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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미워하지 마십시오

마태복음 이한규 목사............... 조회 수 1820 추천 수 0 2012.10.21 20:5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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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5:21-26 
설교자 : 이한규 목사 
참고 : 2012.9.3 이한규 http://www.john316.or.kr 

너무 미워하지 마십시오 (마태복음 5장 21-26절)

 

< 혁신을 늦추면 뒤쳐집니다 >

 작년에(2011년) 애플의 창시자인 스티브 잡스가 56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로 죽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삼성과 애플의 소송을 보면서 그의 죽음의 원인이 대충 짐작됩니다. 그는 디지털 혁명의 아버지, 혁신의 대가, 그리고 디자인 완벽주의자란 별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하지 못한 사람의 완벽주의는 항상 문제를 만들고 몸과 마음과 영혼을 무너뜨립니다. 그는 머리는 좋았지만 마음은 좋지 않았고 컴퓨터 혁신에는 강했지만 자기 혁신에는 약했습니다.

 그는 ‘남의 것을 베끼는 것’은 잘했지만 ‘남이 자기 것을 베끼는 것’은 참지 못했습니다. 그는 과거 제록스의 컴퓨터를 베껴 매킨토시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빌 게이츠가 그런 사전 기술을 토대로 더욱 간편해진 윈도우 컴퓨터를 개발하자 그의 기술을 훔쳤다고 빌 게이츠를 고소했습니다. 그때 재판정에서 빌 게이츠가 비꼬며 말했습니다. “잡스! 제가 제록스란 부잣집에 TV를 훔치러 가서 보니까 당신이 먼저 훔쳐갔더군요.” 자기가 제록스에서 훔친 것은 외면하고 빌 게이츠가 자기 기술을 훔쳤다고 노발대발한 것입니다.

 그처럼 ‘베끼는 자기’는 용납하고 ‘베끼는 타인’은 극도로 미워하면서 툭 하면 고소하며 사니까 어떻게 건강이 남아나겠습니까? 이번 소송을 보십시오. 자기 제품과 비슷한 것은 다 자기 것을 침해했다고 화를 내면서 지나치게 나옵니다. 도둑이 남의 도둑질은 참지 못한다는 말 그대로입니다. 잡스는 소송을 시작하면서 경쟁자들은 모조리 전멸시키겠다고 미움과 증오를 표출했다가 결국 자신이 먼저 죽은 것입니다.

 이번 소송으로 스티브 잡스에 대한 신화가 상당히 깨졌습니다. 잡스와 애플은 더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둥근 모서리로 디자인 특허를 주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잡스와 애플이 그런 기술력밖에 없고 그런 그릇밖에 되지 않는 존재들임을 알아챘습니다. 그 둥근 모서리가 어떻게 자기만의 전매특허입니까? 요새 ‘강남스타일’이란 노래가 떴습니다. 그렇다고 노래 제목에 ‘아무개 스타일’이라고 붙이면 다 특허 침해입니까? 그런 류의 특허 주장을 하는 기업에 어떻게 미래가 있겠습니까?

 손가락 두 개로 화면을 확대하고 축소시키는 멀티터치 기술도 그 전에 있었던 한국인 제프 한의 멀티 터치 기술을 베꼈고 그 기술은 1980년대부터 있었던 기술이라고 합니다. 결국 애플이 자랑하는 기술도 자기 원천 기술이 아니라 남이 발명한 것을 차용해 제품화한 것입니다. 그처럼 남이 발명한 것들을 짜깁기해서 자기 것처럼 주장하며 소송하는 것을 보면 대동강 물을 자기 물이라고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보다 오히려 한 수 위인 것 같습니다.

 잡스가 남의 기반 기술들을 모아 짜깁기로 제품을 내놓으니까 일반인 눈에는 그가 최초의 혁신 개발자로 보이지만 원천 기술을 가진 회사는 그를 배짱 좋은 도둑이자 짜깁기의 천재로 봅니다. 그런 사실을 이번 소송을 통해 일반인들도 알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번 소송으로 그의 명성은 오히려 떨어졌습니다. 그처럼 남을 미워하고 증오하면 결국 자기부터 망하게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이번 소송을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겉모습인 디자인 특허는 무한정 권리를 인정받으려고 하고 스마트폰을 있게 한 기반 통신기술은 거의 공짜로 쓰려는 모습을 가지고 계속 그렇게 나가면 애플은 혁신기업이 아닌 짜깁기 기업으로 인식될 것입니다. 짜깁기해 만든 제품의 몇 가지 특징을 특허로 삼아 영원히 그 제품의 맹주로 군림하려는 자세가 얼마나 나쁘게 보였는지 미국인들까지 삼성을 옹호할 정도입니다. 그런 자세를 고치지 않으면 애플도 잡스처럼 곧 무덤행이 될 것입니다.

