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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부활의 현재와 미래

고린도전 조용기 목사............... 조회 수 2412 추천 수 0 2010.02.08 21: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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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전15:50~58 
설교자 : 조용기 목사 
참고 : 2009. 4. 12. 부활주일 4부 설교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0~58)

<서론>
오늘 저는 “예수님 부활의 현재와 미래”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주님이 지난 금요일 날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매달리셨다가 오후 3시에 운명하시고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들어가셔서 토요일날 하루를 지나시고 주일 아침 일찍이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들어가셨을 때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가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하시겠다는 말씀을 수차 했기 때문에 제자들이 틀림없이 와서 예수님의 시체를 훔치고 난 다음에 부활했다고 거짓 선전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빌라도에게 부탁을 해서 강력히 무장한 로마 군인들이 무덤을 단단히 봉하고 지키고 있었습니다. 어떠한 제자들도 와서 그들과 싸워 이겨서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갈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일 이른 아침에 여자 제자들이 예수님의 몸에 향료를 바르기 위해서 갈보리산 언덕 근처에 있는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니까 큰 지진이 나더니만 하늘에서 빛이 비취고 산이 진동을 하더니 로마 군인들이 죽은 사람같이 얼굴이 하얗게 되어 벌벌 기어서 도망을 치고 돌문은 옮겨지고 천사들이 돌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놀래서 벌벌 떠니까 천사가 하는 말이 “너희들이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구나. 예수님은 무덤에 계시지 않고 부활하셨다.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알리라”고 말했었습니다. 그래서 제 일단의 제자들은 다른 제자들을 찾아 가고 막달라 마리아는 베드로와 요한이 있는 숙소를 향해서 뛰어가서 알렸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빨리 달려와서 무덤에 와서 들여다 보고 예수님이 안 계신 알고 무덤의 문을 나와서 집으로 돌아가고 막달라 마리아는 혼자 그 앞에 앉아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마리아여” 하는 바람에 마리아는 예수님인줄 깨닫고 “랍오니여”하고서 주님을 영접하고 경배했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순식간에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을 만나러 가는 여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놀래서 전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하고 그 발을 만지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 즉시에 예수님은 엠마오에 낙향해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같은 동행인으로 가장해서 걸어가시다가 저녁에 밥을 먹을 때 기도를 하실 때 변형되어서 본모습을 나타내므로 두 제자가 깜짝 놀랐습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이 계신 줄 알고 놀래서 가는 길을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뛰어 가니까 열 제자들이 모여서 있는데 주일 저녁 마가다락방에서 예수님이 살아나셔서 우리 가운데 나타났다고 모두 흥분해서 야단이었습니다. 얼마 있지 않다가 함께 있지 않았던 도마가 설렁설렁 와서 “너희들 전부다 엉터리다. 예수님이 살아났다니 그럴 수가 있느냐? 나는 그가 살아났으면 손에다가 못 자국을 만져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고야 믿겠다.”고 했었습니다. 그런 후에 여드레 만에 주일날 또 그들이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였는데 예수님께서 도마가 있는 곳에 함께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도마를 보고 “도마야 와서 내 손에 못 자국에 손을 넣어 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아라. 그리고 믿지 않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니까 도마가 그때야 주님께 엎드려서 “나의 하나님, 나의 주여”라고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예수님은 또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부인하고 좌절과 절망에 처한 베드로에게 주님이 나타나셔서 격려하여 다시 용기와 힘을 얻게 하시고 난 다음 제자들을 갈릴리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해변에서 고기를 잡았으나 밤새도록 한 마리도 못 잡은 일곱 제자들을 위해서 고기를 잡고 떡을 준비해서 예비하고 나오게 하셔서 그들에게 떡과 고기를 주시고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다짐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주님께서 나중에 40일 후에 감람산에서 승천하실 때 약 500명의 제자들이 함께 와서 예수님이 승천한 것을 쳐다보았습니다. 그 500명 중에 120문도가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와서 열흘 동안 기도하고 성령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에 사도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서 감옥에 넣고 때리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다가 그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니이까?”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말했었습니다. 