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선생복종(善生福終)

마태복음 정지석 형제............... 조회 수 1825 추천 수 0 2009.08.06 23:24:39
.........
성경본문 : 마7:13~14 
설교자 : 정지석 형제 
참고 : 2009.02.22 새길교회 주일설교 

오늘은 배움의 한 매듭을 짓는 자녀들의 졸업을 축하하는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원까지 11명이 졸업을 합니다. 유지승, 김수민, 이희엽, 김명인, 유지원, 이윤애, 박한솔, 유혜인, 이기문, 윤하식, 김해경. 이 이름을 모두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새길교회의 자녀들입니다.

교회는 지혜의 학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세대는 학교와 사회, 가정 그리고 여러 곳에서 다양한 지식을 얻고 자랍니다. 인터넷에 들어가 세계의 정보와 지식을 매일 매일 무한정 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이 다만 지식에 그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지식이 참지식이 되어 생명을 살리고 이웃에게 널리 이로운 것이 되기위해서는 지혜로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생명의 지식, 삶을 구원하는 진리의 지식이 지혜입니다. 자신의 생명뿐만 아니라 이웃의 생명을 살리는 지식이 지혜라 하겠습니다. 지혜의 삶을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말해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병이 들어 의사로부터 진단받기를, 3년산 인삼을 먹으면 병이 나으려니와 그렇치 못하면 5년을 넘기기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3년산 인삼을 구하기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끝내 구하지 못하고 5년째 되던 해에 죽었습니다. 참 웃지 못할 이야기입니다. 만약 그 사람이 의사의 진단을 들은 후에 인삼을 심었더라면 3년산 인삼을 수확할 수 있었을 것이고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단지 3년산 인삼을 구하러 다니기에 바빴습니다. 지식은 많은 사람일지 몰라도 지혜는 갖지 못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살려고 애를 쓰나 결국은 죽는 길로 달려가는 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 삶과 문명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경제위기, 지구 온난화에 따른 생태계 위기, 남북한간의 위기에서부터 우리 일상의 작은 갈등과 위기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잘 살펴보면 이 이야기와 다름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잘 생각하고 지혜롭게 길을 찾고자 하면 생명의 길을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길로 치닫고 있는 우리네 삶과 아주 흡사합니다. 지식을 많이 가진 것 만으로는 생명을 건질 수 없습니다. 지식이 생명의 지식, 참 진리의 지식인 지혜로까지 나아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지식을 지혜로 변화시켜주는 일은 오늘날 우리 교회의 사명이며 예수 신앙의 본질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졸업축하 예배를 드리는 참된 의미는 바로 이런 점을 다시 확인하고 시대속에서 우리 신앙 공동체의 소명감을 회복함에 있습니다.
오늘 졸업예배를 드리면서 저는 세가지 점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참 지식, 지혜란 어떻게 얻어지는가. 둘째, 우리 교회 공동체의 본질은 무엇인가? 셋째, 우리 인생의 졸업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인생의 졸업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인데, 그 날까지 우리 삶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또 우리가 어떤 삶에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인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지혜는 고난과 하나님 경험에서부터 나온다.