 1980-90년대 미일간의 반도체 전쟁에서 미국은 빠르게 성장하는 일본 경제를 증오해서 덤핑 관세를 매기며 법의 힘으로 그 전쟁에서 이기려고 이전투구를 벌였습니다. 그렇게 서로 관세를 매기고 보복관세를 매기며 미워하며 싸워서 그 반도체 전쟁에서 누가 최종 승자가 되었습니까? 미일은 다 무너지고 미움과 상처 없이 내일을 향해 끊임없이 혁신을 이뤄낸 삼성을 비롯한 한국 기업들이 결국 최종 승자가 되었습니다.  

 큰 곰과 작은 곰이 싸우면 작은 곰은 죽고 큰 곰도 다칩니다. 그때 다친 큰 곰을 잡으면 정글을 제패합니다. 그처럼 계속 싸움닭의 모습을 보이면 애플은 삼성을 못 따라잡습니다. 기술 혁신이 아닌 외장 특허를 지나치게 내세워 법의 힘으로 경쟁사를 누르려는 회사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리고 애플이 그렇게 나와도 한국 기업들은 앞만 보고 계속 혁신을 이뤄내야 합니다. 그 싸움이 휘말리면 중국 기업들에게 뒤처지면서 상황은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미국은 20세기의 혁신적인 신제품은 거의 다 내놨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창의적인 나라였습니다. 그런 정신으로 혁신을 거듭하고 시장을 선도하면 그런 지저분한 소송에 매달릴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반도체나 자동차 시장에서 더 이상 혁신 제품을 내놓지 못하니까 결국 경쟁사의 추격을 허용한 것입니다. 스마트폰 시장에서도 후발주자가 따라오면 더욱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혁신에 나서야 하는데 경쟁자 탓만 하고 미움과 저주와 소송으로 문제를 풀려고 하면 어떻게 그런 기업에 내일이 있겠습니까?

 혁신은 외면한 채 특허를 내세워 경쟁자를 법으로 공격하고 상처 내며 지칠 때까지 기운을 빼면 같이 공멸합니다. 미움 때문에 승자 없는 전쟁에 매달리면 결국 이겨도 패자입니다. 그처럼 미움과 증오에 매달려 혁신을 늦추면 개인이나 기업이나 모두 뒤쳐집니다. 결국 화해의 길은 축복의 길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길입니다.

< 화목한 삶에 필요한 신앙 >

 현대인의 건강을 해치는 대적들 중에는 과식, 불안, 과로 등이 있습니다. 그 중에 제일 큰 대적은 분노입니다. 요새 분노가 얼마나 많은 인간관계를 깨뜨립니까? 요새 고부간에 갈등이 얼마나 심한지 며느리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이 ‘시’자가 들어간 시금치이고 시어머니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은 ‘며’자가 들어가는 며르치(멸치)라고 합니다. 또한 며느리가 제일 싫어하는 성경은 ‘시댁 편’이 연상되는 시편이라고 합니다.

 그런 미움들이 가정의 축복을 막고 혁신을 막고 모든 길을 막습니다. 건강도 막습니다. 엄마가 분노를 품고 젖을 먹이면 아이가 설사합니다. 신장병 환자들은 인공신장을 달고 다니는데 마음에 분노와 증오가 있으면 인공신장의 수명도 크게 단축된다고 합니다. 미움과 분노는 자기 몸과 영혼을 죽이고 축복의 길도 막습니다.

 본문을 보면 주님은 십계명의 제 6계명인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새롭게 해석합니다. 살인하면 심판을 받지만 더 나아가 형제에게 노해도 심판을 받고 형제를 욕하면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21-22절). 이 말씀은 형제에게 화를 내고 욕하는 것은 간접살인인데 그렇게 간접살인을 하면 자신이 먼저 심판받아 비참하게 죽는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형제에 대해 화내고 미워하는 것은 자멸의 길이란 뜻입니다.

