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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갇혀 버린 예수

마태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442 추천 수 0 2015.02.14 23:4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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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24:1-2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4.9.24 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교회’에 갇혀 버린 예수 

오래된 이야기로 오늘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지금 이 교회 건물을 신축하던 1999년의 일입니다. 직영으로 건축을 시작했기 때문에 각 부문별 기능인들을 일일이 만나 계약을 했습니다. 전기공사도 그렇게 맡겨졌고, 기초 공사를 하는 날부터 전기회사의 직원이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7개월이 지날 무렵 공사가 거의 끝나서 주택에 등을 달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황기사’라고 불리던 전기 회사의 기술자가 저를 보고 잘 웃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공사가 끝나는 날이니까 좋아서 저러는 구나’싶었습니다. 그렇게 전기 공사를 모두 마치고나서 그는 손을 툭툭 털면서 이러는 겁니다. “저는 목사님이 누군지 압니다.” “아니, 어떻게 아세요?” “고등학교 기계공고 나오셨죠?” “예.” “저도 목사님과 같은 해에 졸업을 했어요. 물론 저는 전기과였고요. 목사님은 학생회장이었으니 당연히 나는 알죠. 목사님은 모르겠지만요.” 그 말은 듣는 순간 제가 단박에 어조를 바꿔 이렇게 말했죠. “뭐라구? 나를 아는데 1년 가까이 일을 하면서 모른 척 했단 말야? 왜 그랬어?” 그랬더니 그가 이럽니다. “수 십 년 신축 건물 공사를 하다 보니 교회를 많이 만나게 되었어. 그런데 대부분 목사님들이 하나님께 헌금으로 드리면 복을 받으니까 공사대금을 깎아 달라고 조르거나, 돈 걷히면 꼭 준다고 하고는 떼어 먹더라고. 그래서 내가 너를 아는 척 하면 너도 그럴까 봐 아예 처음부터 모른 척 한 거지.”

이쯤 되면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는 경계해야 할 대상이 되는 것이고, 목사나 교회 지도자들의 소위 ‘믿음의 행위’는 믿지 못할 허위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가 하는 말이나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믿고 주장하는 것들이 단지 ‘교회 안에서만 소용’이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낯선 부부 한 분이 예배에 참석을 하셨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식사를 마친 후 잠시 대화를 했는데, 서울 명성교회에 다니는 부부로서 그분들의 딸이 극동방송에 다닌답니다. 딸은 전국의 많은 목사님들 설교를 방송에 나가도록 하는 분인데 그 딸이 말하길 ‘춘천의 허목사 설교’를 꼭 들어 보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일부러 서울서 춘천까지 설교를 들으러 오신 겁니다. 이게 뭐 제 자랑 같지만요, 그 분들이 대화 가운데 하시던 말씀이 이겁니다. 그 말씀은 그분들이 춘천까지 설교를 들으러 오게 된 이유와도 맞물려 있다 하겠습니다. 그게 뭔지 아십니까? ‘교회가 뒤집어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개혁’이라는 단어를 쓰시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이 말씀도 ‘교회가 세상 속에서 제 구실을 하지 못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앞의 두 가지 이야기가 이 시대 종교 특히 한국 기독교와 기독교 신앙을 특정해서 말할 수는 없겠지만, 사실 우리의 교회가 겪고 있는 위기는 실로 심각합니다. 앞의 두 이야기 속에서 단순히 ‘그럴 수’있다고 보는 게 아니라 이는 심각한 선교의 위기이며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에 대한 붕괴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이 붕괴 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은 우리의 신앙이 내적 구조 깊은 곳까지 어떤 문제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런 문제의식에 대해서 동의하고 전제한다면 어떤 성찰이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어디서부터 문제를 해결할 출발점을 찾느냐 그 말입니다.

