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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守城)인가, 공성(攻城)인가?

마태복음 김창락 목사............... 조회 수 1362 추천 수 0 2008.09.04 23: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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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16:18-19 
설교자 : 김창락 목사 
참고 : 한신대학교 신학과 교수, 새길교회 2006.3.5주일설교 
제목: 수성(守城)인가, 공성(攻城)인가?
본문: 마태복음 16:18-19
설교: 김창락 목사(전 한신대학교 신학과 교수, 새길교회 2006.3.5주일설교)

1. 아마 1980년대 중간쯤이었을 것입니다. 그 때에 저는 어느 민중교회에 출석하고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서는 전 교인을 훈련시키는 교육 프로그램을 자주 실시했습니다. 그 가운데 한 가지는 제 의식 세계를 늘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이 타고 가던 비행기가 사막 한가운데 추락했는데 당신 혼자만 생존했다고 합시다. 구조대가 즉각 사고 지점을 찾아내어 구출하러 온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고 합시다.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 없습니다. 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공 여부는 불문에 붙이고 어떻게 해서든지 이 사막지역으로부터 탈출을 강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동에 지장이 없도록 휴대품을 될 수 있는 대로 간편하게 꾸려야만 합니다. 이러한 경우에 다음에 제시된 물품들 가운데서 생존에 꼭 필요한 물품 10 가지와 버려도 되는 물품 10 가지를 각각 차례대로 적으시오.” 이것은 돌발적 위기상황에 똑바로 대처하는 능력이 있는지를 테스트하는 문제였습니다. 저는 그 때에 제 얄팍한 상식 수준의 지식을 판단의 근거로 삼았지요. 사막은 낮에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고온이지만 밤에는 반대로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추워지니까 이 추위에 대비해야 한다. 체온을 높이는 방법이 무엇인가? 품목 목록에는 위스키 한 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지고 가야 할 물품 제1번에 위스키를 적어 넣었습니다. 물품 목록에는 또 화장용 손거울이 있었습니다. 살아남느냐 죽느냐 하는 위기 상황에서 화장한다는 것은 전혀 불필요한 일일 것이기 때문에 저는 이 손거울을 버려할 품목 제1번으로 적어 넣었습니다. 나머지는 어떻게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채점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탐색 비행기가 날아오는 경우에 내가 있는 위치를 알려주는 것이 중요한데 그 때에는 손거울로 햇빛을 반사하여 신호를 해야 하므로 손거울이 가장 필요한 물건이라는 것, 그리고 위스키는 체온을 높여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체온을 떨어뜨리는 것이므로 버려야 할 물품의 제 1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2. 그 때 이후로 이 참담한 실패의 기억은 항상 뇌리에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제 개인의 신상에 적용시키면 어떻게 될 것인지 종종 상상해 봅니다. 가령 사람이 가득 찬 큰 장소에서 필요 없는 인물 하나를 집어내어서 버리라고 하는 경우에 틀림없이 제가 그 제1호에 해당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문제를 우리의 현실 문제에 적용시켜 보기도 합니다. 가령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에 곧 큰 지진이 일어나서 온 시가지가 파괴되는 엄청난 재해가 발생한다고 한다고 할 때에 우리의 생존에 필요불가결한 것으로 파괴되지 않고 보존되기를 바라는 10 가지 항목과 당장은 없더라도 생존에는 별로 지장이 없다고 생각하는 10 가지 항목을 적어내라는 문제에 사람들은 어떤 답안을 쓰겠는가? 수도시설, 전기시설, 지하철, 주택, 교육기관, 의료시설, 금융기관, 백화점, 방송국, 신문사, 행정부, 국회, 법원, 정당, 공장, 노동조합, 영화관, 노래방, 미용실, 사우나 탕, 국립미술관, 남대문, 운동경기장 등등의 항목 가운데 교회가 끼어 있다고 하면 교회는 과연 어느 쪽에 몇 번째 항목에 기입되겠습니까? 오늘날 일반 사람들에게 교회, 그리스도교, 그리스도인의 인기가 바닥을 친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일반 사람들은 없어도 되는 항목의 앞쪽에 교회를 놓을 것입니다. 이것은 무지의 소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마는 그보다도 사실은 대다수의 교회가 그 본래적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문제를 좀 더 쉽게 바꾸어 봅시다. 서울 시내의 수 천 개 교회 가운데서 꼭 있어야 10 개 교회와 없어야 할 10 개 교회를 지목하라는 문제를 두고 우리가 섬기고 있는 교회는 어느 쪽 몇 번째 속할 것인지 한 번 진지하게 자문해 보는 것입니다.

