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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넘어지게 하는 한국교인들

마태복음 한완상............... 조회 수 1703 추천 수 0 2008.06.25 10:4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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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6:24 
설교자 : 한완상 형제 
참고 : 새길교회 
요즘 우리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예수를 따르는 길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예수를 열심히 잘 믿는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이러 저러한 세상 스캔들에 휘말려드는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새롭게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지난달에 몇 가지 일로 마음이 무거웠고 부끄러웠으며 또한 그 가운데서도 희망을 갖기도 했습니다.
첫째는 옷 사건 청문회를 보면서 느낀 자괴감이었습니다. 특히 어느 신문기자가 라는 제목으로 쓴 글을 읽고 나 스스로 기독교 신자라는 사실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두고 두고 뒷맛이 씁쓸한 대목은 하나님과 성경이 겪는 때아닌 수난이었습니다. 주요 증인으로 나온 세 여인 모두가 똑 같은 사안에 대해 정반대의 증언을 하면서도 하나같이 , , 등을 들먹이면서 자기들의 결백을 호소했습니다. 그중 한 분은 라고 말했고, 또 다른 권사 한 분은 성경구절(마태복음 5:34-35)을 인용하면서 고 강조하였습니다. 또 성경에 손을 얹고 맹세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당당한 표정으로 고 대답한 또 한 사람의 고관 부인의 모습을 보면서 그 기자는 이들이 하나님에게까지 위증했다고 날카롭게 비꼬았습니다. 정말 하나님에게 위증했다면, 그들은 하나님 믿기를 이미 중단했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기는커녕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했습니다(신명기 5:11).
그런데 이들의 한심하고 뻔뻔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그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요, 우리의 모습이요, 우리 한국교인들의 모습임을 확인하는 듯 하여 더욱 부끄러웠습니다. 이렇게 자괴감의 깊은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또 한 가지 사건이 생겼습니다. 어느 지방의 교회 신도들이 집단으로 탈출하여 종말론적 믿음으로 똘똘 뭉쳐 한달을 여기저기서 헤매면서, 상식 밖의 집단행동을 한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천년을 앞두고, 허황된 종말론이 지금 세계 여기저기서 그 괴력을 떨치고 있는 터에, 그것이 한국 사회에서 더욱 기승을 부리는 것 같습니다. 한때 휴거사건으로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한국 교회의 일각이 새 천년을 앞두고 계속 추문을 일으키게 된다면, 기독교와 교회가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한낱 시끄럽고 혐오스러운 사이비 종교로 인식되기도 할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한국 기독교는 부끄러운 짓만을 계속 저지르게 될까요? 왜 한편으로 부유하고 힘이 있는 교인들은 세상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부도덕한 짓, 사치스러운 짓, 하나님보다 맘몬(재물)을 더 섬기는 짓거리를 서슴없이 행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 힘없고 넉넉지 못한 교인들은 해괴망칙한 종말론에 사로잡혀 세상의 비웃음과 조롱거리의 대상으로 떨어지고 있을 까요?
게다가 또 우리를 서글프게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한 소녀가 병에 걸려 흉칙스러운 외계인처럼 배가 산만큼 불러 올랐습니다. 사지는 가느다랗게 달려 있는 듯 했는데, 무엇보다도 그 어린 소녀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호소하는 모습이 우리를 아프게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소녀의 부모가 자기 딸을 병원에 가서 고쳐줄 생각은 아예 하지 않고 하나님이 고쳐주실 것이라고 믿어 기도만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맹신의 기도로 인해 현대 의학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는 것도 안타깝지만, 신앙의 이름으로 자기 딸을 죽게 방치하는 그 부모의 무지와 무자비의 신앙에 놀랄 뿐입니다.
