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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빛 그리고 하나님{넷}

칼럼수필 신영록............... 조회 수 1475 추천 수 0 2008.05.18 01:4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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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빛 그리고 하나님(넷)
:조용기 목사의 바라봄의 법칙과 양자론

6. 조용기 목사의 바라봄의 법칙과 베드로의 바라봄
6-1.진동하는 세계와 믿음

*** 참고문헌: 자연 과학의 세계; 김희준 (궁리)
***................. 시간의 역사; 스티븐 호킹(삼성이데아)
***................. 생명이란 무엇인가; 슈뢰딩거(한울)
***................. 끝나지 않은 길;M. 스콧 펙(소나무)

슈뢰딩거는 그의 ‘생명이란 무엇인가(한울)’에서 “우리 몸이라는 체계와 외부 물체 사이의 물리적 상호작용은 대개 스스로 어느 정도의
물리적 질서 도를 가지고 있는데, 다시 말하자면 어느 정도의 정확성을 가지고 엄격한 물리법칙을 따르고 있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우리 몸의 ‘물리적 상호작용’의 성격에 관한 언급이다.

글의 앞부분에서도 인용한 “운동하지 않는 물체의 정지질량(Rest Mass)까지도 에너지의 한 형태”라는 아인슈타인의 주장에 입각한다면
우리의 몸은 운동하는 물체로서 그것도 살아있는 생명이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거대한 에너지 저장고(실제로 우리 몸은 원자로 구성
되어 있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거대한 에너지 저장고가 위의 슈뢰딩거의 주장과 같이 어느 정도 정확성을 가지고 엄격한 물리법칙에 따라 외부 물체와
상호작용한다면, 막스 플랑크의 제2가설에 따른 입자간의 진동수에 비례하여 양자에너지를 교환하듯이, 사람과 사람 간에 사람과
생물 간에 심지어 운동하지 않는 정지 질량(Rest Mass:단순한 무생물)과도 원칙적으로 양자화 된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교통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사실 입자간의 물리적 상호작용은 워낙 미시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그런 미시세계의 물리적 현상들이 거시세계의 물리적 현상을
유지시켜 주므로 거시세계의 물질 간 양자에너지의 교통은 불가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인간과 인간 간의 상호관계가,
미시세계의 입자운동의 모형 같이 보이기는 하나,......

미시세계처럼 그렇게 강력하게 일어난다면 우리 인간은 단순한 물리적 성격을 띤 기계적 개체에 불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이러한 물질세계와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자유의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역시 슈뢰딩거의 견해를 빌리면 “열역학적 평형(Entropy:최대 무질서 상태)상태, 즉 죽음으로의 이행을 지연시키려는 유기체의
노력을 음의 엔트로피(Negative Entropy)”라고 정의한다면, “살아 있는 유기체는 먹고, 마시고, 숨쉬고, 식물의 경우는 동화 작용을 하며
계속해서 환경으로부터 음의 엔트로피를 얻어야 죽음에서 멀리 벗어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 유기체는 살아있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물리적 음의 엔트로피의 추구는, 생명체에서의 마음의 활동은 엄청나게 복잡하므로, 마음의 활동(음식 먹는 것을 거부할 수 있다)들
가운데 단지 하나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슈뢰딩거의 결론은 “자기성찰에 의해 보장되는 자유의지에 모순“될 수 있다는
견해를 무시하고 내린 결론이지만, 자유의지에 모순된다는 견해를 존중할 경우의 자기성찰에 의한 자유의지가 지향하는,

또 하나의 마음의 활동을 영적 활동이라고 정의한다면, 이러한 영적활동도 마찬가지로 음의 엔트로피(Negative Entropy)를 지향할 것이다.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죽으나 사나 부지런히 따라다니며 열심히 해야 한다.