3. 교회가 참으로 교회의 본래적 기능을 올바로 한다면 현재의 세상이 사라지고 하나님나라가 도래하는 그날까지 존속해야 하는 기관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증거하는 기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은 교회의 본분, 교회의 본래적 기능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잘 말해 줍니다. 이 본문은 예수에 대해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입니다”라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잇달아서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인데 주석적으로 세밀한 검토가 필요합니다.  

가) ‘교회’라는 용어는 사도행전과 서신들과 요한계시록에만 나타나고 네 복음서에는 사용되지 않았는데 예외적으로 마 16,18과 18,17에만 사용되었습니다.

나) 신약성서 전체에서 예수께서 ‘나의 교회’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오직 마 16,18뿐입니다.  

다) 신약성서 전체에서 ‘교회’라는 용어가 114회 정도 사용되었는데, 그 가운데서 단 한 번도 교회의 건물인 ‘교회당’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지 아니 했습니다. 3세기 중반 이전까지는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당’이라는 별도의 건물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신약성서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모임’. ‘회중’, ‘공동체’를 뜻합니다.

라) ‘내 교회를 세우겠다’라는 표현에 사용된 ‘세우다’라는 동사의 문자적 의미는 ‘집짓다’이니까 그것의 목적어인 ‘교회’는 건물로서의 ‘교회당’을 뜻한다고 볼 수도 있지마는 여기서는 상징적으로 교회를 건물에 비유해서 서술할 따름입니다.

마) ‘동창회를 설립/창립한다’는 표현은 동창회라는 모임을 만드는 것을 뜻하지 동창회 회관을 건축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 것처럼 ‘교회를 세운다’는 표현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수립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바) 여기에는 서로 적대하는 양대 세력이 대결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한쪽 진영에는 ‘교회’가 있고 반대편 진영에는 ‘죽음의 문들’이라고 지칭된 세력이 있습니다. ‘죽음의 문들’은 구약성서의 표현으로는 ‘서올의 문들’입니다. ‘서올’은 죽은 사람들이 머무는 세계를 뜻합니다. 헬라어로는 ‘죽은 사람들의 세계’를 ‘하데스’라고 하니까 신약성서에서는 ‘하데스의 문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죽은 사람들의 세계’가 ‘죽음’을 상징한다고 보면 ‘하데스의 문들’은 곧 ‘죽음의 문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죽음의 문들’이라는 표현이 ‘죽음’ 또는 ‘죽음의 세력’을 상징한다면 그 반대 진영에 서 있는 ‘교회’는 ‘생명의 세력’을 상징한다고 하겠습니다.  

