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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마23:25-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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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 참고 : | http://blog.naver.com/malsoom/171270259 |
2012년 11월 18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태복음 23장 25절~27절
설교제목 :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 영성시
<다락방의 기도>
/ 김상민
주여!
우리 텅빈 가슴 속에 아름드리 피어나 기쁨 가득 넘치게 하소서.
꽃지고, 잎지고,
싱그런 눈망울과 헤어지고,
산산히 퍼드러진 별빛 가득 이슬 내린 새벽
허물과 상처들이 깨기전
주여!
새로운 여행을 하게 하소서.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총총히 내놓은 말들이
머릿속에 새로이 솟아올라 갈래갈래 땅끝을 찔러 소생하는, 잠을 깨는,
주여!
처음 눈을 뜨게 하소서.
주여!
작은 아이가 품은 반짝하는 눈빛으로,
풀피리 소리 동심의 뜰 앞에서, 꾸밈없이 퍼치는 순수함을 발하게 하소서.
꿈들이 모인 이 밤!
초롱초롱한 눈망울들을 하나하나 세며
주여!
사랑하게 하소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채우기 때문이다. 눈먼 바리새파 사람들아!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그 겉도 깨끗하게 될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가 회칠한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그것은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마태 23:25~27)】
<두 가지 방향>
오늘 예수의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 방향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들의 위선, 아니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될 인간사회의 위선에 대한 경고 및 고발, 꾸짖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또 하나는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명심해야할 본질적 차원의 생각, 즉 우리 내면적 실체-외면적 차원이 아닌 -에 대한 철저한 리얼리트적 추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첫번째 이야기>
예수께서 비난하신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특별히 ‘악독하고 못된 놈들’(?)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너무나도 평범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현재 우리들, 즉 우리시대의 목사나 장로, 권사나 집사 등이 보통 생활하고 있는 평범한 정도의 정신상태와 마음가짐으로 살아갔을 것입니다. 종교인으로서 생활인으로서 그냥 편안하게 살고 있는 보통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그 보통의 평범한 종교인들을 그 토록 사납게 꾸짖으셨을까요? 그것은 예민한 영성적 시각으로 보았을 때, 그 평범한 종교인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위선과 거짓의 늪’에 빠져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일상을 편안하게 살아갔을 테지만, 그들의 일상이란 사실 ‘위선과 거짓의 일상’이었습니다. 누구보다 예민한 정신의 소유자였던 예수는 그 위선과 거짓의 사람들을 가만히 놓아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위선과 거짓의 일상들>
우리 종교인들이 빠져 있는 ‘위선과 거짓의 늪’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일까요? 생각나는 대로 몇 가지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몇 해전 큰 교회를 일구신 대형교회 목회자가 수억원의 연봉을 받는 것에 대해서 비난이 일자, 그 스스로 답변하기를 “나는 그 정도는 받을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고 했었습니다. 이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죠. 그런 정도의 정신상태를 갖고 있는 사람이 우리 시대의 지도자급 목회자라는 사실에 불쾌함과 위험함을 느낍니다. 목회자들 뿐만 아니라 장로 혹은 권사들의 처신 역시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분들이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권력을 누리면서 교회공동체를 억압하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습니다. 즉 목회자 한 사람의 아래로 자신을 자리매김하면서, 그 아래 무수히 많은 교인들 위에 군림하는 상황이 만들어져 왔던 것입니다. 또 있죠. 교회공동체에 첫발을 내딪는 분들 중에서도 불순한 의도를 갖고 있는 초신자들이 상당수 있습니다. 대형교회의 사례가 되겠습니다만, 이분들이 사업하는 데 유리하기 때문에 교회를 찾거나, 외롭기 때문에 무리를 짓기 위해서 교회를 찾거나, 혹은 서구 제국주의가 기독교를 매개로 세계를 지배하기 때문에 교회를 찾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 모두 위선과 거짓의 일상이고, 이를 깨트리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분노하셨더랬습니다.
<두번째 이야기>
예수는 리얼리스트(realist, 실재론자 / 사실주의자 / 현실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안과 밖이 같은 사람이었고, 특히 안에 대해서 집중한 사람이었습니다. 즉 밖을 꾸미거나 치장하거나 하는, 외면적 차원에 대해서는 무심했습니다. 예수는 본질에 집중한 사람이었습니다. 본질을 탐구할 뿐, 외면에 대해서 무시했습니다. 왜냐하면 외면을 치장하는 차원이란 거짓과위선을 만들어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몇해전 경기도 양평에서 흙피리를 만들어 주는 캠프를 운영하는 ‘후두둑 선생’네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 그 양반의 집을 보면서 느낀 강렬한 인상은 “이 양반은 리얼리스트적 면모를 갖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후미진 시골에 아무렇게나 지어진 오래된 집, 그 퇴락한 시골집을 별로 이렇게 저렇게 꾸미지 않고, 찾아오는 아이들을 맞는 사람, 특히 불편하고 더러운(?) 재래식 화장실을 천연덕스럽게 사용하는 차원 …… 그런 것들이 좋아보였습니다. 물론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는 모르지만.
그에 반해 우리 교회들이 짓고 있는 수양관은 어떤가요? 아니 도시의 현대인들이 시골에 짓고 있는 별장들은 어떤가요? … 예수를 따른다는 우리가 예수의 리얼리스트 정신을 내다버렸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수도교회 이야기>
이야기를 하다보니 우리 수도교회를 우리 스스로 홍보하는 차원이 되었습니다만, 이는 의도한 일이 아니었고요, 다만 우리가 왜 이런 ‘재미 없는 목회’를 하는 지에 대해서 해명하고자, <수도교회 이야기>를 하게 되네요.
우리 수도교회에는 심방도 없고, 전도도 없고, 세례도 없고, 성찬도 없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물론 원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예외적으로 해드릴 용의는 있습니다만, 저희가 주도적으로 그런 예식들을 일부러 마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처럼 철저하게 ‘본질과 내면, 밖이 아니라 안’을 무섭도록 탐구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잘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하늘의 님이여. 땅의 예수여. 바람의 성령이여!
이제는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이 땅에서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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