 지금 주위를 둘러보면 인종 간, 계층 간, 국가 간, 지역 간, 그리고 세대 간에 수많은 갈등과 반목과 상처가 넘쳐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도들은 ‘화목의 빛’을 세상에 비춰야 합니다. 믿음을 보여주는 가장 큰 외적인 증거 중의 하나가 바로 ‘화목한 삶’입니다. 그런 화목한 삶을 살려면 어떤 신앙이 필요할까요?

1. 윤리 신앙

 오늘날의 교회와 교인은 세상의 신용을 많이 잃었습니다. 일부 교인들의 비윤리적인 행동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예배를 뜨겁게 드린 후에 귀가 버스를 서로 먼저 타려고 교인들끼리 욕하고 밀칩니다. 어떤 교주는 자신을 신격화하며 강단에서 욕하고 안찰기도를 한다면서 성도를 때리고 발길질하고 심지어는 여자 성도들을 추행합니다. 얼마나 교회를 욕 먹이는 부끄러운 모습들입니까?

 목자는 성도를 인격체로 존중해주고 성도들도 목자를 ‘신격체’가 아닌 ‘인격체’로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아무리 다정한 개들도 한 밥그릇에 밥을 주면 싸웁니다. 그러므로 가까워도 약간은 떨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성전 기둥은 약간 떨어져 있어야 성전을 바치듯이 믿음으로 모였어도 피차간의 인격은 엄격히 구별되고 존중되어야 합니다. 윤리란 개개인의 인격의 존중을 바탕으로 성립된 사회적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존중해야 화목한 삶이 펼쳐집니다.

2. 지성 신앙

 기독교는 지식이나 이성보다 믿음을 중시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지성활동을 무시하라는 말은 아니라 이성으로 추구할 것은 추구하되 그 위에 믿음과 은혜를 더하라는 말입니다. 신앙과 과학은 반목관계가 아닙니다. 과학은 사실 설명에서 신앙보다 낫고 신앙은 사실의 지혜로운 수용에서 과학보다 낫습니다. 성경적인 지혜는 과학지식의 한계를 넘어서지만 그렇다고 과학을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신앙과 과학은 반목관계가 아니라 상호보완관계입니다. 과학의 문턱에 들어가면 과학 때문에 신앙을 버리고 과학에 깊이 들어가면 과학 때문에 신앙을 찾습니다. 현대 과학이 풀 수 없는 수많은 미스터리를 보면서 과학의 한계를 인식하고 신앙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특히 천문학자치고 무신론자는 없다고 합니다. 우주의 놀랍고 오묘하고 완전한 질서를 보며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과학과 신앙은 서로를 존중해야 합니다. 간혹 영계의 비밀에 정통했다는 어떤 교주는 자기가 안수하면 불이 나가는데 무슨 과학이냐 하면서 과학을 멸시합니다. 무슨 손에서 불이 나갑니까? 그런 사람으로부터는 더 불이 안 나갑니다. 그런 거짓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성경적인 치유는 과학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성도에게는 기도하는 ‘골방’도 필요하고 나눔의 ‘사랑방’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지성과 과학을 개발시키는 ‘글방’과 ‘연구방’도 필요합니다.

3. 균형 신앙

 오늘날 여러 갈등 중에 가장 뼈아픈 갈등은 교회내의 갈등입니다. 그런데 교회 내의 갈등은 믿음 없다는 사람들이 일으킬 때는 거의 없고 대개 앞서서 교회 일을 한다는 사람이 절제가 부족해서 일으킬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지나친 자기중심적인 열심으로 교회와 가정과 사회에 갈등과 반목을 일으키면 안 됩니다.

 어느 날, 독일의 발츠 목사가 한 미국 교회를 방문했을 때 미국 목사님이 한 교인을 소개하면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이분은 우리 교회의 평신도 챔피언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조용히 나중에 묻자 그 미국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아까 그분은 매일 저녁 교회에서 지내며 기도하고 봉사해서 다들 그렇게 불러요.”