사) ‘죽음’은 인간의 한계상황의 선상에 가로 놓여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도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을 뛰어 넘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죽음’은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최대의 적입니다. 그렇지만 신구약성경은 현재의 생물학적 생명이 무한히 존속하는 불로장생을 궁극적 이상으로 삼지 않습니다. 성경은 천수를 다 누리고 평안히 죽는 죽음을 비극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성경이 문제 삼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임’입니다. ‘죽임’은 자연적인 생명의 질서에 반하여 인간이 저지르는 악행의 소산물입니다. 성서 상으로 최초의 죽음은 아벨의 죽음인데 그것은 자연적 죽음이 아니라 죽임당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세계의 모든 언어에서 ‘죽음’이라는 낱말은 흔하게 사용되지마는 ‘죽임’이라는 낱말은 드물게 사용됩니다. 일찍이 서남동 목사님은 성서에서 또는 사도신조의 신앙 고백에서 “예수의 죽으심” 또는 “예수께서 죽으시고” 등의 표현은 “예수의 죽임 당하심” 또는 “예수께서 죽임당하시고” 등으로 표현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정곡을 찌른 통찰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말에는 ‘죽다’라는 자동사에 대응하는 타동사 ‘죽이다’가 있습니다. ‘죽다/죽이다’는 같은 어근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렇지만 문명어라고 자랑하는 영어, 독일어, 불어, 라틴어, 그리스어 등등의 모든 언어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영어 die/kill; 독일어 sterben/toten, umbringen, mordern; 라틴어 mori/interficere; 그리tm어 apothn?sko/apoktein?. 또 우리말에는 ‘죽다/죽이다’, ‘살다/살리다’의 명사형인 ‘죽음/죽임’, ‘삶/살림’이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실감 있게 사용하는 ‘죽임’, ‘살림’, ‘죽임 당함’과 같은 개념들이 신학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는 것은 서양 언어의 나쁜 관행에 오염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생명이 위협당하는 위급한 경우에 거의 모든 서양언어와 일본어는 ‘도와줘’인데 반해서 우리말은 ‘사람 살려!’입니다. 얼마나 적절한 표현입니까!  

아) ‘죽음의 문들’이 ‘죽임의 세력’을 상징한다면 그것과 대결하고 있는 ‘교회’는 ‘생명의 세력’,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살림의 세력’을 상징합니다.
한쪽 진영에는 ‘죽임’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있고, 다른 쪽 진영에는 ‘살림’ 또는 ‘생명’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대결하고 있습니다.

자) 양대 진영, 즉 죽임의 세력 진영과 살림의 세력 진영은 영토를 양분하여 안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지배 영역을 확장하기 위하여 상대 편 진영을 공격하는 전투를 감행합니다. ‘죽음의 문들이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라는 표현이 이러한 전투 상황을 잘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어느 쪽 진영이 어느 쪽 진영을 향하여 공격전을 전개하며 어느 쪽 진영이 방어전을 펼치는 것입니까? 교회는 수성을 하고 있습니까, 공성을 하고 있습니까?  

차) 여기서 교회의 세력과 죽임의 세력은 각각 거대한 성채로 비유되어 있습니다. 성채에서 성문은 방어 수단입니까?  공격수단입니까? 이사야 45,1-2에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나 주가 기름 부어 세운 고레스에게 말한다. 내가 너의 오른손을 굳게 잡아, 열방을 네 앞에 굴복시키고, 왕들의 허리띠를 풀어놓겠다. 네가 가는 곳마다 한 번 열린 성문은 닫히지 않게 하겠다. 고레스는 들어라. 내가 네보다 앞서 가서 산들을 평지로 만들고, 놋쇠 성문을 부수며, 쇠빗장을 부러뜨리겠다.”
또 이사야 24,12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성읍은 폐허가 된 채로 버려져 있고, 성문은 파괴되어 조각이 난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도 성채는 방어 수단이며 성채에 달린 성문도 방어 수단으로 사용됩니다. 위의 예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문이 열린다거나 성문이 파괴당한다는 방어벽이 무너진다는 것을 뜻하지 공격을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문들이 교회를 이기지 못 한다’는 것은 죽임의 세력이 교회의 공격을 버티어 내지 못하고 무너지고 만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지 않고 이 어구가 만일 교회가 철통같은 방어벽을 쳐놓고 죽임의 세력의 공격에 대하여 신도들을 안전하게 보호한다는 것을 뜻한다면 교회는 옛 시대의 ‘노아의 방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교회가 노아의 방주와 같은 도피성 기능을 하는 데 머문다면 그것은 단지 그리스도인들만의 잔치판은 될지언정 바깥 사회에 대해서는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 하는 기관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전위대로서의 교회는 성문을 굳게 잠그고 방어전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죽임의 진영을 격파하는 공격전을 벌이는 것입니다.    

카) 교회의 존립 목적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사명은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오게 하는 전위대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시면서 귀신이 침입하지 못하게 방어선을 그어 놓고 기다리신 것이 아니라 귀신과 대결하여 귀신을 축출하신 것과 같습니다. 베드로가 교회의 대표로서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마태복음에서 ‘하늘나라’는 하늘에 있는 나라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 복음서에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을 마태가 특유하게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무엇의 열쇠를 받았다는 것은 그것을 해결하거나 성취시킬 능력과 권한을 위임 받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참다운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오게 하는 사명을 위임 받았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오기까지 존속해야 합니다.