사울은 거기에서 변화되어 바울이 되고 열렬한 그리스도의 복음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사건들을 합쳐서 볼 때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으로 너무 확실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고 변명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들은 성경에 기록된 기적이나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 단지 신화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예수님이 기절했다가 깨어났다. 빈무덤에서는 도난을 당했다. 환상을 봤다. 신화를 말한다고 그렇게 변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매카트니 박사는 기독교의 대적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 갈 수 있었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그들 중에 남아 있는 것은 축 늘어져 죽은 예수의 시체밖에 없는데 그를 감추어 놓고 거짓말로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전하기 위해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처참한 고통을 당하고 순교를 당해도 예수님을 배반한 자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죽은 예수를 살았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목숨을 바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이 살아난 것을 확실히 보았기 때문에 그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순교를 당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것은 성경에 말씀한대로 진리며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요즘‘잘 사는 법’(well-being)에 이어‘잘 죽는 법’(well-dying)이 사회적 열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는 삶 못지않게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커졌다는 것입니다. 이미 유럽에서는 웰 다잉을 위한 실제적인 사례들이 있어 독일에서는‘죽음 준비학교’가 세워졌고, 프랑스에서는‘임종치료학과’가 생겼으며 일본에서도 ‘존엄한 죽음’을 위한 처방 등이 나와서 사회적인 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죽음을 생각하면서 종교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많은 종교들이 죽음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만 죽음을 이기고 부활을 가르치는 종교는 기독교 밖에 없습니다. 불교의 석가모니도 죽어서 그 무덤이 오늘도 남아 있는 것입니다. 유교의 공자도 죽어 무덤이 오늘도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슬람의 마호메트도 죽어 메카에 무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무덤이 없습니다. 무덤이 텅 비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아무리 예루살렘에 찾아가서 예수님 무덤에 경배하려고 해도 예수님 무덤은 없습니다. 주님은 살아서 일어나시고 부활 승천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며,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에 우리 믿는 자들을 위해서 있을 곳을 예비하시고 이제 곧 내려오시기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본론>
1. 현재 체험하는 부활의 사건
그러므로 오늘 제가 여러분께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의 부활 사건을 우리의 현실 생활 속에 체험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역사적으로 2천 년 전에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셨을 뿐 아니라 그 부활이 오늘 우리 속에 계속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중생할 때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부활하신 사실을 믿고 기도하면 부활한 성령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 죽은 영혼을 부활시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사람의 영은 죽었습니다. 그래서 영이 없기 때문에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사람은 혼을 가지고 육을 통해서 이 세상 일만 관심을 가지고 살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으려면 영이 죽은 것을 살아나야 되는 것입니다. 부활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영을 부활시킨 것은 부활한 예수님의 영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 영을 부활시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예수를 구주로 모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여러분의 영이 부활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만 2천 년 전에 부활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영이 오늘날 부활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구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한번은 밤에 바리새인의 선생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바리새인은 철저히 율법주의자요, 유대주의자인데 그중에도 선생이니까 니고데모는 흠도 없고 점도 없이 율법을 지키고 의식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고 의식을 지키므로 천국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그러나 이 니고데모는 무언지 마음에 공허한 마음이 있고 예수님의 생활을 보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이 확인하고 하늘에서 온 사람 같아서 밤에 몰래 찾아와서 주님께 말했습니다. “주님, 주님은 틀림없이 하늘에서 온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런 기적이 생애 속에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짜고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청천벽력 같은 말입니다. 