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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승리: 승리주의를 넘어

마태복음 한완상............... 조회 수 1416 추천 수 0 2008.09.08 01: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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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4:8-10 
설교자 : 한완상 형제 
참고 : 새길교회 2006.4.23주일설교 
제목: 예수의 승리: 승리주의를 넘어
본문: 마태 4:8~10, 누가 22:36~37, 요한 19:28-30

얼마 전 청소년 적십자 대표들이 찾아와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던 중 저의 좌우명이 무엇인가를 물었습니다. 내 삶을 오늘까지 이끌어오는데 밝은 길잡이가 되어준 명언이 있다면 그것을 설명해 달라고 했습니다.

“우아하게 지는 것이 살벌하게 이기는 것 보다 멋지고 훌륭하다”라는 나의 대답에 젊은이들이 얼마간 놀라는 듯했습니다. 지는 것을 멋진 것으로 예찬하는 일이 요즘 세상 돌아가는 흐름과 너무 달랐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요. 온갖 경쟁에서 무조건 싸워 이기는 것을 출세와 성공의 미덕으로 여기는 것이 오늘의 세태이기에 젊은이들에게는 저의 좌우명이 이상하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웬만한 경쟁이나 경기에 임하면서 으레 “화이팅”을 외치는 것이 이 시대의 풍속도이니까요. 저는 이 같은 파이팅 소리를 들을 때 마다 속으로는 언짢아 집니다. 그것이 저에게는 퍽 어색한 외침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과연 지금 우리와 함께 사신다면, 화이팅을 외치는 무리 속에 계실까를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절로 내 고개를 흔들게 됩니다.

최근 수천 만 권이 팔린 세계적 베스트셀러『다빈치 코드』가 드디어 영화화 되었습니다. 오월 달에 우리나라에서도 상영될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한국기독교의 일각에서 그 영화 상영을 금지해달라는 청원과 함께 맹렬한 비난을 이 작품에 대해 퍼붓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믿는 신조나 교리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한국 전체 기독교 신자의 이름을 빌어 이 영화의 상영을 적극적으로 배척하는 일부 기독교 신자들, 특히 교회 지도자의 행태에서 반대세력을 무조건 힘으로 제압하려는 근본주의적 승리주의의 횡포를 보는 듯 했습니다. 이 나라 인구의 75% 이상이 기독교와 관계없는 건전한 시민들이며 기독교 신자들 중에서도 다른 종교와 문화에 대해 열려있는 자세를 지니고 있는 분들이 상당수 있을 텐데 특정영화가 이른바 <反 그리스도적>이라든가 <反 기독교적>이라고 해서, 비기독교신자 국민들이 그 영화를 관람할 자유마저 박탈하려는 종교적 독선과 야만성에 대해 경악할 뿐입니다. 부끄러워 얼굴 들기 힘들 것 같습니다. 영화 한 편, 소설 작품 하나로 인해 기독교 신자들의 확신과 생활이 통 채로 흔들리게 된다면 그러한 신앙은 마땅히 흔들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튼튼한 예수따르미로 새롭게 거듭나야 할 것 같습니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행동이란 대체로, 아니 언제나 반대세력에 대해 예수의 이름으로 가장 예수답지 않은 승리주의적 완승(完勝), 전투적 압승을 정당화해왔습니다. 이것이 저를 항상 슬프게 하고 부끄럽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저는 또 하나의 베스트셀러로 미국에서 잘 팔리고 있는 케빈 필립스(Kevin Phillips)의『미국의 神政政治(American Theocracy)』를 구입하여 읽어 보았습니다. 저자가 한때 닉슨대통령의 재선을 위해 미국 공화당 전략의 틀을 짰던 사람이기에 이 책의 논지가 더욱 설득력을 지닌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미국은 지금 부시 대통령 하에서 명백하게 현존하는 위기에 봉착했다고 진단했습니다. 첫째로, 현재 미국행정부는 석유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이라크 전쟁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둘째로 미국은 엄청난 부채국가로 전락했다는 것입니다. 현재 누적된 국가 부채가 8조 억 불(약 8,200조 원)을 넘어서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진짜 미국의 위기는 이 두 가지 현실에 더하여, 날로 전투적 근본주의 종교로 변질되고 있는 오늘의 미국 기독교에서 배태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종말론적 전투적 근본주의자들은 구약에 나오는 바빌론이 오늘의 이라크라고 확신합니다. 이스라엘을 공략하여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을 약탈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잔인하게 포로로 끌고 갔던 옛날 바빌론이 바로 오늘의 이라크로 부활하였다고 믿습니다. 지금의 후세인은 바로 그 옛날의 느부갓네살왕으로 보는 것이지요. 이 나라를 악의 축으로 정죄하면서 그의 제거를 위한 <거룩한 전쟁>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 같은 무모한 전쟁을 불러 일으켰던 종교적 열정 때문에 오늘의 미국은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는 것입니다. 악의 세력을 완벽하게 제압하며, 완승을 증명해 보이려는 기독교 확신의 광기가 바로 부시와 그 주변의 신보수정치인들을 이끌고 있다고 했습니다. 선제공격, 예방전쟁이라는 부시 정책이 바로 이 같은 종교적 과격주의에서 비롯되었기에, 미국의 위험은 분명하고 현존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이 이 같은 승리주의 가치에 대해 박수치며 기뻐하셨으며 지금도 하실까요?