 첫째, 참 지식인 지혜는 고난과 역경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를 구하려는 데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 마태복음 7장 13-14절은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졸업설교라 해도 좋을 만한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가는 자가 많으나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도 험해 찾는 이가 적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대비되는 두 동사를 주목할 수 있습니다. 큰 문과 넓은 길로는 많은 사람이 들어간다(enter)라는 동사를 사용하는 반면에 좁은 문과 험한 길은 찾는(find) 사람은 적다고 합니다. 들어간다와 찾는다는 말이 대비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지나갔고 지금도 가는 길은 문도 넓고 길도 넓고 평탄합니다. 그러므로 들어가는 것이 안심이 되고 당연하게 여겨져서 아무런 의심없이 들어갑니다. 아주 자연스런 현상처럼 보입니다. 우리네 일상의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반면에 좁은 문과 험한 길은 잘 드러나지 않고 힘드는 것이기에 찾는 사람, 즉 의지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신앙의 길은 이런 결단과 노력을 요청합니다. 진리를 구하는 사람(seeker)의 삶의 길이라 하겠습니다. 세상에서 늘 듣고 배우는 가르침은 우리들에게 큰 문, 넓고 평탄한 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더 큰 문, 더 평탄하고 넓은 길로 가기위하여 치열한 경쟁을 하며 이기기위해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짓밟게되며, 그런 삶으로 결국 생명을 소진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얻은 삶의 결과는 온갖 위험과 멸망의 징조들뿐입니다. 잘 산다는 것이 과연 이런 것이었나 하는 회의감과 허무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정 반대의 다른 길을 찾으라고 권면합니다. 좁은 문과 험한 길입니다. 아직까지 오직 소수만이 찾았고 들어갔던 문이요 길입니다. 그러나 그 문안에 들어가면 생명의 나라가 있습니다. 어쩌면 큰 문과 넓은 길을 추가하던 인생에서 돌아서는 그 순간부터 생명의 세계는 펼쳐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생명력이 용솟음치는 보람과 의미로 충만한 삶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확신을 갖고 제자들에게 드러내 주시고 알려주시는 길이며 그후 많치 않지만 여러 사람들이 걸어갔던 생명길입니다. 분명한 것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고자 추구하고 갈망하는 삶의 길과는 다른 것입니다. 좁은 문과 험한 길을 찾고 또 그리고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우리는 이들을 창조적 소수자라 부를 수 있겠습니다.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행복하고 의미있는 것으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또한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기쁨과 유익함을 주는 삶을 살아갑니다. 좁은 문, 험한 길을 찾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일지 모르지만, 그곳에는 참다운 생명이 있기에 궁극적으로는 마음이 평안하고 행복 넘치는 구원의 삶이 있습니다. 반면에 큰 문, 넓은 길은 평탄하고 안심되는 성공의 길인듯 보여도 궁극적으로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 참된 만족과 행복이 없으며 늘 불안하고 쫒기는 삶으로 생명을 소진해가는 삶이라 하겠습니다. 생명길은 한마디로 사랑의 길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이 삶의 길을 선택하고 살아가도록 격려하고 이끌어 줘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예수님께서 몸소 그 길을 삶으로서 보여주셨드시 우리도 그 삶의 길을 몸소 살아가는 것 밖에 다른 길이 없겠습니다. 이것이 참 지혜의 길이며, 이를 가르치고 배우며 훈련받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렇게 예수의 본을 따라 사랑을 드러내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 앞에서 서는 것이 우리 신자들의 인생의 졸업식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또 하나의 졸업 설교문을 봐야 합니다. 출애급 광야생활 40년을 마감하면서 모압평야에서 했던 모세의 고별설교입니다. 이는 해방의 광야학교 40년을 졸업하고 새로운 땅에 들어갈 차비를 하고 있는 히브리인들에게 하는 모세의 졸업설교라 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서 34장 4-5절에는 이 광경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여 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었다’. 그때 모세 나이 120세였습니다. 애급 땅에서 노예들을 이끌고 나올 때 모세는 80세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를 보면 인생은 팔십부터라고 할 만합니다. 광야 40년 수업을 마치면서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이들에게 모세가 한 설교의 중심 메시지는 ‘기억하라’ ‘잊지마라’입니다. 이를 반복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 교육은 유명합니다만 그 특징이 반복교육입니다. 하나님 경외, 조상의 삶의 경험에서 얻은 지혜와 지식을 반복하여 교육함으로서 이들은 지식을 삶에 체화시키고 후손에게 대대로 계승합니다.

 무엇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것입니까. 고난의 삶을 잊지 말고, 노예살이에서 해방시켜주신 야훼 하나님을 잊지 말고 기억하며,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광야 히브리인들의 삶에서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경험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친족공동체가 교회의 뿌리이다.