 다시 발츠 목사가 물었습니다. “그분에게 가족이나 직장은 없습니까? 다른 사회생활은 안 합니까?” 미국 목사님이 “가족과 직장도 있고 사회생활도 한다.”고 대답하자 발츠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평신도 챔피언이 아닌 것 같습니다. 성도는 가정과 사회와 직장에서의 책임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절제가 없이 자기중심적인 열심이 지나쳐 교회와 가정과 사회에 반목을 일으키면 안 됩니다. 완전히 침몰한 배는 다른 배의 항해를 방해하지 않지만 반쯤 침몰한 배는 다른 배의 항해를 방해합니다. 그처럼 어설픈 지식과 무절제한 모습은 전체 공동체를 어렵게 만들 수 있습니다. 때로는 외치는 것보다 침묵하는 것이 더 필요하고 나서는 것보다 절제하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그처럼 가끔 침묵과 절제의 미를 살려가면서 사려 깊게 행동하면 서로 간의 반목의 벽은 무너지고 그 공동체에 하나님의 은혜도 넘치게 될 것입니다.

4. 희생 신앙

 대개 반목과 갈등은 자기중심주의에서 생깁니다. 어떤 공동체는 자기들만이 바른 진리를 가진 최고의 보수신앙인들처럼 행세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 수많은 교파가 생기게 된 이유도 ‘보수신앙’을 내세우면서 ‘화목의 삶’을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진짜 보수신앙은 진리에 ‘화목의 정신’을 더해서 성숙해진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보수신앙’을 내세우면서 서로 싸운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보수입니까?

 서울의 한 가정에 심각한 고부갈등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너무 구박한 것이었습니다. 시어머니는 어느 교회의 권사였고 며느리도 교회를 나가는데 아들은 고부간의 갈등을 보고 교회의 ‘교’자도 떠올리기 싫어했습니다. 어느 날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제가 무슨 잘못을 했나요? 교회 다니면서 이러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그때 시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일없다.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만 바르면 된다.”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만 바르면 된다는 사람은 대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사람 관계도 바르게 하려는 사람이 대개 하나님 관계도 바른 사람입니다. 갈등과 반목을 푸는 최고의 길은 자기를 죽이는 십자가 신앙에 있습니다.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십자가를 힘써서 지려고 하면 결국 그 삶이 갈등과 반목이 난무하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초석이 될 것입니다.

< 너무 미워하지 마십시오 >

 하나님은 무엇보다 ‘관계의 화평’을 요구하십니다. 그처럼 사람들과 화평할 때 하나님과의 화평도 이뤄집니다. 본문 23-24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예배는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일인데 그 예배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바로 형제와 화목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화해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 삶인지를 잘 가르쳐줍니다. 그러므로 멀리해야 할 사람은 멀리하더라도 그를 미워하고 증오하지는 마십시오. 용서하고 마음속으로 화해하십시오. 그래야 그 예배가 하나님 앞에 열납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할 때 원한에 사무쳐 몸부림치며 기도하면 그 기도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상달되겠습니까? 미움이 없는 깨끗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나님이 그 기도도 기쁘게 받아주실 것입니다.

 한문의 ‘사람 인(人)’는 서로 기대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처럼 사람은 서로 기대고 살아야 행복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용서와 행복은 비례합니다. 그래서 행복하게 살려면 용서와 감사가 넘쳐야 합니다. 하나님은 용서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할 때 그 예배를 받으시고 약속한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왜 문제가 지속됩니까? 대개 용서와 감사의 부족 때문입니다. 그 원리를 잘 알아도 실천은 쉽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큰 피해와 상처를 주고 돈을 떼먹고 따돌리기까지 했는데 어떻게 쉽게 용서합니까? 쉽지 않지만 그때 무릎을 꿇고 자신의 상처와 좌절을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그가 그렇게 나온 어떤 사정이 있었을 것이란 이해심이 생기면서 용서가 쉬워질 것입니다. 그 순간 분노에서도 해방될 수 있고 그때부터 하나님의 신기한 역사가 나타나서 잃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런 체험을 통해 더욱 감사가 나오게 되고 결국 자기에게 상처를 안겨준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게 됩니다. 알고 보니 자기에게 상처를 준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축복을 위해 사용한 도구였습니다. 그런 경지까지 가야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면 축복받는다!”는 말씀이 비로소 이해됩니다. 이제 문제가 생기면 더욱 용서와 감사를 다짐하고 인간관계의 맺힌 것을 먼저 푸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그 문제도 조만간 풀리게 하실 것입니다.

