 비로소 예수님의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필레오로만 사랑하여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처음 질문과 두 번째의 질문이 아가파오이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예수님을 아가파오로 사랑하여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을 이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가 없고 또한 이 아가페 사랑은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반드시 이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하고 또한 성령을 힘입어 이 아가페 사랑으로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로부터 죄인 고백에 이어서 그리스도 고백을 받아 내시고 마지막에는 사랑 고백을 받아 내십니다. 그리고 이 세 번에 걸친 베드로의 사랑 고백은 예수님께서 이 사랑 고백을 받아 주심으로 인하여 베드로가 세 번에 걸쳐서 예수님을 부인한 배신으로부터도 치유(용서)함을 받게 하여 줍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2,33)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한 사실로 인하여 엄청난 고통을 당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베드로가 이 고통을 통하여 “자아 죽음”을 경험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큰 고통에서 용서함을 받고 마음의 평강을 다시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마 28:21)라고 물어 보았을 때, 예수님께서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 28:22)라고 하시면서 “한 없는 용서”를 가르쳐 주신 말씀이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사랑 고백을 통하여 예수님으로부터 치유(용서)하심을 받고서 다시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지위가 회복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죄인 고백에 대하여 제자로 부르시고 전도자의 사명을 주시고, 그리스도 고백에 대하여 교회의 기초를 삼고 천국 열쇠를 약속하여 주셨는데, 이 사랑 고백에 대하여서는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라고 하셨는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 목적을 사도 베드로에게 사명으로 주신 것입니다.

③ 사명의 내용

셋째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사명이 베드로의 세 번에 걸친 사랑 고백에 따라 다르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내 어린 양을 먹이라”(Feed my lambs)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어린 양 즉 양 새끼들 다시 말하면 믿음이 약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들(고전 3:1)을 어미가 새끼를 양육하듯이 먹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내 양을 먹이라”(Take care of my sheep)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장성한 양들 곧 장성한 자들(고전 13:11)을 먹이는 것이 아니라 돌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내 양을 먹이라”(Feed my sheep)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장성한 양들을 먹이라는 것으로 특히 늙은 양들을 어린 양을 돌보듯이 먹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세 번째에서는 첫 번째 동사 feed와 두 번째 명사 sheep이 결합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 사랑 고백을 하고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사명 즉 어린 양 먹이고 젊은 양들을 돌보고 늙은 양들을 먹이는 일을 감당할 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 5:13,14)라고 말씀하시면서 어린아이와 장성한 자의 차이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따라서 ‘어린 양을 먹이라’라는 사명을 감당하려면 “갓난 아이들 같이 신령한 젖을 사모하”(벧전 2:2)는 어린 양을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마 4:4)을 먹여 주어서, 단단한 식물을 스스로 씹어 먹을 수 있는 장성한 사람이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또한 ‘양을 돌보라’라는 사명을 감당하려면 장성한 자들이 스스로 단단한 식물(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서 의의 말씀을 경험하고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 될 수 있도록, 다시 말하면 장성한 자들은 스스로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신앙서적을 보면서 영성훈련을 하여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나온지 오래 되었지만 아직 장성한 자가 되지 못한 사람은 어린 양을 먹이는 것같이 신령한 젖으로 자랄 수 있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3) 사명을 주신 후의 말씀

① 베드로에 대한 예언

이 베드로의 사랑 고백과 관련하여 예수님께서 사명을 주신 후 하신 말씀 가운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내 양을 먹이라”라고 하시고서 사명을 주신 후, 사도 베드로에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새 사람)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요 21:19)라고 가르쳐 줍니다.

여기서 “진실로 진실로”라고 번역된 말은 영어(RSV)로는 “truly truly”이지만 헬라어로는 “아멘, 아멘(amēn, amēn)”으로서, 히브리어에서 온 것이고 그 뜻은 ‘동의한다, 확증한다’라는 응답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자신의 말씀 앞에 둘 때에는, 그 목적은 그 말씀을 시인함으로써 그 진정성과 타당성을 강조하는 데 있습니다.5) 그리하여 영어(NIV)에서는 “아멘, 아멘”을 “I tell you the truth”(내가 너에게 진실을 말하노니)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your word is truth)”(요 17:17)라는 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truth(진리, 진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아멘, 아멘”은 그 뒤에 나오는 말씀이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신적 선언’(神的宣言)임을 강조하여 나타내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걸을 때 자유롭게 행동하기 위하여 겉옷을 허리띠로 둘렸기 때문에, 여기서 스스로 띠를 띠운다라는 말은 자유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팔을 벌린다는 말은 십자가에서 팔을 벌리고 못박히는 것을 상징하고, 남이 띠 띠운다는 것을 결박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도 베드로가 늙어서 십자가에서 순교할 것을 예언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나를 따르라”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예수님께서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5)라고 하셨기 때문에, 이것은 양을 돌보라는 사명을 받은 베드로도 예수님을 본받아 양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려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서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를 하게 됩니다.