죄와 사망의 법칙(롬7:24.25)인 엔트로피(Entropy)의 법칙을 되도록이면 멀리 벗어 나고자하는 인간의 의지는 더 높은
영적능력을 지향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영적의지의 지향을 흥미롭게 도식화한 모형을 M.스콧 펙 박사(심리학자, 정신과 의사)가 그의 “끝나지 않은 길; 고통에서
자기완성으로(소나무)”에서 아래 그림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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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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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서 아래 화살표 와 삼각형이 겹쳐있다고 간주할 때(이 사이트에 그림이 올라가지를 않아서 약식으로 그렸다)삼각형의 정점을
“영적능력”,삼각형의 바닥을 “미개한 성” 그 중간인 삼각형 내부를 “인간성” 삼각형의 경사면을 따라 아래로 향한 화살표 두 개를
“엔트로피의 힘”이라하자.(아래 화살표의 왼쪽에 있는 점세개는 없다고 간주한다.)--->이글을 보시는 분은 설명대로 그려서 보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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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각각의 개인은 영적으로 성장하고자 하는 충동을 가지며, 이 충동으로 스스로를 개선 하려는 의지를 키워나가려는 노력(단련)을
할 때는 혼자서 내부의 저항(관성이라는 자연적 저항; 엔트로피의 힘, 이것은 영적으로 ‘게으름’이라고 그는 평가한다)과 싸워야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 이니라[히6:12]”

그런데 도식에서처럼 낮은 인간성(‘미개한 성’)이 높은 영적능력에 도달하도록 하는 이 힘을 그는 ‘사랑’ 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리고 그는 ‘사랑’을 정의하기를 “우리자신 또는 다른 사람의 영적인 성장을 돕기 위해 자아를 확장하려는 의지”라고 하였다.

이러한“자아를 확장하려는 의지”를 성경적으로 평가해 볼 때 그것은 자기희생과 본을 보이려는 정신(십자가 희생의 정신)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4,1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M.스콧 펙 박사의 “자아를 확장하려는 의지”는 위의 성경 말씀에서 “한 알의 밀이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으려는 의지”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의지를 구태여 위의 성경 말씀에다 적용시키는 이유는 어디에도 이것보다 더 큰 사랑의 정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또한“인간의 의식 밖에 존재하면서 인간의 영적 성장을 돕는 이 강력한 힘”은 어디서 오는가하고 묻고 있다.
그는 이것을 ‘은총’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은총’의 목표는 무엇인가하고 묻고 있다.

위의 그림에서
영적능력------->‘하나님’(피라미드의 정점)
인간성------->‘사랑’(피리미드의 가운데)
미개한 성------->‘자아를 확장하려는 인간의지’(피라미드의 바닥)

이와 같이 바꾸어 볼 경우 “자아를 확장하려는 인간의지”가 M.스콧 펙 박사의 말과 같이 “엔트로피의 힘”이라는 자연법칙에 도전하는
기적적인 힘인 ‘사랑의 힘’에 의지하여, 믿음으로,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는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고 목표이며,
이것이 하나님이 알파이며 오메가, 즉 시작과 끝이라고 할 때의 의미라고 한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계21:6]”

물론 그의 말에 따르면,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 가기위해서는“사랑의 힘에 의지하여 꾸준한 자기개선과 영적성장”을 도모하여야하며,
이러한 수고를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자기 십자가”가 될 것이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눅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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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언급한 것같이 슈뢰딩거의“우리 몸이라는 체계와 외부 물체 사이의 물리적 상호작용”도(----->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드라도) M.스콧 펙 박사의 “자아를 확장하려는 의지”와 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자아를 확장하려는 의지”가 슈뢰딩거의 “물리적 상호작용”으로 작용하는 성경의 역사를 보자.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행3:6]”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행3:7,8]”
------->물리적 상호작용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원리이다.

위의 성경 말씀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문을 올라 가다가 만난,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치료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베드로의 “자아를 확장하려는 의지”는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를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치료하고 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요14:13]”

가슴 아픈 자기좌절{마26:74]도 있었지만,....... 아무리 예수님께서 인정하는, “사랑하는 제자”[요21:15~17](이러한 의미에서 저의
집사람은 바울보다 베드로를 더 좋아한다)라서 믿음이 유별나다 하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슈뢰딩거의 ‘물리적 상호작용’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셨다고 하드라도, 그 구하는 것을 믿음안에서‘예수님의 이름’으로 밖에 구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세상은 진동하는 세계[히12:27]이므로 “치료의 광선[말4:2]”을 교환(기호화된 양자 에너지의 교환)하는 물리적 상호작용은,
앞에서도 얘기 했지만, 중개자(광자=빛)가 없으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중개자의 역할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요1:9,요12:46] 밖에 없으시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의인이 무엇인가’를 정하신 것
[롬1:17,히10:38,창15:6]같이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14:14]”고 말씀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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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상은 어떠한 세상인가???
물리학자들에 의하면 이세상은 빛의 속도 이외에는 어느 하나도 결정할 수없는 ‘하이젠 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지배하는 예측불가능 한 세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진동하는 세계’에 있어서 ‘죄와 사망의 법(롬7:18~25)’이라는 ‘엔트로피(Entropy) 증가’는 필연인 것 같다.
육신의 물리적 성질을 가진 우리 인간은 이러한 사망의 법에서 벗어날 수 없다.