타) ‘매고 풀다’는 표현은 유대교에서 율법 학자들이 어떤 경우에 어떤 율법 조문이 효력을 발휘하는지 아니 하는지에 대한 유권 해석을 하는 기능을 지칭합니다. 교회가 위임받은 이 기능을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는 데 있어서 어떤 일을 옹호하거나 부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사법 제도에 있어서 하급심의 판결이 상급심에서 뒤바뀔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땅에서 매고 푸는 것은 하늘에서 매이고 풀릴 것이라는 말씀은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이 땅에서 하는 일은 모두 하나님께서 재가해 주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놀라운 특권입니다.

파) 타락한 거대한 제도교회는 오늘날까지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았다’는 말씀을 빙자하여 천당에 들어가는 입장권 판매업을 합니다. 마태복음의 ‘하늘 나라’는 하늘에 있는 나라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분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를 뜻합니다. 그것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하나님 나라’를 달리 표현한 것입니다.  ‘매고 푼다’는 말씀에 근거하여 교회가 마치 사죄권과 징벌권을 가진 듯이 행세하면서 신도들 위에 절대 권력으로 군림하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하) 오늘날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죽음의 문화’ 대 ‘생명의 문화’, ‘죽임의 세력’ 대 ‘살림의 세력’이 치열하게 대결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문화’, ‘죽임의 세력’은 절대로 죽음이나 죽임을 지향한다고 내세우지 않습니다. 고후 11,14-15에서 사도 바울은 “사탄도 빛의 천사로 가장합니다. 그렇다면 사탄의 일꾼들이 의의 일꾼으로 가장한다고 해서, 조금도 놀랄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거대한 죽음의 문화, 죽임의 세력은 오히려 생명과 평화와 정의의 수호자로 행세합니다. 테러를 발본색원한다는 명분 아래 무자비한 군사적 폭력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대다수 교회는 이 장단에 맞장구를 치고 있는 실정입니다.    

4. 시계가 발명된 19세기 초에는 특권층에 속하는 극소수만이 시계를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대다수 사람들은 시계는 없었지마는 시간은 있었습니다. 20세기 말과 21세게 초에 사람들은 거의 모두 시계는 소유하고 있습니다마는 시간은 없습니다. 현대의 인간은 시계를 차고 문화인 생활을 하는 듯한 착각 속에 살면서 시간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5.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너무나 복잡합니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렵습니다. 문제 해결의 방안으로 문명비평가들, 사회학자들, 경제학자들, 철학자들, 정치가들, 등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저마다 현란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여기에 그리스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명함도 내놓지 못할 정도로 주눅이 들어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지만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의 열쇠와 죽임의 세력을 무너뜨릴 능력을 위탁받았다면 이 시점이야말로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목소리를 높여야 할 때일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그 무엇도 섬겨서는 안 된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씀보다도 이 전투에 더 적절한 무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6. 고후 2,14-17의 바울의 말씀을 결론으로 삼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개선 행렬에 언제나 우리를 참가시키시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어디에서나 우리를 통하여 풍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그러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죽음의 냄새가 되고, 구원을 얻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에 이르게 하는 생명의 향기가 됩니다. 이런 일을 누가 감히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일꾼답게, 진실한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7.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사명을 감당할 때에, 오직 그러한 경우에만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올 때까지 없어지지 않고 존속해야 할 기관이 될 것입니다. 창립 예배의 설교를 되새겨 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간청에 답변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그 성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거울삼아 우리는 단순히 교회를 하나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본래적 본분을 다하는 그러한 열 교회 가운데 하나에 속하는 교회가 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세웠습니다. 이 목표야 말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때까지 새길교회가 이 세상에 존속해야 할 존재 근거일 것입니다. 올바른 교회를 일구어가려고 헌신하시는 모든 신도 여러분 위에 하나님의 위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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