무엇보다 한국 교인들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생각으로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고 있는 저에게 신선한 편지 한 장이 전달되었습니다. 감리교 목사님으로 헌신하고 있는 이형수 목사님의 편지였습니다. 그 내용의 일단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저는 82년도 감리교 신학대학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강원도 및 충북 일대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많은 회의와 고민, 그리고 갈등을 겪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혁명적인 십자가 복음이 율법주의에 가려지고, 기복신앙에 왜곡되고, 샤마니즘 신앙에 오히려 예속되거나 이용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종교적 타락의 끝을 보았습니다. 가장 깨끗해야 할 종교집단이 너나 할 것 없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부패할 대로 부패해서 더 이상 성한 곳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물질주의와 대형주의가 진실과 진리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어 가치관의 혼란을 절감하면서 97년도에 제도권에 더 이상 머물러 있을 필요성과 가치를 느끼지 못해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현대 한국교회가 이처럼 부패한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으나 그 주범은 황금주의에 그리고 목회자들의 출세주의와 성공주의에 함몰되었다고 보면서, 무보수로 복음을 전하겠다는 각오로 군부대에서 지금은 목회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생활비를 조달하게 위해 점원, 택시기사, 막노동을 거쳐 지금은 공공근로요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한 성직자의 편지를 읽고 나니 한편으로는 신선한 충격을 받아 힘을 얻었습니다만, 다른 한편 옷 사건과 종말교도들의 행태를 보면서 갖게 된 의문점은 더욱 증폭되었습니다. 그 의문점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도대체 기독교 신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도대체 내가 기독교 신자인가? 기독교 신자로 행세하는 우리가 오히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괴롭히는 자들이 아닌가? 오늘 본문 말씀대로 우리는 예수를 넘어지게 하는 자가 아닌가?
예수님께서는 산상 보훈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철없는 제자들을 데리시고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한 고난의 순례 도상에서 영광과 성공, 출세와 행복을 바랐던 제자들, 특히 고난을 회피하려 했던 베드로에게 이렇게 꾸짖어 말씀하셨습니다.

"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태 16:23-24)

그렇습니다. 이 말씀에 비춰보면, 우리 한국 크리스천들은 대체로 성공, 명예, 권력, 부, 개인 영혼 구원 등을 바라고 믿는 영광의 신앙을 높이 받들면서, 고난과 죽음을 거친 참 영광은 알지 못합니다. 값싼 축복과 은사를 바라면서 적극적 사고를 숭배하는 자들입니다. 바로 이같은 신앙인들을 예수님께서는 사단이라고 불렀습니다. 영광과 출세의 신앙으로 예수를 따랐던 베드로의 얼굴에서 예수님은 얼핏 당신을 광야에서 유혹했던 사단의 모습을 본 듯 했습니다. 저렇게 많은 돌들을 떡으로 만들고 싶은 유혹, 곧 부(富)와 성공의 유혹을 물리치셨던 주님, 세상의 권세를 한 손에 움켜쥐고 싶은 권력과 영광의 유혹을 물리치셨던 주님, 바로 그 주님께서 오늘 한국 교회를 보시고 사단의 모습을 직시하시면서 라고 외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 외침의 소리가 들려오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숭배하는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막대한 재물을 모으고 쌓아 놓게 되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 세계에서 제일 큰 감리교회, 세계에서 가장 큰 장로교회가 모두 한국에 세워졌습니다. 그만큼 한국교회의 규모와 재물은 엄청납니다. 물론 교회 선교를 위해 재물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재물의 가치는 어디까지나 수단의 가치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한가지 수단인 재물의 가치가 신성한 목적의 가치로 변질되면, 교회는 교만해지고, 타락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그 큰 교회 안에는 떡으로 변한 돌들로 가득 찰 것이고, 그같은 돌을 많이 가져오는 사람들이 엄청난 위세를 누리게 될 것이며, 마침내, 그것은 거대한 의 바벨탑같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런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고 이형수 목사님은 그 바벨탑에서 탈출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걸고 넘어지게 하는 목사, 장로, 권사, 집사들로 가득 찬 큰 교회들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 많습니다. 바로 이런 교회에서 듣고 배우고 즐겼던 권사님들이 서로 불신의 전쟁을 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듯 합니다. 