② 너는 나를 따르라

둘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도 요한이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찌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요 21:20~23)라고 가르쳐 준 말씀에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자기의 순교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을 들은 후,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인 사도 요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집니다. 이 관심은 사도 요한을 염려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고 단순한 호기심으로 마음이 흩어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내가 그를 머물게(헬 ; menō, 영 ; remain)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호기심 (때로는 시기심) 때문에 남의 일에 관심을 가질 때가 많은데, 예수님께서는 남의 일에 쓸데없이 상관하지 말고 오직 예수님만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남의 일에 상관하기보다는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순교를 예언하신 후 “나를 따르라”(follow me)라고 하신 말씀은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롬 8:29)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follower)(고전 11:1)가 되는 것을 말할 뿐만 아니라, 계속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청종하면서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하고, 나아가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한 알의 밀의 비유를 말씀하시고서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요 12:26)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말하는 예수님께서 계신 곳은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예수님께서 한 알의 밀이 되셔서 지신 십자가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요 21:19)라고 하시고서 다시 남의 일에 상관하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요 21:22)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셨던 일을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하면서 우리의 사명을 감당하되 다른 사람들의 일에 상관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감당하면서, 자기와는 다른 방식으로 예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우리가 너무 상관을 많이 하여, 그 사람이 잘못한다고 하거나 비난하거나 심지어는 적대시까지 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통일성이 있어야 하지만 또한 다양성도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해석에는 그 견해가 일치하지 아니한 것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것이 있고, 자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눈이나 귀로, 어떤 사람은 입으로, 그리고 어떤 사람은 손이나 발로 사용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빌 3:10)하여야 하고, 자기와 특별히 관계가 있는 경우 외에는 쓸데없이 남의 일에 상관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잘 감당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③ 가라사대 “너는”

하나님의 말씀(성경)에는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이신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에 관한 이야기(narrative)와 함께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께서 하신 말씀(word)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아버지, 예수님, 성령님)께서 하신 말씀은 보통 “가라사대”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헬라어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로고스(logos)와 ”레마(rhema)를 교환적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로고스”와 “레마”는 신학적으로 동일한 의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하였느니라”(마 4:4)라고 하신 말씀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라고 하신 말씀에서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에서 말씀이나 말은 모두 “레마”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입으로 하시는 말씀(rhema)은 그 말씀을 직접 듣는 특정인을 향하여 하신 말씀이 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성경) 가운데 “로고스”는 객관적이고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말씀으로서 모든 사람에 대한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을 말하고, “레마”는 주관적이고 개별적이고 특수적인 말씀으로서 그 말씀을 듣는 특정한 사람에 대한 입으로 나오는 선포된 말씀(spoken word)이라고 구별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가라사대” 다음에 나오는 말씀은 모두 “레마”로서 선포된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힘)이 있는데(히 4:12)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창 1:3) 하시매 빛이 창조된 것에서 보는 바와 같이 레마는 더 크게 역사합니다.

레마(선포된 말씀) 가운데서도 그 내용이, 듣는 사람 모두에게 해당되는 ‘너희는’으로 시작되는 말씀과 그 말씀을 듣는 한 사람에게 해당되는 ‘너는’으로 시작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으로 시작되는 말씀은 “공동체”에게 주시는 말씀이고 ‘너는’으로 시작되는 말씀은 그 말씀을 듣는 개인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성경)은 말씀이 이루어진 그 당시 사람들이나 그 말씀을 들었던 개인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주신 말씀이고, 우리 신앙 공동체에 주시는 말씀일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 믿는 사람 각자 각자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영의 양식으로 먹고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하여서는 기록된 말씀(logos)을 선포된 말씀(rhema)으로 받아서, 그 말씀을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나 묵상할 때에 그 말씀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서 그 말씀을 하나님께서 직접 나에게 하시는 말씀(rhema)으로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narrative)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word)도 모두 직접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너희는’ 하시고 공동체에 주시는 말씀 뿐만 아니라 ‘너는’ 하시고 어떤 개인에게 주셨던 말씀도, 내가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되거나 그 개인이 되어서 그 말씀을 지금 여기에서 나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하신 말씀도, 우리는 예수님께서 지금 여기에서 “나”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5. 끝맺는 말