더욱이 이 마지막 때(딤후3:1,2)에 공중권세 잡은 자(엡2:2)가 죽이고 멸망시키려고(요10; 10)혈안이 되어있다.
바울은 히브리서에서 우리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하고, 이것 없이는 결코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고 경고하고 있다.

또한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 예측불가능 한 “진동하는 세상”을 제거하고,
우리에게 진동하지 않는 나라[단2:44]를 주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하고 계신다.

“이 또 한번이라 하심은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드신 것들이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히12:27~29]”

“The words "once more" indicate the removing of what can be shaken--that is, created things--so that what cannot be shaken may remain.”
“Therefore, since we are receiving a kingdom that cannot be shaken, let us be thankful, and so worship God acceptably with reverence and awe,”
“for our "God is a consuming fire."[히12:27~29]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단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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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조용기 목사의 바라봄의 법칙과 베드로의 바라봄

*** 참고문헌: 생명이란 무엇인가; 슈뢰딩거(한울)
***.................낯선 곳에서의 아침; 구본형(을유문화사)
***.................기호학 이론; 움베르토 에코(문학과 지성사)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 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마14:25~31]”

앞에서 설명한 것 같이 전자기력은 모든 전하(전기)를 띤 물체 간에 작용한다. 전기에는 양(+)과 음(-)의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두개의 양전기나 두 개의 음전기 사이에는 밀어내는 힘(척력)이 작용하고 양전기와 음전기
사이의 힘은 끌어당기는 힘(인력)으로 작용한다.

예수님의 당시 몸무게를 짐작해 본다면 여러 가지 참조 문헌에 의하면 골격이 크시며(내가 환상 중에 뵈었을 때도 골격이 무척 컸다),
키가 크시고, 마른 체격이신 것으로 짐작되며, 아마도 80~90kgf 정도 되실 것으로 짐작 된다.

------->제가 환상중에 예수님을 뵈었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은총이다. 왜냐하면 나는 참으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개떡같은 성격의 인간이다.

예수님은 빛(광자)으로 오신 분으로 빛은 전자기력을 중개하는 입자이므로 바다가 갖고 있는 전기와 당신의 전자기력(양자에너지)을,
척력(서로 미는 힘)으로 상호 작용(교통)하게하여, 스스로 당신이 물에 빠지지 않고 몸무게를 지탱하도록 하신 것은, 모르기는 하지만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서 사용하신 전자기력(기호화된 양자에너지=치료의 광선)에 비하면, 아마도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런데 베드로가 물에 빠지지 않고 물위로 한발 짝이라도 걸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예수님을 향한 베드로의 믿음이,(우선 예수님과
양자에너지로 교통하면서) 베드로 자신의 진동자(몸)의 진동수(믿음의 정도에 상당)에 상당하는 전자기력을 발생하게 하여 물에
빠지지 않도록 물속에 있는 전기력과 ‘척력(서로 미는 힘)’을 발생하게 하였을 것이다.

베드로의 몸무게를 지탱하는 척력(전자기력=양자에너지)은 베드로의 진동수(믿음)에 상당하는 전자기력으로 물과 상호작용할 때
그 중개자로서 예수님의 빛(광자)이 중개하였을 것이다.------->만약 예수님의 빛(광자)이 전자기력을 중개하지 않으면 베드로는 물에 빠진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교통할 때 예수님의 전자기력에 의한 ‘인력’이 베드로를 잡고 있었을 것이라는, 설명은 ‘역사의 수준’이
너무 떨어지므로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베드로는 몇 발짝이라도 물위로 걸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다와 풍랑을 바라보니 무서워서 바다에 빠져 가고 있었다.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베드로가 겁을 먹든 말든 예수님의 베드로를 향한 양자 에너지는 계속해서 작용하고 있었을 터인데, 베드로는
물에 빠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조용기 목사님께서 당시 ‘희망으로의 초대’라는 전도지의 설교 말씀에서 어떻게 이 장면을 설명하셨는지는 기억에는 없는데,
어쨌든 조용기 목사님은 예수님을 바라보느냐??? 풍랑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베드로가 물위에 뜨느냐, 아니면 가라앉느냐가 결정된다고 하신 것 같다.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 말씀대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볼 때는 베드로가 그 진동수에 따른 ‘척력’으로 물위에 뜰 수 있었을 것인데,
그렇다면 베드로가 풍랑을 바라보았을 때는 베드로와 상호교통하든 예수님의 양자에너지도 사라졌는가???
그래서 ‘슈뢰딩거의 상호 작용력’에 상당하는 ‘척력’은 어떻게 된 것인가???