 둘째, 교회 공동체의 본질은 하나님 신앙에 기반한 새로운 약속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종살이의 고난과 광야에서의 고난의 경험은 히브리인들의 뼈에 맺힌 삶의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 경험을 통해 히브리인들은 새로운 민족공동체로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고난은 인간성을 단련시키며 새로운 인간성을 낳는 풀무와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쉬이 잊어버리게 되면 다시 옛 인간성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 여긴 것입니다. 실제로 히브리인들은 광야 해방학교 40년 기간 동안 고난의 경험 속에서 하나님과 새로운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 계약의 핵심에는 가난하고 약한 소수자, 이방인들의 인권을 존중하는 정신이 아로새겨있는데, 이는 히브리인들 자신의 고난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습니다. 고난을 경험한 사람이 고난 받는 사람의 인권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고난을 경험한 사람이라고 다 고난의 인권의식을 소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히브리인들이 자신의 고난의 경험을 이토록 높은 윤리의식으로 승화시키는 데는 야훼 하나님 경험이라는 거룩의 경험이 있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노예 종살이에서 빠져나와 광야를 헤매면서 생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생존할 수 있었던 삶의 경험에서 임마누엘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대제국 애급의 속박에서 노예들이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 자체가 기적의 체험이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을 해방하고 구원하신 이는 인간의 지식과 능력을 초월하는 야훼 하나님의 존재하신다, 그리고 히브리인들의 고난과 함께 하신다는 공동 고백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개개인의 확신을 넘어 전체 집단적인 믿음에 이르기까지 출애굽의 히브리인들은 광야에서 40년이란 세월의 학습과 훈련의 기간을 거쳤다고 봐야 합니다. 4백여 년이 넘는 오랜 노예생활은 히브리인들의 몸과 마음, 정신의 뿌리까지 노예의식으로 체질화시켰을 것입니다. 새로운 땅에 들어가 새로운 백성으로 재탄생하는 기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광야학교 40년 기간이었습니다. 고난의 경험과 야훼 하나님 신앙이 함께 결합됨으로써 히브리인들은 골수에 박힌 노예의식을 벗어던질 수 있었고 자유와 해방의 높은 공동체 윤리를 갖게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계약은 히브리인들을 새로운 민족 공동체로 탄생시켰습니다. 히브리인들은 다양한 족속 출신으로 이뤄진 노예들이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혈통을 공동기반으로 한 민족공동체가 아닙니다. 이들을 일컫는 말 암하레츠는 말 그대로 땅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이 해방자 야훼 하나님과 계약을 맺으면서 공동기반을 갖고 하나님의 백성(암 야훼)로 재탄생했습니다. 혈연을 공통기반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을 공통기반으로 탄생한 히브리 민족을 하바드 대학 신학부 석좌교수인 프랭크 크로스(Frank Cross)는 ‘하나님의 친족(Divine Kinsman)'라 불렀습니다. 계약의 민족, 계약의 백성이라는 새로운 부족의 탄생입니다. 저는 이 출애급 히브리 공동체의 탄생에서 우리 교회의 성서 신학적 뿌리를 봅니다. 혈연, 지연, 학연, 인종과 피부색의 차이 등 모든 인간적인 인연관계와 차이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새 공동체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친족으로서 공통기반을 삼는 공동체가 우리 교회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말씀드릴 기회에 있겠지만 오늘 졸업예배에 교회공동체의 본질을 다시금 확인하고자 한 것은 이 졸업생 자녀들이 단지 혈연의 부모님의 자녀만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 속한 자녀요, 그럼으로써 우리 모두의 자녀임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새길교회는 서로를 형제 자매로 부릅니다. 그동안 세속 역사 속에서 교회는 이 신앙의 형제 자매됨, 하나님의 친족으로서의 공동체성을 상실해 왔습니다. 새길교회는 이 교회의 본래 정신을 회복하고 세상에서 자라나는 겨자씨와 같은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이뤄가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졸업예배에서 우리는 이 신앙 공동체의 정신을 다시 확인하고 회복하며, 우리의 자녀들에게 계승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혁하는 창조적 소수자의 전통을 이어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권면하신 좁은 문, 험한 길을 찾고 들어가라는 말씀을 육화시키고 실현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에 내려오기까지 70년’

