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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여자 그리고 하나님

칼럼수필 신영록............... 조회 수 2078 추천 수 0 2008.10.15 00:4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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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기저귀 찬 여자는 강대상에 올라 올수없고,여자가 장로되고 목사가 되는 것은 비성경적이며,영적 교만이라고 함부로 말하는 '악성 나르시시스트' 들에게
보내는 글이다.

남자, 여자 그리고 하나님

1.남녀 뇌의 구조적 차이

인간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수정될 때부터 남성과 여성의 구별된 형태를 가지지 않는다.
태아 때의 뇌는 모두 여자아이 형태이지만, 남자아이의 경우 자기의 정소에서 분비되는 ‘안드로겐’이라는 남성 호르몬에 의해서 뇌의 남성화가 일어난다.

어린아이들의 놀이 방법에서, 남자아이는 칼싸움이나 기마전 같은 전투적 성향을 가지는 놀이를 좋아하고 여자는 실내에서 소꿉놀이나 고무줄놀이 같은
소위 여성스러운 놀이를 좋아해서 분명히 남녀의 차이가 인정된다.

이러한 놀이 방법에 대한 성차는 타고 나지만 이것이 무슨 암수형상의 유전적인 우열성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태아기의 호르몬 작용에 의해서 결정된다.

임신 중인 원숭이에게 남성 호르몬인 ‘안드로겐’을 주사하면, 태어난 암컷새끼는 수컷들이 선호하는 놀이를 좋아한다. 이 연구에 의하면 출생 뒤 원숭이
사회에서의 후천적인 영향은 놀이방법에 있어서 성의 차이를 보이는데 중요한 요인으로는 작용하지 않는 것으로 과학자들은 밝혔다.

사람의 경우에도 ‘선천성 부신 과형성’이라는 병에 걸린 아이는 태아 때부터 대량의 '안드로겐' 남성 호르몬에 노출되는데, 여자아이가 이병에 걸리면,
태아 때 임산부에게 ‘안드로겐’을 대량으로 투여한 것과 같은 상태가 된다.

이럴 경우 정상적인 여자아이에 비해 남자 아이들의 놀이를 좋아하고, 소꿉놀이나 인형 놀이를 싫어하고, 장남감도 자동차나 비행기 등 남자 아이들이
좋아하는 완구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론적으로 남녀의 성차는 태아 때의 호르몬 작용으로 결정된다는 말이다.
태아 때의 뇌에 ‘안드로겐’이라는 남성 호르몬이 작용했느냐, 아니했느냐의 차이에 따라 뇌에서 성차가 생긴다.

남자다움 ,여자다움은 일차적으로 뇌의 호르몬 작용의 차이에다가 출생 후의 사회적, 문화적 영향에 의해 남녀의 성 차이는 벌어지고 그 성향이 달라지는 것이다.

인간의 능력을 평가할 때 주로 사용되는 것이 지능과 관계하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태아 때의 뇌는 모두 여성 형인데 남자의 경우에는
태아 때의 어느 시기에 태아의 정소에서 분비되는 남성 호르몬인 ‘안드로겐’이 대뇌변연계-시상하부에 있는 신경 회로의 일부를 남성 형으로 바꿈으로써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시작된다는 의미에서, 남자와 여자의 ‘기질’이나 ‘능력’의 차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무슨 유전적인 우열성에 의하여 뇌가 차이를 보여, 성향에 차이를 보인다면, 그 ‘기질이나 ’능력‘이라는 면에서도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으나 유전학적으로 남녀가 전혀 동일한 초기조건(태아기 때의 여성 형 뇌)을 가지고 출발하고 있기 때문에 소위 인간이 인간을 놓고 평가할 때
사용하는 모든 요소는 동일하다고 보아야 한다.

육체적인 남녀의 차이는 어느 한쪽이 여성이면 반대는 남성이어야 한다. 무성생식으로 새 개체를 만드는 양치식물 이하의 하등생물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다.
이러한 육체적인 조건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행위는 양치식물이하의 하등 생물이 되겠다는 뜻과 다름이 없다.

그렇지만 남녀 간에 아무런 차이도 없고 단지 육체적 차이(성적 차이)만 있다고 주장한다면 좀 이상한 것 같아서 남녀 뇌의 구조적차이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뇌에서 뇌량은 좌우 대뇌 반구가 만나는 부분이며, 좌우 대뇌의 연락회로이다. 팽대부는 좌우 후두엽과 측두엽을 잇는 부분으로서 해부학적으로 살펴보면
여성은 공 모양으로 크고, 남성은 관 모양이며 부풀어 오르는 것이 적다.