우리는 마음으로 믿어 의(義)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confess, 고백)하여 구원에 이르기 때문에(롬 10:10) 우리에게 있어서 신앙고백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신앙고백을 내용으로 하는 사도신경을 주기도문과 함께 늘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신앙고백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사도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베드로의 죄인 고백과 사랑 고백까지 잘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죄인 고백이 그리스도 고백의 기초가 되고 베드로의 사랑 고백이 그 완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죄인 고백은 자기 자신에 대한 고백이고 그리스도 고백은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고 사랑 고백은 자기 마음(결단)의 고백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사도 베드로와 같이 먼저 죄인 고백을 하고서 그리고 그리스도 고백을 하고, 나아가서 자기 부인을 한 후 사랑 고백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사랑 고백이 사명을 받는 전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죄인 고백은 심판주이신 예수님을 만나서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면서 구주(救主, Savior)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고, 그리스도 고백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만나서 헌신하고 순종하면서 주님(主, Lord)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고, 사랑 고백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만나서 사귐(koinōnia)을 가지고 연합하면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신랑(新郞)이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도 베드로와 같이 제자로의 부르심과 전도의 사명,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워가는 사명, 나아가서 양들을 돌보는 사명을 받아서 그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라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을 물어보신 것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사도 베드로와 같이 예수님으로부터 이러한 질문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음(heart)을 다하고 목숨(soul, 성품)을 다하고 뜻(mind)을 다하고 힘(strength)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막 12:30, 신 6:5)라는 크고 첫째되는 계명에 따라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예수님을 사랑하여야 하고,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fervent in spirit ; KJV) 주를 섬기라”(롬 12:11)라는 말씀에 따라 열심히 즉 영적으로 뜨겁게 예수님을 섬겨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만나서 이야기(대화)를 하고 사귐(koinōnia)을 갖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서(임재, presence) 대화를 하고 예수님과 교제(사귐, koinōnia, 고전 1:9)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다고 생각이 되는 경우에는, 아들의 치유를 위하여 그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막 9:24)라고 외친 것같이, 우리도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나의 사랑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라고 사랑을 고백(告白, confess)하면서 사랑을 간구(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사랑(agapē)은 정(情)적인 것이기도 하여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같이 느끼는 것(compassion, 동정, 불쌍히 여김)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의지(意志)적인 것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요일 5:3)라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계명(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구주(Savior)되시고 주님(Lord)되시는 예수님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육신 하시어서 이 땅에 계셨으나 십자가를 지신 후 부활하시고서 승천하여 이제는 하나님 우편에 계시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신 하나님께서(요 1:1) 성육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요 1:4), 우리는 예수님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면서 주야로 그 말씀을 묵상하여야 합니다(수 1:8).

또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상징으로 십자가(피)를 남겨 주시고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막 8:34, 눅 9:23)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사랑하고서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아야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내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사랑(감사)하는 것 뿐만 아니라(구주의 십자가),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갈 2:20)라고 말한 대로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롬 6:6)을 말하고(주님의 십자가), 나아가 예수님께서 삶에서 우리에게 지게 하신 각자의 십자가를 깨달아 알고 그 십자가를 달게 지는 것을 말합니다(자기 십자가).

그리하여 우리가 기도(koinōnia))와 말씀(묵상)과 십자가(피)를 통하여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면, 우리도 사도 베드로와 같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 5:5~8)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신다(엡 5:26)는 말씀에서 씻는다는 말이나 깨끗하게 한다는 말은 같은 말이므로 여기서 말하는 “물”은 “말씀”과 같은 말이 됩니다. 따라서 성령과 말씀과 피(십자가)가 예수님을 증거하시는데, 이 셋이 합하여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님과의 교통(koinōnia, 고후 13:13)과 말씀 묵상과 보혈(십자가)을 통하여서도 예수님을 사랑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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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70 무엇이든 하찮은 인생은 없습니다 굳뉴스 2006-03-14 1288
3769 무엇이든 메모장에서 옮겼습니다 흔적 2006-03-13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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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67 무엇이든 로마서 강해 3장 - 새로운 의(義) file nulserom 2006-03-12 1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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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64 무엇이든 로마서강해 2장 - 율법주의의 허구성 file nulserom 2006-03-05 1840
3763 무엇이든 전세계 실시간 기독교TV방송 간증찬양 동영상 입니다. sjsch 2006-03-03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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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7 무엇이든 조기유학 실패? 문제점? [1] 한미란 2006-02-24 1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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