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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없는 교회와 신앙고백

마태복음 한완상............... 조회 수 1686 추천 수 0 2008.04.25 15: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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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11:1-6 
설교자 : 한완상 형제 
참고 : 새길교회 
1. 머리말

3년 후 우리는 새로운 천년을 맞습니다. 새로운 천년을 맞으면서 지난날의 잘못을 총체적으로 반성하고 새로운 천년을 새로운 결단으로 맞아야 합니다. 뒤돌아보면 기독교가 인류 역사 속에서 제도화된 이후 기독교와 교회는 같이 되어버린 느낌이 듭니다. 특히 사도신경이 교회의 중심적 신앙고백으로 정착된 후 그 신앙고백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확인해온 크리스천들은 예수 없는 신앙고백을 너무 오랫동안 중얼거려온 것 같기도 합니다. 게다가 교회의 조직이 거대화되고 관료제화되면서, 조직의 권한이 막강해지고, 그 영광이 세상 속에서 휘황찬란해지면서 예수와 하나님도 세상에서 군림하는 절대독재자처럼 숭앙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겸손한 인간의 모습은 찾기 어려워졌습니다. 그 인간적인 부드러움과 때때로 우유부단한 것처럼 보이는 모습, 힘없는 어린양처럼 보이는 모습들은 감춰지고 있습니다. 이제 교회조직과 그 신앙고백을 통해 예수를 만나기란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그 막강한 전통과 조직, 그 정교하고 억압적인 교리와 신앙고백이라는 중간매개체 또는 브로커(broker)를 통해서 겨우 역사의 예수님을 희미하게나마 만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이런 중간 브로커 없이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말씀과 행적과 사건이 비록 2,000년 전에 일어났던 것이긴 하나, 오늘 여기에서 추체험(追體驗)하는 일이 참으로 소중합니다. 이와 같은 실존적 만남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오늘에 되살릴 수 있는 감격을, 새 사람되는 보람과 새 역사를, 새 구조를 만들어 가는 감격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2,000년을 눈앞에 두고 새로운 종교개혁이 요청됩니다. 예수님을 새롭게, 뜨겁게 만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적 교회조직과 새로운 신앙고백이 요청됩니다.

2. 본문의 상황

성서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그 많은 행적(말씀과 행동) 중에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잠시 생각해봅시다. 그 말씀의 상황부터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선교활동으로 내보내신 후 갈릴리 여러 도시들에서 가르치시고, 섬기시고, 낫게 하시는 일로 분주했습니다. 이때 세례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갈릴리의 맹주 해롯 안티파스가 자기 동생의 처와 결혼한 것에 세례요한은 올바르게 꾸짖었습니다. 그 결과 세례요한은 마케레우스 요새의 토굴 감옥 속에 깊이 갇히게 되었습니다. 외롭고 괴로운 나날을 보내는 가운데 그는 예수님의 행적에 관한 소문도 듣고 있었습니다. 그는 절망적인 감옥생활 속에서 메시아의 도래를 더욱 열망하고 있었기에 예수사건들에 대한 소문을 들을 때마다 더 깊은 관심을 보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기에 그에 대한 희망이 컸었는데,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대한 보고를 들을 때 때때로 그가 생각하는 메시아의 행적과 예수의 행적이 서로 다르다는 인식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어느 날 그의 제자들이 면회 왔을 때 그들을 예수님께 직접 보내어 이렇게 묻도록 했습니다. "오실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왜 이런 회의가 생겼을까요? 세례요한과 그 제자들은 오실 메시아를 무서운 심판주로 믿었던 것 같습니다. 썩은 나무를 날카로운 도끼로 여지없이 찍어내듯, 잘못된 기존 구조를 천지개벽하듯 바꿔버릴 수 있는 막강한 힘을 무섭게 활용하는 심판주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 무섭게 보복하는 강력한 분으로 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오실 메시아의 그 단호함, 그 과격성을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다. 사랑을 강조하시고 그것을 실천하라고 하였습니다. 기존의 구조에 대해서도 너무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하는 듯 보였습니다. 과연 그렇게 미적지근한 행적만을 일삼는 예수가 오실 메시아일까 하고 의심하기 시작한 듯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예수님은 어떻게 대응하셨습니까?