오늘은 부활주일 지난 첫 주일입니다. 과연 부활의 그리스도가 승리주의 복음을 소리 높여 외쳤을까요? 부활 사건을 승리의 사건으로 해석한다면, 그 승리의 참 뜻은 무엇일까요?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 위에서 처절하게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신 말씀이 과연 승리주의의 완승을 선포한 것일까요? 도대체 역사의 예수, 인간 예수께서 제자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승리주의 가치를 선포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예수께서 승리주의를 반대했겠지만,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면, 과연 예수께서 반대세력을 힘으로 제압하려는 세속적 유혹에 대해 정말 자유로웠을까요? 예수 당시 로마제국의 승리주의, 시저의 승리 숭배, 즉 “Veni, Vidi, Vici”(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를 외쳤던 시저의 오만과 욕망에 대해 예수님은 어떤 입장을 취하였을까요? 인간 예수 자신도 그와 같은 권력의 승리주의 마력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을까요?

여기서 저는 역사의 예수와 부활 이후 그리스도 따르미들이 완승의 유혹과 승리주의의 시험에 대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주마간산(走馬看山)식으로나마 한번 살펴보고 싶습니다. 마치 영화의 단면들을 살펴보듯, 예수의 공적 생애의 면면에서 인간 예수가 겪었던 이 유혹 극복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저는 예수의 삶을 기록한 성서에서 승리주의 유혹이 예수를 수시로 괴롭혔던 흔적을 곳곳에서 살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큰 뜻을 품고 메시아로 세상에 나아가기 앞서 그는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하기야 이 유혹을 뛰어 넘어서기 위해 광야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겠죠. 대체로 기독교인들은 예수께서 마귀의 유혹을 이겼다는 결론만 중요시한 나머지, 그 과정에서 예수께서 겪으셨던 인간적 고뇌와 고투의 모습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하지 않는 듯합니다. 광야 40일간 그가 겪었던 치열한 내적 싸움, 외로운 몸부림과 그 깊은 고뇌에 대해서는 묵살해왔습니다. 40일 간의 긴 고투를 우리는 새롭게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도 지금 그러한 유혹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는 바로 경제적 부(富)의 가치일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먹을 것을 많이 확보한 사람일수록 힘이 있게 마련이지요. 특히 찢어지게 가난했던 예수 당시에는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돌처럼 흔한 것들을 소중한 재화로 변화시키는 힘, 그것은 지도자가 되려는 모든 이들에게, 특별히 반대세력을 힘으로 대번에 제어하고 싶은 지도자 지망생들에게는 참으로 달콤한 유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 예수는 이 문제로 번민한 듯합니다. 이 유혹을 이긴 뒤에도 곧 바로 그는 종교적 괴력을 과시하여 세상을 이끌 카리스마적 힘의 지도자가 되고 싶은 유혹을 또다시 받게 됩니다.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져도 천사의 도움으로 살아나는 극적인 기적을 통해 백성들을 감동시킬 힘을 얻는 일. 그것 또한 거역하기 힘든 유혹이었을 것입니다. 이 유혹 다음에 찾아 온 것은 천하를 통치하는 권력에 대한 유혹이었습니다. 당시가 팍스 로마나의 막강한 힘이 지배하던 시대였으니,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권력과 시저의 위력을 능가하는 절대 권력을 한번 휘둘러보고 싶은 욕심, 그것 또한 로마의 식민지 청년에게는 거역하기 힘든 유혹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라면 마땅히 이 같은 세속적 유혹에서 기계적으로 자유로워야 하는데 성서는 그렇지 않았음을 시사해 줍니다. 