니고데모는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사람이 율법만 잘 지키고 의식만 잘 지키면 하늘나라에 간다고 하는데 예수님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가 없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가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나같이 늙은 사람이 어찌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날수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이 “네가 진실로 진실로 다시 말하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물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을 믿는 것이 물이요 성령은 예수님의 부활의 영이 성령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한 것을 믿음으로 물로 세례 받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한 것을 믿을 때 성령이 바람이 불듯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우리 영혼을 중생시킨다는 것입니다. 어리둥절한 니고데모를 보고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함 같이 성령이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다시 부활시킨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육으로 난 아담의 후손들은 아무리 율법과 의식으로 갈고 닦아도 번쩍 거리는 육이지 육은 육이지, 육이 영이 되지 않는다. 성령으로 나야 영이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어떠한 종교도 육은 훈련시킵니다. 금식을 하고 수양을 하고 도덕을 닦고 종교의식을 행하여 육을 닦습니다. 육을 훈련시킵니다. 육은 단련시킵니다. 그러나 끝까지 육은 육이지 육이 영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돼지를 아무리 목욕시키고 좋은 옷을 입히고 머리를 빗어 주고 안경을 끼워 주고 방 저 안방에 요 이불을 깔고 눕혀 놓아도 돼지는 돼지지 사람이 안 됩니다. 절대로 사람이 안 됩니다. 아담의 후손은 육체이기 때문에 아무리 해도 육이지 영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결단코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니고데모는 그 말을 듣고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하니까 예수님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불뱀에 물려 죽어갈 때 하나님께 기도하니 불뱀을 놋뱀으로 만들어서 나무에 달라고 말했었습니다. 나무에 높이 달아서 쳐다만 보고 믿으면 불뱀의 독에서 낫는다고 했는데 믿는 사람은 다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처럼 예수님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그것은 니고데모가 잘 아는 사실이거든요.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어떠한 사람이라도 빈부귀천 남녀 노유를 불구하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구주로 믿으면 성령이 오셔서 육속에 죽어있는 영을 부활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살아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은 부활하지 않고는 안 됩니다. 우리는 자꾸 예수님 부활만 주장하는데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부활해서 지금 예수 믿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절대로 영원이 부활될 수 없습니다. 종교가 우리를 영적으로 부활시킬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해서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를 부활시킨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에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아들의 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이 우리에게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이 죽어서 부활하지 못했더라면 예수님의 영이 어디 있습니까? 없지요. 부활해서 승천하여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아서 예수의 영인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를 부활 시키셔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부활의 영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므로 우리 마음속에 주님을 깨닫게 되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천국의 희망과 꿈이 생긴 것도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 영이 마음속에 들어와서 우리 마음속에 깨우침을 주기 때문에 우리가 천국이 있는 것을 알고 천국에 들어갈 희망과 꿈을 갖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3절로 4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여기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시므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거듭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거듭나는 것하고 예수님 부활하고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 부활의 영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사망을 이기고 우리 영혼을 부활시킨 것입니다. 부활은 2천 년 전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내속에서 일어난 사건인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시므로 내 영이 부활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이 다 길거리에 모이고 시장터에 모이고 관광지역에 모이지만 그 속에 부활한 영을 가진 사람과 죽은 영을 가진 사람하고 겉은 같아 보여도 속은 같지 않습니다. 