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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십자가를 지라

마태복음 한태완............... 조회 수 2709 추천 수 0 2009.04.29 13:3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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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16:13-28 
설교자 : 한태완 목사 
참고 : http://je333.com 
찬송: 십자가를 질 수 있나 (519장)

프란시스 자비어(France Xavier)라는 사람이 자신의 선교지를 동양으로 결정하고 출발하기 전날 밤 꿈을 꾸었습니다. 그 내용은 그가 앞으로 감당해 내야할 고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건너야 할 강과 광야와 사막을 보았고, 추위와 배고픔, 더위와 갈증, 그리고 핍박을 보았습니다. 자기를 숨어서 기다리는 원수까지도 합세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한 광경들이 하나씩 다 지나간 후 그는 잠에서 깨어 벌떡 일어나 앉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오! 주님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오히려 나는 주님을 위해 기꺼이 견디겠나이다" 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 24)
미국인 부부가 독일의 오베라머가우에서 유명한 수난극을 관람했습니다. 공연 후에 그들은 예수역을 한 배우를 만나려고 무대 뒤로 갔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남편은 배우가 극중에서 지고 갔던 십자가를 발견했습니다. 사업가인 그 남편은 부인에게 카메라를 건네주며 말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내 모습을 찍어 줘요."
그는 등을 구부리고는 커다란 십자가를 어깨에 짊어지려 했으나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얼굴에 땀을 흘리며 낙담하여 그는 배우를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속이 빈 것 인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무겁죠?" 배우는 대답했습니다.
"내가 무거움을 느끼지 않았다면 나는 그 역을 해내지 못했을 겁니다.
성경에 보면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자기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에 주님은 말씀합니다.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마20:23)
야고보와 요한처럼 나는 그리스도의 잔은 마시지 못하면서 그분의 옆에 앉게 해 달라고 바라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헌신적인 크리스천을 만나게 되면 나는 내가 속이 빈 십자가를 지고 가기를 원한다는 것을 깊이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자신에게 묻고 또 묻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잔 (고결함과 뜨거운 동정심과 용기 있는 신앙고백과 섬김의 잔)을 마실 수 있겠는가? 이 잔은 주님의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두 제자를 데리고 어떤 길로 들어서셨습니다. 거기서 주님은 각자에게 무게가 똑같은 십자가 하나씩을 건네주시며, 당신은 이 길이 끝나는 곳에 가 있을 테니 그곳까지 십자가를 지고 오라고 지시한 다음 자취를 감추셨습니다.
첫 번째 제자는 가볍게 십자가를 매고 가는데 반해, 두 번째 제자는 지독히 힘들어하면서 뒤쳐져 따라왔습니다. 십자가를 걸머진 지 하루만에 첫 번째 제자는 길 끝에 당도하여 십자가를 스승에게 넘겨드렸습니다. 주님은 첫 번째 제자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아주 잘 했다."
두 번째 제자는 이튿날 저녁이 되어서야 길 끝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한 제자는 십자가를 주님의 발 밑에 내동댕이치며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저한테는 다른 제자보다 훨씬 더 무거운 십자가를 내주시다니요! 제가 이제야 온 것도 그 때문이라구요!"
주님은 마음이 상한 채 슬픈 얼굴로 두 번째 제자를 바라보며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둘 다 똑같은 무게였느니라." "그런데도 앞사람은 아주 쉽게 십자가를 옮겼는데, 유독 저만 십자가를 옮기느라 쩔쩔 맸다 이 말씀입니까?"
주님이 그에게 타이르셨습니다. "십자가를 탓하지 말아라. 그 까닭은 십자가를 지고 오는 동안 줄곧 불평을 늘어놓은 너에게 있느니라. 네가 불평할 때마다 십자가의 무게는 늘어났던 거야. 앞에 온 제자는 십자가를 지고 있는 동안 사랑을 실천했기 때문에 그 사랑이 십자가의 무게를 덜어준 거야. 그래서 힘들이지 않고 옮길 수 있었던 거지."
