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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계, 새로운 관계

마태복음 이재정............... 조회 수 1800 추천 수 0 2008.06.02 19:5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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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11:2-11 
설교자 : 이재정 목사 
참고 : 새길교회 
신영복씨의 글씨를 보면 새로운 느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의 글씨는 마치 살아서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여 생명체처럼 우리에게 느낌을 줍니다. 그런데 서예의 특징은 지우거나 고쳐서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수로 굵어진 획을 다시 쓸 수는 없고 다음 글씨에서 바로 잡아야 합니다. 비뚤어진 글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우고 다시 쓸 수 없으니 다음 글씨로 균형을 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한자 한자를 써서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모자란 것을 채우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나가는 것이 서예입니다. 그리고 한 행을 완성하고 다음 행으로 역시 행과 행의 균형을 잡아 나가다가 마지막에 병서를 하고 붉은 낙관을 찍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전체의 조화를 이루어 내면 한 폭의 아름다운 글이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서예의 경지는 한 글자 한글자의 우수하고 절도 있는 모습에서가 아니라 전체를 이루고 있는 한 자 한 자가 어떻게 서로 기대며, 바로 잡으며 마침내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눈여겨볼 것은 글씨들이 외형적으로만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에 따라 내면적으로 이어져서 주변의 여백과 함께 새로운 세계를 흑백의 조화로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세계관은 모든 사람이 서로 서로에게 독립적이며 다만 外的으로만 연결되어 있다는 개인주의적 이해에 기초를 두어 왔습니다. 그 배경에는 뉴턴 식의 기계론적, 계급적, 독립적 세계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양자론(quantum theory)이 나오면서 이 세계관이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부분과 전체는 서로 내적인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여기에서 사람들은 전체가 부분의 성격을 만드는데 크게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분들이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각 부분의 특징도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마치 세계는 상호 연관된 사건으로 만들어지는 역동적인 거대한 거미집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세계는 완전성(wholeness)을 추구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근대의 과정 신학자들, 예를 들어 John Cobb이나 David Griffin이나 또는 Norman Pittenger 같은 학자들은 우리들의 세계가 서로 다르다 하더라도 결코 나뉘어질 수 없다는 것과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은 서로에게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우리에게 이 진리를 다시 일깨워 줍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이 말은 언제나 우리의 가슴을 울립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살아온 역사는 이원론으로 세계를 나누어 왔습니다. 그런데 그 이원론은 단순한 나눔이나 구별이 아니라, 어느 한쪽을 깎아 내리거나 차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남녀의 이원론이 그렇고 흑백의 이원론이 그러했습니다. 권력이나 지배권도 이런 의미에서 사람을 찍어누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양자이론은 그러한 이원론을 배격하면서 우리가 추구해가야 할 온전성(wholeness)을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지향하는 세계관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사야의 선포를 보십시오. 이사야 35장에서 그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메마른 땅과 사막아 기뻐하여라. 황무지야 내 기쁨을 꽃피워라. . . 기뻐 뛰며 환성을 올려라." 그런데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일대 변혁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어둠과 억압과 좌절의 상황에서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사람들의 모습에서가 아니라, 그 어둠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냄으로서 세상의 완전성을 이뤄야 한다는 역사적 반전을 이사야는 그렇게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혀있는 세례요한에게 전하라고 명령하신 예수의 말씀은 더욱 분명하게 새 역사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걷고,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심지어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세계의 변화는 극단적인 혁명적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 이루어진 예수의 선포는 가히 충격적입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 그 길을 요한은 앞서 우리에게 닦아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요한에 대한 예수의 선포를 통하여 오늘 우리가 기다리는 세계를 보도록 합시다.

제8차 WCC총회가 하라레에서 오늘 폐막됩니다. WCC의 총무인 Raiser박사는 총회가 열리기 전 새로운 에큐메니칼 관계를 Network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WCC가 아직도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는 로마 카톨릭교회나 수많은 오순절교회들과의 새로운 관계는 구조(Structure)나 조직(Institution)으로는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Network 즉 실천적 공동 연대를 통한 역할을 제안하려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는 어떻게 서로 보완하고 협력하는 공동의 관계를 이루어내는 것이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연대란 이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처절한 과제 즉 외채의 문제부터 가난의 문제, 전쟁과 기근을 해결하고 인간 존엄성을 이루어 가는 필연적인 길이며 방법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20세기는 언제나 '식탁의 논리'와 '힘의 논리'였습니다. 반 에덴의 이란 동화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길을 지나가다가 길옆에 자라고 있는 버섯을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지팡이로 그 버섯을 가리키며, "저것은 독버섯이다."라고 아들에게 말해줍니다. 독버섯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옆에 있는 다른 버섯에게 물어봅니다. "내가 독버섯이냐?" 친구가 말합니다. "아니야 너는 독버섯이 아니야, 내게는 좋은 친구야. 그런 말은 다 사람들이 하는 말이야." 사람의 판단은 그것이 먹을 수 있느냐, 먹을 수 없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것이 '식탁논리'이며 '힘의 논리'입니다. 독버섯은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서 독을 가지고 있을 뿐 남을 해치는 독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먹느냐, 먹히느냐의 존재론만 말합니다. 여기에 어떻게 함께 더불어 살아가느냐, 즉 먹힐 수 있는 것이 먹히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것은 결국 먹을 수 있는 힘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강한 것과 약한 것, 남는 것과 부족한 것, 그리고 많은 것과 적은 것의 조화가 곧 Network의 지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새로운 세계는 조화의 세계입니다. 협력과 나눔의 세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우리에게 주는 새로운 길입니다. 온전성을 이루기 위한 길,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전체가 부분을 감싸가며 내적으로 연결되어 함께 살아가는 세계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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