바로 이 모습을 이번에 우리는 청문회에서 보게 된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바로 여기서 예수 따름의 뜻을 새롭게 새겨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꾸짖는데 끝나지 않으시고, 베드로에게 적절하고 정당한 대안을 제시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신을 따르는 제자, 곧 예수신자가 되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십자가, 그것도 남의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의 십자가를 져야만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고 참된 크리스천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십자가 짐의 뜻을 새삼 밝히기에 앞서, 한국 교회의 십자가는 그간 심각하게 변질되었다는 사실부터 말씀드려야겠습니다. 한국 교회의 십자가는 고난과 부활의 상징이 아니라, 곧 고난을 거친 부활의 기쁨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 없는 부활의 영광을 숭배하는 우상의 상이 되어버린 듯 합니다. 한 마디로 그것은 값싼 영광과 출세의 부적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얼핏 보면 보탬(plus)의 기호인 +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사실 십자가는 보태어주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기쁨을 보태어 주는 힘입니다. 옥중에서도 즐거워했던 사도 바울은 바로 이같은 보탬의 힘을 고백했습니다. 많은 순교자들이 그 기쁨을 또한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의 문제는 십자가의 보탬 기능이 주로 맘몬(재물)의 보탬과 값싼 축복의 보탬을 뜻한다는데 있습니다. 말로는 영적 보탬을 주장하나, 실제로는 그것도 자기 개인 영혼 구원에 국한시키며, 말로는 선교의 보탬을 말하나, 그것도 자기의 큰 교회를 더욱 크게 하는 일로 착각합니다. 예수 믿으면 사업도 잘 되고, 병도 낫고, 운수 대통하게 되는 것을 십자가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바로 이같은 천박한 십자가 이해를 막기 위해 주님께서는 고 명령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맘몬과 권력을 보태주는 부적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지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일입니다. 부인하는 것은 보탬이 아니라 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를 빼는 일이요,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만일 청문회에 나왔던 권사님들이 바로 이같은 복음의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였다면 이렇게 대답했어야 했습니다.

"정말 부끄럽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남편과 그 사업 잘되기만 바랐던 저의 천박한 기복신앙을 회개합니다. 바로 이같은 기복신앙의 탐욕 때문에 하나님께 잘못을 범했고 같은 신자인 다른 권사님들에게 폐를 끼치게 된 것을 사과합니다. 제가 맘몬을 하나님 자리에 놓았다는 사실을 절감하면서 여러분들께 용서를 구합니다."
"정말 부끄럽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고난의 십자가, 자기 부인의 십자가를 부인하고 남편의 권세와 영광을 더 따랐고, 그 권세를 오용했던 교만을 회개합니다..."
"정말 부끄럽습니다. 국민들은 IMF 사태로 아픔을 겪는데 다른 장관부인들과 어울려 호화스러운 곳에 다니면서 특권의식을 가졌던 것을 후회합니다. 세상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인해 예수 안에서 서로 사귄 우정마저 저버리고 서로 다투고 미워하고, 모든 잘못을 하나님 이름으로 친구들에게 돌린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 마디로 십자가의 가르침이 자기 부인과 자기 비움, 즉 자기 빼기에 있음을 알았다면, 그들이 그처럼 어리석은 逆 傳道, 逆 宣敎의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에 한국교회의 책임이 큽니다. 특별히 큰 교회와 고관재벌이 다니는 교회의 목회자의 잘못 가르침의 책임이 큽니다.
예수님은 이같은 우리들을 깨우치시기 위해 당신 자신이 자신을 어떻게 비웠던가를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남들의 억울한 아픔을 고쳐주시기 위해서는 엄청난 성령의 힘을 행사하셨던 주님께서, 당신 자신의 평안과 기쁨을 위해서는 그 막강한 영의 힘을 단 한번도 사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처절하리만큼 모습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끝까지 자기를 빼시고, 자기를 이기셨습니다. 克己의 놀라운 감동을 십자가 위에서 보여 주셨습니다. 하기야 자기를 이긴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남을 이기는 것보다 자기를 이기는 일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 따르는 일, 곧 기독교 신자가 된다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기에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 사람만이 역사에 훌륭한 지도자로 남는 법이며 자기와의 싸움에서 진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는 경우 역사는 어김없이 어두워지고, 인권은 크게 훼손되며, 정의는 무참하게 무너지고 평화는 안타깝게 메마르게 됩니다. 우리는 지난날 이 모든것을 체험하지 않았습니까.