시각에 관계하는 후두엽의 연락회로가 여성 쪽이 커서, 남녀의 시각정보처리 구조에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여성 쪽에서 의도적으로 의식하지 않고서도
아주 세심하게 물체를 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인 것으로 과학자들은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여성의 경우 측두엽의 연락회로가 큰 것은 언어기능에서 뛰어 난 것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편도체등 본능행동이나 정동행동과 관계하는
정보의 연락 회로 다발인 ‘전교련’도 여성 쪽이 크다고 한다. 이것은 여성이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자상한 것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크다고 좋으냐???
정보화 사회에서 겉보기는 작고(여자는 평균적으로 남자보다 체격이 적다), 정보 처리 능력이 크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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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남녀의 뇌와 성차

케임브리지 대학 자폐증 연구소 책임자인 사이먼 배런 코헨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얼마만큼 쉽게 알아차리는지를 확인하는 감정이입 지수(Empathy Quotient)라는
검사방법을 고안했다. 이 검사 결과 평균적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월등히 점수가 높았다고 한다.

그러나 체계적인 사고에서는 남성적 뇌가 유리했으며, 기계를 다루는 직관적 능력을 검사하는 부분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평균적으로 점수가 훨씬 높았다.

그런데 이러한 극단적인 형태의 뇌는 남성과 여성의 2~3퍼센트에 불과하다고 한다. 연구에 의하면 어떤 남성들은 ‘여성적’뇌를 가지고 있고, 어떤 여성들은
‘남성적’ 뇌를 가지고 있으며, 대다수의 경우 남자들의 뇌와 여자들의 뇌는 감정이입과 체계적 사고에서 동일한 능력의 범위 내에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여자와 남자의 차이는 ‘성 차이’가 아니라 ‘개인 간의 차이’로 설명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이 된다.

이러한 개인 간의 차이의 가장 최적의 형태는, 배런 코헨에 따르면, 감정이입과 체계화에서 모두 뛰어난 균형 잡힌 뇌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6,27]”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롬2:10,11]”
“but glory, honor and peace for everyone who does good: first for the Jew, then for the Gentile. For God does not show favoritism. NIV [Romans 2:10,11]”
------->이 성경 말씀 어디에도 여자라고 구별(편애)한다는 말씀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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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성경에서의 남녀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남녀를 어떻게 구별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자.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고전14:34~36]”

이 성경 말씀은 목사든 장로든 평신도든,....... 교인이든, 아니든, 남자들이 여자들을 평가할 때, 조자룡 헌칼 쓰듯이 써먹는 성경 말씀이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에게 이 편지를 보낼 때, 고린도에서 온 여러 사람들이 교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관하여 조언을 구하는 교회의 서신을
바울에게 전달하였다[고전7:1].

이러한 문제 들은 고린도 교회 내부에서 일어난 교인간의 분열[고전1:10~4:21]과, 부도덕[5장,6:12~20]한 행실 및 방언과 교회에서의 처신[고전10:32]등으로서,
이에 대해서 권면하는 글로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말씀이다.

위의 여자들에게 보내는 권면의 말씀을 살펴 보건데, 제반문제들에 대해서 여자성도들이 특별히 이의를 제기하든가 ‘말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여인은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특별히 주문하신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언급은 여인은 말이 많기 때문에(나로 말할 것 같으면 여자와 별 차이도 없다),
‘말이 많다는 것’은 통상적으로 ‘복종’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때문에,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말한 것은 바로 ‘복종하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 된다.

율법의 어디에도 여자가 교회에서 말해서는 안 된다는 법은 없다.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위의 성경 말씀에서 ‘복종’하라는 말씀이 주제가 된다고 생각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특별히 ‘율법’이라고 말씀한 것은 바울 사도가 “남편이 여자를 다스릴 것이라는” 창세기[3:16] 말씀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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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1:3~16절 말씀을 보면 ‘머리’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전11:3]”

‘머리’에 대한 개념은 에베소서 1장2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복종해야한다고 한 말씀에 비추어 보건데,
‘머리’의 개념은 복종과 순종[엡5:22,23]의 의미로 쓰인 것으로 짐작된다.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엡1:21,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엡5;21,22]

그렇다면 왜 여자는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을까???
우선 ‘방언’에 대한 바울의 견해를 잠시 살펴보자.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고전14:23]”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고전14:26~28]”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14:39,40]”

바울은 방언을 말할 때 통역이 없으면 잠잠하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므로 화평”[고전14:33]을 위해서,
“모든 것을 품위있고 질서있게 하기 위해서[고전14:40]”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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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살펴보았지만 여자는 인간적 능력으로 남자에 대해서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다. 그러나 방언이 하나님의 은사[고전14:22]임에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하여 교회의 덕을 세워야하는 것처럼, 여인도 순종의 미덕을 보여야한다는 의미로 복종을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바울이 요구한, “교회에서 잠잠 하라는[고전14:34]”권면은 교회에서 여자의 처신에 대한 요구로, 남자에 대비되는 여자라기보다,
남편에 대한 아내에게 요청한 요구사항으로 보인다. “무엇을 배우려거든 남편에게 물어 보라는[고전14:35]”말씀을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다.

