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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마루(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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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하셨습니까?

가족글방 나비............... 조회 수 1805 추천 수 0 2009.02.11 17:5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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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춥기만 하던 겨울도 이제 물러나는 모양입니다. 날씨가 한결 풀리고 있습니다. 그동안 평안하십니까?

가슴 아픈 일이 있어 목사님과 나누고 싶습니다. 

북한에 살던 형제인데 할아버지 대부터 믿음으로 산 신앙의 가정 이야기입니다. 김ㅅ철이라는 올해 나이로 48세 된 한 가장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지난 11월 30일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19OO년 11월 생이니까 올해 나이 마흔 여덟입니다. 뜻밖의 소식을 전해주는 일꾼의 말이 거짓말이기를 바랐지만 그의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김 선생은 그 어두운 사회의 희망이었습니다. 그가 존재하는 한 그 암흑의 사회는 절망이 아니라고 우리는 믿었습니다. 그 유약해 보이는 선한 눈매와 쇠골이 드러난 가냘픈 가슴과 마를 대로 마른 어깻죽지에도 불구하고 모진 고문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강인한 믿음이 그에게 있었고 그것은 성령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 있는 한 그 땅은 희망의 땅이라고 우리는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희망의 불꽃이 사그라지고 말았습니다. 믿음을 죄로 여기는 사회에서 믿음을 간직하고 산 것이 죄가 되어 5년 형을 판결 받고 복역하던 감옥에서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진 육신을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한 채 그만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아! 하나님! 어찌 그를 그리도 급하게 데려가셔야 했습니까? 왜 그에게 자유와 희망의 세상을 조금이라도 맛보여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주님의 마음을 품고 그 땅 백성을 섬기겠다던 그의 선한 의지를 왜 장려하지 않으셨습니까? 깊고 어둔 감옥 생활을 마치고 착한 양심과 바른 믿음, 그리고 꿋꿋한 인내를 통하여 복음의 열매를 맺게 하실 수도 있었을텐데 왜 그런 은총의 기회를 주시지 않으신 것입니까? 그 어둠의 모리배들이 얼마나 복음과 주님을 무시할지 주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저 어둠의 세상이 깜짝 놀라도록 그를 세우셔서 모세처럼, 바울처럼 쓰실 수도 있지 않았습니까?

그의 부모는 두 분 모두 모태신앙으로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일찍이 믿음을 받아들인 할아버지 김OO(19OO~19OO)은 쏘련에 거주하다 중국 훈춘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아버지 김OO(1927~1990)은 믿음의 가정에서 자란 김OO(19OO~20OO)을 만나 믿음의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던 중 중국이 문화혁명을 준비하던 시기에 김 선생의 부모는 북한 이주를 결심하였습니다. 믿음의 부부가 북한에 정착한 것은 당시 중국이 매우 강경한 기독교 박해가 예고된 시점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북한에서의 신앙생활이 용이하였던 것은 아닙니다. 믿음을 감추고 살지 않으면 안 되는 혹독한 시련이 이 믿음의 가정에 찾아왔고 숨죽여가며 하나님을 찾는 부모의 모습을 김 선생과 그 형제들은 어렸을 때부터 보며 자랐습니다. 아쉽게도 믿음을 죄악시하는 거센 박해 때문에 부모의 독실한 믿음이 자녀들의 고백적인 믿음에 이르지 못하였지만 부모의 찬송소리와 기도하는 모습은 훗날 김 선생과 그 형제들의 가슴에 강한 향수로 작용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 현실 속에서도 어머니는 눈을 감기 전에 김 선생에게 ‘평화의 시대가 이 땅에 올 때에 꼭 복음의 일꾼이 되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기형적 세계관과 왜곡된 진리를 강요받으며 자란 김 선생은 청소년기를 지나며 부모의 믿음생활에 대하여 못내 부정적인 생각을 하였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보란 듯이  노동당에 입당하였습니다. 그리고 OO지배인이 되어 잘나가는 청년시절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1990년 중반 계속되는 흉년으로 인한 ‘고난의 행군’은 조선노동당 OO지배인을 비켜가지는 않았습니다. 300 만 명이나 되는 백성이 굶주림으로 죽어간 이 ‘고난의 행군기’는 그토록 추종하던 김일성 중심 세계관이 거짓되고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 행복한 백성’이라고 자화자찬하던 미사려구가 허구였던 것입니다.
김 선생은 가장 극심한 고난의 행군기인 1998년에 탈북을 결심하고 도강하였습니다. 다행히 중국에 있는 친척들이 그를 반가이 맞아 주었고, 그들은 김 선생에게 잊혀진 복음의 기억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친척들로부터 복음을 제시받은 그는 마치 물을 빨아들이는 스펀지처럼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성경을 암송하고 기도생활을 시작하였고, 성경공부를 착실히 하였습니다. 그리고 2000년에 세례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고향에 돌아간 후에도 성경 구절을 늘 암송하였으며, 암송성구 쪽지를 창고의 땅을 파고 묻어두며 신앙생활을 유지하였습니다. 평화와 희망의 새날이 찾아왔을 때 어머니의 유언대로 목회자의 길을 걷기 위하여 김 선생은 기도생활과 성경공부를 지속적으로 하여왔습니다.  
그러던 중 2002년, 김 선생은 당시에 그 사회에 흔한 질병 가운데 하나인 결핵으로 병원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밤마다 집 뒤의 나무기둥을 부여잡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갈구하였습니다. 다행히 건강이 호전되어 하나님의 은총인 줄 알아 김 선생은 더욱 분발하여 신앙생활을 하며 친지들과 친구들, 이웃들을 찾아다니며 은밀하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는 새날이 올 것이라는 확신 가운데 있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새날이 도래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새날을 맞기 위하여 분주하였습니다. 가슴 아픈 사연으로 슬퍼하는 이들을 찾아 위로하였고, 주님의 사랑으로 비극의 땅, 슬픔의 시대를 살고 있는 이들에게 희망의 복음을 소개하였습니다.