부활한 사람은 이 마음속에 영이 부활해서 하나님과 교통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돌베개 베고 자다가 하늘에서 사닥다리가 자기에게 내려와서 사닥다리를 통해서 천사가 오락가락 하고 사닥다리 위에 하나님이 서서 말씀하기를 “나는 너의 조부 아브라함 너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너와 같이 하여 너를 이곳에 돌아오게 하고 너희 자손을 창대케 하고 너희 후손이 이 땅의 축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야곱에 어느 곳에 가나 하나님이 사닥다리를 내려놓아서 야곱과 연결된 것처럼 우리는 부활한 예수님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사닥다리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느 곳에 가나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부활의 사닥다리가 되어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이 살되 부활하지 못한 사람은 속에서 하늘에 연결되는 영적인 사닥다리가 없습니다. 인간으로써 그냥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한 영을 가진 사람들은 부활의 영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연결한 사닥다리를 통해 그 부활의 영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역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결코 우리 외롭게 혼자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오나가나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부활한 사닥다리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므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우리 속에 충만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절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왜냐, 하나님과 우리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영이 부활해서 하나님의 성령과 교통하고 있으므로 우리가 죽으면 성령을 통해서 직접 하늘에 올라가서 예비하신 우리의 처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우리는 이와 같이 항상 동행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성령이 바로 예수의 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입니다. 성령은 누구냐. 예수님의 영광에 광채시오 그 본체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예수 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속에 부활의 영과 같이 계신 것은 예수님이 우리 속에 동행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죽은 예수가 어떻게 우리와 같이 하십니까? 부활하셨기 때문에 성령으로 우리 속에 와서 우리를 부활시키고 우리와 항상 같이 계신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이 여러분 속에 같이 계신 것입니다. 부활의 영역을 통해서 여러분과 함께 계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 13장 8절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어제 예수님은 죽어서 없어진 것이 아니라 부활 승천해서 성령으로 다시 와서 내 속에 어제와 똑같이 오늘도 함께 계시고 미래 영원 있는 천국에서 영원히 주와 함께 같이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자나 깨나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와 함께 하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산자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로 2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
예수님은 이제 부활이요 그 부활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를 살려서 생명이 되니 우리에게는 부활이요 생명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영혼을 살려 주셨으므로 우리는 죽어도 속 영은 살고 살아도 속 영은 삽니다. 이 몸은 의복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옷을 벗고 발가벗었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옷을 갈아입으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를 우리의 영혼이 입고 있는 옷입니다. 언제고 벗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벗어 버린다고 해서 영원히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은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죽은 사람들이 육체를 벗고 저 세상에 가면은 당분간은 자기가 죽은 줄을 모른다고 합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의 간증을 들으면 자기는 안 죽었는데 몸밖에 나와서 자기를 보고 있는데 일가친척들이 와서 자기를 붙잡고 통곡을 하고 우는데 “내가 여기 있는데요? 울지 마세요. 내 살아 있어요. 울지 마세요.” 아무리 말을 해도 못 알아듣고 시체를 갖고 울고불고하는 것을 보고 “이상하다. 나는 안 죽었는데 왜 사람들이 죽었다고 하느냐?” 그러한 이상함을 느꼈다가 하나님이 도로 육체에 들어가라 해서 들어와서 깨어난 그런 간증들을 하는 것을 제가 한두번 아니고 수없이 들었습니다. 바울선생도 육체를 떠나서 셋째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간 경험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육체를 옷 입고 있다가 하나님이 오라 하시면 육체를 벗어 버리고 나가기 때문에 자기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바울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만 아신다”고 했었습니다. 바울이 셋째 하늘에 올라갔는데 죽어서 올라간 줄 몰랐습니다.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리라.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삽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에게 놀라운 영적인 부활을 주신 것입니다.

2. 죽을 몸에 나타나는 부활의 생명