구전(口傳)에 의하면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로마 사람들이 주문하는 십자가를 만드는 전문 목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어릴 때에 아버지 요셉을 도와 열심히 목수의 일을 하셨으므로 예수님도 십자가를 만드는 전문가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십자가를 만드는 전문가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전문가이셔서 지금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절한 십자가를 친히 만들어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10:38)
유대인들에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일 어떤 주인에게 두 마리의 소가 있는데 한 마리는 약하고 힘이 없고 또 한 마리는 강하고 힘이 세다면 어느 소에 무거운 짐을 지울까”
물론 강하고 힘이 센 소에 무거운 짐을 지웁니다. 나의 십자가가 유난히 무겁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질 만한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직접 십자가를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교부(敎父) 히에로니무스는 교황 다마수스 1세의 명령을 받고 70인역 성경을 이탈리아어로 번역하게 되었습니다. 3년 만에 신약 개역을 완성했는데, 그는 그동안 수많은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를 비난한 자들은 성경을 개역하는 것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히에로니무스는 이때 괴로운 형편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만일 내 직업이 왕골 바구니를 엮는 것이거나, 종려나무 잎사귀로 방석을 짜는 것이어서, 내 이마에 땀을 흘림으로써 매일 살아가는 벌이를 하는 것이었더면 남의 시기는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 구주의 명령에 순종하고, 모든 영혼의 유익을 위하여, 썩지 아니하는 떡을 준비하는 동시에, 어떤 지식 없는 사람이 심은 잡초를 지식의 밭에서 뽑아내는 일을 택하였기 때문에, 두 가지 비평을 받게 되었다. 내가 성경 본문에 잘못된 것들을 고치면 나를 곡필가(曲筆家)라 배척하고, 만일 내가 그런 잘못된 것들을 고치지 아니하면 잘못된 것을 덮어두었다고 욕할 것이다.” 라고 한탄했습니다.
교회사에서만이 아니라 현재에도 큰 일을 하는 지도자들에게는 언제나 비난이 따라 다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에 대해 도전하는 사람은 주의 진노를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저마다 자기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가 다 있습니다. 그 크기와 무게는 다를 수 있으나 십자가가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아버지 되시는 분은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지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어머니가 되시는 분은 어머니가 되시기 때문에 지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자녀가 되는 사람은 자녀이기 때문에 지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대통령은 대통령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십자가를 지고 있습니까? 어떤 십자가 때문에 힘들어하고 계십니까?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어떤 십자가일지라도 질 수 있는 십자가입니다. 질 수 없는 십자가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께 헌신을 해야 합니다. 각기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여러분이 성경에서 보십시오. 십자가에 죽게 흉계를 꾸민 것은 유대 나라의 지도급 인사들 서기관, 제사장, 장로들이라고 했습니다. 그 흉계에 놀아난 사람이 가룟 유다입니다.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공개적 고소를 한 사람들은 유대 백성이고, 그 민중 데모가 두려워서 공개 처형을 시킨 사람은 빌라도였습니다. 현장에서 못을 박은 사람은 로마 군인이었고, 영문도 모르는 군중은 군중 심리에 휘말려 박수를 쳤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그 중에 누구를 상대해서 싸움을 하셔야 되겠습니까? 빌라도는 실제로 예수를 놓아줄 기회를 만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그 시간에 예수는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만일 네가 여기서 정의의 말이나 옳은 말을 하면,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넉넉한 논리를 제공한다면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죽일 권세도 있느니라." 그러나 예수님은 절대 한 마디 하지 않으셨어요. 왜 그러셨는가 말입니다. "이 일은 아버지가 내게 주신 것이다." 그는 그 시간에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이것은 여기 있는 모든 군중들의 흉악한, 그러나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이니까, 빌라도여! 내가 이 시간 구차한 변명을 해서 네 손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치사한 말을 하겠느냐? 