특히 2003년에 OO공장을 차릴 때에 김 선생은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이 희망의 OO공장은 중국에 있는 친척들이 종자돈을 마련하여 중국에서 기계를 구입하여 현지에 설치하였습니다. 당시에 우리는 LACEM을 통하여 북한 전역에 젖염소를 보내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OO공장을 시범적으로 운영해보고 그 효과를 따라서 더 확장할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소규모의 OO공장을 각 지역에 하나씩 하나씩 세워나가므로 북한의 극심한 식량난 극복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과 현지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로 하여금 선한 영향력이 증대될 수 있다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다행하게도 이 공장은 그 자신들뿐만 아니라 이웃들에게도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김 선생은 공장의 일꾼들에게 복음을 제시하였고 10여명의 전 직원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극심한 식량난 속에 OO공장은 화목한 분위기 가운데 운영이 순조로웠습니다. 그것은 복음에 의한 사랑과 김 선생의 화합 노력이 있었던 때문입니다.
그러던 2005년 9월, 갑자기 들이닥친 당국에 OO공장은 발칵 뒤집혀지고 말았습니다. 평소에 화기애애한 OO공장의 분위기를 이상히 여기던 보위부가 급습한 것입니다. 성경 구절을 적은 종이 조각이 발견되었고, OO공장 내부에 흐르는 따스하고 화합하는 분위기의 중심이 기독교 신앙이었다는 것도 밝혀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아직 믿음의 첫걸음마 단계에 있던 OO공장 직원들은 ‘곤란한 시기라 궁여지책으로 예수를 믿었다’며 발뺌을 하였습니다. 다만 김 선생 형제는 믿음을 배신할 수 없었습니다. 고문과 회유가 있었지만 두 형제는 꿋꿋이 십자가의 길을 걷기로 굳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당국은 믿음을 지키기로 결심한 이들 형제에게 각각 5년 판결을 내렸습니다. 두 형제는 OO북도 OO시 OO리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감옥의 열악한 환경과 모자라는 영양공급은 지병인 결핵을 재발시켰습니다. 그런 속에서도 김 선생 형제는 모범수로 인정받아 2009년에 출소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2008년 5월이던가요. 중국의 현지 연락소에 한 북한 여성으로부터 다급한 김 선생의 메시지가 날아들었습니다. 그 여성은 김 선생 동네 분이었는데 감옥으로 면회를 갔다가 ‘중국에 와 있는 라 선생에게 자신의 처지를 알리면 그분이 꼭 도움을 줄 것이다’는 말을 따라 다급하게 연락을 하여 온 것입니다. 물론 저희는 그 이전부터 김 선생 형제의 남은 가족들을 위하여 때마다 구호금을 전달하여왔고, <모종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아우되는 KSG의 두 자녀의 탈출을 도모하려고 까지 하였습니다만 아마 이때가 김 선생으로서는 매우 극한 고통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결국 김 선생은 2008년 11월 30일, 지병인 폐결핵으로 고생하며 평화와 자유의 새날을 기도하다가 캄캄하고 추운 감옥 안에서 조용히 주님의 품에 안겨 눈을 감았습니다. 그는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갔습니다. 그리고 고난의 길 끝에 계시는 영광의 주님을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나사로처럼 김 선생은 주님의 품에서 평안을 누리며 안식하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는 내 동포여, 예수님만이 희망입니다. 끝까지 인내하십시오. 십자가의 길을 걸으십시오.’
‘함께 이루지 못한 이 땅의 복음화를 위하여 남겨진 일을 부탁합니다.’