따라서 위의 문제의 성경말씀도[고전14:34~36]역시 ‘머리에 대한 개념’과 ‘방언’과 같이 질서를 세우기 위한 말씀으로 보인다.
그런데 왜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 여자에게 이러한 요구가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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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또는 아들도 그 때에 스스로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리라[고전15;28]”

위의 성경 말씀은, 예수님께서 만물이 자기에게 복종하게 되면,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하나님에게 예수님께서도 스스로 복종하신다는 성경 말씀으로 보인다.
하나님께서 만물의 주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 자신에게 복종한 만물뿐만 아니라, 예수님 당신도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해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가 되시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은 신성과 위엄이 동등하시다고 우리는 배워왔다.
이러한 의미에서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복종은 질서(직분)의 의미와 영광을 아버지께 드린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옳다.

이러한 복종과 순종으로인한 질서는 복종하기로 작정한 분이, 복종하는 행위가 자기에게 적합하다든가, 선천적인 기질이 보조자로서 더 어울리고
열등하기 때문에 그러하다고는 결코 생각되지 않는다.

바울이 여자에게 복종하라고 말한 ‘복종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 복종하심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한 복종과 전혀 다름이 없다고 생각 된다.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전11:3]”이 성경 말씀은, 그 말씀 자체가 바로 질서를 의미한다는 것을
말씀 자체로부터 알 수 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여기에서 여인은 '가지'가 될 자격이 없기 때문에,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남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다.

‘장로’와 ‘목사의 직분’이 위의 ‘포도나무의 가지’에서 분파된, 하나의 작은 ‘직분’이상이라고 생각 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 순종하심으로써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된 것[롬5:19]”같이, 능력 있고, 위계질서 상 순종과 복종을 할 줄 아는
여자도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 하는데 기여하는 것이 무엇이 비성경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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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마19:3~9]”

Jesus replied, "Moses permitted you to divorce your wives because your hearts were hard. But it was not this way from the beginning. NIV[Matthew 19:8]

여기 성경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창2:24]”는 말은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보아야한다.
이것은 분명히 성경말씀 대로하면 창조 때 하나님께서 하신, ‘시간을 초월한 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그들(정치와 전쟁에서 주도권을 가지는 남자들)이 여자에 대해서 ‘완악’함으로, ‘정치적 목적’으로 이혼증서를 써 주고
여자를 버릴 수 있다[창24:1]라고 말했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다.

모세가 남자들을 잘 다스리려는 ‘정치적 의도’로 이 말씀을 하셨다면, 당시 이스라엘에서 남자가 여자를 보는 성향이 어떠했는가하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물론 모세도 자기의 말이 하나님의 명령에 위배된다는 것을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리고 “합하여 한 몸이 된다.”는 의미는 등가 원칙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남편이 여자를 다스리도록 하신 명령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것은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기 때문인가???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창3;16]
“To the woman he said, "I will greatly increase your pains in childbearing; with pain you will give birth to children. Your desire will be for your husband,
and he will rule over you. NIV[Genesis 3:16]"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창조하신 인간이 하나님을 배신하여 이 가시와 엉겅퀴가 있는 세상[창3:18]에 내 던져 졌을 때에는, 하나님의 손길을 떠나서
죄와 사망의 법 아래에 있게[롬8:2] 되고, “공중 권세 잡은[엡2:2]”“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벧전 5:8]”이 세상에서
생존을 위해서는 인간들 간의 위계질서는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이 위계질서가 왜 필요한가 하는 것은 남자의 ‘분노의 조절 능력’과 ‘공격성’을 생각해 본다면 바로 짐작해 볼 수 있다.
덧붙여서 탁월한 언어 구사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앞에서 언급한 것같이 정보처리 능력이 또한 탁월한 여자들과,
오직 폭력으로 짓누르기 십상인 남자와의 한판 승부는, 적 앞에서 자중지난을 일으키게 될 것이라는 것은 짐작이 가능하다.

이러한 위계질서의 차원에서 하나님께서는 남편에게 위의 성경 말씀에서와 같이 아내를 다스리도록 허락하신 것으로 보아야한다.
여기서 다스린다는 의미로 쓰인 ‘Rule’은 원칙이나 규정을 의미하는 말로서 ‘기저귀 찬 주제’의 ‘우열’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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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사랑의 갈증

하나님은 위의 성경 말씀에서“여자가 남편을 원하도록 하시겠다[창3;16]”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것은 아내에게 남자인 남편보다 더 큰 사랑의 갈증(Desire)을 가지도록 변화를 준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위계질서가 쉽게 정착되도록 하기 위한 방법으로 보인다.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남자에 비해서, 더 큰 사랑의 갈증을 가지도록 하신 것은 어떤 방법을 사용하여 그러한 갈증을 부여하셨을까???