 셋째, 우리 인생의 졸업은 사랑의 길에서 완성되고 영원해질 것입니다. 이번에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위해 추운 거리를 가득 메웠습니다. 추기경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 온갖 모욕과 조롱을 받으면서 온 몸의 피와 물을 다 쏟으신 후 고통속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해 볼 때 추기경의 죽음은 인간적으로 본다면 매우 행복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온전히 고난받으심으로, 이후에 그를 믿고 따르는 이들을 복되게 하신 분이십니다. 김추기경이 많은 사람들의 애정과 사랑을 받은 이유는 그의 삶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드러내려 무진 애를 썼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시 면류관을 썼지만 김추기경은 추기경이란 금관을 쓰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추기경은 금관을 쓰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보였습니다. 높이 계신 분이 낮게 사셨던 예수님을 진심으로 따르고, 또 따를 수 있음을 보여주신 삶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사랑의 삶입니다. 김추기경은 사랑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실천하며 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젊은 시절 쓴 수상록에서, 결혼도 안한 자신에게 신자들이 사랑에 대해 말해달라고 할 때가 제일 곤혹스럽다고 쓴 걸 읽으며 퍽 솔직하고 유머감각이 있는 분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 김추기경이 선종하면서 그 분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제 가슴에 가장 깊이 와 닿은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오기까지 70년이 걸렸다’고 하신 김추기경의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을 몇 번이고 되씹어 보곤 합니다. 머리에 있는 사랑은 이기적 유전자의 자연법 원리에 따르는 사랑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법한 ‘자신을 위한 사랑’ 말입니다. 반면에 ‘가슴에 내려온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온전히 남을 위한 사랑 말입니다. 김추기경은 평생 동안 자신의 삶속에서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그 미세한 움직임에 매우 민감한 삶을 사신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선생복종(善生福終) ‘선하게 살다가 복되게 마친다’는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이 말을 줄여 김추기경의 죽음을 선종(善終)이라 부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죽음을 종말로 보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간다고 믿습니다. 이 세상에서 선하게 살다가 복되게 마친 후에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는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좁은 문, 험한 길로 들어가면 생명의 나라로 간다고 하셨습니다. 그 좁은 문은 사랑의 문이며 그 험한 길은 사랑의 길이라 하겠습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310 마태복음 주께 드릴 예물 - 성탄설교 [2] 마2:9-11  김연구 목사  2009-12-21 4707
309 마태복음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 마23:1-12  정용섭 목사  2009-12-15 2037
308 마태복음 화평과 검으로 오신 예수 마10:34-39  강종수 목사  2009-12-13 1841
307 마태복음 기다리는자의 삶 마25:14∼30  임영수 목사  2009-12-10 2358
306 마태복음 회 개 마4:17  조용기 목사  2009-12-07 1622