역사의 예수님은 공생애 시작부터 승리주의의 달콤한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그 유혹에 의해 흔들렸다는 점에 새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이 같은 유혹을 마침내 성령의 힘으로 뛰어넘은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 과정에서 그 같은 시련에 자유롭지 못했던 그의 인간적 모습은 오늘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그러한 유혹에 취약하여 끊임없이 그 유혹에 함몰되는 사례들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승리는 경제의 힘으로, 종교적 카리스마의 힘으로, 세속적 권력, 특히 군사력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며 부시 대통령이 그랬듯이 <임무완수(mission accomplished)>를 당당하게 외치는 방식으로 얻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승리는, 시저의 승리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인간의 탐욕과 독선의 힘을 성령의 도움을 받아 이겨내는 자기 비움의 힘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남의 패배, 남에 대한 물리적 힘의 제압에서 비롯되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광야의 시험 이후에는 이 같은 세속적 승리주의 유혹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광야의 유혹 소리는 공생애 기간 내내 끈질기게 예수님을 괴롭혔던 것 같습니다. 몇 가지 장면들에서 예수의 고뇌를 느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6장15절)은 흥미로운 장면을 보여줍니다. 예수께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가난했던 이들 백성들은 자기들의 허기진 배가 채워지자 예수를 즉각 자기들의 임금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보잘 것 없는 보리떡 다섯 개와 두 마리 생선으로 굶주렸던 인간들을 배불리 먹였으니 이들이 예수님을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싶어 했겠지요. 어떻게 보면 예수에게는 최고 지위가 그저 굴러들어오는 ‘행운’이 생긴 것이지요. 요샛말로 말하자면 여론 조사 결과 90% 이상의 압도적 지지로 대통령이 될 판이었으니 이러한 호기가 어디 쉽게 생기겠습니까. 이때 예수님은 잠시 흔들린 것 같습니다. 흔들리지 않으셨다면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제자들과 함께 다음 사역을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창조적 단절의 순간, 심각한 자기 성찰의 순간이 생겨납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모두 뒤에 남겨두신 채 홀로 산으로 가셨지요. 조용히 기도하시기 위한 것이지요. 광야에서의 고투와 비슷한 산 위에서의 조용한 내적 자기 다짐을 위해서지요. 자기 안에 소용돌이치는 유혹에 대한 반응을 잠재우기 위해 그는 조용한 곳으로 물러섰던 것입니다. 예수의 기적 행위를 보고 대번에 승리주의에 흥분하여 마치 큰 자리라도 차지할 듯 들떠 있는 제자들과 열광적으로 그를 왕으로 모시려했던 군중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아빠 하나님과 깊은 영적 대화를 통해 이 유혹을 물리치려고 홀로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여기에 예수의 외롭지만 아름답고 인간적인 고뇌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중병환자들을 치유해 주시고, 병의 근원으로 인식된 죄의 사슬에서 환자들을 해방하여 새 사람으로 일으켜 주셨을 때도, 군중들은 예수를 세속적 메시아로 모시고 싶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밥상 공동체를 이룩하시어 계급, 인종, 지역, 성(性)의 장벽을 허무시고 모든 사람들을 온전한 인격체로 받아들이시면서 그들과 음식을 함께 나누셨을 때도 많은 사람들은 감격하여 예수를 자기들의 카리스마적 지도자로 추대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앞세우게 되면, 그들의 적들을 대번에 제압하여 완승의 쾌재를 소리 높여 외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겠지요.