그냥 말로만 하나님이 “너는 남편을 원하라[창3:16]”하고 말씀하시니까 이 말씀을 하신 분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므로 그렇게 될 것이다 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막연한 생각이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것은 생리적인 변화를 의미한다고 보아야한다.
사춘기 이후의 성차는 성호르몬의 작용 때문이라고 알고 있다.
사춘기가 되면 태아 때 활동을 멈춘 상태였던 정소나 난소가 성호르몬을 분비하여 정자나 난자를 만들기 시작한다.

남자는 정소에서 남성 호르몬인 ‘안드로겐’을 분비하고, 여자는 난소에서 여성 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이 분비된다.
‘에스트로겐’은 여성형의 대뇌 변연계-시상하부에 작용하여, 여성 특유의 기능을 발휘하게 하는데, 적게 먹도록 하거나 체지방에서 ‘렙틴’이라는
식욕 억제 호르몬을 분비함으로써 식욕을 저하 시킨다고 알려져 있다.

‘에스트로겐’은 여성 호르몬의 총칭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에스트라디올’은 가장 강력한 여성 호르몬이다.
난소나 태반에서 분비되며 젖가슴을 크게 하거나 초경을 일으키게 하는 호르몬이다.

에덴동산에서 하와의 성적 매력은 어떠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이러한 호르몬들이 피부를 아름답게 하고, 여성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여
남편으로 하여금 관심을 가지게 함으로서, 여성 자신의 존재를 남편에게 인지 시킨다고 할 수 있다.

런던 대학교에서 실시한 한 연구에서는 ‘진심으로 가슴깊이 미치도록’ 사랑에 빠진 17명의 남녀들에게, 연인의 사진과 친구의 사진을 바라보게 하고,
그동안 뇌 촬영을 실시하였다.
남녀모두 친구를 바라볼 때와는 달리 ‘열정의 대상’을 바라볼 때 뇌의 특정한 회로부분에서 활발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신경과학자 야크 판크셉에 따르면 이 회로의 상당 부분은 또 다른 쾌감상태, 즉 코카인 같은 마약류를 복용했을 때에도 활성화 된다고 한다.
이러한 발견은 정열적인 사랑의 속성이 중독성을 가지며, 또한 사랑으로 인한 중독성 있는 황홀감은 신경학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남성의 경우는 이런 사랑회로가 성적 흥분상태일 때만이 활성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사랑에 관한 신경학적인 메커니즘이 바로 성경말씀에 있는 “너는 남편을 원하라[창3:16]”는 말씀의 뜻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메커니즘은 실제로 여자가 남편에게 복종(?)하게 되는 강력한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님께서 왜 어느 한쪽의 생리적 욕구를 불리(?)하게 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 아니신가???
앞에서도 설명하였지만 그것은 위계질서를 세운 것이라고 보아야한다.

남자도 전쟁을 좋아하고, 여자도 소위 남성의 파괴적 속성이라 할 수 있는 전쟁을 좋아하도록, 하나님께서 허용하셨다고 생각해 보자.
당시의 민도를 고려할 경우, 이 세상이 남녀 대결로 남아나겠는가???

어느 한쪽이 타협을 잘하고, 순종적이면, 균형이 훨씬 잘 맞아 분란이 적다.
당시의 지적수준은 지금에 비하여 형편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위계질서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은 균형의 추구에 있었다고 보아야하며 그것은 곧 하나님의 ‘공의’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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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인간의 ‘굴종의 학습’과 ‘나르시시즘’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뇌는 원래 여성 형으로서 정소가 없는 여성의 뇌에는 태아 때 신경회로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뇌가 여성 형으로 남게 된다.
남자의 경우에는 태아 때의 어느 시기에, 태아 자신의 정소에서 분비되는 ‘안드로겐’이라는 호르몬이 대뇌 변연계-시상하부에 있는 신경회로의
일부를 남성 형으로 바꾼다.

사춘기가 되면 활동을 멈춘 상태였든 남자의 정소나 여자의 난소가 활동을 재개하여 성호르몬을 분비하거나 정자나 난자를 만들기 시작한다.
남자는 남성 호르몬인 ‘안드로겐’이 작용하여 몸에 털이 나고, 변성기를 겪어 목소리가 굵은 남성 형으로 변화된다.
성 호르몬은 몸 뿐 만아니라 뇌와 마음의 작용 까지도 변화시킨다.

사춘기 때 남자가 공격성을 나타내는 원인은 ‘안드로겐’이 대뇌 변연계의 ‘편도체’나 시상하부의 ‘복내측부’등을 자극함으로써
‘공포’나 ‘분노’를 만드는 것이 동기가 되는 것으로 과학자들은 보고 있다.

과학자들이 원숭이의 ‘편도체’를 파괴하면, 그 원숭이는 아무런 두려움이 없이 뱀을 집어 들고, 시상하부를 자극하면 서열이 가장 높은
대장 원숭이를 공격하기도 한다.