------->예수님의 빛이 베드로의 몸무게를 지탱하는 전자기력을 중개할 때의 빛(=광자)은 특별은총(찾아오시는 하나님)에 해당된다.
------->통상적인 슈뢰딩거의 상호작용은 일반은총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설명을 다시하면, 예수님의 양자 에너지는 그냥 있었을 것이다.(그가 두려움을 갖는다고 해서 양자에너지를
거두어들일 예수님이 아니다.) 또한 ‘슈뢰딩거의 상호작용’을 하는 베드로의 전자기력과 중개하는 광자(예수님의 빛)도 그냥 있었을 것이다.
-------> 따라서 베드로의 믿음도 그냥 있었다고 보고, 생각을 해보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비롯하여 수많은 기적을 경험하였다. 비록 나중에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님을 부정하였지만[마26 :75],...... 이러한 부인은 성장 통으로 간주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어쩌면 베드로는 예수님과 풍랑을 동시에 바라보며 간절히 예수님이 도와주실 것으로 생각 했을 것이다.
성경 말씀도 “주여 구원 하소서”라고 말하고 있다.------->이렇게 도움을 구하는 것은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런데 왜 물에 빠져가고 있는가??? 나는 지금 베드로의 믿음이 사라 졌다고 보지 않아야 이야기가 재미있어지기 때문에 계속해서
이렇게 길게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베드로의 상황이 바로 우리의 상황이라고 생각해보자. 확실하게 우리의 상황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확실하게 마음에
근심이 없이(문제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확고한 의심 없는 믿음[마21:21]위에 서있을 수 있는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 보라는 말을 하고 싶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두 가지 선택(올바른 표현인지 모르지만)을 하여야한다. 하나는 오직 예수만 바라보고,
그 마음에 다른 것이 결코 들어올 수 없도록, 바라는 바를 마음 판(The Tablet of your Heart)에 새긴다는 것이다[잠3:3].
------->원하는 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뚜렷하게 생각하면서(마음에 그림으로 그리면서) 마음 판에 새기는 것.

이것이 조용기 목사님의 바라봄의 법칙의 핵심이다. (후성학에서는 기억이 나지 않아서 이것에 대한 언급은 빼먹었다;
자료 없이 글을 쓰려니 애를 먹는다)
------->내가 외국에 있을 때 다니든 교회의 전도사님은 이것을 자꾸 연습해야한다고 말씀하셨다.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 판에 새기라[잠3:3]”

둘째는 우리가 연약하여[롬8:3,롬8:26] 예수님도 바라보지만 풍랑도 바라본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거짓 없는 모습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성령님이 보혜사로 오신 것이다.[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 : 26]”

우리가 풍랑도 바라보고 예수님도 바라보면서, ‘주여! 구원 하소서’ 하고 풍랑이 거셀수록 두려움에 떨며, 더 크게 외칠 때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우리를 도우시는 것은, 어쩌면 위의 로마서의 말씀에서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는” 그런 경우에 속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외침에 대해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믿음이 적다[14:31]”고 나무라고 계시는 것을 볼 때 이러한 간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는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내가 말하려는 것은 풍랑도 바라보고, 예수님도 바라보면 무엇이 달라지느냐???
이것을 과학적으로 분석해보고, 이것이 바라봄의 법칙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
1972년, 시베리아의 오브 강변에 위치한 노보시비르스크 임상실험 의학연구소에서는 놀라운 발견이 행해졌다.
세포들이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뜻을 특정한 전자기파 형태로 부호화하여, 서로 의사전달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가운데가 유리벽으로 차단된 밀봉 용기에 똑같은 배양 조직을 두 곳으로 나누어 집어넣었다. 그리고 한쪽에 치명적인 세균을 투입하였다.
세균의 침입을 받은 곳의 세포는 전멸했지만 다른 곳의 세포는 그대로 살아있었다.