무력을 사용하더라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되고자 했던 젤롯당 사람들은 예수를 모세 같은 민족해방자로 높이 모시고 싶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의 열두 제자 중에는 시몬이 젤롯당원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나 베드로도 그 동조자였을 수도 있겠습니다. 한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준비하라고 당부하신 적도 있었지요(누가복음 22장36절). 젤롯 당원 중, 날카로운 칼을 품고 다니는 시카리파가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들의 역할을 인정해준 듯한 말씀을 하신 것 같기도 합니다.

계급의 장벽으로 한 맺혀있던 민중들은 예수를 계급해방자로 높이 받들어 모시고 싶었겠지요. 이런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얼굴에서 억눌린 자들의 해방된 희열, 가난한 자들의 풍만한 만족, 차별받던 자들의 신나는 웃음을 머리에 떠올리시면서 그들의 세속적 지도자가 되어 그들의 절절한 소망을 시원스럽게 이뤄주고 싶은 충동을 때때로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이러한 관점에서 다시 읽어보십시오. 누구보다도 예수께서는 그들을 사랑했으니까요. 그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그들의 적들을 통쾌하게 굴복시켜 그들을 해방시켜 주고 싶은 생각도 했을지 모릅니다. 바로 그 같은 승리주의 충동과 치열하게 싸우셨던 예수님은 참으로 외로운 분이였습니다. 그 실존적 고뇌를 제자들이 조금도 이해해주지 않았습니다.

으뜸 제자 베드로마저 예수의 고난과 패배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올라가게 되면 그곳에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에 의해 핍박받게 될 것이라고 알려주었을 때, 베드로는 예수에 매달려 그렇게 하지 않도록 간했습니다. 그곳에 올라가 왕이 되시어 온갖 영광과 권세를 누리셔야지 고난 받아 죽임 당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식으로 예수를 붙들고 말렸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단호하게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물러가라”고 꾸짖었습니다. 저는 이 같은 예수의 꾸짖음이, 물론 일차적으로는 베드로와 제자들을 향한 것이었다고 확신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예수 자신 속에서 움틀거리는 승리주의 욕구에 대해서 외친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거두어 달라는 인간적 간청 속에는 그 고난을 회피하고 세속적 영광과 안위를 추구하고 깊은 인간적 욕망의 찌꺼기가 아직도 자기 속에 남아있었던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요. 하기야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들의 연약한 모습이지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몽둥이를 들고 예수를 체포하러 왔던 제사장들의 사병들 중에 말고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급한 베드로가 칼로 그의 귀를 잘라버렸지요. 그때 예수님은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할 것임을 경고했습니다. 한때 제자들에게 그들의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사라고 독려했던 주님께서 이때는 칼로 대항했던 베드로를 꾸짖으셨습니다. 이것은 자기 스스로에게도 이 진리를 다시 한 번 다짐시킨 것으로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카잔차키스는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시기 직전 십자가 처형에서 스스로를 해방시켜 자기가 참 승리자인 것을 과시하고 싶은 유혹에 시달렸다고 상상했습니다. 작가의 상상력이긴 하나 상당히 설득력 있는 상상이라 하겠습니다. 주님은 운명의 순간까지 그러한 세속적 승리주의 유혹에 시달렸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그 유혹을 죽음으로써 이겨내셨습니다.