인간도 이와 마찬가지로, 사춘기가 되면 성호르몬인 ‘안드로겐’이 대량으로 증가하여 남자 뇌의 ‘시상하부’나 ‘편도체’를 자극해 ‘분노’나
‘공격행위’를 일으키도록 충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남자아이들은 ‘칼싸움’ 같은 ‘싸움놀이’ 하기를 좋아한다. 아이들은 ‘싸움놀이’를 하는 가운데 어느 정도의 힘을 쓰면 상대가 아프고, 다치는지,
혹은 어떻게 하면 자신이 다치며, 상대의 공격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지 하는 ‘싸움의 요령’을 학습하게 된다.

‘대뇌 신피질’은 ‘대뇌 변연계’를 감싸고 있으며, ‘대뇌 변연계’는 해마, 편도체, 뇌궁, 띠이랑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대뇌 신피질’은 인식과 사고, 판단 등의 고도로 발달 된 지적 능력을 보이는 부위이다.

대뇌 신피질, 특히 전두엽의 ‘전두 연합령’이라는 부위는 ‘편도체’나 ‘시상하부’등의 기능을 억제하는(다시 말해서 분노와 공격성을 억제하는)역할을 하는데,
이 부위는 매우 느리게 발달한다.

그 원인을 과학자들이 관찰한 바에 의하면, 시간을 두고 천천히 발달하는 동안, 위에서 말한 ‘싸움의 요령’을 학습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해서 ‘대뇌 신피질’은‘분노’와 ‘공격성’을 조절하고, 해도‘좋은 것’과 ‘나쁜 것’등의 행위를 기억으로 신피질에 축적한다.
이러한 ‘싸움놀이’로부터 배우는 학습이 충분하지 않으면, ‘분노,와 ’공격성‘에 대한 신피질의 억제조절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

요즘은 어린아이들이 과보호로 동네 또래 아이들과 놀다가 뒹굴면서 싸우는 일은 보기가 힘들다. 나의 지인 한분도 어린아이들을 키울 때,
싸우는 것이 무엇이 좋은가하고, 남자아이들의 놀이 감으로 장난감 총이나 칼을 절대로 사주지 않는다고 하였다.
------->대안으로 태권도 같은 운동을 시켜, 패배를 배우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 같기도 하다.

‘싸움놀이’가 부족하면 대뇌변연계-시상하부의 ‘편도체’등을 조절하는 전두엽의 ‘전두 연합령’의 발달이 약하거나 늦어진다고 과학자들은 보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싸움 놀이’는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사회화의 학습과정’을 의미하기도하며, 스캇 펙 박사의 ‘삶의 기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스캇 펙(M. Scott Peck)박사는 그의 ‘영혼의 부정(김영사)’에서, 어린아이가 싸움에서 패배하면 겪게 되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의 본질은
자존심의 훼손이라고 한다. 즉 심리적 고통의 또 다른 한 형태인 ‘굴종’을 학습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어린아이일 때 싸움의 패배로 인하여 얼마나 움츠러들었었는지를 기억할 수 없다. 그러나 이때 우리가 겪은 ‘굴종’이라는
기본적 학습과정의 흡수야 말로 우리의 생존을 위한 고통에서 필요한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역시 스캇 펙 박사에 따르면, 이러한 ‘굴종’의 학습과정이 없었다면 인간은 벌써 영원한 과거에 절멸 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이런 고통을 거부하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으신다고 한다.

------->생존적 고통을 회피하는데 가장 흔히 동원되는 방법은 자기 기만적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기만적 행동은 정신병으로 발전하는데, ‘굴종의 학습’을 오히려 방해한다.
------->또한 하나님은 어떤 의미에서는 고의로 고통을 주시기까지 하신다[욥1:12].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욥1:11,12]”

그래서 성경은 시험을 만나면 온전히 기뻐하라 고 말씀하고 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1:12]”

‘고통의 거부’를 허용하는 것은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한, 우리‘인간의 멸종’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땀이 피 방울이 되도록”간절한 독생자의 기도[눅:44]도 들어 주시지 않으셨든 것이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눅22:42]”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5:13,14]”
“Anyone who lives on milk, being still an infant, is not acquainted with the teaching about righteousness. But solid food is for the mature,
who by constant use have trained themselves to distinguish good from evil.NIV[Hebrews 5: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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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의 발달에 의한 남성호르몬인 ‘안드로겐’ 분비 시기와 ‘전두 연합령’이 정상적으로 발달하지 못하면 소위 ‘화를 조절하지 못하는 상처 난 뇌’가 된다고 한다.
더욱이 ‘굴종’을 제대로 학습하지 못한 이 ‘상처 난 뇌’를 가진 요즘 사춘기 청소년들이 ‘잔혹한 파괴와 살인을 일삼는 사이버 게임’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이렇게 성장한 청소년들이 ‘해도 되는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제대로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함으로 그들이 바라본 ‘사이버 게임’의
잔혹한 파괴와 살인 같은 행위를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일삼는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기본적인 감정이입이 전혀 안되기 때문이다.