이제 김 선생은 우리 곁에 없지만 그의 가난한 가족은 여전히 남아 있고(아들 OO이는 평양OOO대학에 합격하였지만 아버지의 일로 입학이 불투명한 상태입니다. 아내와 열다섯 살 된 딸 OO이는 폐결핵으로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그의 아우 김OO 역시 감옥에 있고, 두 자녀 OO이와 OO는 학교조차 다니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는 또 다른 믿음의 지체 여덟 명이 그 긴 어둠 속에서도 희망의 새날을 기다리며 주님의 위로하심을 애타게 바라고 있습니다. 그는 갔지만 그의 일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가 남겨 놓은 일을 주님의 남은 고난을 채워가는 마음으로 감당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이것이 고통과 절망의 세상을 믿음과 희망으로 살다가 우리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나 주님의 품에 안긴 김 선생의 뜻이자 곧 주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남은 자의 몫이며 그동안 북방사역에 힘을 기울여온 우리의 의지라 확신하며 다음의 사항을 실천할 것입니다.    

1. KSC의 순교적 죽음을 기억하며 그 의미를 한국교회에 알린다. 
2. <KSC을 추모하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다짐의 예배를 드린다.
3. KSC의 가족들을 돕는 일을 지속적으로 시행한다.
4. 아직 감옥에 있는 KSG과 믿음의 동료 8명을 위하여 기도하며 북한 복음화를 위하여 더욱 매진한다.

주후 2009년 1월 31일 나팔소리

이미 말씀 바 드린 바와 같이 김○○(KSC) 선생의 부르심에 대하여 그 의미를 되새겨보는 시간을 갖기로 하였습니다. 그는 북방 사역에 미미하게나마 쓰임 받는 저희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어왔던 형제였습니다. 뿌리 깊은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 믿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고백하지도 못하는 세상에서 고통스러워하였지만 저희는 그를 보면서 그 땅의 희망을 꿈꾸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절망의 땅에서 마지막까지 믿음을 신실하게 지키며 주님의 백성으로 살다가 ○○북도 ○○시 ○○○감옥의 차가운 감방에서 조용히 주님의 부름을 받아 눈을 감았습니다.
이에 저희는 고 김○○ 선생의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며 민족의 화해를 위한 복음의 기능과 북방사역에 부름받아 사역하는 종들로서 헌신과 다짐의 시간을 갖기로 다음과 같이 마음을 모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다 먼저 부르심을 받아 주님 품에 안긴 고 김 선생을 추억하며 남은 자의 사명을 다짐하는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셔도 같은 날(3월 1일) 예배를 통하여 앞에 말씀드린 내용을 주변에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아래

1. 주 제 :  하나님의 영광, 순종하는 일꾼(주님의 남은 고난을 채우다 부름받은 고KSC 추모하며)
2. 일 시 : 주후 2009년 3월 1일(주일) 오후 3시
3. 메시지 : 김요셉 목사(한장연 대표회장)

목사님~ 건강을 기원드리며 이만 맺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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