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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천국

마태복음 정선자 자매............... 조회 수 1705 추천 수 0 2009.10.14 22:4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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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13:44~46 
설교자 : 정선자 자매 
참고 : 새길교회 2009.06.21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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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예배드릴 때는 모두 핸드폰 전원을 꺼놓고 계시겠지만, 저는 지금 반대의 부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핸드폰을 켜놓아 주십시오. 아무래도 십 분 안에 저 때문에 119를 불러야 할 상황이 오지 않을까 합니다. 말씀증거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절대 변경할 수 없는 요지부동의 일로 결정되고, 날자가 점점 다가오자 급기야 제겐 신체적인 증상까지 나타나기 시작 했는데요. 우울, 불안, 공포, 식욕부진, 그리고 대인기피증까지 생겼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는 새길 교회에 출석한지 14년이 되었지만 처음에 공중기도를 딱 한번 떨면서 했던 뒤로 저는 한사코 무대를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역시 안 되는 건 안 되는구나. 즉 저는 무대공포증환자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무대공포증이 생긴 것은 감수성이 예민한 고등학교 사춘기 때 생긴 것입니다. 그것도 교회에서 강단에 섰다가 비롯된 일이었단 말입니다.

 ‘말씀’을 증거 하는 것은 ‘말씀’에 대해 깊이 깨닫고 믿는 신앙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도 이제는 50대 중반이 되었으니, 신앙도 겨자씨에서 조금은 더 자라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말씀을 증거 하기에 저의 신앙은 곧 드러나겠지만 부끄럽게도 체계도 내용도 없으며, 신앙의 태도 또한 너무 ‘애매’합니다. 이 자리는 피해야만 하는 자리였을 것입니다. 무엇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고민이 많이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천국에 대한 비유가 많이 나옵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 혼인잔치의 비유, 양과 목자의 비유. 열 처녀의 비유.... 그 많은 비유가운데 천국을 보물에 비유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사실 어린 시절, 주일학교에서 배운 천국, 천당이란 개념은 그저 죽으면 저절로 가는 달콤하고 고통이 없는 단순한 곳이었는데, 실제로 당장 가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절실하게 다가오는 실체는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보니, 천국을 알지 않고선, 즉 천국을 마음에 품지 않고선 죽음을 편하게 맞을 수 없다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지천명의 나이와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내 모든 것을 팔고서 얻어야만 하는 값진 보물 ‘천국’, ‘하늘나라’, 자신의 모든 소유를 걸고서라도 얻어야만 하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나라! 이 비밀의 나라가 내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릇 보물이란 정말 소중한 것일수록 함부로 드러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탐욕의 시선으로 눈독을 들이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부정의 시선으로 보물의 가치를 훼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무관심의 시선으로 보물의 가치를 알아보려하지 않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보물은 아무 의미가 없죠. 돼지에게는 진주를 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돼지에게 먹이를 주지 않고 진주를 주는 것은 돼지를 모독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지만 한편 보물의 속성은 너무 드러나서 흔한 것이 되어서도 안 되지만 또 마냥 감추어두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속성이 있습니다. 보물이 보물다우려면 존재를 드러낼 때에야 자신의 보물스러움이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나라의 비밀, - 그 보화, 진주는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으면서도 존재감을 발산하는, 존재감을 행사하는 귀한 가치’로 생각합니다.