대니얼 골먼(Daniel Goleman)은 그의‘SQ 사회지능(웅진)’에서 “타인에 대한 잔인한 행위를 서슴없이 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으며. 비판을 받으면
분노하거나 심하게 치욕감을 느끼며 특별하게 대접받을 것을 기대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감정이입 능력이 부족한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을 불건전한 나르시시즘의 전형이라고 한다.

나르시스(Narcisse)란 말은 원래 그리스 신화의 '나르키소서(Narcissus)'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나르시스는 호수에 비친 자기 모습에 홀려서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건전하지 못한 나르시스 형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찬양하고, 모든 타인은 자신을 찬양하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역시 대니얼 골먼에 따르면 이와 같은 나르시스적인 사람들은 가려가면서 감정 이입을 한다고 한다. 자신의 영광에 보탬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외면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16:15]”

예수님의 이 성경 말씀은 전형적인 ‘악성 나르시시즘’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계신다.
------->명품 옷을 입고, 버려야 한다고 설교하는 사람은 ‘악성 나르시시즘’의 중증에 가깝다.

앞의 ‘2.남녀의 뇌와 성차’에서 언급하였지만, 감정 이입지수는 평균적으로 여자가 훨씬 높다. 따라서 감정 이입지수(타인과의 상호작용으로서,
융화를 의식하는 정신작용)가 높다는 뜻은 ‘악성 나르시시즘’에 빠질 확률이 낮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러한 감정이입 지수는 ‘굴종의 학습’으로부터 얻어질 수 있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여인은 고통에 대해서 남자보다 9배나 더 잘 견딘다고 한다.
여인의 이러한 특성은 후성학적인 유전특질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바로 에덴동산이후 원죄의 주연인 하와의 후손으로서 수 천 년 동안 견뎌온 인고의 세월에 대한 후성학적 유전자 각인으로 보인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23:8~10]

이러한 ‘굴종의 학습’으로부터 정금같이 나와,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톨레도트(계보)’에 오른 다섯명의 여인의 후손들이, “장로나 목사가 되는 것은
영적 교만의 극치”라 하고, “기저귀차고 어디에 올라오려고 하는 가!” 라는 천박한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굴종의 학습’의 부족으로부터
나오는 전형적인 ‘악성 나르시시즘’의 극치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악성 나르시시즘의 정의를 살펴보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이 말했든 ‘악성 나르시시즘’을 스캇 펙 박사는 이렇게 정의했다.
“악성 나르시시즘의 특징은 복종할 줄 모르는 자기의지에 있다.”

‘악성 나르시시즘’이 아닌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뭔가 자기보다 높은 존재에 대해서 그것이 ‘하나님’이든 ‘진리’든 ‘사랑’ 이든
아니면 다른 ‘이상’이든 스스로를 굴복시킬 줄 안다.”

“그들은 자기 욕망 보다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행하고자한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눅22:42]’
이것이 하나님께 굴복하는 사람들의 바람이다. 그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믿기보다는 ‘진리’ 자체를 믿는다.”

------->‘악성 나르시시스트’의 눈에는 여자를 보면 ‘기저귀’ 밖에 보이지 않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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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마26:6~13]

위의 성경 말씀은 마르다와 죽은 자 가운데에서 살리신 나사로의 자매인 마리아가 향유 한 옥합을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성경 말씀으로,
마리아의 정신의 전형적인 상호작용에 의한 감정이입이다.
이러한 행위에 대한 예수님과 제자들의 반응은 전혀 상반 된다.

제자들은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선한 행위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으나,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선한 행위보다, 예수님과의 상호작용에 의한
감정이입(교통)이 우선한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또한 예수님과의 ‘상호작용’이며, 융화를 위한 정신작용으로서 감정 이입을 한 그 여인의 행위는 “온 천하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어디든지 기억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예수님께서 복음의 주체이시므로 그 행위를 온 천하에 알리는 것은 예수님의 의지라고 보아야한다. 마리아와 상호교통하시는 예수님께
마리아의 ‘기저귀’는 안중에도 없으시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곳에는 오직 교통하는 ‘사랑의 눈물’만이 있다.

------->‘예수님과 교통하는 사랑의 눈물이 있는 상태’는 장로의 직분보다 상위에 있는 상태라 할 수 있다.
------->‘예수님과 교통하는 사랑의 눈물이 있는 상태’는 목사의 직분보다 상위에 있는 상태라 할 수 있다.
도대체 장로 되고, 목사 되는 것이 무엇이 그리 대단하다는 말인가???

------->여인은 믿어서 복을 받아 예수의 어머니가 되었다[눅1:45]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눅1:45]
.................................................................................................................................................
잠시 이야기를 돌려 보자. 참으로 나는 말하기가 민망한 위치에 있는 평신도임으로, 이 글을 써야 할 것인가 말아야할 것인가를 두고 무척 고심했다.

장경동 목사님이 CTS 기독교 TV에 출연하셔서 하신 말씀에 대한 나의 의견을 적어본다. 이 말씀은 2~3개월 전에 하신 말씀이다.

