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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귀한 세가지 금은 황금, 소금, 지금 이라고 한다. 나도 좋아하는 세가지 금이 있다. 현금, 지금, 입금 이다 ㅋㅋㅋ(햇볕같은이야기 사역 후원 클릭!)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
리우리 하우엘이라는 학자는 언어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말의 언어'이고 또 하나는 '관계성의 언어'라고 합니다. '관계성의 언어'란 말하지 않고 느낌이나 그 외 다른 수단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언어입니다. 50년만에 만난 이산 가족에게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껴안고 눈물 흘리는 일에 수만 마디의 언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엄밀히 이야기하면 말의 언어보다 관계성의 언어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말의 언어보다 관계성의 언어를 살피십니다. 즉 우리의 기도소리보다 그 기도가 "바른 기도인가?"와 "바른 자의 기도인가?"를 먼저 살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 요구를 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이 소란한 세대에서 귀에 거슬리는 수많은 소리를 들어야 함으로 우리의 귀는 얼마나 피곤하게 되었습니까? 이럴 때일수록 "말씀하옵소서 당신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말했던 소년 사무엘의 영을 닮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의 행위를 살피십니다. 행위는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구원의 결과는 되어야 합니다. 예배는 예배대로 드리고 생활을 생활대로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은 노엽게 생각하십니다. 예배는 생활의 시작이요 마지막이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정신으로 생활해야 하고, 생활하는 도중 생긴 문제를 예배로서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렇게나 예배를 드려서도 안되고, 아무렇게나 생활을 해서도 안됩니다.
예배는 행동적인 것으로서 윤리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감상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하는 예식이 예배가 아닙니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뜻을 내 생활 속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예배에는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행위 자체가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는 교회고 사회는 사회다"라는 논리에서 예배생활과 사회생활을 분리시켜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삶은 내적 평안을 해칩니다. 내적 평안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 중의 하나는 우리의 생활을 두 영역, 즉 신성한 영역과 세속적 영역으로 나누는 습관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서로 분리되고 상반되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결국 우리의 내적 삶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생활과 사회생활은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어야 합니다. 삶으로 드리는 예배! 이것인 참된 예배입니다.
성경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합니다(삼상 15:22). 순종이 무엇입니까? 순종은 곧 실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자유는 무질서도 아니고, 무책임도 아니고, 방종도 아니고, 그리고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신학자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 완전한 자유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쁘게 실천하는 삶에 진정한 자유가 있다는 말입니다. 지상천국도 그러한 삶에서 비롯됩니다. 지상천국이란 우리가 신의 뜻을 순종한다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을 때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오늘날 훌륭한 기관들이 성경말씀을 널리 유포하여 많은 사람들이 '옳은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교회사에서 최고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영적 예배가 이와 같이 썰물처럼 쇠퇴한 적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진정한 영적 예배를 회복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어떻게 회복할 수 있습니까? 예배와 삶을 일치시키려는 우리의 노력이 중요합니다.
매일 벅찬 감격과 감동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이 가진 것'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 자신과 그분의 뜻'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 이외의 어떤 것을 추구하게 하는 것을 미워해 보십시오. 그래서 오직 하나님 한 분과 그분의 뜻 이외에는 아무 것도 우리의 지식과 뜻에 작용하지 못하게 한 후에, 세상에 나가 그 뜻을 실천해보십시오. 그러한 삶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영적 예배일 것입니다.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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