둘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죽을 몸에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 속에 무슨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겠느냐? 여러분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 육체 속에도 부활의 역사가 늘 일어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을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여기 보십시오. 우리 영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목구비를 가진 우리 몸에도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면 예수의 죽음을 몸에 걸머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죽었습니까? 우리 죄 때문에 죽었지요. 우리의 흉악한 부정 때문에 죽었지요. 우리 병 때문에 죽었지요. 우리 저주 때문에 죽었지요. 우리의 지옥 가는 죽음 때문에 죽으셨지요. 주님이 죽으신 것은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 죄를 위해서 우리 추악을 위해서 우리 병을 위해서 우리 저주를 위해서 우리 지옥을 위해서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몸을 우리 마음속에 우리 위해서 죽은 것을 알고 믿고 받아들이고 마음에 품고 몸에 짊어지고 묵상하고 있으면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도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부활 했거든요. 죽음이 있으면 부활이 있습니다. 성경은 다른 책과 달라서 창세기 보십시오. 저녁이 오고 아침이 오니 첫째날이라. 우리는 첫째날을 아침이 오고 저녁이 온다고 말하는데 성경은 저녁이 오고 아침이 오니 첫째날이라. 깜깜한 밤이 있으면 곧장 밝은 새벽이 온다는 것입니다. 시험과 환난이 있으면 꼭 축복과 승리가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죽음이 있고 난 후에 부활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 우리의 몸에 예수의 죽음을 걸머지면 곧장 그 뒤에는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 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몸에 의로운 생명의 부활로 나타나고 거룩한 부활의 생명으로 나타나고 치료와 건강의 부활이 생명으로 나타나고 아브라함의 축복과 형통의 부활이 생명으로 나타나고 천국 영생 부활의 생명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심은 우리 현실 생활 속에도 부활의 생명으로 나타난 것을 알고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의롭게 되지 못하잖아요. 부활의 생명이 나타나서 우리를 의롭게 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거짓말쟁이가 참말을 하게 되고 방탕자가 근면한 사람이 되고 음란한 자가 정상적인 사람이 되고 도박광이 도박을 안 하게 되고 알콜중독자가 낫고 아편중독자가 낫고 하는 것은 부활의 생명이 와서 그렇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령을 받고 거룩하게 되는 것도 부활의 생명이 와서 그렇게 되는 것이고 병이 낫는 것도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이 와서 병이 낫고 건강하게 해주는 것이요, 우리가 사는데 괴롭고 고통스럽고 저주가 많은데 이를 제키고 축복해 주어서 평안히 살 수 있게 하는 것도 부활의 생명이 와서 해주는 것이요, 죽어서 지옥 떨어질 것을 우리를 건져서 천국으로 갈 수 있는 희망을 주는 것도 부활의 생명이 와서 그렇게 해주는 것입니다. 부활의 생명이 우리 영적으로만 부활시키는 것이 아니라 육체로 살고 있을 동안에도 육체에도 부활의 생명이 끊임없이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무덤 내 부활, 예수 부활 내 부활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이 성경에 말씀하세요. 우리가 항상 하루 이틀만 아니라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라는 것입니다. 항상 예수님께서 날 위해서 죽었다는 것을 몸에 걸머지고 마음에 끌어 앉고 있으면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늘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이란 오늘 우리의 생명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의 능력을 고린도후서 4장 8절로 10절에 이렇게 말했는데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고난으로 사방을 우겨쌈을 당하여도 예수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쌓이지 아니하며 우리가 답답한 일을 당해도 예수의 생명이 임하므로 답답함을 이기고 우리가 핍박을 당해도 버림 받아도 예수의 생명이 내 속에 충만하므로 버림받지 아니하고 우리가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완전히 망해 버려도 우리가 망하지 않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속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의 부활은 현실적입니다. 지금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 속에 예수의 부활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날 위하여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을 믿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하거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날 위해서 죽은 것을 믿고 받아들이고 주님 날 위해서 죽은 것은 나에게 부활의 생명을 주기 위해서 주신 것이니 내 영만 부활한 것이 아니라 육체의 삶도 부활의 생명을 얻어 힘과 능력을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게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죽을 육체에 나타난 예수의 생명에 대해서는 고린도후서 4장 11절에 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죽은 육체가 아닙니다. 죽을 육체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육체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참 놀라운 말씀입니다. 한번 따라 읽어 주십시오.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죽을 육체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부활의 생명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을 당해서 고통을 당할 때 그 고난을 이길 수 있도록 예수의 생명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육체에 나타나서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을 당할 수 있게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참 희한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두움이 있으면 밝음이 있는 것처럼 죽음이 있으면 생명이 우리 속에 언제나 부활의 생명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동구라파가 아직 공산권에 있을 때 리처드 범브랜드 목사님이 복음을 전하다가 투옥되었습니다. 