장경동 목사님은, 성철 스님께서 돌아가시기 한 달 전(?)에 “자기의 죄가 수미산보다 많다”고 하셨다는 말씀에 대해서, 산속에서 15년 동안 수양하신분이
무슨 죄가 그렇게 많아서 자기 죄가 수미 산 보다 많다고 하셨는가??? 하고,

다소 보기 민망할 정도의 태도로 말씀하여, 설교를 듣고 있는 교인들의 웃음을 자아내도록 하셨다.
------->말씀드리면 나는 불교 신도는 결단코 아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교회 예배 때 자주 찬송하며 눈물짓는 찬송가 404장의 3절의 가사를 한번 살펴보자.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다 쓸까”

“바다를 먹물 삼고 하늘을 두루마리 삼아도 다 쓸 수 없을 정도로”하나님의 사랑은 크셔서,....... 받지 않은 사랑의 크기를 인지할 수는 없으므로,
우리가 그 사랑을 다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큰 은혜를 받았다는 뜻이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받은 사랑을 의미한다.
따라서 기독교인의“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쓸 수 없는” 은혜와 성철 스님의 수미산 보다 큰 죄는,......이 죄-은혜 간에는 인과 관계 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수 믿지 않은 성철스님의 죄의 크기와, 만약 성철스님이 예수 믿게 되셔서,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받아 은혜를 입게 되었다면,
그 죄와 은혜 즉 사랑의 크기는 등가라고 보아야 한다.

그분이 수미산 보다 큰 죄를 이야기 하신 것은, 인간의 행위의 부정적 측면을 보았다고 할 수 있으며, 기독교인이 크신 사랑으로 은혜를 입었다고 한 것은
구원의 긍정적 측면을 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분의 감정과 우리 기독교인의 감정은, 어느 측면을 보고 있는가 하는 것은 다르지만, 그 자각은 동일하다고 보아야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철스님은 죄를 깨달았으나, 무슨 죄가 그렇게 많아서 죄가 수미산보다 크냐고??? 하시면서 교인들의 웃음을 자아내게 한
마음에 ‘빈정거림’이 있었다면,........

장경동 목사님은 진리 안에 있음에 틀림은 없으나, 목사님은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으로 입은 은혜를 전부 깨달았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조심스럽게 판단할 수 있다.
우리가 받은,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쓸 수 없는 사랑이 수미산 보다 적다면, 나의 판단에는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나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면, 장경동 목사님은 ‘악성’ 까지는 아니라 하드라도 다소 건전하지 못한 ‘나르시시즘’에 빠져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나르시시즘은,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요14:6]”, 진리를 주장하는 종교적 의미에서가 아니고, 그의 인간적 면모에서 그러하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시니컬(Cynical)한 태도로 남을 보는 행동이 어떤 문제를 낳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인간의 뇌에는 1000억개의 뉴런(Neuron,신경세포)이 있다. 그중에서 반사경 뉴런이라고 하는 신경 세포가 있다.
반사경 뉴런은 인간으로 하여금 남의 행동에 대해서 모방하려는 의지로 나타난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우리의 뇌는 다른 사람의 행동을 흉내 내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다고 한다. 이러한 모방 프로그램의 역할을
담당하는 신경세포가 반사경 뉴런이라고 한다.

장경동 목사님은 부흥목사로서 기독교인에게 미치는 영적 영향력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TV에 나와서 행동하는
일거 수-일투 족은 TV를 보고 있는 많은 기독교인에게 깊은 영향력을 미칠 것이다.
지금은 끊어 버렸지만, 집에서 케이블 TV를 시청하고 있었을 때는, 나도 목사님의 설교 말씀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은혜를 많이 받았다.

목사님의 선한 영향력이 큰 만큼, 비록 작은 행동일지라도, 나쁜 행위도 깊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단지 가볍게 웃자고 한 행동일 수 있는, 이러한 냉소적인 시선으로 남을 보는 행위는 목사님을 존경하는 많은 교인들의 반사경 뉴런에
깊은 흔적을 남겨, 무심결에 남의 것을 무시하게 하여, 전도가 아니라 적을 만들게 되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도대체 이러한 언급이 하나님의 영광에 무슨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2:3]“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고전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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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맺으면서

나는 개인적으로 ‘에스더’서를 볼 때 마다 하나님의 역사의 전개 수준에 감탄한다.
처음 TV드라마를 통하여 에스더서를 접하고 나서 나온 나의 탄성은 ‘이야 진짜 수준 높네!!!’였다.

이 하나님의 드라마는 두개의 ‘초기조건’을 가진다. 하나는 바사 왕 아하수에로의 왕후 와스디가 왕명을 어김으로써 폐위되는 사건[에1:12]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으로 ‘에스더’가 왕후가 된다.