저는 우리 신앙의 성찰을 위한 출발점으로 다음 두 문장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교회의 예수’냐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의 예수’냐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여러분들이 목사들에게 책 한 권씩을 선물해 주셨잖아요? 거기에 보니까 민목사님이 바라는 책 중에 ‘역사적 예수’라는 게 있었어요. 신 장로님과 얼핏 ‘역사적 예수’라는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만, 우리의 신앙과 교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성찰하는데 이 두 문장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면 먼저 예수를 ‘역사적으로 묻는다’는 말은 뭘까요? 이를 말하기 이전에 이 질문에는 ‘교회의 예수’가 정당한가라는 의문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감지해야 합니다. ‘교회의 예수’라는 말은 예수는 단지 교회 안에서만 유용한가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역사의 예수’는 ‘교회의 예수’에 대한 의문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이는 1960-1970년 한국을 포함한 제3세계 지역의 급진적인 신학자들에 의해서 거론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주춤했던 이 ‘역사의 예수’는 1980년대의 ‘신자본주의’의 등장으로 소비사회의 소모품으로 인간이 전락하면서 다시 중요한 기독교 신앙의 주제로 떠오르게 된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믿는 예수 신앙이 이 세계와 세계 사람들과 서로 소통을 하느냐 아니면 교회 안에서만 작동하고 있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믿는 건 교회 안에서만 하고 사는 건 세상이 가는대로 흘러가며 산다면, 우리가 믿는 예수의 진리와 세상이 소통을 하지 못합니다. 아니 소통에 ‘교회의 신앙’이 장애가 되는 겁니다. 이런 문제의식을 먼저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 우리의 사회는 어떻습니까? 하루에도 각양의 사건들이 수많 건이 생깁니다. 정치적인 현안들은 어떻습니까?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의 지식이라는 것도 유효기간이 있어서 일정 기간이 지나면 어제의 지식이나 지혜도 거짓이 됩니다. 참고로 물리학은 13.07년, 경제학은 9.38년, 수학은 9.17년, 심리학은 7.15년이 지나면 쓸모없는 쓰레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걸 어떻게 알았느냐? 우리나라 국립 중앙 도서관처럼 큰 도서관에서도 너무 많은 책들이 출판이 되니까 일정 시간이 지난 책들은 폐기를 해야 합니다. 현재 중앙도서관의 책은 1천 142만 권 쯤 된답니다. 그 폐기처분하는 책들의 기준을 정하기 위해 조사를 했더니 이렇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은 급박하게 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신앙’은 이런 수많은 사회 정치적 현안에 개입할 적절한 세계관도, 개개인의 소외와 고독, 우울과 절망, 조급과 결정장애(틱, 불안장애)같은 문제에 대면할 성숙한 철학도 없습니다. 지금 ‘교회의 예수’는 이런 세상을 향해 결핍된 종교제도입니다. 껍데기처럼 존재합니다. 그러니 그런 예수를 사람들의 삶에 의미 있는 존재로 대면시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오늘날 종교가, 기독교가 자폐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저 ‘교회안의 예수’에서 끝나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세상을 구원할 여지가 없습니다.