감옥에 갇혀서 성경을 읽다가 그는“두려워 말라”는 말씀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에 줄을 그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전체를 다 읽고 난 다음 줄을 그은 것을 헤아려 보니까 두려워 말라는 말이 365번 있었던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무릎을 탁 치면서 “맞다.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은 1년 365일을 날마다 나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성경에 365번 두려워하지 말라 했으니 365일을 살면서 늘 두려움이 다가오면 내가 너희 속에 부활의 생명을 줄테니까 나를 의지하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지킬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절에서 27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바울이 선생이 말하는 것입니다.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런 엄청난 고통을 당하면서 바울 선생은 소아시아 일대와 유럽에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고통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항상 그가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우면 예수의 생명 또한 그 죽을 육체에 나타났기 때문인 것입니다. 죽을 고비를 늘 당하면 당할 때마다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서 버텨준 것입니다. 아무리 집이 무너지려고 해도 기둥이 튼튼히 버티면 안 무너지는 것입니다. 다리가 무너지려고 해도 기둥이 튼튼하면 안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심신을 가지고 있으나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마귀가 고통과 괴로움을 갖다 줘도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이 버팀목이 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부활의 생명을 의지하면 우리가 넉넉히 이겨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모르면 쓸 수 없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은 우리 영혼만 살린 것이 아니라 우리 육체도 버팀목이 된다는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부활은 성령으로 우리와 같이 계셔서 우리 육체가 감당하지 못할 고통을 당할 때 주님이여 부활의 생명으로 내 육체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하면 우리 육체를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 네가 없는 것은 구하지 아니함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알아야 구하지요. 그러므로 주여 부활의 생명으로 내 병을 고쳐 주시옵소서. 부활의 생명으로 약한 몸을 강하게 해주시옵소서. 부활의 생명으로 이 공포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부활의 생명으로 내 쓰러진 것을 일으켜 세워 주시옵소서. 그럴 때 오늘날도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이 실제로 우리 생활 가운데 역사해서 크나큰 변화를 우리에게 일으켜 주는 것입니다.

3. 미래의 부활
셋째로, 우리에게는 영혼과 육체가 완전히 부활하는 역사가 일어날 때가 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4절에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우리는 썩잖아요. 우리는 죽지요. 썩어지고 죽어지는 우리가 썩지 않게 되고 죽지 않게 되는 놀라운 부활의 역사가 나타나서 사망을 이기는 기적이 체험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죽으면 육체를 벗어버린 영혼은 낙원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육체를 벗어버린 영혼은 낙원에 들어가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부활의 날까지 낙원에서 기다려요. 그러나 때가 와서 부활의 때가 오면 낙원에 있는 영들이 모두다 예수님과 함께 내려와서 부활의 몸을 새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 영원한 곳에 다시 옮겨가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이 육체가 죽으면 낙원으로 갔다가 낙원에 있다가 다시 예수 재림하시는 날 같이 와서 부활의 몸을 얻어서 이제는 주와 함께 영원히 있을 곳으로 또 가는 것입니다. 그런 영광스런 소망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시겠다고 말한지가 2천년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우리가 사는 것은 주님이 천국 백성을 기르는 밭입니다. 우리가 텃밭에 여러 가지 씨앗을 심어서 채소를 기르고 과일을 기르지 않습니까? 텃밭에 씨를 뿌리는 것은 채소와 과일을 거두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 이 지구는 하나님의 천국 백성을 만드는 텃밭인 것입니다. 이 지구 자체에 우리가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서 사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천국 백성으로 만들기 위한 씨앗을 심은 것입니다. 이것이 잘 자라서 올바르게 익으면 천국 백성이 되고 올바르게 익지 못하면 썩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를 받아들이면 올바르게 익게 되고 예수를 거역하면 썩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은 영원히 살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천국 백성을 만들어 내는 텃밭이므로 우리가 텃밭에 사는 동안 여기에서 잘 살려고만 애를 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무리 잘 살아도 이 텃밭은 우리가 떠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돈도 부귀도 영화도 공명도 청춘도 쾌락도 가져가지 못합니다. 또 가져갈 필요가 없습니다. 하늘나라는 너무 좋기 때문에 이런 것을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텃밭에 있을 동안에 우리가 있는 목적이 주님이 천국 백성을 만드는 것이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착실하게 자라는 것입니다. 