요한복음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셨습니다. 이 선포를 기독교 승리주의자들은 즐겨 예수의 압승과 완승의 단언이라고 믿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신 뒤 힘없이 운명하셨습니다. 완성과 완승을 선포하신 후 바로 적들을 격하게 쳐부순 것이 아니라 조용히 그러나 처참하게 십자가 위해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기에 다 이루었다는 선언의 내용은 승리주의적 제압의 메시지가 아니라, 철저한 수모와 패배의 메시지입니다. 로마권력의 입장에서나 제사장과 장로들의 시각에서 보면 처절하고 철저한 패자의 완벽한 모습, 그 처참함 모습의 자기 확인이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예수의 이 외침은 시저의 승리주의와 그것의 추종자들의 값싼 승리주의 잣대로 볼 수 없고 또 보아서도 안 됩니다. 철저한 자기 비움의 극치가 바로 운명 직전의 예수의 “다 이루었다”라는 선포에 농축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죽음은 승리주의 유혹의 패배를 뜻합니다.

여기서 황제 시저의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의 선포와 예수의 “다 이루었다”의 선포를 비교해 보십시오. 화려한 군마 위에 위풍당당하게 번쩍이는 칼을 높이 들고, 수많은 로마시민들의 환호성에 취하여 모든 로마와 적들을 물리치고 이렇게 개선했노라를 외쳤던 시저와 그 후예들의 승리주의 모습과, 초라하게 신 포도주를 머금은 우슬초를 억지로 마셔야 하는 수모를 겪으시며 “다 이루었다”를 외치신 예수의 모습을 비교해 보십시오. 피비린내 나는 전투장에서 죽은 시체들 위에 꽂힌 로마군기의 그 잔인한 펄럭임과 함께 울려 퍼지는 “이겼노라”의 함성과 십자가 위에서 벌거벗은 채 조롱당하며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를 외쳤던 예수님의 절규를 비교해보십시오. 예수의 승리는 승리주의 입장에서는 완패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처참한 완패이기에 사흘 후 그것이 바로 환희의 부활로 이어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상의 완패는 완벽한 자기비움입니다. 인간 속에 깊이 박혀있는 원래적인 탐욕과 독선의 힘, 완승과 승리주의의 탐욕을 완벽하게 비워내는 자기부정의 극치, 그것이 바로 참패를 통한 예수승리라 하겠습니다. 그 승리는 그의 부활로 폭발한 것입니다. 처참한 완패 없이 영광스러운 부활은 없습니다.

부활한 그리스도는 그 부활의 힘으로 제자들을 깨닫게 하셨고 새사람으로 일으켜 주셨습니다. 새사람의 힘은 세속적 권력의 사악함을 사랑으로 이겨내는 힘이지요. 결코, 악의 세력을 그 세력이 선호하는 악한 수단을 활용하여 이겨내는 승리주의적 힘이 아닙니다. 로마제국의 총칼과 야수들에 의해 순교당하면서도 하나님께 찬양드리며, 감사하며 죽어갔던 그리스도 따르미들의 행동, 바로 그것이 예수의 승리요, 그 승리가 로마의 승리주의를 극복해 낸 힘이었습니다.

부활을 체험했던 예수의 제자들 태반은 로마권력 하에서 예수님 못지않게 처참한 방식으로 처형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처형을 두려워하지 않는 놀라운 새로운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기를 자원했지요. 한때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말렸던 베드로가 예수의 죽음보다 더 처참하게 처형되기를 선택했습니다. 그 선택의 힘이 사형집행자들의 권력을 뛰어넘는 참 승리의 힘입니다. 사도 바울은 참수를 당했으나 “죽는 것도 유익하다(빌립보서 1장21절)”는 평소 신앙고백을 기꺼이 실천하는 승리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이렇게 죽고, 이렇게 패배함으로써 비로소 이기는 힘이 바로 예수승리의 힘입니다. 정말 감동적인 역설의 힘이지요.