지난여름에 보리슬라프 페키치의 [기적의 시대]라는 소설을 읽었습니다. 성서 속에 등장하는 예수의 기적을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보게 하는 소설인데, 이를테면 문둥이, 정신병자 등이 예수를 통해 병을 고쳤지만 그들은 그 이후 모두 불행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곧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사실은 아니지만 페키치는 너무나 간단한 도식으로 예수를 규정하려는 신앙의식에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패키지가 지적하는 것은 교회가 항상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아픈 사람은 무조건 고쳐 주신다’처럼 ‘완성된 답’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 시대의 사람들과 대면하고, 관계하면서(밥을 먹고 대화하고 마시면서)그들의 문제, 세상의 문제에 개입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의 사건, 예수가 꿈꾸는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되어 가는 것이지 ‘이미 완성된 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예수’라는 말은 ‘이미 완성된 답으로서의 예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공생애 3년을 보세요. 성서가 전하는 예수는 3년 내내 대중의 욕망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대중들은 예수가 어서 바삐 예루살렘으로 쳐들어가  로마를 쳐부숴 원수를 갚고 다윗의 나라를 다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한자리 차지하고 힘을 자랑하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3년이나 기다릴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로부터 대중들에 이르기까지 계속 만납니다. 대중의 욕망과 예수의 본질 사이에 온갖 사건이 일어나지만 그는 지치지 않고 설득하고 가르칩니다. 예수가 공생애 동안 하신 일은 당시 세계 속에 팽배한 배타주의적인 폐쇄성을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예수는 편견과 배제의 매카니즘으로 구성된 세상에 대화적 사건으로 배치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교회사 속에서 교회는 어떻게 발전해 왔습니까? 교회는 예수의 사건에 너무 뻔 한 답을 정해 버렸습니다. ‘예수께서 병을 고치신다’ 이러면 그만입니다. 이러다보니 변화의 세상 속에 사는 사람들의 문제와 대화하기 어려워졌습니다. 문제를 가진 사람들과 대화하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답은 그게 아닌데 ‘이미 완성된 답’을 교회는 가지고 있으니까요. 이러다보니 교회는 되레 예수와 세상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는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반대로 예수님과 세상 사람들을 중계하는 중계자의 위상은 놓아지게 됩니다. ‘완성된 답’을 전달하는 최후의 수단자니까요. 이게 그만 종교의 기득권세력 또는 종교권력이 된 겁니다. 그리고 이 전달과 수여 사이에 비용이 발생했습니다. 문제는 비용의 발생보다도 비용지불 능력이 곧 믿음의 척도로 이해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교회의 예수’가 지닌 문제의식입니다.

그러면 ‘역사의 예수’는 뭐냐? 정치에 뛰어들라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의 권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사건을 통해 세계와, 세상 사람들과 대면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의 사건은 유일회적이 아닙니다. 2천 년 전의 그 사건에서 주어진 그 답이 2천년이 지난 오늘 누구에겐가 일어나는 그 사건의 답은 아닙니다. 사건이란 언제나 그 감정이나 일어난 사실을 공유하는 집단적인 고백을 통해 반복적으로 기억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6.25사건은 어떻습니까? 그 사건을 경험한 분들이 단순히 ‘그때 그랬어’하고 눈물 한 방울 흘리고 끝납니까? 아니면 그 사건을 기억하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 돼’합니까? 다시 말하면 현재를 사는 사람들은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고 고백함으로 현재화 시킵니다.

그런데 ‘교회의 예수’는 과거 예수의 말과 행동을 유일회적 사건의‘이미 완성된 답’으로 정해 놓고 그걸 전달하고 수여받는 집단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역사의 예수’는 그 때 그 사건의 감정과 사실을 공유하여 고백할 뿐만 아니라 그 사건을 현재화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예배란 바로 그 때 그 사건이 현재적 사건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매 주일 확증하는 장치이며 무대인 것입니다. 즉 예배는 오늘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을 원 사건, 2천 년 전 예수의 사건과 연계하여 해석하고 여전히 그 때 그 예수의 사건이 우리 시대와 삶 속에서 재현되고 있음을 기억하는 장치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역사의 예수’입니다.

그럼 점에서 예수의 삶을 연계성이 아닌 일회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예수를 기리는 게 아니라 예수를 왜곡하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처럼, 진리는 어느 특정한 공간에 어떤 제도로 갇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신앙을 거부하고 배제하고 세상 속에 사는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문제의 답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의 사람들 속에 심고 키워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교회의 갇혀 지내는 예수’가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의 삶의 한 복판에서 그들과 대화하며 소통하는 중에 그들이 세상을 이기길 바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돕고 응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의 예수’에 대한 증언입니다.


댓글 '1'

씨나락

2015.02.16 10:01:16

교회는 커질 수록 공간에 갇히고,
교회는 작을 수록 사람에 갇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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