똑같은 과일이라도 적게 달리는 과일이 있고 크게 달리는 과일이 있고 잘 익은 과일이 있고 잘 못 익은 과일이 있습니다. 여러분 잘 익은 과일일수록 값이 많이 나가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장차 부활해서 하나님께 더 귀히 여기고 값이 많이 나가려면 잘 익은 과일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잘 예배드리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며 말씀을 따라 순종해서 잘 익은 영혼이 되면 부활의 날에 큰 영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5장 50절에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혈과 육을 가지고서 나는 거부가 되었습니다. 나는 박사입니다. 나는 교수입니다. 나는 대통령입니다. 나는 장관이었습니다. 그런 것 하나님께서는 아무 관심 없습니다. 대통령 했으면 네가 했지 내가 무슨 상관있느냐. 혈과 육을 가지고 한 것은 아무 성과 없습니다. 혈과 육은 하늘나라를 상속으로 받지 못합니다. 오직 성령으로 나서 성령으로 역사한 것만 상속으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할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썩는 것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썩지 아니할 영원한 양식을 위해서 일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나팔 소리와 함께 부활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1절로 54절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마지막 나팔이라고 했습니다. 나팔을 몇 번 부는지 모르겠어요. 두 번 부는지 세 번 부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세 번 부를 것 같아요. 한번 나팔을 부르면 무덤이 갈라지고 두 번 나팔을 불면 시체들이 일어나고 세 번 나팔을 불면 살아서 변화 되어 버린다. 먼저 간 사람은 한번 나팔을 불 때 이 세상에 내려와서 두 번 나팔을 불면 새로운 몸을 얻어 세 번 나팔을 불 때 변화 되어서 하늘에 올라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굉장한 희망이 우리 앞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한 것은 우리에게 영원한 부활을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 과정으로써 영이 먼저 부활해서 중생을 하게 되고 육체가 부활의 생명을 얻어서 이 어려운 세상에 승리하게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마지막에는 우리 영과 육이 함께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고 그리스도의 형상대로 부활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다 예수님이 33세에 부활하셨으므로 우리의 모습이 33세로 변할 것입니다. 청춘으로 변해요. 저도 거울을 들여다보면 탄식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옛날에는 안 이렇고 제가 미남이었는데 요사이는 도저히 바라볼 수가 없어요. 그러나 내 속으로 현재는 그래도 장차는 33살 예수님의 모습으로 닮아갈 것이다. 희망이 있고 꿈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늙은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다 청춘으로 젊어질 것을 알고 희망과 꿈을 갖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나팔을 불면 죽은 자들이 먼저 부활하는 것입니다. 살아남은 자들보다 먼저 죽은 자들이 부활하고 그 부활의 모습은 썩지 아니하고 죽지 아니하는 모습으로 변화되고 그 다음에는 부활한 죽은 사람들과 함께 공중으로 올라가서 주님을 만나게 되고 7년 혼인잔치를 공중에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데살로니가전서 5장 1절로 3절에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언제 올지 알지 못해요. 오늘 제가 이 설교 하는데 오늘 저녁에 주님이 오실 런지 몰라요. 내일 오실 런지 모레 오실 런지 몰라요. 그날과 그 시는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준비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깨어서 기도하고 준비하고 있어야지 주님 오실 때쯤 되면 내가 정신 차리겠다. 언제가 그쯤인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겠다고 하신지가 벌써 2천년이 되었으므로 내가 보기에는 정말 때가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도 나팔 소리가 나면 우리는 주님에게로 나아갈 줄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서 기도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6절로 11절 우리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정말입니다. 서로 권면하고 덕을 세우고 서로 깨워줘야 되는 것입니다. 졸음이 와서 내가 자꾸 졸 때 옆에서 자꾸 찔러서 깨우면 졸음이 떠나가는 것처럼 우리가 졸음이 온 사람 그대로 내버려 놓으면 그는 자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서로 격려하고 서로 깨우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성경 읽고 열심히 전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7절로 58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우리가 주님 위해서 희생하고 수고하는 것이 결코 헛되지 않은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손양원 목사님은 성자라고 우리가 말합니다. 두 아들을 공산반도에게 이어서 다 죽임을 당해서 한꺼번에 두 아들 장례식을 지내면서도 슬퍼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10가지 조건을 가지고서 설교를 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을 죽인 공산당 청년을 사형선고를 받아서 끌려가는데 따라가서 사정을 해서 자기 양아들로 삼았었습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어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자기 아들 둘을 죽인 그 공산당 청년이 사형장에 끌려가는 것을 가서 막아서 자기가 아들로 삼아서 집에 같이 살았습니다. 목사님은 어디서나 왜 사람이 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지으신 복음 성가 중에“주님 고대가”라는 그 가사가 참으로 은혜로워서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읽어 드리려고 가지고 왔습니다.