이렇게 예수처럼 이겨야만, 악순환이 비로소 종식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모두의 승리가 됩니다. 승리주의 승리는 적들을 악으로 규정하는데서 시작됩니다. 적이 악이므로, 그 악은 무슨 방법을 쓰더라도 제거되어야 한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이 경우 악의 방법을 사용하는 데는 제한이 없습니다. 악한 수단의 사용은 활짝 열려있는 셈이지요. 온갖 악한 방법들을 다 동원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상대방 적의 악을 닮게 됩니다. 그래서 마침내 스스로 악의 세력이 되고 맙니다. 여기서 악을 제거하려고 했던 원래 의도는 역설적으로 스스로 악의 세력으로 전락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스스로 악한 세력이 됨으로써 결국 악에 굴복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악과 악간의 싸움으로 변질되고 맙니다. 그런데 상대방을 서로 악의 축으로 규정하는 순간 이 전쟁은 악한 전쟁이면서도 각기 자기들의 전쟁이 거룩한 전쟁이라고 위선적으로 우기며 그것을 정당화하고 미화하게 됩니다. 전쟁이 이렇게 잘못 미화될수록 그것은 더 무섭게 추진되고 그 결과는 양자 모두에게 엄청난 재앙이 되고 맙니다. 이것이 승리주의의 비극적 종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악순환의 고리를 원천적으로 끊어버리는 것, 그것이 참 승리임을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순간순간마다 인간으로서 승리주의의 유혹을 받으시면서도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을 통해 참승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부활의 승리는 결코 승리주의의 압승이 아닙니다. 그것은 고난과 죽음을 즐겁게 선택함으로써 얻어지는 참 승리였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을 위시한 예수제자들과 그 제자들의 제자들은 ‘패배’를 통한 이 같은 참 승리를 증거하였습니다. 이것이 빛나는 기독교의 전통입니다.

이렇게 빛나는 예수승리의 감동이 기독교가 국교로 전환되고, 교회가 기독교 왕국(Christendom)으로 변질되면서 점차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이 제도 기독교의 비극이지요. 가슴 아픈 일입니다. 정교한 교리가 다듬어지고, 교리의 창구를 통해서만 예수와 그리스도를 인식하고 이해하고 신앙하도록 교회가 강요하게 되면서 예수의 승리는 기독교의 승리주의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십자군의 횡포와 실패가 그것을 증언해 줍니다. 온갖 종교재판의 횡포와 권력이 또한 그것을 증언해 줍니다. 게다가 20세기에 들어와서 호전적 근본주의가 대두하면서 예수의 승리는 더욱 거칠게 승리주의로 변질됩니다. 최근 미국에서는 정경분리원칙의 해이를 통해 근본주의 권력이 국가부분을 장악하게 되면서 그 국가는 가장 무서운 승리주의에 도취되어 평화와 인권을 심각하게 위협하게 됩니다. 케빈 필립스가 염려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어떠합니까? 무슨 수단을 쓰던지 일류대학에 들어가 출세하여 권력을 누리는 것을 장려하는 우리 문화풍토를 제가 염려하는 것도 바로 값싼 승리주의 때문입니다. 소꼬리가 되기보다 닭머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즐겨하는 한국기독교인들을 염려하는 것도 바로 이 승리주의 때문이지요. <다빈치 코드> 영화상영 금지를 위해 순교를 불사하겠다고 나서는 일부 기독교신자들을 보고 걱정이 되는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처음 얘기로 되돌아가 봅시다. 초등학교 적십자 대표에게 제가 우아하게 지는 것을 저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의 뜻을 보다 적극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로 우아해지려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를 생각해봅시다. 그곳에는 상생과 평화가 큰 강물이 되어 흐르게 될 것입니다. 지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곳에서는 경쟁이 승리주의로 나아가지 않고 예수승리로 나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꼴찌가 결코 열등감에 시달릴 필요가 없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서로를 착한 친구로 보면서 최선을 다해 경쟁하되, 이길수록 나눔에 성실하다면 그 경쟁이 살벌한 승리주의 경쟁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지면서 더 당당해지고, 지면서 더 우아해 지는 반면, 이기는 자는 더욱 겸손해지고 이길수록 더 나눔에 성실해진다면 그곳에는 예수 승리의 선순환이 힘있게 작동하게 될 터이지요. 그곳에 승리주의의 악순환은 들어설 자리가 아예 없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선으로 악을 이기는 힘이 모아지게 될 것입니다. 로마의 원형극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면서도 서로 아끼고 사랑했던 초대 예수따르미 공동체가 바로 선으로 악을 이기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같은 감동의 공동체가 이제는 기독교권 안에서 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미국의 비극이요, 미국기독교의 모순이며, 바로 우리 한국기독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기독교 승리주의가 세속권력의 승리주의와 연합하여 예수의 승리를 조롱하고 무력화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기독교의 수치입니다. 그렇다고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만 우아하게 지는 것을 기뻐할 것이 아닙니다. 온 세상으로 예수 승리의 메시지는 울려 퍼져야하고 실천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대로 된 전도요 선교며 올곧은 복음화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진정한 평화가 복음전파와 실천에 따라 찾아 올 것입니다.

