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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8: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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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4.11.19 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
우리에게 존재하는 두 개의 시간
마8:2-4
지난여름에 보리슬라브 패키치의 ‘기적의 시대’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통상적으로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적들을 패러디한 최초의 소설인 것처럼 보이지만, 기적에 관한 일상적인 통념이 얼마나 어긋나 있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입니다. 그 중 ‘얍느엘의 기적’이라는 게 있습니다. 성서본문은 오늘 우리가 읽었지요.
그때에 나병환자 하나가 예수께 와서 절하며 “주님, 주님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하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그에게 손을 대시며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하고 말씀하시자 대뜸 나병이 깨끗하게 나았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정해준 대로 예물을 드려 네 몸이 깨끗해진 것을 사람들에게 증명하여라”하고 말씀하셨다. -마8:2-4-
여기서 얍넬은 가공 지명입니다. 패키치에 의하면 구얍넬과 신얍넬이 있는데, 구얍넬은 일반인들이 거주하는 살기 좋은 지역이고, 신얍넬은 성밖으로 쫓겨난 사람들이 살고 있는 황량한 곳입니다. 그러니까 구얍넬은 포용의 공간이고 신얍넬은 배제의 공간 즉 ‘쫓겨난 공간’인 셈입니다. 이것은 물론 ‘정결한 구얍넬’과 ‘부정한 신얍넬’로 나뉠 수 있기도 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쫓겨난 공간’인 신얍넬로 들어갑니다. 이곳에서 그는 한 문둥병자를 만납니다. 에글라라는 여자로, 시신을 씻는 게 직업인 남편이 있었지만 남편은 일찍 병으로 죽었고 그녀 또한 지금 치명적인 질병에 걸려 있습니다. 부정한 존재의 극치를 그려 보여주는 장면이죠. 이 이상 더 부정한 사람이어디 있겠어요. 그녀는 예수님에게 소원을 말합니다. 이 저주받은 신체로부터 해방되고 싶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소원을 들어 줍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들어 주신 걸까요? 주변부에서 중심으로, 성 밖에서 성 안으로, 비정상이라는 조롱에서 해방시켜 준 것일까요? 아무튼 기적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기적’이 뭘까요?
패키치의 통찰력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녀는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얍넬은 그녀를 ‘아직 아니’라고 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편견이란 이렇게 질긴 겁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에글라라는 여인에게는 분명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새로운 시간 속에서 살게 되었다는 뜻이죠? 이른바 ‘기적의 때 혹은 시간’안으로 들어온 겁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녀를 여전히 ‘과거의 시간 즉 일상의 시간’에 가둬 두고 있죠? 그러니까 에글라라는 여인에게는 두 개의 시간이 존재하는 거예요. 하나는 ‘아직도 아니’라는 세상이 정한 시간과 예수가 행하신 치료 즉 ‘기적의 시간’이 병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이 여인은 ‘기적의 시간’에 살지 못합니다. 그녀에게 기적의 시간은 그저 은혜로 정지된 시간이고 그녀를 움직이는 시간은 ‘일상의 시간’이죠. 이해되십니까?
패키치가 말하려고 하는 건 이거예요. 예수에게 병 고침을 받았다는 것은 ‘일상의 시간’에서 ‘기적의 시간’안으로 들어간 거 아닙니까? 그런데도 여전히 그들은 ‘기적의 시간’을 살지 못하고 ‘일상의 시간’에 묶여 산다는 거예요. 그것은 ‘기적의 시간’과 ‘일상의 시간’이 대립하는 것이지요. 이걸 보여주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병자들과 같이 구얍넬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사는 ‘일상의 시간’은 뭐예요? 그것은 그들이 ‘죄인’이라는 것과 ‘인간 이하의 존재’라서 신도 거들떠보지 않는다는 것과,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절대화하고 정당화 하는 것이죠. 사람이지만 사람이 아닌 차별의 금이 바로 ‘일상의 시간’입니다. 그러니까 ‘일상의 시간’은 사회종교적인 추방 자 들에게는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의시간인 겁니다. 고집불통의, 완고한 시간이 바로 ‘일상의 시간’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간 안으로 초대를 하신 겁니다. 그게 바로 ‘병 고침’혹은 ‘기적’입니다. 그건 단지 병을 고친 게 아니라 새로운 시간 안으로 시간 밖에 있던 사람들을 끌어 들이신거예요. ‘일상의 시간’에 묶여서 버려진 그들을 ‘기적의 시간’을 만들어서 끌어 들임으로 새 사람이 되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버려진 일상이 아니라 새로운 일상으로 그들을 복귀시키는 거지요.