3. 예수님의 확신에 찬 대답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보낸 그의 제자들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라." 단순히 듣는 것만 전한 것이 아닙니다. 세례요한은 깊은 동굴 감옥 속에서 예수 행적에 대해 듣기만 했습니다. 볼 수 없었습니다. 듣기만 했기에 의심이 증폭했을는지 모릅니다. 주님께서도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의 진리를 왜 모르셨겠습니까? 그래서 단순히 듣기만 할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직접 본 것을 알려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듣고 보는 것은 분명히 객관적 현실입니다. 또한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기도 합니다. 비록 성서 기록자가 자기의 삶의 자리에서, 자기 공동체(신앙공동체)의 입장에서 이런 현실을 신학적으로 또는 신앙의 눈으로 해석했다하더라도 그들이 해석한 것은 어디까지나 듣고 본 현실에 대한 해석이요 신앙적 판단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역사적 예수의 한 편린을 적어도 이러한 해석적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직접 귀로 듣고 눈으로 확인한 사건들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소경이 보며, 절름발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해지며, 벙어리가 말하며, 가난한 자가 기쁜 소식을 들으며,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사건, 참으로 놀라운 사건 중의 충격적 사건들을 그들은 직접 목격한 것입니다. 이 사건을 단순한 환상적인 신앙고백이라고 가볍게 취급할 수 있을까요? 더욱이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 말씀의 진실성과 말씀과 실천간의 일치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공적인 활동을 처음으로 시작하셨을 때 나사렛 회당에서 첫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취임사라 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그는 공적인 활동을 시작을 하시면서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케" 하시겠다고 공약하셨습니다. 한마디로 겉으로 보기에 천지개벽 같은 행동으로 세상을 확 뒤집는 행위를 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외롭고 괴로운 사람들, 차별 받고 소외당하고 있는 사람들, 보고 듣지 못하면서 억압받고 있는 사람들, 깨어지고 비뚤어진 인간들을 사랑으로 치유하여 그들을 사랑으로 온전케 하시겠다는 것이 예수님의 공약이었습니다. 이 공약의 원문은 이사야 61장 1-3절까지의 말씀인데, 여기 우리는 예수님의 의도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사야 61장 2절에는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며"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신원의 날은 심판의 날 또는 복수의 날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바로 이 복수와 심판의 역할을 짐짓 당신의 취임사 공약에서 빼셨습니다. 주님은 복수와 심판의 메시아가 아니라 사랑의 메시아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점이 세례요한의 메시아관과 다른 점이 아닐까요?
예수의 사랑 말씀, 사랑 실천, 그리고 사랑의 예수상은 당시 주변 사람들이 직접 듣고 본 것입니다. 마태 공동체의 주관적 해석이나 환상적 의견이라고 격하할 수 없는 공적인 사건이요 역사적인 행적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새로운 하나님의 모습과 본질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실천에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전지전능한 무서운 복수의 하나님이 아니라 약한 듯 하나 자기를 비우시면서 남들을 사랑하시는 새로운 하나님의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라는 진리를 새롭게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곧 사랑이라고 믿을 때 근본주의 교리들의 창구로만 하나님을 보고 믿으려는 기독교 신자들은 크게 실망할지 모릅니다. 나아가 조잡하게 철저한 무신론자(無神論者, vulgar atheists)들도 크게 실망할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자기를 비우고 희생시켜야 합니다.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무서운 존재, 그러기에 영원한 외톨이 하나님이 아니라 남들과 함께 아파하는, 남을 위한 존재인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은 무신론자들이 비웃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비웃음은 전폭적으로 무서운 전지전능한 복수의 하나님에 대한 비웃음입니다. 이를테면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왜 히틀러의 대학살을 방치하는가?" 따위의 질문을 통해 전지전능의 신이 없다는 것을 그들은 주장합니다. 아마도 사신식학자(死神神學者)들의 대응은 바로 이런 거친 무신론자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주기 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객관적 교리범주에 가둬둘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움직이는 사랑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무서운 복수자로 국한시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를 비우시기에 연약한 듯 보여도 참으로 강하신 사랑의 실천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사랑의 실천자이신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대한 초대교회 공동체의 신앙적 고백이 바로 성서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직접 듣고 본 것을 초대교회 공동체가 기록한 성서는 사건의 역사성과 실제성을 그 속에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제도화된 이래 그 거대한 조직 속에서 강조되어 온 신앙고백과 교리는 이와 같은 역사적 예수, 예수의 실제성을 약화시켰거나 망각했거나, 심지어 제거해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사랑으로 가르치시고, 사랑으로 봉사하시고, 사랑으로 치유하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던 예수님 모습이 전통적 신앙고백과 교리 속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천년을 눈앞에 두고 이 점을 우리는 심각하게 성찰해보아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사도신경을 한 번 간단히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4. 사도신경의 문제점