이번에는 유리벽대신 석영 유리벽으로 바꾸어 실험해 보았더니 세균을 투입하지 않은 곳의 세포까지 죽고 말았다.
세균은 분명히 석영 유리벽을 통과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세균을 투입하지 않은 쪽의 세포를 죽였을까? 자외선은 유리벽을 통과하지 못한다.
그러나 석영 유리는 그것을 통과시킨다. 여기에 무슨 열쇠가 있는 것은 아닐까?

모스크바의 신문들은 ‘과학자들의 견해를 담아’ 이 실험의 보고서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꿈같은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고통을 당하고 있는 세포에서 방출되는 자외선이 그 고통의 정도에 따라 파동의 형태로 부호화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부호화는 기호학에서 의미소통과 의미작용을 뜻한다. (소통(Communication)의 각각의 행위는 어떤 의미를 담고
상대에게 영향을 미친다 =의미작용(Signification); 고통을 받을 경우, 고통이 크면 미치는 영향력도 크다)

------->자외선은 가시광선은 아니지만 빛에너지에 해당한다.(세포의 ‘상호 작용력’이다)
------->이러한 빛에너지는 일반은총에 의한 광자(중개자)의 중개로 전달 된다.

그들은 건강한 세포가 죽어가는 세포에 노출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말한다. 마치 세균이나 독극물, 해로운 방사선 등에
노출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죽어가는 세포로부터 경고 신호를 받은 세포는 저항할 차비를 차린다.

그리고 존재하지도 않는 적들로부터의 습격을 받은 것처럼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인간의 삶과 세포의 삶이 비슷한 것은 웬일인가???
건강은 정신적인 것이다.
.....................................................................................................................................................................................................
위의 글은 구본형씨의 “낯선 곳에서의 아침(을유문화사)”에서 발췌한글이다.
고통 받는 세포의 공포 내지는 두려움이 기호화되어 양자에너지를 타고 상호교통하면서 건강한 세포를 죽인 것이다.
이글을 읽는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얘기하려고 하는지 알아차렸으리라고 믿는다.

풍랑을 바라본 베드로의 양자에너지는 공포와 두려움의 기호(Signification)를 담고 ‘척력(서로 미는 힘)’으로 물과 상호작용하려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공포와 두려움의 기호(Signification)를 담은 전자기력을 오직 사랑만으로 이루어진 예수님의 빛(광자)이 어떻게 중보 할 수 있겠는가???

------->일반은총에 의한 빛의 중개는 베드로의 몸무게를 지탱하지 못한다.

베드로의 몸을 지탱해주던 ‘척력’은 중보자에 의지하지 못하고 상호 작용력을 잃고, 베드로가 물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고 계신다.

“믿음이 적은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마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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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성경의 ‘믿음의 법칙’이며, 조용기 목사님께서 명명한 ‘바라봄의 법칙’이다. 우리가 세상의 미혹이나 두려움을 바라보면
그것이 기호화(Signification)되어 우리에게 올무[잠29:25]가 될 것이다.

“사람을 두려워하면(Fear of Man)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29: 25]”

오직 믿음과 간구로 바라는 것만 바라보고, 그것을 마음 판에 세기고[잠3:3]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롬4:17]” 바라야하는 것이다.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롬4:17]”

아브라함은 그 “나이가 백세나 되고 사라의 태는 죽은 것 같아도[롬4:17]” 그 바라본 것[창15:15]을 마음 판에 세기고
꿈을 꾸며 바랐든 것이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롬4: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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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13:14,15]”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창13:17]”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 15 : 5]”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민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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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는 풍랑을 ‘바라보고’ 공포와 두려움으로 예수님을 바랐다. 그러나 스데반은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기[행7:55]”때문에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을 죽이는 자를 위하여
도리어 기도했든 것이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행7:55,56]”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7:59,60]”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그 마음의 상태가 전혀 달라지는 것이다. 아마도 스데반은 죽어가는 순간에도
그의 전자기력에, 공포와 두려움이 아니라, 용서를 기호화(Signification)하여 ‘예수님의 사랑의 빛의 중보’를 받아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을 향하여 보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면(믿으면) 예수님(성령님)의 빛이 우리의 양자에너지를 중보하신다.
그렇지만 믿지 않든가 두려움을 가지면 예수님의 빛이 중보할 수가 없다.(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해놓은 원칙인것 같다.)

이 스데반의 마음으로부터,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에 대한용서의 간구를 하실 때
그 마음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의 깊이를, 나는 사랑의 마음이 적으므로 조금은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 이다.” (눅23:34)하시더라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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