어서 말하라! 선언하라! 나는 십자가를 지도록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길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지고 가겠다는 굳은 결심과 약속을 평소에 합니다. 그러나 정말 십자가를 져야할 시간이 닥치면 십자가는 버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직계 제자 12명도 똑같은 반응을 행했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그 길을 올라가실 때 그 제자들이 했으면 좋았던 일이 있습니다. 로마 군사들이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어깨에 메우게 하고 갈보리 산을 채찍질하면서 올라가게 했을 때 신체적으로 사실 그 일이 너무 힘에 벅차고 무거워서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전설에 의하면 14번 쓰러졌다는 기록이 있고 쓰러진 장소마다 기념하는 어떤 표시를 했습니다. 상황이 너무 안 좋으니까 로마 군인들이 "이 예수는 몸이 약해서 갈보리 골고다까지 도저히 올라가지 못하겠다! 그러면 이 약속에 차질이 빚어지는데 …" 그래서 구경하러 나온 구레네 시몬을 현장 징발해서 "네가 좀 대신 지고 가라!" 그래서 예수님은 잠시 고통을 구레네 시몬 때문에 잊게 됩니다. 바로 그때 그렇게 용감하게 나서기를 좋아했던 베드로가 나타나서
"주님, 제가 지겠습니다." 하고 그 십자가를 자기가 지고 올라갔다면 …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가장 나이가 젊은 요한이 덤벼들어서 "예수님, 비키세요. 내가 질게요."
만약 그랬다면 그 광경이 얼마나 아름답고 또 주님은 기뻤겠습니까? "아, 그래도 내 제자들이다." 그런데 그 현장에 제자들은 어디로 갔는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눈을 뜬,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라든가, 죽었다가 살아난 예수님 때문에 다시 살아난 나사로라든가, 온갖 질병에 시달리다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 그 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 혹은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 남자가 먹었다고 했는데 5,000명 남자 중에 단 한 사람만 그 시간에 십자가를 졌어도 그 이야기는 영원히 빛날 뻔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몇 가지의 십자가 표시 문화가 생겼습니다. 무덤 앞에 꽂혀 있는 십자가! 영생을 약속하는 뜻입니다. 푸른 색깔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병원을 상징하는 것으로 질병에서의 구원입니다. 붉은 색깔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인간 고난에 동참한다는 적십자입니다. 교회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 하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이 목걸이나 옷에 달고 다니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나는 예수의 제자"라는 뜻입니다. 북유럽 4개국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은 국기가 다 십자가입니다. 네 나라가 똑같습니다. 색깔만 다릅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이 나라의 주인이란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다 자기 십자가로 생각하고 참고 살아야지요.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는 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는데, 이런 병도 십자가로 생각하고 견디어야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지금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병의 원인입니다. 이 사람은 평소 너무 많이 먹고 불규칙한 식사 생활로 인해 위장병이 생겼던 것입니다. 이렇듯 자신이 몸 관리를 잘 못하고 음식에 지나친 탐욕을 부리다가 얻은 병을 십자가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런 이야기도 합니다. “십자가로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의 가난이 한때 방탕하고 사치해서 생긴 것인데, 그렇게 해서 생긴 가난을 십자가로 간주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십자가는 고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겪는 고난이 다 십자가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분명한 잘못과 실수로 야기되는 고난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는 두 개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착각의 십자가’와 ‘복음의 십자가’입니다. ‘착각의 십자가’는 고난은 고난이되 신앙 때문에 얻게 된 고난이 아니라 인간의 욕심과 죄로 인해서 생긴 고난입니다. 반면 ‘복음의 십자가’는 신앙을 버리면 겪지 않아도 될 불이익과 고난이지만, 순전히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맞게 되는 고난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져야 할 십자가는 ‘착각의 십자가’가 아닌 ‘복음의 십자가’입니다. 당신이 지고 있는 십자가는 ‘착각의 십자가’입니까, 아니면 ‘복음의 십자가’입니까?