 완벽하게는 못 살아도 미움과 증오로 인해 축복의 흐름이 막히지는 않게 하십시오. 항상 용서하고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하고 자신과 반대 입장을 취하는 사람을 너무 미워하지 마십시오. 미움은 영혼과 육신과 인간관계를 파괴하고 하나님을 침묵하게 만듭니다. 모든 갈등을 보면 대개 양쪽에 흠이 있습니다. 그것을 인정해야 용서가 쉬워집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이 정말 흠이 없어도 본문 말씀처럼 먼저 화해에 나서야 하나님이 비밀스런 축복의 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지금 용서하십시오. 쑥스러워서 찾아가기 힘들면 마음으로라도 온전히 용서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기에 합당한 존재가 되십시오. 미움과 욕망이 들끓는 마음을 가지면 그 예배가 열납될 수 없고, 불화의 장벽을 쌓고 남을 해치는 손을 가지면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세상의 화려한 불빛에 길들여진 눈을 가지면 하나님의 얼굴을 뵐 수 없습니다. 마음을 깨끗하게 비우고 만들어야 비로소 그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의 샘물이 고이게 됩니다.

 항상 화평을 이루는데 최선을 다하고 교회생활에서도 최대한 화평을 추구하십시오. 어디에 가든지 트러블 메이커가 아닌 피스 메이커가 되십시오. 봉사는 많이 하는데 사람들과도 잘 부딪친다면 그것은 우선순서가 바뀐 것입니다. 봉사보다 화평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늘 평화를 앞세우며 겸손하고 은밀하게 봉사하십시오.

 어떤 분은 정의를 세우겠다면서 심한 언행으로 화평을 깨뜨립니다. 그런 삶은 대개 보면 ‘정의’에서 나온 삶이 아니라 ‘정욕’에서 나온 삶입니다. 정의를 간절히 추구하는 삶이 노출하기 쉬운 최대 약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정의가 미움으로 변질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정의가 미움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해야 그 정의가 참된 정의가 됩니다. 그런 참된 정의감을 가질 때 하나님의 은혜도 그의 삶에 넘치게 부어질 것입니다.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둘 다 누군가를 미워해서 위암에 걸렸습니다. 거기까지는 같았지만 그 다음이 달랐습니다. 위암에 걸린 후에 A는 더 증오심이 불타올랐습니다. “내가 이렇게 죽게 된 것은 그 사람 때문이야.” 결국 그는 심판 받아 죽었습니다. 반면에 위암에 걸린 후에 B는 철저히 회개했습니다. “내가 그를 미워하니까 이렇게 힘들어졌구나! 이제 더 이상 사람을 미워하지 말자!” 그 후 그는 놀라운 신유의 역사를 체험하고 나중에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된 후 지금 목회를 잘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큰 시련에 닥치고 죽을병에 걸립니다. 그때 A의 길을 따르지 말고 B의 길을 따르십시오. 용서하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병들었을 때 그 다급한 마음은 이해되지만 용서와 같은 자기 변화도 없이 신유를 준다는 곳만을 찾아 너무 여기저기 다니지 마십시오. 그 모습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찾는 모습으로 심각한 우상숭배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찾으면 참된 신유는 멀어집니다. 죽을병에 걸리면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미움과 증오를 작은 한 점까지 털어버리고 마음을 용서와 감사로 채우고 천국 가는 날까지 나눔의 삶을 살기로 작정하십시오. 바로 그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사는 모습을 통해서 신유의 역사는 극대화되고 모든 합력하여 선이 이뤄지는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교회를 비롯해서 요삼일육선교회, 미션퍼블릭, 네트영어 등의 비전을 이루고 또한 이루는 것을 보려면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오래 살려고 너무 아등바등 대면 오히려 더 일찍 가게 됩니다. 그저 넉넉한 마음으로 미움과 증오를 버리고 용서하고 감사하면 오래 살 수 있습니다. 이제 용서와 감사로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고 사람과의 화목도 이루십시오. 그래서 건강과 기력도 되찾고 지혜와 명철도 얻어서 찬란한 축복의 문을 열어가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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