첫째, 이 고백 속에 사랑으로 살아 계신 나사렛 예수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 모습이 보입니까? 가난한 자들에게 큰 희망주시고, 벙어리로 하여금 우렁차게 말하게 하시며, 소경이 눈을 떠서 세상을 둘러보며 감탄케 하시고, 38년간 지체부자유자로 누워있던 자를 벌떡 일어나 자기 자리를 들고 당당히 걸어가게 하신 예수님, 온갖 중한 질병의 질고에서 환자를 낫게 하시면서도 환자의 믿음으로 온전케 됨을 확인시켜주신 사랑의 예수님, 절망의 땅 갈릴리에서 사랑의 구체적 실천을 통해 희망과 기쁨을 땅의 사람들 가슴속에 뜨겁게 집어 넣어주셨던 예수님, 바로 그 당신의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듣고 볼 수 없습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기독교는 제도 종교로 자리잡으면서 교만과 독선으로 서로 갈라지게 됩니다. 동방교회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강조한 결과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예수께서 탄생하신 것을 크게 부각시켰던 것 같습니다. 서방교회(로마 카톨릭)는 성육신보다 예수의 부활을 강조하다보니 그 점을 사도신경에 크게 부각시켰는지 모릅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예수님은 갈릴리 지역에서 사랑의 선교를 하셨는데 그 역사적 사건들은 모두 제거해버리고 바로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사 죽으신 것으로 그의 일생은 끝나고 맙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신 것과 죽게된 것으로만 표현되어 있습니다. 삶의 토막이 없어졌습니다.
물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의 탄생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성육신은 하나님의 뜻이 구체적인 우리의 상황과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구현됨으로써 계속 진행되는 사건이어야 합니다. 마리아에게서의 탄생으로 끝나버리는 것이 성육신 사건의 전부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도 성육신 사건을 더욱 활성화시켜주는 힘으로 작동합니다. 그것은 그렇다하더라도 왜 그토록 오랫동안 우리가 고백해 온 사도신경이 나사렛의 예수, 갈릴리의 예수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언급도 없습니까? 왜 다음과 같이 몇 마디라도 우리 주님의 실제를 표현하지 않았을까요?

"...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사랑으로 인간을 섬기시며, 가르치시며, 온전케 하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다가 본디오 빌라도에게...."

한마디로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당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직접 듣고 본바 있는 예수님의 역사적 행적과 사건들을 철저하게 담아내지 못한 교리와 신앙고백을 우리는 여태껏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거대한 관료제화된 교회에서 살아온 셈입니다. 를 우상화하면서 살아온 것 같기도 합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이 부끄럽습니다. 살아계신 주님께서 지금도 이렇게 탄식하시고 질책하시지 않을까요? "너희들은 성서가 증언하는 나의 행적과 사건을 철저히 듣지 않고 보지 않으려고 하는구나?"

5. 성서에 대한 바른 이해

성서기록은 역사적 일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객관적 전기도 아닙니다. 아마도 예수님에 관한 객관적 전기를 재구성하기란 거의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이 일에 매달렸으나 실패한 듯 합니다. 유명한 신학자였던 슈바이쳐 박사도 이 일에 매달리다가 실망하여 신학을 포기한 뒤 의사가 되어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가서 예수님의 사랑을 직접 실천하는 일에 여생을 바쳤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보편 타당한 전기(傳記)는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사렛에서 자라시고, 갈릴리에서 가르침과 섬김과 낫게 하심의 선교활동을 하시면서 당시 종교 지도세력과 마찰하셨으며, 그들에 의해 피소되어 마침내 로마 빌라도 총독의 법정에서 사형선고 받고 골고다에서 처형되신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성서는 이 사건들에 대한 초대교회 공동체의 신학적 해석일 것입니다. 아무리 해석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예수사건들에 대한 해석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성서는 저자가 속했던 공동체의 해석일 수 있고, 저자가 예수사건에 대한 기존의 해석 기록들을 편집, 정리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주관적 해석이나 그의 공동체의 견해를 준거로 삼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것을 준거로 해서 첨삭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떻든, 성서는 예수님 행적과 사건에 대한 신학적 또는 신앙적 해석임은 틀림없습니다. 바로 이 행적과 사건의 중요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우리의 신앙고백과 교회교리에서 구체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역사적 예수의 모습은 희미해지고 약화되면서 교리와 신앙고백은 더 소리 높여 강조되고 강요되는 듯합니다. 신자들은 교리를 통해, 신앙고백을 통해, 또는 거대화된 교회조직을 통해 희미하게 예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이제 새로운 세기를 맞으면서 갈릴리의 예수를 브로커 없이 직접 만나야 합니다. 예수사건은 2,000년 전에 한 번 일어났던 지난날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도 우리 속에서 계속 구체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사건 속에 지금도 여기서 추체험 해낼 수 있고 또 해내야 합니다. 우리를 사랑으로 온전케 해 주시는 우리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오늘도 추체험 함으로써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뜨겁게 성육신 하심을 감사해야 합니다. 이제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는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됩니다.
원래 비뚤어진 것과 깨어진 것을 아름답게 하나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늘도 하나되게 하시는 일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경우, 가슴아프게 분단된 조국이 하나되게 하시는 일에 오늘도 성경을 통해 우리 주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오늘도 포로 같은 인생들에게, 억눌린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자기를 비우시고 계십니다. 오늘도 억울한 고통 속에서 외롭게 몸부림치는 당신의 백성들을 낫게 하시는 일에 헌신하고 계십니다. 이런 실존적 깨달음이 예수사건에 대한 성서의 기록을 통해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새길공동체는 새로운 신앙고백과 결단으로 갈릴리의 예수님을 새롭게 공동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의 그 허망함을 청산해야 할 것입니다. "갈릴리 예수님이시어, 새로운 천년을 직접 이끄시어 당신이 그토록 이룩하시고자 하셨던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룩하여 주소서."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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