십자가란 희생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성취되고 이루어지는데 내가 어떤 십자가를 져야 할 것인가? 약삭빠르게 십자가를 피해가며 내가 살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 마옵소서. 십자가만은 안되겠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영광의 길을 따른다”는 말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따른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사람은 어디에 가든지 주님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십자가를 회피하고 우리의 영혼이 살고 축복 받는 길은 결코 없습니다. 축복을 원하면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잘 져야 합니다. 새의 날개가 무겁지만 잘라버리면 날지 못하고, 베의 돛도 무겁지만 잘라버리면 항해를 할 수 없고, 시계추도 무겁다고 떼버리면 시계가 돌아가지 않듯이 성도가 십자가가 무겁다고 던져버리면 그 날로 축복의 문도 닫히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정수는 십자가입니다. 요새 신령하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환상을 보고, 천국을 보고, 예언을 하고, 신유의 은사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 분들이 최고의 성도일까요? 아닙니다. 최고의 성도는 주님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성도입니다. 돈이 없고, 학력이 없고, 외모가 없어도 십자가를 지는 자는 어디에 가든지 인정받고 존경받습니다. 진정한 축복은 십자가의 희생 속에 있습니다. 가끔 우리는 삶이 허무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제일 먼저 할 일은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삶의 보람이란 섬기는 삶의 대가로 얻어진 정신적 보상이지만 공허는 자기 안일과 정욕을 위해 살다가 생긴 삶의 후유증입니다. 그러므로 삶에서 보람을 느낀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고 존귀하게 살고 있다는 표시이고, 삶에서 공허를 느낀다는 것은 십자가를 외면하고 비천하게 살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흔히 여자는 세월이 갈수록 값이 떨어지고, 어머니는 세월이 갈수록 값이 올라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머니에게는 십자가의 헌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희생해서 남에게 베풀고 살면 삶은 점차 고귀하게 되고, 인생의 행복도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기적의 불씨입니다.
어느 날, 어떤 가정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남편이 교회에 나가는 것을 반대한 것입니다. 너무 마음이 괴로워서 40일 작정 새벽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말씀 듣고 기도하면서 십자가 외에는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최선을 다해 남편을 섬겨주었습니다. 그리고 40일 새벽기도가 끝나는 날 저녁에 진지한 대화 기회가 생겨서 말했습니다. “여보! 지난 10년 간 당신에게 항상 고마웠어요. 내가 좀더 잘했어야 하는데...” 그러니까 남편이 “왜 이래! 갑자기!” 하고 핀잔을 주었지만 만족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조금 더 대화를 하다가 이 아내가 자기 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여보! 당신을 정말 사랑하지만 나는 믿음 생활하지 않으면 살 수 없어요. 이제는 당신이 좀 내 신앙생활을 도와주세요.” 그러자 남편이 “요즘처럼 살림 잘하려면 다녀!”라고 말하더랍니다. 그렇게 해방된 후에 더욱 기쁜 마음으로 지내니까 얼마 후에 남편마저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면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생시킬 목적으로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축복하시려고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잘 지면 주님은 우리의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넘치도록 채워주신다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고, 사실상 알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헌신하는 마음으로 살면 하나님의 우리의 꿈과 비전과 미래를 붙들어주시고, 가장 복된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주실 것 하나만 알고 살면 됩니다. 항상 십자가를 잘 지고 승리하는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다." (21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때 주님의 마음은 이제는 제자들도 고난에 대비할 마음 준비를 하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조금 전에 그렇게 훌륭한 신앙고백을 했던 베드로가 돌변을 합니다. 22절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그랬더니 예수님은 책망을 하십니다.