평화는 결코 승리주의라는 위풍당당한 군마를 타고 오지 않습니다. 평화는 예수승리라는 겸손한 나귀를 타고 옵니다. 마치 봄이 나비의 등을 타고 오듯이 말입니다. 이제 우리 예수따르미들은 예수님을 군마를 타고 지휘하는 십자군의 총사령관으로 추대하고 사모하는 어리석은 짓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도 적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부당하게 죽이는 자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역사적 예수도 자기의 반대자들을 악으로 규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내속에 있는 더 큰 부족한 점을 보라고 일러주셨습니다. 남의 결점은 티처럼 작게 보고 자기 결점은 대들보처럼 크게 보라고 권고하셨습니다. 그래야 참 평화가 오기 때문이지요. 그 평화는 예수의 겸손의 나귀를 타고 오시지요. 결코 시저의 화려한 군마를 타고 오시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 기독교는 예수님을 권력의 군마에 태우지 말아야합니다. 승리주의 십자군 백마(白馬)에 예수님을 총사령관으로 태우지 말아야 합니다. 연약하나 아름다운 나비의 등을 타고 봄이 오듯, 예수님의 승리가 저희들을 찾아오신다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을 우리는 따뜻한 친구로 뜨겁게 맞이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부활의 승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꽃피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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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마태복음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마6:10  조용기 목사  2008-09-23 1654
109 마태복음 나라이 임하옵소서 마6:9-10  조용기 목사  2008-09-23 1276
108 마태복음 은폐와 노출 마10:26-31  정용섭 목사  2008-09-18 1382
107 마태복음 하나님 나라의 통치방식 마20:20-28  정용섭 목사  2008-09-18 1925
106 마태복음 평화에 대한 예수코드: 가장 큰 축복 마5:9  한완상 형제  2008-09-15 1506
105 마태복음 느리게 살기 마25:34-40  류상태 목사  2008-09-15 1478
104 마태복음 하나님의 자기 전달 마12:1-8  차옥숭 자매  2008-09-08 1277
» 마태복음 예수의 승리: 승리주의를 넘어 마4:8-10  한완상 형제  2008-09-08 1416
102 마태복음 먼저 의를 구하라 마6:26-34  차옥숭 자매  2008-09-08 1561
101 마태복음 일곱 원수를 쫓아내라 마11:22  조용기 목사  2008-09-06 1587
100 마태복음 예수님의 최고의 관심사 마6:9-10  조용기 목사  2008-09-06 1657
99 마태복음 용서 마6:12  조용기 목사  2008-09-06 1573
98 마태복음 수성(守城)인가, 공성(攻城)인가? 마16:18-19  김창락 목사  2008-09-04 1362
97 마태복음 왜 사느냐고 물으면 마16:24-26  류상태 목사  2008-09-04 1679
96 마태복음 휘장은 찢어져 있는가? 마27:50-52  한세희 형제  2008-09-04 1443
95 마태복음 스스로를 지우시는 하나님 마16:23-25  한완상 형제  2008-09-02 1288
94 마태복음 예수를 넘어지게 하는 한국교인들 마6:24  한완상 형제  2008-06-25 1703