 이 세계 안에 감춰져있으면서도 보는 눈, 들을 귀가 있는 자에 한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소망하고 동경하는 마음속의 이상향입니다. 이 이상향은 살아서 구현되기를 바라지만 그 불가능성 때문에 죽어서라도 보상받고 싶어 하는 것이죠. 혹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죽은 뒤라도 이 세상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구현되어지기를 바라는 가치체계입니다. 그러니 도저히 마음속에 은밀하게 감춰둘 수만은 없습니다. 그 강한 존재감은 지금 이 지상에서 마땅히 선행 학습되어야 하는 과제로 옵니다. 우리의 삶은 항상 리허설 중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잠깐! 과연 우리 마음에는 그토록 실현시키고 싶어 하는 하나님의 나라, 보물이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요? 내가 소망하고 믿는 것은 무엇일까요. 나름대로 그 천국을, 일부분이나마 발견하신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아직은 아니야, 방황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추구함으로써 아직은 그 도상에 계신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저는 오늘 20세기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한 소설가, 구원의 문제에 천착했지만 구원과는 정반대의 현실 속에서 무섭도록 세계를 통찰해내었던,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의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체코의 수도 프라하는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프라하를 여행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도시에는 아주 크고 멋진 고성이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1883년, 유태인으로 태어나 이 도시에서 41년의 생애를 살았던 카프카는 또한 <성>이라는 유명한 소설을 남겼습니다. 카프카는 현재는 그 유명함으로 프라하성과 함께 도시의 소중한 관광자원이 되어있습니다만, 생전의 그는 이 도시를 싫어해서 무척이나 떠나고 싶어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카프카의 이름에서 유래된 ‘카프카에스크(Kafkaesk)란 단어가 있습니다. ‘카프카적인 것’ 쯤으로 옮길 수 있는 이 카프카에스크의 뜻은, 불투명하고 의미 없는 운명에 내던져져 전율과 불안, 소외, 좌절을 겪는 현대인의 내면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그의 작품 속에서 주인공들은 도대체 왜 그런지, 그리고 왜 다른 상황이 될 수는 없는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으며 도움을 받지 못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저는 이 <성>이란 소설을 고등학교 때 읽었습니다. 첫 구절이 인상적이었습니다. “k가 마을에 도착했을 때 마을은 눈에 덮여있었다” 아마 이렇게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첫 구절뿐, 그 다음부터는 도무지 난해한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읽었던 건 그 시절엔 난해한 책을 읽는 것이 참 멋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죠.
줄거리를 대강 소개하자면 이렇습니다.

 눈 덮인 시골 마을에 K라는 이름의 측량사 한명이 부임해 옵니다. 그는 마을의 관청 역할을 하는 성안으로 들어가 정식으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그는 성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성과 관련된 어떤 인물들과도 접촉할 수 없습니다. 그가 성으로 향한다고 생각되는 길은, 나중에 보면 전혀 엉뚱한 길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측량사에게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며, 아무도 그를 성으로 안내해 주지 않습니다. 실제로 마을 사람들도 성에 무엇이 있고 성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모르는 듯합니다.

  주인공 K는 끊임없이 성과의 접촉을 시도하지만, 번번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실패합니다. 성에서 파견된 사람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만나보기가 어렵습니다. 결국 K는 자신이 부임한 마을에서 측량사로서의 업무를 전혀 부여받지 못한 채, 끊임없이 성과 접촉하려는 무익한 시도만 하는데 여기서 소설이 끝나버립니다.

 그때에 저는 소설의 줄거리가 너무 답답했고 지루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잘못 읽었나 했는데,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논리에 관한 책이 아니고 느낌에 관한 책이었던 것입니다. 소설은 아주 고의적으로 지루하고 짜증나게, 멸렬하고 답답하게, 그리고 아무런 전망 없이 쓰여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그 ‘성’은 꼭 들어가야만 구원을 얻는, 마치 ‘천국’의 상징처럼 인식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의 실체, 즉 ‘성’의 세계는 별 것도 아닐 수 있는데, ‘성’에 들어가야 한다는 당위성은 이렇게 치열할 수 있을까. 내가 나중에 더 나이를 먹으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정말 그동안은 제대로 잊고 있었죠. 그러다가 작년 우연히 카프카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카프카의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는 유태인으로 자수성가한, 활발하고 사업욕이 강한 실용적 가치의 사람이었습니다. 장남이자 외아들이었던 카프카에게 성공을 위한 교육을 시켰습니다. 당시 체코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지배계층의 언어를 습득시키기 위해 아들을 독일어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카프카의 소설은 독일어로 쓰였습니다.) 그리고 문학에 뜻을 두고 있는 아들에게 법대진학을 강요합니다.