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베드로의 말 때문에 넘어질지도 모르는 위험이 찾아왔기 때문에 그것을 물리치고 안 넘어지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상 예수님의 마음에도 십자가만은 피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에 가장 고민이 되고 피했으면 좋은 십자가를 자신이 제일 신뢰하는 베드로가 말하니까 마음이 흔들리시는 것입니다. 가장 강력하고 극단적 방법이 아니면 이 위험한 상황을 예수님도 극복하기 어려운 상태로 되었기 때문에 가장 측근의 고백자, 베드로를 타고 들어오는 사단의 유혹을 예수님은 단호하게 물리치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베드로는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했는가? 자기도 그 길만은 가고싶지 않아서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지금 출세의 꿈이 있습니다. 갈릴리를 떠나본 일이 없는 가난한 어부가 조상이 물려준 낡은 조각 배 한 척에 수십 군데 찢어진 그물 하나로 고기를 잡아서 생계 유지를 하는 어촌 영세민이 예수님을 따라 나선 후 그래도 그의 눈에 뭐가 보였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된다는 소문도 무성하고, 자기에 대한 신뢰도도 매우 충분한 것 같이 보이고, 이대로 가면 보장된 출세 자리라 보였습니다. 그런 희망찬 베드로 앞에 예수님이 이제 나는 고난을 당하고 죽어버린다니 그러면 나도 죽으란 말인가?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실제적으로 이때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듣고 싶었던 말은 "내가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하나님이 내게 허락해 주신 권위로 유대인의 왕이 되겠다. 그리고 이 민족이 그토록 소원하고 있는 로마로부터 국권 회복을 내가 이룩할 것이며 이제 너희들은 나의 이 위대한 민족적 거사에 적극 동참해 주기 바란다. 내가 통치자의 자리에 앉을 때는 너희는 이 나라의 열두 장관이 될 것이다. 약속하겠다." 이런 말입니다. 그걸 기대하고 지금까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온갖 고생을 했는데 이제 남은 일이 그 사회의 지도급 인사들인 그들이 가장 미워하고 있는 장로들과 대제사장, 서기관들에게 잡혀 고통을 당하고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여 죽어버린다고 하니 세상에 이런 슬픈 패배가 또 있단 말인가?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이것만은 안되겠습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베드로의 마음을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항변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준비가 다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예수님의 것이고 베드로가 져야 할 십자가는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든지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신의 십자가를 가지고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사실 베드로는 몇 번의 실수를 통해서 예수님께 실망을 드렸는데, 그런 일이 다 지나간 후에 주님 곁으로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때는 로마 황제 가운데 가장 악명이 높은 네로가 미치광이처럼 자기 어머니와 아내까지 모두 죽여버리고 로마시의 모든 기독교인들을 절대 핍박하던 그 시절, 그 험악한 상황에서 베드로는 버리고 갔던 십자가를 향해서 달려옵니다. "베드로의 시" 라고 제목을 붙인 시(詩)가 하나 있습니다.
"오! 나의 십자가여! 내가 버렸던 십자가여! 내 그토록 다시 보고싶던 나의 십자가여! 주께서 달려 돌아가신 그 십자가에 오늘 나 또한 죽게되니 감격으로 그대를 맞노라. 나 얼마나 그대를 그리워했던가! 나 얼마나 그대를 사랑했던가! 그대는 오늘 나를 주님의 곁으로 인도하니 나 이제 그대의 품에 오늘 달리겠노라."
오늘날에는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죽이겠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 신앙 생활을 한다고 사회적으로 왕따가 될 염려도 사실 없습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진리는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영원히 주님은 우리에게
"이것만은 네가..." 그것이 곧 십자가입니다. "너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저 같은 사람은 하늘나라 갈 때가지 이 목회를 해야 되는 것이 나의 십자가입니다. 각양 각색의 은사 따라 하나님은 십자가를 주십니다. 베드로의 시처럼 "오! 나의 십자가여! 나 그대를 사랑하노라! 내가 지고 순례의 길 가다가 함께 주님 곁으로 갈 나의 십자가여! 십자가 없는 나의 인생의 존재는 의미가 없노라. 사랑의 나의 십자가여!"
이 말씀을 듣고 보시는 성도 여러분 모두가 주님이 부탁하신 그 십자가를 지고 믿음의 승리자가 될 것을 축원합니다.