자기와의 싸움에서 진 사람은 선한 싸움에서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진 사람은 남과의 싸움에서는 반드시 이기려고 합니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진 사람은 남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진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선한 싸움, 정의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힘은 자기 탐욕과 허영을 이기는 힘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남과의 싸움에서 압승하려는 욕심은 참된 평화의 승리를 보장하지 못합니다. 압승은 마침내 처참한 共敗를 낳게 때문입니다. 자기만을 사랑하는 사람은 남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사랑은 자기를 비울 때 비로소 채워지는 감동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비우지 못하는 사람은 남의 사랑으로 자기를 채울 수가 없습니다. 자기 속에는 탐욕과 허영, 독선과 교만으로 이미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자기를 비우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고, 모실 수 있습니다. 자기를 비우는 사람은 곧 하나님을 모시는 지성소를 우리 안에 마련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이번 권사들의 전쟁을 보면서 예수님을 더욱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과 수모를 당하시게 될 때 예수 제자 중 어느 한 분도 주님의 구명을 위해 산헤드린이나 빌라도 권력에게 로비하지 않았음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는 로비스트가 필요 없었습니다. 또한 예수를 은 삼십냥에 팔아 이익을 얻었던 가롯 유다는 적어도 하나님과 이웃에게 위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선택은 어리석었을지라도 가증스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 우리 한국 교회 신자들은 가롯 유다보다 더 가증스럽다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교회로 아무리 많이 몰려 온다해도, 그런 큰 교회들과 신자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없습니다. 아마도 세계에서 십자가가 가장 쉽게 눈에 띄는 나라가 한국일 것입니다. 정말 십자가가 소금과 빛의 효력을 지닌다면, 왜 한국의 범죄율이 십자가가 눈에 쉽게 뜨이는 정도로 현저하게 떨어지지 않고 있을까요? 왜 한국이 부정부패에 있어 세계에서 앞서가는 것일까요? 그간 적고 큰 부정부패 사건에 연루된 교회 장로들이 한둘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처럼 큰 교회가 많고, 신자들도 많고, 십자가도 많은데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한국 교회의 십자가는 세상의 빛의 밝음을 비춰내지 못하며, 세상의 소금의 맛을 내지 못하는 한낱 기복적 부적으로 전락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한국교회의 십자가는 밝음을 오히려 어둡게 하고, 부패를 더욱 촉진시키는 추악한 보탬의 부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듯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윤리 없는 교회의 속된 힘으로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자리에 재물을 올려놓고 숭배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주님의 이름으로 가증스럽게 숭배하고 있습니다. 마치 권사들의 전쟁에서 권사님들이 , , 등을 들먹이면서 이웃에게와 하나님 앞에 위증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면서도 그것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는 듯이 태연히 해 내듯이, 한국 교회는 위선의 높은 수준, 몰도덕의 정점에 이르게 된 듯 합니다.
이제 새 천년을 앞두고 종말론에 심취할 때가 아니라, 깨어 일어나 회개하여야 할 때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예수를 넘어지게 했던 우리의 잘못, 우리의 가증스러운 위선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 신성한 십자가를 탐욕과 허영의 부적으로 전락시킨 우리의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각자 자기를 비워 남과 이웃을 사랑하고, 자기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주님이 가신 고난의 길로 향해 나가야 합니다. 그 고난의 끝에는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아니, 그 고난의 길목, 길목마다 부활의 기쁨이 있습니다. 성령으로 연약한 저희들을 도우시는 위로자가 고난의 고비 고비마다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먼저 주님을 넘어지게 한 저희들의 탐욕, 독선, 허영, 그리고 교만을 주님 앞에 회개할 때, 주님께서는 용서해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우리의 가증스런 위선과 탐욕으로 오늘도 우리 앞에서 화다닥 넘어지는 예수님을 우리는 똑똑히 볼 수 있는 영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참으로 잘못했습니다. 사단으로 변해버린 저희들을 용서하시고, 저희들이 스스로 자기를 부인하여 저희들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믿음의 힘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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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마태복음 은총의 세계 마20:1-16  서창원 목사  2008-02-26 2188
61 마태복음 균형 마4:23-25  장경동 목사  2008-02-10 2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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