두 번째 ‘초기조건’은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절하지 않은 사건[에3:2]이다. 이 두 번째 사건은 ‘나비효과’로 증폭되어 바사에 남아 있든 하나님의 백성이,
아말렉 사람 하만의 음모로 멸종 위기에 몰리게 된다.

“왕이 옳게 여기시거든 조서를 내려 그들을 진멸하소서 내가 은 일만 달란트를 왕의 일을 맡은 자의 손에 맡겨 왕의 금고에 드리리이다 하니,
왕이 반지를 손에서 빼어 유다인의 대적 곧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에게 주며 이르되 그 은을 네게 주고 그 백성도 그리하노니
너의 소견에 좋을 대로 행하라 하더라[에3:9~11]”

두 개의 ‘초기조건’은 별도의 변수에 따라 움직이는 것 같으나, 사건의 분수령에서는 서로 만나게 된다.
이 드라마의 분수령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에스더의 하나님의 백성을 구해야한다는 희생적 결단이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에4:16]”

‘에스더’의 이 죽음의 결단을 보면 자꾸만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은 한알의 밀이 되어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돌아가신 예수님의 사랑이 느껴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요 12:24,25]”

‘에스더’서를 보면 ‘하나님’이나 ‘여호와’란 이름은 한 번도 사용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시계태엽을 감은 뒤 저절로 작동하도록 놔두었든가,
아니면 연극의 연출가나, 벌어지는 일을 끊임없이 조정하는 꼭두각시 조정자의 역사는 결코 아니라는,
‘켄터베리 대주교’ 로언 윌리엄스의 지적이 생각나게 하는 ,참으로 수준 높고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느끼게 해준다.

그런데 ‘에스더’는 남자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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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마27:50,51]”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위의 성경 말씀은 예수님께서 흠 없는 그 몸을 십자가의 속죄 물로 단번에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예수 믿는 자는 누구나 하늘 지성소
(지상 성전은 하늘의 지성소의 모형 임)에 당당히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성경 말씀이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사건이 그것을 의미한다.

‘기저귀’ 찬 사람이 강대상에 올라갈 수 없다고 하는 주장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무력화 시키는 행위이다.------->강대상은 지성소도 아니지만,
이러한 주장은 참으로 하나님께 ‘죄’ 된 행위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제사(예수님의 희생)를 모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드로 전서의 말씀은, 예수님의 속죄의 희생을 믿는 자는 모두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대표한다는 제사장이라는 말씀이다.
지구촌 교회 이동원 목사님은 이 성경 말씀을 설교하실 때 우리 모두(목사님 자신을 포함하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하셨다.

목사님께서 이말 씀을 하실 때 적어도 만 명이 넘는 여자 성도 분들이 설교를 듣고 계셨다.
목사가 제사장이라면 누구나, 남자든 여자든, 목사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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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마25:1~10]”
*******
예수님은 신랑이고, 우리는 신부인데,.......
예수님 앞에 여자가 어디에 있고, 남자가 어디에 있나???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 모두는 여자일수 밖에 없다.
예수님이 부활 후 처음 만난분도 여자다[마16:9]
기저귀를 차지 않아서, 예수님을 신랑으로 맞기 싫으면 할 수 없고,.........

신영록(남자)/건축 구조 기술사

댓글 '1'

신영록

2008.10.15 17:34:30

영화를 워낙 좋아하기 때문에, 케이불 TV가 집에 설치 되어 있을때 책을 볼 시간도 없을 정도로 영화에 미쳐서 시간을 많이 낭비했다.
그래서 지금은 케이블 TV를 끊어버렸다.
케이블 TV가 설치되어 있을때,CTS기독교 방송을 통하여 여러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참 많이 받았다.
지금은 그 방송이 나오지 않으니,
목사님들의 설교 말씀을 접할 수가 없어서 무척 아쉬움이 있다.

그런데 당시에 CTS 방송을 통하여 '우리들 교회'의 김양재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무척 은혜를 많이 받았다.
저는 은혜를 조금 받아서 눈이 좀 밝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설교 말씀을 들을때,
많은경우 설교자의 마음을 볼려고 노력을 하는데(완전히는 아니고, 쬐끔은 그 마음의 상태를 느낀다고 생각한다).
목사님의 마음은 유명하다는 어느 목사님 못지않게 참으로 깨끗하다고 느꼈다.
------->김양재 목사님의 글을 국민일보를 통하여도 많이 접하여 보았는데,
그 마음의 깨끗함은 목사님의 영적인 수준의 현 주소를 보는것 같아서 무척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김양재 목사님은 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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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칼럼수필 존재, 죽음 그리고 하나님 신영록 2008-03-06 1620
111 칼럼수필 분당 샘물교회 *아프간 선교 봉사팀*에게 드리는 성경말씀 [1] 신영록 2008-02-29 2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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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칼럼수필 봉사 받는 삶{4)---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1] 신영록 2008-02-19 2030
105 칼럼수필 봉사 받는 삶{3}---못다 진 십자가 [1] 신영록 2008-02-19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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