* 기도: 사랑의 주님, 죄인 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영원한 구원을 베푸심을 감사드립니다. 크신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며 죄를 짓지 않고 살도록 우리에게 영적인 힘을 주소서. 시련이나 핍박을 당한다 해도 예수님의 고난을 되새기며 이기게 하소서.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잘 지고 주님을 따르게 하소서. 세상의 어둠을 밝히신 주님의 뜻에 따라 우리가 머무르는 자리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게 하소서. 우리 사회의 깊은 불화와 갈등, 세대와 계층 사이에 가로막힌 담을 허물어 주소서. 그리하여 진정 이 땅에 평화가 넘치고 모두가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소서. 우리는 주님께서 겪으신 고난과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주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의 죄와 허물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희생을 기억하며, 주님을 위한 헌신과 사랑으로 주님께 더 가까이 가기를 기원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 2부 : 분반(구역)공부 자료

1. 말씀: 십자가를 잘라주세요

어느 시골에 사는 자매가 몹시도 힘들게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믿음으로 이겨 가고 있었지만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주여 , 너무도 힘듭니다! 주여 너무 힘듭니다!" 이렇게 늘 말하고 다닐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꿈을 꾸는데 그녀가 커다란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님 너무 힘듭니다. 주님은 목수이시지 않습니까? 이 십자가를 잘라 주세요." 이에 주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잘라 주셨습니다. 자매는 꿈속에서 세 번씩이나 자기의 십자가를 잘라 달라고 하였습니다. 한결 가볍고 편안한 듯 하였습니다. 그런데 눈앞에 요단강이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뒤에 오는 다른 사람들은 커다란 십자가를 강에 턱 놓더니 그 십자가를 다리 삼아 하늘나라로 건너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십자가는 이미 손아래 들어올 정도로 너무 작았습니다. 자매는 너무 서러운 나머지 강가에 털썩 주저 앉아 엉엉 울며 예수님을 찾았지만 이미 소용은 없었습니다. 그 때 그 자매가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주님의 음성이 다시 들려 왔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쫓아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지니라" 그 자매는 이에" 아멘! 아멘! "소리쳤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고난은 필수적입니까? 불행히도 그것은 '예'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몸소 그것의 본을 세우시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고난은 축복의 기회라는 얘기도 있잖아요 고난이 힘들어 십자가를 잘라 달라고 했던 이글속의 자매의 모습... 행여 이것이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여러분들에게 행여 자신이 짊어지기에 너무나 무겁고 힘들어 보이는 십자가라고 생각하는 그런 고통들이 지금 있습니까? 기도하십시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 13)

2. 묵상 및 토의
0 나는 나의 십자가를 기쁜 마음으로 지고 가는가?
0 나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가?
0 나는 형제를 사랑하기 위해 어떤 희생을 당한 적이 있는가?
0 나는 세상적인 부요보다 주를 위한 능욕을 기뻐할 수 있는가?
0 나는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씻음 받았는가?
0 나는 십자가 용사로 살아가는가?

3. 예화: 십자가의 고난이 있어야

어느 한 사람이 우리 나라에 부지런히 일하는 꿀벌을 남양에 가지고 갔더니 첫 해에는 부지런히 꿀을 날라서 수확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만하면 큰 부자가 되겠다. 꽃 많겠다. 꿀 많겠다. 벌이 부지런하겠다.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이듬해에 벌은 그렇게 부지런히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듬해는 전혀 일하지 않고 다 벌통을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렇습니다. 겨울이 없기 때문입니다. 겨울이 없으니 꿀을 저장할 필요가 없고 그러면 사람은 꿀을 먹을 수가 없게 됩니다. 알맞은 일거리, 알맞은 목적, 희망, 내일을 향한 저축, 어느 정도의 고생이 있어야 발전하는 것입니다. 편하면 발전이 없고 나중에는 집 마져 버리고 자기 근거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누구든지 자기에 알맞은 십자가가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4. 찬송: (141장) 웬말인가 날 위하여

1.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 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2.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웬 일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3. 주 십자가 못 박힐 때 그 해도 빛 잃고 그 밝은 빛 가리워서 캄캄케 되었네
4. 나 십자가 대할때에 그 일이 고마와 내 얼굴 감히 못들고 눈물 흘리도다
5.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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