93 마태복음 하늘과 땅엔 예수의 웃음이 마6:26-30  조태현 목사  2008-06-25 1794
92 마태복음 지극히 작은 자 하나 마25:34-40  한인섭 목사  2008-06-20 1971
91 마태복음 전통적 가치와의 갈등과 극복 마5:38-42  최만자 자매  2008-06-15 1603
90 마태복음 말씀과 실천 마7:24-27  정하영 목사  2008-06-06 1807
89 마태복음 죄짓게 한 자에게 화가 있다 마5:20-26  최영실 교수  2008-06-06 1654
88 마태복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마11:28-30  서중석 목사  2008-06-06 7843
87 마태복음 크리스마스의 기분과 예수가족의 아픔 마1:18-25  한완상 형제  2008-06-06 1948
86 마태복음 저주받은 도시들 마11:20-24  박광현 목사  2008-06-03 1840
85 마태복음 열정 예수 마9:35-38  이정선 목사  2008-06-03 2181
84 마태복음 잠만 주무시는 하나님 마8:23-27  이정선 목사  2008-06-03 2105
83 마태복음 새로운 세계, 새로운 관계 마11:2-11  이재정 목사  2008-06-02 1800
82 마태복음 추수할 일꾼을 보내주소서 마9:36-38  김경남 목사  2008-06-02 2204
81 마태복음 믿음과 삶 마17:1-7  박충구 목사  2008-05-30 2072
80 마태복음 원수와 악을 어떻게 사랑하나? 마5:38-39  한완상 형제  2008-05-30 1878
79 마태복음 6.25를 되돌아 보며 마5:38-48  조용기 목사  2008-05-19 1727
78 마태복음 행복 선언 마5:1-12  정양모 신부  2008-05-19 2087
77 마태복음 육신이 되신 말씀의 아픔 마25:31-46  한완상 형제  2008-05-16 1737
76 마태복음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마1:20-23  이경숙 교수  2008-05-16 2365
75 마태복음 세상을 구할 자 마4:1-11  길희성 형제  2008-05-16 1914
74 마태복음 추수의 보람과 나눔의 기쁨 마6:25-34  이재정 목사  2008-05-13 1585
73 마태복음 오직 생명으로만 마6:25-34  최만자 자매  2008-05-13 1557
72 마태복음 주님의 기도 마6:9-13  정양모 신부  2008-05-13 1763
71 마태복음 예수 없는 교회와 신앙고백 마11:1-6  한완상 형제  2008-04-25 1686
70 마태복음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 마13:1-9  조용기 목사  2008-04-18 3438
69 마태복음 일용할 배고픔 마6:11  서중석 목사  2008-04-18 1664
68 마태복음 예수님의 진노, 오늘 누구에게 향할까? 마23:29-36  한완상 목사  2008-04-18 1706
67 마태복음 삶과 죽음과 부활 마28:16-20  정양모 신부  2008-04-11 2260
66 마태복음 오직 하나님, 오직 예수님 마22:35-38  조용기 목사  2008-04-06 2635
65 마태복음 믿음으로 삽시다 마17:14-20  한태완 목사  2008-03-25 2601
64 마태복음 부자 청년의 경우 마19:16-23  손규태 목사  2008-03-17 2297
63 마태복음 제자들의 특징 마10:1-4  한태완 목사  2008-03-13 2458
62 마태복음 은총의 세계 마20:1-16  서창원 목사  2008-02-26 2188
61 마태복음 균형 마4:23-25  장경동 목사  2008-02-10 2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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