주님 고대가로써

<주님 고대가>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고적하고 쓸쓸한 빈 들판에서 희미한 등불만 밝히어 놓고
오실 줄만 고대하고 기다리오니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머리 들고 멀리멀리 바라보는 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내 주님 자비한 손을 붙잡고 면류관 벗어 들고 찬송 부르면
주님 계신 그 곳에 가고 싶어요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신부 되신 교회가 흰옷을 입고 기름 준비 다해 놓고 기다리오니
도적같이 오시마고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천 년을 하루같이 기다린 주님 내 영혼 당하는 것 볼 수 없어서
이 시간도 기다리고 계신 내 주님, 오 주여, 이 시간에 오시옵소서

너무나 감격적인 시를 남겼습니다. 우리 1절 여러분 아시죠? 다 한번 불러 보십시다.

<주님 고대가>
1.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2. 고적하고 쓸쓸한 빈 들판에서 희미한 등불만 밝히어 놓고
오실 줄만 고대하고 기다리오니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3.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머리 들고 멀리멀리 바라보는 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4. 내 주님 자비한 손을 붙잡고 면류관 벗어 들고 찬송 부르면
주님 계신 그 곳에 가고 싶어요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5. 신부 되신 교회가 흰옷을 입고 기름 준비 다해 놓고 기다리오니
도적같이 오시마고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6. 천 년을 하루같이 기다린 주님 내 영혼 당하는 것 볼 수 없어서
이 시간도 기다리고 계신 내 주님, 오 주여, 이 시간에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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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72 사사기 변질 되지 말아야할 부모와 자식관계 삿14:5-9  김필곤 목사  2010-02-06 3109
2871 에배소서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 교회 공동체 엡2:19-22  김필곤 목사  2010-02-06 2570
2870 창세기 분노의 노예에서 자유로운 길 창4:1-15  김필곤 목사  2010-02-06 2470
2869 마태복음 탐욕으로부터 해방되는 길 마6:19-34  김필곤 목사  2010-02-06 2230
2868 고린도후 인생 3대 낙심에서 해방되는 길 고후4:16-18  김필곤 목사  2010-02-06 2950
2867 요한복음 가장 귀중한 만남 요1:35-42  김필곤 목사  2010-02-06 3044
2866 요한복음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요20:11-18  김필곤 목사  2010-02-06 2513
2865 고린도전 십자가의 능력/ 고전1:18-25  김필곤 목사  2010-02-06 4546
2864 마가복음 과정에서 포기하지 않는 신앙 막4:35-41  김필곤 목사  2010-02-06 2682
2863 예레애가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다 애3:19-33  김필곤 목사  2010-02-06 3737
2862 고린도후 믿음직스러운 자(청지기 같은) 고후8:16-24  최장환 목사  2010-02-06 1729
2861 사도행전 좋은 두려움과 나쁜 두려움 행23:17-35  이한규 목사  2010-02-04 2973
2860 사도행전 칭찬과 격려의 힘 행23:11-16  이한규 목사  2010-02-04 3831
2859 사도행전 담대함의 3대 원천 행23:1-10  이한규 목사  2010-02-04 2657
2858 사무엘상 사랑의 3대 정의 삼상23:13-17  이한규 목사  2010-02-04 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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