305 마태복음 물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 마14:22~33  조용기 목사  2009-12-07 2464
304 마태복음 섬김과 고난의 왕 마21:1-11  이정원 목사  2009-12-02 2281
303 마태복음 그 날과 그 시간 마25:1-13  정용섭 목사  2009-11-25 2237
302 마태복음 당신도 주여 주여 하십니까 ? 마7:21~23  박노열 목사  2009-11-20 1883
301 마태복음 카이사르의 것과 하나님의 것 마22:15-22  정용섭 목사  2009-11-18 2617
300 마태복음 경건주의의 함정 마21:23-32  정용섭 목사  2009-11-18 2303
299 마태복음 죄를 어찌할 것인가? 마18:15-20  정용섭 목사  2009-11-18 1888
298 마태복음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마6:13  조용기 목사  2009-11-16 1803
297 마태복음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마6:13  조용기 목사  2009-11-16 2019
296 마태복음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6:12  조용기 목사  2009-11-16 2104
295 마태복음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마6:11  조용기 목사  2009-11-16 1944
294 마태복음 나라가 임하시오며 마6:10  조용기 목사  2009-11-16 2705
293 마태복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마6:9  조용기 목사  2009-11-16 3186
292 마태복음 하늘나라와 일상 마13:44-51  정용섭 목사  2009-11-11 1945
291 마태복음 삶과 행위 마11:2-19  정용섭 목사  2009-11-11 1891
290 마태복음 일꾼을 위한 기도 마9:35-38  정용섭 목사  2009-11-11 2307
289 마태복음 여덟 가지 최상의 복 (Ⅲ) 마5:9~16  조용기 목사  2009-11-10 1795
288 마태복음 여덟 가지 최상의 복 (Ⅱ) 마5:6~8  조용기 목사  2009-11-09 1770
287 마태복음 여덟 가지 최상의 복 (Ⅰ) 마5:1~5  조용기 목사  2009-11-09 1837
286 마태복음 믿음이 작은 자여 마14:22~33  조용기 목사  2009-11-09 2608
285 마태복음 겸손의 위력 마20:20-28  김필곤 목사  2009-11-07 4108
284 마태복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느니라 마12:22~30  박노열 목사  2009-11-06 1882
283 마태복음 삼위일체의 신앙 마28:16-20  정용섭 목사  2009-11-04 1999
282 마태복음 쓰레기 청소 마15:16~20  조용기 목사  2009-11-04 1950
281 마태복음 도전해야 산다 마7:7~11  조용기 목사  2009-11-04 2086
280 마태복음 빈집의 우환 마12:43~45  조용기 목사  2009-11-04 2260
279 마태복음 새시대를 준비합시다 마25:1-13  김필곤 목사  2009-11-01 2281
278 마태복음 기대와 평가 마25:21-30  김필곤 목사  2009-11-01 1795
277 마태복음 이렇게 배웁니다 마4:3~8  안인숙 자매  2009-10-31 1492
276 마태복음 하나가 되기 전에는 마5:23~24  이상익 형제  2009-10-31 1994
275 마태복음 갈릴래아 나자렛 사람 마21:1-11  정용섭 목사  2009-10-29 2090
274 마태복음 마음하늘 마6:10  조용기 목사  2009-10-28 1627
273 마태복음 경계해야할 바리새인의 누룩 마23:23∼28  임영수 목사  2009-10-16 3070
272 마태복음 카프카의 천국 file 마13:44~46  정선자 자매  2009-10-14 1705
271 마태복음 환상과 현실 마17:1-9  정용섭 목사  2009-10-14 1796
270 마태복음 유혹을 이기는 힘 마3:13~4:11  길희성 형제  2009-09-30 2095
269 마태복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마4:1~11  배현주 교수  2009-09-30 2171
268 마태복음 교회여, 너는 자신을 무엇이라 말하는가? 마16:15~18  정지석 형제  2009-09-30 1685
267 마태복음 마14:13-21  정용섭 목사  2009-09-29 1808
266 마태복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 내게 배우라 마11:28~30  조용기 목사  2009-09-28 2864
» 마태복음 선생복종(善生福終) 마7:13~14  정지석 형제  2009-08-06 1825
264 마태복음 예수 따르미 마16:24~26  윤공부 목사  2009-08-06 1775
263 마태복음 셋째 하늘, 마음 하늘 마6:9~10  조용기 목사  2009-08-03 1823
262 마태복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마5:6  한태완 목사  2009-07-27 2047
261 마태복음 화평케하는 자의 복 마5: 9  연규홍 교수  2009-07-27 2161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