 그러나 어머니 외가 쪽의 성격을 물려받은 카프카는 민감하고 불안하며, 결정적으로 몸이 병약했습니다. 그의 여린 성격에 관한 일화를 소개하면...

 어린 카프카에게 갑자기 큰돈이 생겼습니다. 이 돈을 들고 밖으로 나간 카프카는 시장 통에 앉아있는 불쌍한 거지를 보고선 그에게 이 돈을 주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런데 주는 방법이 문제였습니다. 그 거지가 큰돈을 적선하면 놀랄 것이 부담스러워..., 그 돈을 한꺼번에 주지 못하고, 작은 동전으로 나누어 조금씩만 깡통에 던져줍니다. 그리고 지나쳐 거리를 다시 한 바퀴 돌아 또 조금 주고..., 이런 식으로 그 돈이 없어질 때까지 한 것이죠. 그리고 너무 지쳐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옵니다.

 카프카는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을 극히 불편해했습니다. 법대에 진학하여 박사학위를 따고, 그가 근무한 곳은 노동자재해보험공사. 이곳에서 그는 지극히 판박이처럼 단조로운 생활을 합니다. 결핵이 발병하기 전 14년간 그가 이 생활을 감수할 수 있었던 것은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일한다는 보람이 그나마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머지 일과에는 소설을 씁니다. 소설은 겉에 드러난 카프카의 단조롭고 평온해 보이는 삶과는 정반대입니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벌레로 변신해있었다는 <변신이야기>는 어느 날 문득 자신의 가치가 무가치해졌을 때 경험하게 되는 경악과 소통의 불가능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일반적으로 절대자인 올마이티의 개념으로 가장 근접하게 인식되는 존재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육친의 아버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카프카와 아버지와의 관계는 매우 비정상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를 썼으나 실제로 부치지는 않았습니다. 부친의 일방성에 대한 강한 분노와 혐오, 경멸감을 갖고 있으면서도 한편 아버지의 강인함과 거침없음을 부러워하고 경탄하는 또 다른 감정이 있었습니다.

 카프카는 29세 때 펠리체 바우어라는 독일여자를 만나 5년간에 걸쳐 편지를 주고 받으며 두 번 약혼하였으나 파혼으로 끝났습니다. 두 번째 파혼은 1917년 후두결핵이란 진단을 받은 직후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41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 프라하의 유대인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는 생전에 남긴 그의 모든 작품들을 없애달라고 유언합니다.. 그러나 카프카를 세상에 소개했던, 절친한 친구 막스 브로트는 그 유언을 거부합니다. “미안하지만, 친구, 그 부탁은 들어줄 수 없네.”

 이렇게 해서 현대 실존주의 소설의 효시로 추앙받는 그의 작품은 자칫 사라질 뻔 했지만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그는 왜 그토록 자신이 마지막까지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었던 자신의 작품을 없애달라고 했을까요? 그는 죽음 앞에서 자신의 성과물의 가치를 부정하고 무위의 세계로 가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카프카가 도달한 ‘막다른 골목’이, 이 세상의 다른 누군가에게는 출구로 나아가는 ‘빛’의 이정표가 되기도 하는 것을 어쩌겠습니까. 역설과 반전이 이렇게 일어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좌절이었던 것이, 죽음이었던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부활이 되고 새로운 희망과 결단이 되기도 하는 것을 우리는 최근의 한국사에서도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부터는 제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제가 40년 쯤 지나 다시 만난 카프카, 이제는 그가 죽은 나이보다 내 나이가 더 많기 때문에 그를 이해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습니다. 카프카의 비밀은 화해되지 않는 관계의 긴장, 그리고 모호성에 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던 것이 읽으면 읽을수록, 그를 더 알아갈수록 카프카가 아니라 내 자신을 더 알아가고 이해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카프카에스크라는 불안, 소외, 좌절을 통해 나의 문제를 비로소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일단 문제를 이해하고 긍정하기 시작하자 정말 감추어져있는 것 같은, 그의 보물 같은 참 인간적 가치가 드러났습니다. 만일 지금 저에게 카프카에스크란 뜻을 물어보신다면, 이제는 유우머, 사려깊음, 배려, 도움, 그리고 용기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는 제게 숨겨져 있는 보물로 다가왔습니다. 이 반전을 경험했을 때 저는 천국을 보물에 비유한 성경 말씀을 어렴풋이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에게 가르쳐주고 싶어 하는 삶의 모범답안에도 오류가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강압할 때는 상처를 주게 됩니다. 하물며, 자신이 진리로 믿는 이른 바, 신념과 이념체계를 사랑과 진리로 믿고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려고 할 때는 지켜야할 에티켓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산에 오르는, 정상에 오르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진리를 구하는 것을 등산에 비유한 것입니다. 햇볕이 평화롭고 경사가 완만한 남쪽 등산로가 있는가 하면, 장비를 갖추지 않고서는 절대 불가능한 험한 북쪽 등산로도 있습니다. 어떤 루트를 선택하는가는 형편에 따라 취향에 따라 최종적으로는 본인이 판단할 일입니다. 정해진 등산로도 있지만 굳이 새로운 등산로를 개척해서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먼저 정상에 도착했다고 해서 깃발 꽂고 그 산을 다 아는 척 하거나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