그러므로 기적이란, 완고한 일상의 시간을 무너뜨리는 겁니다. 아니, 완고한 일상의 시간 속으로 침투하여 거기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는 사람들을 유연한 존재로 바꾸고 살아 있는 존재로 바꾸는 것이 바로 예수의 ‘기적’혹은 ‘기적의 시간’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 다는 거, 예수를 따라 산다는 건 뭘 말하는 걸까요? 앞에서 말한 ‘시간’의 관점에서 말입니다. 그건 바로 ‘일상의’완고한 시간을 무너뜨리기 위해 ‘기적의 시간’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편견이 없는, 불평등하지 않는 일상의 시간적인 존재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기적은 이런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런 이해도를 따라 잠시 걸어가 보겠습니다. 예수의 말과 행동을 한 마디로 줄여서 말해 보라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일 겁니다. 여기서 ‘가까 왔다’라는 것은 장소를 말하기보다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죠. ‘때’말입니다. 이게 예수님의 핵심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때’의 의미가 당시 사람들에게 명확관화하게 이해되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이 땅에 이미 왔으므로 그 ‘때’가 성취 되었다고 믿었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 날이 도래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직’은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때’의 각기 다른 이해 밑에서 어느 집단의 사람들은 마지막 때의 갈망을 적극적으로 쟁취하려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그 나라를 자신들이 염원하는 어떤 구체적인 목표, 가령 로마군을 쫓아내고 다윗의 나라를 재건하는 일과 연관을 지어 이해했습니다. 그런가하면 그 ‘때’를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특히 저항의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는 이들에게서 이런 ‘때’의 수동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이들은 그저 그 ‘때’를 자신의 몸으로 체현하려고 했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거창하게 염원하고 갈구할 힘도 없으니까 질병의 절규로 온몸으로 항의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 ‘때’는 사람의 힘에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도래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역사는 한 마디로 ‘시간’을 둘러싼 싸움터입니다. 한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상향을 서로 엇비슷한 모양으로 그리며 살았던 겁니다. 각기 다른 이름을 붙이며 말이죠. 오늘날 어떤 이가 자기의 이상을 사회주의적 이상에 따라 말하고, 어떤 이는 자유주의적 이상에 따라 말하듯이 말이죠. 그러니 그 이상향의 내용보다 그것이 언제 도래하는지, 어떻게 도래하는지가 더욱 첨예한 갈등을 이루고 있었겠죠. 바로 그와 같은 시점에서 예수님은 과연 그 ‘때’가 언제라고 여기셨는지, ‘어떤 것’이라고 여기셨는지 하는 게 중요하겠죠. 그걸 알게 하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그 '때' 즉 '천국의 시간' 혹은 '기적의 시간'은 우리의 일상의 시간이 해체되지 않는 한, 기적의 시간은 오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13:2에 예수께서 “저 돌들이 어느 하나라도 제 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것이다.”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종말론적인 격노는 다시 우리시대의 구호이며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일상의 시간’에 정복당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적인 욕망과 공모하면서 하나님의 시간은 지연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라”고 선포합니다. 거짓 일상을 전복하라는 것입니다. 기적의 시간 속으로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그 나라’ 하나님의 ‘그 시간’은 일상이 전면적으로 파괴되어야 도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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