 59년 전 극심한 이념전쟁이 이 땅위에서 벌어져 이 땅에 사는 사람이면 아무도 그 불행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고통스러운 사람은 누구일까요?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사람입니다. 고통스러워도 그 고통을 발설하기조차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전쟁에서는 흑백논리의 뒤로 줄을 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도 그 후유증은 너무도 커서 화해와 평화를 위한 노력은 공공연히 매도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한 가지 고백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좌파니 우파, 보수니 진보니, 정말 이분법으로 구별해 편을 가르는 것이 앞으로 다가오는 미래에도 창조적인 동력을 제공하는지 의심하고 있습니다.

 명분이나 이념에는 정신적인 중독성이 있습니다. 언제나 자신을 지켜주고 기댈 수 있는 이념이 있는 분들은 행복합니다. 그러나 극좌나 극우들이 극단적으로 순수해보이고 힘이 있어 보일 때면 그때는 경계해야 할 때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삶의 구체성’입니다. 흔히 ‘나는 고통 받는 자들의 편이다’ 라고 할 때, 이 고통은 철저히 삶의 구체성에 기반한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구체적인 삶에는 ‘고통의 절대성’이 있습니다.

 고통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목에 박힌 가시 같은 고통도 있지만, 어린 아이를 유괴당하고 시체도 찾지 못해 혼절할 수도 없는 그런 고통도 있습니다. 편견과 이념에 의해 희생된 고통도 있습니다. 고통의 자리는 왜 그런 고통을 당하는가, 정죄의 자리여서는 안 됩니다. 공감의 자리입니다. 우리 종교가 설 자리는 바로 그 공감의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그 수많은 죄와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각자가 이 세상의 주인공입니다. 사람이 굶주려 있을 때에는 설익은 밥 한 그릇도 행복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최후의 심판 때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있다면, 그건 죄를 다는 저울이 아니라 고통의 무게를 다는 저울일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합니다.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미워하던 상대방의 고통을 안을 수 있고, 그를 새삼 보물로 발견할 수 있도록. 그리하여 천국을 우리 마음에 안고 살 수 있도록, 은총을 간구합니다.

 마지막으로 카프카의 말을 인용합니다.

 “나는 은총의 올바른 향유자가 되고 싶습니다. 기대하고 바라고 있습니다. 은총은 내릴지도, 또는 내리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침착하면서도 불안하게 기대하는 것이 벌써 은총의 전조이거나, 또는 은총 자체일 수도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00년 전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서 최초의 역설과 반전의 비밀을 보여주신 예수님, 당신은 우리에게 희망을 보여주셨습니다. 아직도 이 세계에는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많은 고통들이 존재합니다.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라 가르쳐주신 주님, 은총으로 천국의 문을 열어주십시오. 당신의 위로로 편히 눈물 흘릴 수 있게 하시고, 당신의 평화와 사랑을 우리 모두에게 나누어 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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